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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삿 2:6-15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삿 2:6-15 / [여호수아가 죽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돌아가라고 이르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에게 유산으로 돌아온 땅으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7)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를 잘 섬겼다. 또한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푸신 큰 일을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겼다. 8) 여호와의 종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110년을 살고 죽었다. 9)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유산인 에브라임 산악지대 가아스산 북쪽 딤낫헤레스에 여호수아를 묻었다. 10) 세월이 흘러 여호수아와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다 세상을 뜨자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푸신 크나큰 일들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11) [여호와께 등돌리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바라보고 계시는데도 못된 짓만 일삼으면서 바알을 섬겼다. 12) 그들은 애굽 땅에서 자기 조상들을 이끌어 내신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이웃 주민이 섬기는 신들에게 절하며 그 신들을 섬겨 여호와를 무척 진노케 하였다. 13) 다시 말해서 그들이 여호와를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까닭에 14)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노략질을 일삼는 자들에게 이스라엘을 넘겨 주셨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마구 짓밟았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삼지사방에 살고 있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셔서 이스라엘은 원수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15) 이렇게 이스라엘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여호와께서 몸소 이스라엘을 내리치셨다.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던 대로 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여호수아 생전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한분 만을 근실하게 섬겼습니다. 여호와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목격한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이후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죽음(6-10) 여호수아가 죽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사사 시대에 접어듭니다. 사사는 재판하고 심판하는 자라는 뜻으로 가나안 정착 초기에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며 군사요 행정을 치리하던 지도자입니다. 사사는 우리의 삶을 구하시고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여호수아의 생전에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한 세대는 하나님만을 섬겼지만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구원의 일차적인 목격자가 아니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 단락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대사도 알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알다’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큰 은혜와 구원의 대사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기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11-15)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는 여호와 하나님대신 풍요의 신 바알과 그의 아내 아스다롯을 섬깁니다. 출애굽의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사방에 있는 주변 민족들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는 이방 민족에 의한 압제와 지배, 전쟁의 패배를 경험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와 정반대의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반전은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약탈하는 자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 약탈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대적을 당하지 못합니다. 압제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재앙을 주고 고통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투에 나갈 때마다 매번 좌절하고 패배를 거듭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하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실 정도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경영할지라도 그 걸음을 옮기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심각하게 깨닫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적용: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시지만, 당신은 죄를 번복하여 살아갑니다. 당신이 실패하는 원인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명절 지방에서 돌아오는 길, 피곤함에 막내딸에게 운전대를 맡겼었습니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 우회전해야 할 길을 지나가고 있었고, 누군가 “여기서 우회전해야 돼!”라고 말하는 순간, 막내는 급하게 핸들을 꺾었습니다. 경계석을 긁고 가면서 앞바퀴 축이 휘어지고, 지방의 공업사에 맡겨야 했습니다. 보험에 들지 않은 막내였기에 수리비가 걱정되어 내가 운전했다고 둘러댔는데, 수리를 마치기까지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결국은 보험사에 자비 부담하겠다고 선언했고, 차량 가격보다 훨씬 비싼 거액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경제적인 부담과 차라리 폐차 수순을 밟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겠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바보 소리를 듣더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정직한 아빠라는 기억은 남겨줄 수 있었음에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스러져 없어질 세상의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사라! 나의 말과 행동이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 아닌가?
< 설 교 >
신앙유산을 남기자
서명성목사(팔로마한인교회) / 삿 2:11-23
신앙의 활력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모태 신앙이요 삼사 대째 신앙의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는 밑거름은 되지만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어른들을 본받으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성숙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왕년에 받은 은혜만을 되씹으며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 하면 우리의 신앙은 퇴보하게 되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은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의 역사로 그치지 않고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기대합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주로 출애굽 제일 세대의 역사를 다룬다면 여호수아서는 출애굽 제이 세대의 역사를 다루고, 사사기는 가나안에 정착한 제삼 세대 이후 세대의 역사를 다룹니다.
출애굽 1세대는 애굽에서 태어난 세대입니다. 출애굽은 하였으나 전에 살던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광야 생활이 힘이 들 때마다 즉 물이 부족하다거나 길이 험하다거나 고기가 먹고 싶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계속하였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중의 열 사람이“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 ...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민 13장)라고 보고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은 낙심하여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 차라리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고 했을 때 물론 그들이 살고 싶어 한 말이지만, 입술의 열매를 지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한 대로 행하십니다.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 (민 14:33) 그 결과 광야 제일 세대는 60만 장정 중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전부 죽고 말았습니다.
