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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떄 제가 개마무사에 대한 고찰과 철제 기술에 대한 고찰을 같이 적었어야 마땅하지만 시간이 넉넉치 않아 미처 못적었습니다...
얼마전 어떤 분에게 카타프랙타리(개마무사)에 대한 토론 아니 설명을 하였다 허나 그 님은 모르시더라..... 충격을 먹었다...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모르더니만 결국 그 님은 게오볼그 같이 서양사 전공만 하구 우리 역사는 무지한 어떤 사람의 글을 통째로 퍼왔다....좀 어이가 없었다....
아무튼 입 싸물고 고찰이나 하겠음
카타프랙타리는 기원전 중동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수있다.. 앗시리아인 들은 마상에 장식을 하기위해서 약간의 철제장식을 하였는데 이것이 발달되오다가... 오늘 날 카타프랙타리로 번제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접경지역 이수스(isus)에서 말몸통의 해당되는 갑주와 사람이 입는 갑주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허나 아직까지 그들이 가진 카타프랙타리(중갑기병)아직 완전히 말과 사람을 감싼 갑주가 아니어서 정통적인 카타프랙타리라고 보기가 어렵다.. 그 후
이런 반쪽짜리 카타프랙타리들은 중동 ,인도,중국을 거쳐서 마침내 고구려에 이르러 정통적인 카타프랙타리로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에 처음으로 카타프랙타리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고구려 동천왕 (고구려 제11대 태왕 재위 227년~228년)때 기사에서 나타난다..(추신 유럽에서 정통적인 카타프랙타리가 나왔다고 할수있는 것은 1212년 우르겐치 전투... 당시 페르시아의 개마무사와 몽골의 칭기즈칸과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칭기즈칸의 승리로 끝났다.. 그후 이 전투로 몽골은 유럽 기병의 약점을 파고들어 러시아는 7일, 헝가리는 5일 만에 정복했다. 독일에서 온 유럽 3대 기사단 중의 하나인 3만명 가량의 튜튼 기사단도 전멸시켰다.
)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 >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중략)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 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 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이 기사를 토대로 볼때 고구려는 관구검과 전쟁이 벌어졌던 247년 전부터 철기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게 된다....
이들 중갑기병은 후에 연개소문의 사수혈전, 내호아와의 일전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개마기병의 무장은
일단 마면갑으로서 그들의 갑옷은 목가리개와 몸통의 갑옷, 스파이트 신발이 모두 강철제로 튼튼히 엮어져있는 모습으로 당시 당나라,수나라등의 나라들이 비단으로 갑옷을 이은것과는 크게 차이가 나타난다....
고구려의 갑주와 당나라의 갑주
<당나라 당삼채에 묘사된 당나라의 갑주>
<고구려의 원동력,개마무사>
<고구려의 마면갑>
중국의 경우는 저 북방의 북위시대 유물로 보이는 맥철산 맥찰 127굴에서 갑옷과 마갑, 돈황 285 서위의 벽화유물로 보이는 기병의 옷에 드문드문 철갑옷 조각을 드문드문 집어넣느니라.. 많이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거나.하는듯한 모습과
목가리개등이 없으며 괜히 쓸데없이 중국의 삼국양진 시대 때부터 용수개나 만드는 등 효율적이지 못하고 특정한 방어부위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말머리에다가 까지 갑주를 씌운 마면갑을 씌우기도 하였다....
또한 집안 동구 12호분 장천 2호분군에선 정이 달린 일종의 스파이크 신발또한 발견되었는데 .. 마상에서 상대를 찍어누르기위한 신발로 확인되는데.. 발굴자들은 이 신발이 극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하며. 현 중국이나 다른 어떤곳에서도 출토되지 않는 것이다..
(추신으로 고구려는 갑주를 벗고 보관하는데 편리하였다고 한다.. 왜냐 갑옷을 벗을시 이어진 부분들이 납작해지면서 보관력이 쉽고 황칠수라는 일종의 나무에서 생산된 금색의 칠을 입혀.. 갑옷도 번쩍번쩍했다구....) 와우 눈부셔...
개마기병의 전체무게는 의사람 80kg+갑주 50kg+갑주를 제외한 무장 6~10kg+말 500~800kg=700~1000kg 합으로 거의 현대로 말하자면 탱크와 비슷한 것이었다... 속도는 30~35정도이다... 기동성이 드럽다고 욕하지 말자... 실제 1차세계대전 때 영국에서 탱크가 처음 나왔을떄도 속도는 개그지 같이 느리며 30대정도를 출격시켰는데 거희 대부분 농구덩이 빠져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니면 작동불량이었는데..
3~4만 출격되서 혼자서 독일군진영 쓸고 다녔다... 실제로 이들이 중갑옷을 입고 진군을 하여 적진을 향해 진군하여 중무장한 진영에 충돌시 적이 최소 창을 갖다 방어한다 할찌라도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1000kg*시속 20~30km*1/2 해봐라 최소 30t이 넘는 운동에너지를 사람이 감당한다면.....
카타프랙타리를 이용한 전술.....
전술을 보기전에 고구려 안악3호분군의 벽화부터 감상하자..