출애굽 2세대는 애굽에서 나올 때 스무 살 이하였거나 광야에서 태어나서 자란 세대입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신실하고 경건한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나안 정복을 이루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16)라고 여호수아가 고별 연설을 하였을 때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하며 백성들도 하나님만 섬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가나안 세대는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전쟁도 별로 없던 평화로운 시대에 주로 가나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세대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삿 2:10)던 세대였습니다. 아버지 세대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힘들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으나 가나안 세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세대에게 주신 두 가지 사명이 있는데, 하나는 남은 땅의 정복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세대가 이 두 가지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고 영안이 어둡다 보니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각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사사기는 바로 가나안 세대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지은 것에 있습니다. ‘전철을 밟지마라’하는 속담이 있는데 그들은 죄에 빠졌다가 구원을 받고 이전보다 더 큰 죄에 빠지는 과정을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이 왕이 될 때까지 320년 동안 일곱 번 이상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1) 범죄: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2:11-13)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가 가지고 있는 제한된 수분과 영양분이 말라 감에 따라 결국은 죽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가나안의 신들을 의지하였습니다. 일찍이 모세가 경고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신 31:29). 여호수아도 경고했습니다. “만약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수 23:16). 그런데 가나안 세대는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은 과거 역사의 하나님으로만 느껴지고, 그 대신 가나안의 우상이 더 실제적이고,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바알은 기후와 농사를 지배하는 신입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아내로 풍요와 사랑과 전쟁을 지배하는 신입니다.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기는 제사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성적 유희가 포함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즉 신앙생활을 부부 관계로 자주 비유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간음한 것과 다름이 없이 취급하였습니다. 가나안 세대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행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에 관하여 많이 알면서도 실제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하나님에게 드려야 될 시간과 정성을 다른 데에다 쏟아 붓고 있다면 오늘날도 가나안 세대와 별반 다름이 없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징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2:14-15)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경건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한 가나안을 주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니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진 후 돼지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발로 밟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이스라엘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고 모든 대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대적들에게 패하고 그들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면서 과거의 범죄와 그에 따른 징계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통해 징계하시고 이방 민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리게 하셨습니다. 대적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채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반복하여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안타깝고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전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했던 죄를 지금 우리가 다시 범하며, 개인적으로 과거에 범했던 죄들을 또 다시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탄원: “슬피 부르짖음으로” (2:18)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에게 계속적으로 압박과 시달림을 받으니 괴로움이 심하여져서 슬피 부르짖습니다. 그렇지만“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2:17) 라는 표현을 보면 이스라엘이 회개하였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징계를 받아 고통스러워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출 34:6). 후회하고 돌이켜야 할 당사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는 진실한 회개가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여전히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첫 번째 옷니엘, 그 다음에 에훗, 드보라 사사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기드온 때부터 조금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입다 때에는 그들이 부르짖자 ‘너희들이 섬기는 신에게 알아보라’고 하시며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삼손 때에는 이스라엘이 아예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비록 실수할 때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시나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택하신 백성을 돌아보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의 씻김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8: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하면서 확신에 찬 선포를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수시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며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합니다.
4) 구원: “사사를 세우사” (2:16-18)
대적에게 시달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십니다. 사사는 대적에게서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 뿐 아니라 백성을 하나님의 공의대로 다스리는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왕은 세습적이지만 사사는 당대에 끝나게 됩니다. 사사가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는커녕 사사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사가 죽은 후에는 전에 지은 죄를 반복할 뿐 만 아니라 전보다 더 심하게 악을 행합니다. 점점 죄악의 깊은 수렁으로 빠집니다. 즉 사사 시대는 불행하게도 범죄 – 징계 – 탄원 – 구원 – 더욱 타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추락을 계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결심(2:19-23)
가나안 세대는 계속 패역한 길을 가므로 하나님이 결심하셨습니다. ‘패역하다’(2:19)라는 말은 ‘부패하다’는 뜻입니다. 마치 샘물이 더러워져 오염되듯, 도구가 망가지듯 못쓰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잠 25:26). 이스라엘이 부패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온 마음으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나 안 하나 시험하기 위하여 가나안 민족들을 이스라엘 가운데 계속 남겨 두셨습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계명들을 지키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과 교통하며 그들의 신을 섬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이유가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상숭배하면 다른 신을 섬긴다는 종교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신들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이 우상숭배입니까?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 아무 힘없는 어떤 것이 인간이 집착에 가까울 만큼 헌신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신이 아닌 것들이 신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큰 우상은 물질과 경제적인 풍요에 대한 유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무능이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점점 더 큰 죄악으로 빠져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신앙 유산은 계승되어야 합니다.
광야 일 세대는 과거에 연연하며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원망과 불평을 하며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광야 이 세대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가나안 정복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세대는 반역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계가 반복되는 악순환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미국에 사는 Korean American들은 과연 이스라엘의 어느 세대에 해당되겠습니까? 광야 제일 세대에 같이 과거지향적인 사람들도 있겠고 제이 세대와 같이 미래지향적인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면에서 우리는 당연히 출애굽 제이 세대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이 세대에도 문제점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은 제이 세대는 가나안을 점령하느라 몹시도 분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제이 세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면서 자식에 대한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지만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바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잘 남겨주지 못하면 자녀들은 그들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따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가나안 세대의 모습입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들은 아버지 세대가 가졌던 신앙에서 떠나 그들 주변에 있었던 가나안 신을 섬기는 안타까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부모가 너무 할 일이 많아 바빠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광야 제이 세대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하지만 반면에 자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그들의 실수를 거울삼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듯이 오늘날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멀리하게 하고 열심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건한 자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가능하면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고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물질을 많이 남겨 주기보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신앙을 남겨 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더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은 가나안 세대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그들에게 있었고 자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권능에 대하여 부모들에게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설령 부모 세대가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의 잘못된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3) 영적 전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사사시대 이전의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 체결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바로의 압제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자신의 우주적인 주권과 권능과 영광을 분명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참으로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며 구원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그 감격 속에서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체결하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가나안 세대에게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가나안 땅에 실현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가나안 거민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습니다. 이방 족속들과 계속되는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이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사기는 영적 전쟁의 사명을 포기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얼마나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투를 포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경고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통치하시며 다스리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 왕권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서와 다윗과 같은 뛰어난 왕과 관련된 룻기나 사무엘서 사이에서 리더십 부재를 보여줍니다. 사사기 마지막 구절인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을 통해 역설적으로 리더십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보여줍니다. 그 소망은 일차적으로 다윗이라는 뛰어난 영성의 지도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진정한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분께 순종하고 모든 생각을 그분의 뜻에 맞출 때 풍성한 삶이 약속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의 희생과 섬김이 없이는 자녀들이 결코 바르게 자라지 않습니다. 부모 된 우리부터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이 어머니 유니게에게,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이어지는 것 같이(딤후 1:5) 우리의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악한 세상의 풍조에 물들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신앙을 가지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 사회를 위하여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기도하며 그들이 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실족시키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우리의 영원한 사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을 섬기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기를 기대합니다.
주일 신자, 매일 신자
삿 2장 8~15절 / 채규현목사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분명히 믿기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하셨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언제나 최고의 축복,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가장 놀라운 안식과 평안의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의 어디를 보더라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사사기를 보고 있는데요, 사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와 함께 여러 가지 괴로움과 어려움이 안팎으로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가며 죄악 중에 있으며 서로 반복하는 것이 사사기 후반에 갈수록 점점 더 그 강도가 세지지만, 그것보다 더 세지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보다 더욱 세지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도 비록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되는 죄를 우리에게 이야기하지만 실제는 그 밑에 먼저 깔려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심지어는 우리의 잘못과 반복되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도 3장 초반까지 사사기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사기 전체에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반복, 이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을 바로 이 구절에서 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수많은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되느냐,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고 보통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왜 그들에게 진노하시는가 하는 바로 그 이유를 여러분이 제대로 아시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 왜 하나님이 화를 내시고 진노하실까요? 우리가 지난번에 십계명에 대해서 함께 보았습니다만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르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화는 왜 냅니까? 법정에서 판사가 화를 내는 것 보았습니까? 냉정하게 선고할 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진노하시느냐는 거예요. 제가 십계명 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시는 그 모든 것이 마치 어떤 법을 정해서 이것을 안 지키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올가미를 씌워 놓으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명령과 율례들은, 하나님의 율법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행복, 최고의 안식, 이런 것을 누리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언제든지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시기 위해서,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우리가 가장 생명을 풍성하게 만끽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합니다. 마치 그 하나님이 나를 못살게 구는 분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자유를 빼앗아가고 나를 율법이라는 테두리 속에 옭아매는 분으로 우리가 잘못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자녀를 교육할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교육할 때 “하라, 하지마라.” 부모의 간섭이 심하죠? 그런데 부모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바로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녀들이 제일 잘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물론 방법적인 면에서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근본적인 동기는 선(善)인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해서요. 그런데 어떤 때는 우리 자녀들은 그것을 오해합니다. 오해해서 부모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언제나 밑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언제나 알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그 명령 자체가 하나님 안에 들어와서 사랑의 관계를 갖자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서로 사랑의 관계를 갖게 된다, 더욱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간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더욱 알 수 있게 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보통 부부관계로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계속 그렇게 표현하고, 마지막 날의 계시록에서도 “어린양의 혼인잔치라, 교회는 신부라…” 하면서 부부관계로 표현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간다, 다른 신을 섬긴다하는 것이 곧 부부관계에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내 아내, 내 남편이 다른 여자, 다른 남자 만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만두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내나 여러분의 남편이 바람을 피울 때 가만두겠습니까? 가만 안두죠. 그러니까 오히려 상대편에게 벌을 내린다라기보다 화가 나는 것입니다. ‘어찌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가?’ 행위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나와 그와의 관계-내 아내와의 관계, 내 남편과의 관계에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그러한 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네가 내 말을 안 들어?”하면서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먼저 여러분에게 인식이 되고 성경을 봐야 성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떠났을까하는 면을 한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왜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있던 환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있던 영적 환경들을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와 아주 유사점이 많아요. 자, 그 당시에 각 부족마다, 각 성읍마다 다 각각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비슷하지만 전부 각각의 신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대부분 세계 전체적으로 보면 그 모든 신들이 자연신들입니다. 자연의 어떤 현상과 맞물려 있는 신들입니다. 햇빛이 뜨겁게 비추고 있어서 그 햇빛의 존재가 너무나 위협적으로 느껴지던 이집트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태양신은 수없이 많은 민족들, 부족들이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또 풍요의 신도 있습니다. 미의 신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다신교를 믿었으니까 그 신들끼리의 전쟁도 있고, 신들끼리의 사랑도 있고, 그리고 그러한 신들과의 관계가 우리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것이 고대 근동의 바벨론이나 이집트나 어디든지 그러한 신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나중에 그 신들이 그리스나 또 그리스의 신들이 로마까지 가서 결국은 다 그러한 종류의 신들인데, 오직 이스라엘이 믿던 여호와 그 분만은 다른 신들과는 달랐습니다. 먼저 그 여호와 하나님은 독신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하나님이었다는 말입니다. 혼자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은 흔히들 결혼을 했어요. 