<고구려 안악3호분군 >
경무장기병(輕武裝騎兵)은 빠른 기동성이라는 기병 특유의 장점을 살려
상대편 군대의 후,측면을 기습 혹은 상대편 기병과 직접 전투를 벌이거나,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마 궁수의 임무를 수행...
(다만 기마궁수의 존재는 안악행렬도에서 확인되지 않음)
그리고 특수 임무를 띄는 기마 병종(騎馬兵種)으로 마갑(馬甲)을 씌우고 기수의 전신에 찰갑(札甲)을 무장시켜 적의 화살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중장갑기병(重裝甲騎兵)이 있으며 이 기병은 강력한 무장과 돌격력으로 상대편 보병의 진형을 깨트리는 충파(沖破)를 주 임무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말과 기수 전신을 철갑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충돌 시 상대편 보병이 입는 타격은 상당하며 주로 장창을 들고 적 진형으로 직진 혹은 측면을 돌파합니다
또한 2열 3열 4열의 부월수,궁병등은 후방지원 및 진형이 깨지고 나면 포위 섬멸시킴...(개마기병과 협공하여)
혹시나 활이 개마기병에게 미치는 위력이 적다는 것은 실험을 통해 밝혀진바
있다... (혹시 몰라서 이건 서양꺼긴 하지만 한번 메일플레이트 아머로 서양의 활을 막을수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메일 플레이트로 저정도를 막아 내는데.. 고구려의 마갑은?)
추가 (국방백서) 등자에 관해서
등자는 말 위에 올라타거나 말을 타고 다닐 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안장에 달아 양쪽 옆구리에 늘어뜨려 놓아 발을 걸칠 수 있게 만든 것이 바로 등자다. 뛰어난 승마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도 등자를 이용하면 말을 타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특히 등자를 활용할 경우 말을 탄 상태에서의 활 사격이나 창을 이용한 공격도 좀 더 용이하다. 이런 점에서 등자는 전쟁과 군대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비다. 세계사에서 등자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와 로마 문명, 기독교, 기사도 문화 세 가지를 그들 정신 세계의 뿌리로 생각한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가 말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등자가 필수적이다. 때문에 린 화이트 같은 사학자들은 "유럽식 기사의 출현은 등자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등자가 언제, 어디서 출현했는지는 서양 사학계의 오랜 관심거리가 돼 왔다.
현재까지 연구 결과로는 세계 최초의 금속제 등자는 기원후 4~5세기 중국에서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아시아, 인도, 남러시아 등에서 기원전에 이미 등자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실물 금속 등자가 발굴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가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에서 금속제 등자는 기원후 7~8세기 이후에야 사용 기록이 보이고, 실물 유물은 10세기 이후에야 확인된다. 유럽에서 등자를 처음 사용한 시기는 중국보다 수백 년 더 늦다는 이야기다.
중국에서 가장 빠른 등자의 증거는 서기 302년께의 무덤에서 나온 기마용(俑)이다. 도자기로 만든 이 모형에는 말 한쪽에 등자가 달려 있다. 이 등자는 말에 오를 때 발걸이 용도로만 사용하는 단등자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2004년 중국 고고학자들이 요령성 라마동 일대에서 선비족 고분을 대량으로 발굴했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서기 300년대 등자들도 대부분 단등자였다.
현대의 등자처럼 한 쌍으로 된 등자가 확인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322년 축조된 중국 고분에서 나온 기마용(俑)이다. 기마용 같은 모형이 아닌 실물 금속제 등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415년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국 선비족 풍소불의 묘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등자를 사용한 것일까. 삼국시대 고분에서 수많은 금속제 등자(사진)가 출토되고 있지만 최초 사용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최병현 숭실대 교수는 신라에서 등자는 서기 300년대 전반기에 처음 사용됐다고 본다. 하지만 부산대 고고학과의 신경철 교수는 서기 350~375년께 고분인 김해 대성동 2호분에서 일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된 등자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다 완전한 형태 최초의 등자는 서기 400년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것이다.
김두철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는 "고구려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자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금속제 등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부산 복천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자를 사용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늦어도 서기 400년대 초반에 등자를 사용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는 나라는 중국과 우리나라 외에는 없다. 우리나라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등자 사용 역사를 가진 나라인 셈이다.
* 당시 고구려는 제철 기술 수준이 높았습니다. 이들이 처음 나라를 세운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은 철기문화가 꽃을 피운 지역이었기 때문이죠. 기원전 1000년 전반기로 추정되는 무산 지방에서 쇠로 만든 낫, 도끼, 자귀, 반달 칼 등 다양한 도구를 발견한 것도 이 시기에 철기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미천왕릉을 포함하여 4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무덤 벽화를 보면 말등자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4세기 이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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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아주 가신줄 알았어요. 한사인은 잊지 못하는법이라더니...
중국다음으로 등자를 사용한나라다에서 중국은 어느나라를 일컫는 말입니까..
??...갔다뇨....고작...2틀정도인데
등자같은경우엔 아직 중국지역에선 발굴품이 나온적이 없습니다.. 실질적으론 우리나라지요.. 또한 요령성지역은 구 고구려의 강역하에 있었으므로... 등자는 고구려꺼지요
제가 알기로도 등자의 최초사용은 우리민족으로 알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