자식도 낳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신들처럼 자연현상의 돌아가는 그 싸이클에 맞추어서 그 신들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중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에서도 직접 천둥도 번개도 치고, 메뚜기와 온갖 재앙으로, 심지어는 모든 처음 난 초태생을 다 죽여가면서 혼자 애굽 백성과 바로와 싸우십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을 때 홍해바다를 가르셔서 그들을 통과하게 하시고, 또 그들을 쫓아오던 애굽의 군대들은 홍해바다의 물로 수장시키시고, 또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렇게 하시면서 직접 역사 속에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부족이나 다른 이방의 신들은 그런 신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가나안 땅에서 원래 믿었던 신들은 어떤 신이었나를 봅시다. 자, 신들이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제일 우두머리는 엘이라는 신이었어요. 그런데 그 엘이라는 신은 인간세상과는 관계가 없고, 아무리 그 밑의 신들이 뭐라고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거의 무시해도 좋은 그런 신입니다. 그리고 여러 신들 중에 가장 센 신이 천둥과 번개와 비를 관장하는 바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알신은 하나가 아니고 각 지역마다 각각 바알의 이름이 달랐어요. “바알…,바알….”하고 그 지역 이름이 붙었습니다. 천둥, 번개, 비의 신입니다. 비가 안 오면 강물도 마르고 비가 안 오면 바다도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강의 신, 바다의 신보다도 더 센 게 바알신인데, 그 바알신의 누이이자 아내가 앗세라, 아스다롯이라고 하는 땅의 신, 풍요의 신입니다. 그래서 자연현상을 같이 설명합니다. 비의 신이 있고 땅의 신이 있습니다. 이 두 신이 결합을 하면, 부부관계를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리면 그 받은 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식물들이 소생해서 마침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이 풍요의 신에게 농경민족인 가나안 백성들이 제사를 지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든 신들을 섬길 때에 제발 이 신들이 나에게 내게 원하는 것을 많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풍요의 신을 섬깁니다. 내가 많은 소산과 소출이 있고 소득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일정한 도덕률이 거의 요구되지 않아요. 그냥 바치기만 하면 주는 신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 한 가지 하는 게 더 있습니다. 그들이 인식하기에 바알신과 땅의 신 앗세라(아스다롯)가 부부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현상으로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이 바알신의 정액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떨어지는 정액으로 말미암아 이 땅이 받아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신들을 섬길 때 어느 정도 인간이 신들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촉진시켜요. 바알신이 빨리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촉진하는 게 바로 신전에서 여사제들과 제사드리러 온 남자들이 함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제사의 일부분으로 실질적으로 창기인 여사제들과 같이 잠을 잡니다. 제사드리러 가면 반드시 자게 되어 있어요. 제사중의 일부에 그런 일들이 있으니 그 가나안 땅이 얼마만큼 성적으로 타락했느냐는 겁니다. 음란과 타락이 그 어느 곳보다도 더했습니다. 오늘날 고고학에서 계속해서 그 가나안 문화가 발굴되면서 더욱 많이 느끼는 게, 여러 가지 땅에 묻힌 그 유물들을 보고 그 가나안 백성들이 얼마나 타락했었는가가 점점 더 나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러한 환경에 있는 가나안 백성들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들어가서 그 땅에서 신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다 안 물리쳤으니까 그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본업이 무엇입니까? 유목민입니다. 목축을 하는 유목민입니다. 가나안 백성은 농경민입니다. 그런데 유목민이 드디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경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유목도 하지만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경으로 하면 이미 가나안 백성들이 훨씬 더 노하우가 많아요. 그리고 사실은 그들이 더 잘 사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들이 더 잘 살아요. 그들이 농경에 대해 더 많이 알아요. 그들에게 배워서 나도 잘 살고 싶어요. 거꾸로, 가나안 백성들이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농경민족들은 바알신을 섬긴다. 왜냐하면 농경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하니까.” 유목민도 똑같이 어려움을 겪지만 유목민은 간편합니다. 비가 오는 데로 가면 돼요. 그런데 농경민은 땅을 떼어가지고 어디로 갑니까? 그저 하늘에서 비가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되죠. 그러한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네들 신은 유목할 때나 믿는 신이야. 거기서 기적적으로 역사하신 게 많은 것 우리도 들었는데 여기서 농사짓고 먹고 살려면 바알신을 섬겨야 돼.” 보니까 그들이 더 잘사는 것 같아요. 그들의 농사기술도 배울겸 같이 하다가 결혼도 같이 하고 그들이 믿는 농경사회의 일부분인 것처럼 바알신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 날 갑자기 “에이, 오늘부터 나 마음 바꿨다. 여호와 섬기지 말고 바알신을 섬기자.” 이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가나안 백성들에게 수많은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신앙-그들이 믿고 있는 것까지도 내가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면을 우리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 다른 신에게 갔다. 내가 천지만물을 지은 이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심지어 이방까지도 마음대로 주관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미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들에게는 눈앞에 자기들보다도 잘 사는 가나안 백성, 이미 농경으로는 훨씬 발전된 가나안 백성, 그들만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이 사는 그 식대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더 좋은 삶, 더 평안한 삶, 더 내게 복될 것 같은 그런 삶으로 가는데 그 마지막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온갖 괴로움으로 삶이 아주 열악하게 되는 그러한 길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왜 진노하십니까? “왜 나의 백성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세상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 길로 가느냐?” 사실은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 여러 가지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는 환난과 어려움, 그런 것들입니다. 끊임없이 어려움이 와요. 떠나갈 때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생명이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이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어느 순간,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은 아니죠? 지금은 뭐 어떤 신전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그런데 바알신과 같은 이 세상의 신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서 섬기는 신들이요. 바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또 여기뿐만이 아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가장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되고 안식을 누리는 삶을 주시길 원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삶이 무엇이냐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로, 세상의 안 믿는 사람과는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적어도 믿는 백성들은 안 믿는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우선순위가 하나님 앞에 구별되는 삶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나안 백성들처럼 풍요로운 삶을 원했습니다. 그 때 구별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가나안 백성들이 누리는 그런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 배우기를 원했어요. 배우다 보니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 다른 신을 섬기는 것까지 전부 같이 오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구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 믿지 않는 사람과 완전히 갈라져서 완전히 다르게 다른 장소에서 아니면, 끊어져서 살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기서 이야기하는 원리는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과는 뭔가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구별된 삶을 살지 않을 때 잘못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내가 같이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다른 신들을 좇아가잖아요. 돈을 위해서 좇아가고 더 많은 권세를 위해서 좇아가고 더 많은 인기를 위해서 좇아가고 다른 사람 앞에 뭔가 빛이 나는 일을 위해서 좇아가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좇아가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좀 더 으스대고 교만해질 수 있는 것을 위해서,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좇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믿는 백성들이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한 면을 부러워해요.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똑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들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의 삶의 방식, 그들의 삶의 방식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물질을 믿고 세상을 믿는 그런 면이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점점 세상이 타락해가고 있는 이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구별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제가 TV에 대한 한 통계를 말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통계인데 한국도 대동소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인의 하루 평균 TV 시청시간이 4시간 이상이라고합니다. 여러분은 몇 시간 봅니까? 그리고 우리나라 나이로 2살 아래 어린이들의 주당 TV 시청 시간이 6시간, 그런데 미국 소아과 의사들이 그들에게 권장하는 시간은 0시간이에요. TV를 전혀 안 보여주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 2세부터 17세(고등학생까지의 청소년)까지의 주당 TV 시청 시간이 19시간 40분, 일주일에 거의 20시간에 걸쳐서 구들이 TV를 봅니다. 그런데 부모와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주당 38분입니다. 어디서 영향을 훨씬 많이 받겠습니까? TV이죠. 그리고 학생이 연간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900시간인데, 그 같은 학생들이 연간 TV를 보는 시간이 1,203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을지 모르지만 그 자녀들이 왜 신앙에서 떠나가는지 그 이유가 명백합니다. 점점 이 세상의 모든 믿음과 세상적 문화의 모든 것이 TV와 영화 등의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 서민들에게, 우리 청년들에게, 우리 어린이들에게 계속해서 세상적 가치기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믿음의 가정들에서는 무방비상태입니다. TV보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TV 속에서 가르치고 있는 가치관이 뭐냐 이거에요. 심지어는 교육 관련 TV가 교육과 관련없다고 스스로 평가한 프로그램의 비율이 21%,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나서 성년이 될 때까지 시청하게 되는 폭력 장면이 20만 장면입니다. 그 중에 살인하는 장면만 1만 6천 장면이래요. 무시로 살인하는 장면을 보니까 그 살인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거예요. 많은 경우의 폭력을 보니까 그 폭력하는 것을 그대로 쓰게 됩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TV 광고나 심지어는 영화 같은 것들이 옛날보다 훨씬 더 성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과 지금의 영화들의 차이를 한번 보십시오. 지금은 아예 부끄러움도 없이 벗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사회입니다. 또 각 직장마다 만연되고 있는 도박, 이런 것들이 그냥 다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계속해서 마치 진화론이 사실인 것처럼 교육이 됩니다. 그리고 TV의 교육적인 방송에서조차 진화론이 진리인 것처럼 보여지고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자녀들에게 얼마나 이야기해 보았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과 함께 앉아서 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 있습니까? 그러고 어떻게 우리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기를 기대합니까? 훨씬 더 많은 세상적 가치 체계들의 그들의 생각 속에 끊임없이 들어가고 있는데요.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하루 생활 중에 어떤 특정한 일을 하는 시간 말고 여러분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중에서 TV보는 시간이나 영화나 비디오 보는 시간과 내가 하나님을 향한 시간을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있는 그것의 비율에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과 관점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바뀌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나도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 세상 사람들이 믿는 가치 기준을 받아들여서 그들이 뛸 때 나도 뜁니다. 그들이 방향을 바꿀 때 나도 바꿉니다. 똑같이 살아요. 그러면서 하나님 믿는 백성들이라구요? 사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보다 더 악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우리와 전혀 다른 어떤 별종의 사람들 같습니까?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갑자기 머리가 돌아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가 있고 환경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먹고 세상적 가치 체계를 떠나서 오직 구별되는 삶을 살기 위한 결단이 없으면 여러분도 똑같이 됩니다. 로마서 12장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먼저 첫 번째 순서예요. 이 세상의 풍조를 그대로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의 기본적인 가치체계는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이걸로 사는 겁니다. 돈을 찾아가고 세상의 쾌락을 찾아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뭔가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삶을 한번 돌아보자 이겁니다. 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목사나 장로님들이나 하는 것 인줄로 알아요. 그런데요, 하나님이 구별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행복은 목사나 장로나 그 사람들만 받아야 합니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복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과 구별되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별되는 삶을 사는 면이 여러분의 삶 구석구석, 여러분이 현재 있는 모든 곳에서 그런 면이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 와서 뿐만 아니고 여러분의 가정생활에서 분명히 믿기 때문에 여러분이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하고, 여러분의 사회생활에서,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의 사업장에서 분명히 믿기 때문에 같은 업종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장에서 다른 안 믿는 사람들과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의 사업장에서 다른 안 믿는 사장님들하고 뭐가 다릅니까? 분명히 다른 뭔가가 보여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나도 인식하고 있고 그 사람들에게도 인식시켜야만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선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도 인식되고 여러분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의 면이 여러분의 모든 삶의 어디든지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주일 신자”입니다. 주일날만 거룩해요. 완전히 지킬과 하이드에요. 주일날만 거룩하고 일단 월요일이 되면 세상에 완전무장하고 사는 겁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무장해제하고 아주 재미있는 사람으로 교회 나와서 웃고 “아, 집사님, 성도님~”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 졸업할 때 새로 목회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다섯 명으로 시작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막 오면서 부흥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우리 교회 근처에는 한국 사람이 별로 많이 살지 않았는데 마침 근처에 딸네 집에 같이 오면서 이사 오신 분이 계셨어요. 60세 정도 되신 분인데, 이 분이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전혀 영어를 못 하실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취직이 됐어요. 미국의 세탁소는 여기 같은 세탁소가 아니고 상당히 규모가 큰 공장입니다. 앞에는 세탁소 옷들이 걸려있지만 뒤에 가면 빨래하는 기계, 드라이클리닝 하는 기계가 있고, 다림질을 있는데 다림질도 한국식으로 다리는 게 아니라 완전히 찍는 거예요. 셔츠도 셔츠를 입히며 뜨거운 바람이 나와서 셔츠가 부풀어서 한꺼번에 쫙 펴지면서 다려집니다. 거기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 직장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갔더니 그 분도 반가워하고 마침 그 가게를 경영하는 분이 다른 교회의 집사님 부부였습니다. 그래서 더 반가웠고 안심도 됐죠.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서 그 분이 일하는 곳도 보고 몇 마디 나누고 있는데, 그 주인 되는 남자 집사님이 오시더니 “아, 목사님 반갑습니다...” 하면서 막 이야기하시는데 저도 응대를 하다보니까 그 분이 움직이는 대로 같이 움직일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 이야기하면서 같이 바깥쪽으로 나오는데 바깥쪽에 카운터가 있으니까 저는 ‘거기서 차라도 한 잔 줄려나?’ 그런 마음으로 갔는데 막 인사를 하고 덕담으로 하고 어쩌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문밖으로 오게 되었는데 문까지 오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는 겁니다. 결국 저를 아주 nice하게 쫓아낸 겁니다. 왜 직장에 오냐 이겁니다. 한시가 바쁜데, 한시도 자기 직원이 놀아서는 안 되는데 괜히 목사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한 두 마디 하다보면 일에 지장이 있으니까 빨리 가라는 겁니다. 제가 그런 일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은 제가 잘 아는 분이에요. 나중에 그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이러이러한 분 있으십니까?” 했더니 있대요. 어떤 분이냐고 했더니 “아, 그 분 신앙생활 잘 하는데.” 하십니다. 그 사람은 주일 신자였습니다. 자기가 하는 세탁소에 관한 한 하나님도 못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들어오시면 안 돼요. 거기서 갑자기 예배드리고 그러면 시간 다 까먹고 안되잖아요. 그때는 일하게 내버려 둬야 돼요. 내가 교회 갈 때만 하나님 옆에 계시면 되는 거에요. 이게 주일신자에요. 완전히 두 가지의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올 때 입는 옷, 세상의 옷-마음의 옷 말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가운데 살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실제 삶의 현장에서도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실제 삶의 현장에서 다른 안 믿는 사람들과 뭔가 구별되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여러분이 넘어서지 않는 면이 분명히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여기 사사기 2장 10절에도 있는데요 “여호수아와 함께 한 그 세대 사람들이 전부 죽고 나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물론 지식적인 면에서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선조들의 책임이죠, 가르치지 않은 책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성경말씀을 얼마나 가르치고 있습니까? 많이 찔릴 겁니다. 오늘 성경 말씀 안 읽었다고 혼낸 적 있습니까? 공부 안했다고 혼은 잘 내는데 성경 안 읽었다고 혼내는 집, 교회 안 나간다고 혼내는 집, 봉사 안 한다고 혼내는 집...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안다”는 의미는 지식적으로 안다는 의미말고 경험한다는 면이 훨씬 강합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제사장 엘리가 나오잖아요? 그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그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제사장 일을 했는데 성경에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더라.” 하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지식적으로 알지 못한 것이 아니죠. 경험적으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히브리적 개념에는 그냥 지식적으로 안다, 모른다의 개념이 없어요. 항상 안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개념이에요. 그 사람과 같이 밥을 먹고, 그 사람과 함께 걸어다니고, 함께 교제하고, 대화하고…, 이것이 있을 때에 비로소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노대통령 아는 것은 히브리적 의미로 보면 아는 것이 아니에요. 만나서 같이 밥 먹은 적이 없으니까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모태신앙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여러분의 믿음이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느냐 이겁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사느냐,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없으면 여러분은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 주는 번쩍번쩍한 세상적인 즐거움과 세상적인 유혹에 여러분은 쉽게 넘어집니다. 실제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소망의 기쁨도, 헌신의 즐거움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 없어요. 성경의 지식이 많으면 뭐 합니까? 그것이 살아있는 지식이 되지 못하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우리가 지식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지만, 그 하나님 안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순간에는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느끼기를 원합니다. 정서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함께 하나님과 하나됨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차적으로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일 저녁 예배의 형식을 바꾸는 이유가 그 속에서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는 겁니다. 제가 거듭거듭 이야기하지만, 여러분이 같이 찬송하실 때에도 여러분의 혼신을 다해서 여러분의 전인격을 다해서 그 찬송의 가사 속에 들어가서 찬송하시라는 말입니다. 진지하게요. “누구 왔나, 안 왔나?” 두리번거리면서 입만 들썩거리는 것 말고 진정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말씀에 있는 그대로요. 그리고 가능한 한 크게, 모든 힘을 다해서 찬송하라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도 뜨겁게 기도해요. 왜요?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요. 그리고 매일 매일의 삶에서도 규칙적으로 같은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처음에는요, 기도도 안 하다가 오랜만에 기도하려고 새벽에 여러분이 마루에나 부엌 한쪽에나 이렇게 앉으면 잡생각이 엄청 납니다. 그렇지만 그 연습을 좀 하십시오. 그래도 매일 앉아 있는 연습을 하기 시작하면 일주일, 이주일 정도 지나면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정도 그게 습관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 집중하는 법이 점점 더 익숙해지게 되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해서 여기저기 고개 디밀고 다니지 말고요. 그런 사람들 있죠? 아무한테나 가서 안수 받지 마십시오. 아무한테나 가서 예언의 말 받는다고 거기 앉아있지 말고 성경 좀 읽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우리 예배 중에서요. 제가 앞에 앉아 있지만요 저도 있는 힘껏 찬송합니다. 왜요? 제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려고 있는 힘껏 힘을 다해서 찬송한다고요. 예배 중에 몰입하기 위해서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마음에 느껴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의미를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때와 다른 때가 있어요. 내 마음에 감정이 격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결단하라고 시키시는 그 순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하게, 강압적으로 누르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이 여러분에게 아직도 없다면 여러분이 몇십년 믿었던 관계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능력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는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려운 일을 한다하더라도 내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부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여러분이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사십시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누구다 다 하고, 누구다 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번다할지라도, 누구다 다 그렇게 해서 승진한다할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 스스로를 지키십시오. 구별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매일 매일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여러분의 노력이 있으면 어느덧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축복, 샘솟듯 솟아나는 하나님의 기쁨의 축복, 안식의 축복,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도 임하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임하고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축복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가 있는 주의 백성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세대의 부흥을 꿈꾸라
홍한석목사 / 사사기 2:6-15
기원전 13~11세기 약 350년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후부터 왕정으로 접어들 때까지를 사사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강력한 지도자(왕)가 없는 상태에서 도덕적 혼란과 방종으로 빠져들었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사사기서 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7절: 여호수아와 그의 세대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행하신 큰일을 본 자들이었습니다. 불같은 신앙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애굽 종살이의 그 처절한 고통과 출애굽 하여 떠돌던 광야의 그 두려움과 고생,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죽을 만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매를 맞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수많은 기적을 통해 살아계심을 보여주셨고, 건지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너무도 진하게 하나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세대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결국 모두 죽고 이 땅에서는 사라지고야 맙니다.
10절: 그 후에 일어난 다음세대.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어떤 일을 그들의 부모와 선조들에게 행하셨는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부모의 세대가 어떤 고생을 하였는지, 얼마나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는지, 어떻게 그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며 매달려 기도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자기들을 길러왔는지 모르고 또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가르치지 않아서. 말하지 않아서. 400년의 종살이, 40년의 광야살이. 그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는데, 이제 가나안땅에 정착하여 살만해지니까, 편안해 지니까, 말씀을 가르치고 절기를 지키며 감사하는 은혜생활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나처럼 고생할일이 이제 없으니 이 좋은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라, 맘껏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그것이 사사시대의 시작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다음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1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하나님 없는 자리에 또 다른 하나님이 들어왔습니다. 바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거짓 하나님을 모시고 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짓 하나님을 모시면 결국 기쁨이 아니라 괴로움이 남습니다. 왜 괴롭습니까? 참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14-15절: 하나님 없이도 잘 살줄 알았는데, 부모들처럼 교회를 섬기고 교회에 매달리고 충성하지 않아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이 편하고 화려하고 좋은 세상에서 겉보기에는 너무도 잘 사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략질을 당합니다. 팔려갑니다. 재앙을 만납니다. 화려한 인생, 네 맘껏 즐기고 살아라.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사는 속을 들여다보니 괴로움뿐인 인생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왜 괴롭습니까? 노략질 당해서입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빼앗겼나요? 참 행복을, 참 평안과 기쁨을 마귀에게 빼앗겼습니다. 욕망에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재앙을 만나도 돕는 손길이 없으니 당하고야 맙니다. 괴롭고 분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자녀들이 이렇게 되었나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왜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르나요?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훈계하지도 채찍질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유산은 흘러가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120년의 역사는 세계 선교사에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부흥과 축복의 스토리입니다. 예수 믿고 이 민족은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우리는 잘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우리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예수를 전하지도 가르치지도 않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마귀의 무기입니다. 삼천 오백년 전 이스라엘도 그랬고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편안함과 풍요 속에서 자꾸만 신앙의 본질을, 열정을 잃어갑니다. 말씀훈련이 약해지고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소리가 줄어듭니다. 신앙이 다음세대로 이어지지 않는 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너와 네 자손에게 괴로움뿐이라고.
우리 다음세대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합시다. 우리교회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믿고 맡길 만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신앙의 유산이 흘러가는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속어전(속회 어린이 전도운동)에 함께 합시다. 속도원들이 모여 교회학교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다음세대를 전도하고 교회로 데려옵시다. 이것이 우리교회가 살 길이고 우리 가정이 살 길이고 내가 살 길입니다. 아멘!
다음 세대를 위한 …
삿2:6-10 / 임현수목사
괴테는 "왕이나 백성이나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가정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무어(Moore) 는 "사람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온 세상을 여행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와 그것을 찾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로마인들에게 가정을 지키라고 경고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정을 대신할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가정이야말로 지상에 있는 유일한 천국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가정마다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는 우리 교회의 미래요, 다음 세대의 주역입니다. 한 교회나 나라의 흥망성쇠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는 우리는 지금보다 더 좋은 가정, 더 좋은 교회,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바르게 양육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의 현주소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교육비는 매년 약 24조원 이 듭니다. 우리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자녀교육에 쏟아 붇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부부가 이산가족이 될 각오를 합니다.
어린 자녀의 유학을 위해 엄마가 따라 나섭니다. 기러기 아빠는 더 이상 낮선 단어가 아닙니다. 자녀를 위해 가정 수입 절반 이상을 지출합니다. 심지어 모자라는 자녀 학비를 위해서 엄마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합니다
오직 자식 하나 교육 잘 시키려고 우리 부모들이 보여주는 희생은 가히 눈물겹습 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정성을 쏟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류대학의 졸업장, 좋은 직업, 넉넉한 수입, 안정된 생활, 이것은 모두 눈에 보이는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누군들 일류대학이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국의 경우 일년에 수능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이 약 60만 명입니다.
그런데 소위 일류대학의 정원은 몇 만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를 위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조기 영재교육에 들어갑니다.
영어의 수준이 그 인생의 수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어교육이 뜨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도 제대로 배우기 전에 영어 단어를 외웁니다.
현재 외국인 원어민 교사가 2만 명입니다. 우리 2세들도 5만 명이 원어민 교사로 가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교육은 어떻습니까? 입시위주의 치열한 경쟁 구조 속에 있다 보니 교회학교 역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졌습니다.
주일이면 학원에 가서 밀린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 각종 인증시험을 봐야합니다. 내신 성적이나 수능성적만으로도 안심이 안되니까 부모들의 강요에 의해 여러 가지 자격시험을 봅니다. 그러다보니 교인자녀들마저도 주일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카나다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어른 예배에 까지와서 악기로 섬기고 봉사하는 자녀들은 대단한 젊은이들 입니다. 하나님게서 그들의 미래를 축복 하실 것입니다. (1부 예배)
입시위주의 교육이나 자기 이기심을 극대화시키는 교육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자녀들을 보십시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가장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역경 앞에 너무나 쉽게 자신을 포기하는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의존적인 성인아이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것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교육의 목표를 바르게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녀교육 의 현실적 목표는 무엇입니까?
좋은 대학 진학=좋은 직장=돈과 권력=인생의 성공이라는 등식이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저 집 자녀들은 다 성공했어’ 라고 할 때 성공이라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결혼해서 자식 낳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한국식 자녀교육을 비꼬아서 양계 사업과 같다고 했습니다. 양계 하시는 분들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알만 많이 낳으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24시간 불을 환하게 켜놓고 먹이를 줍니다. 잠도 잘 재우지 않습니다.
닭이 알을 낳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제공합니다. 알만 많이 낳는 목표만 달성하면 되기 때문 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우리들의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라는 것 입니다. 알만 많이 낳으면 되는 것 입니다. 밥은 아주머니가 해주고, 빨래는 파출부가 빨아주고, 학교는 기사 가 데려다 주고, 공부는 선생님이 시켜주고,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집에 다녀오겠 습니다) 인사하고, 다시 학원에 가서 시달리고,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잠만 자고, 다시 학교로 갑니다….그래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구해서 시집 장가 잘가고 잘 사는 것 이상의 목표가 없습니다. 알만 많이 나면 된다는 것 입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은 현명한 악마를 키우는 것과 같다.’
사실 요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자녀들을 양육하기에 매우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란스러울 만큼 사람들의 가치관이 급작스럽게 바뀌고 있으며,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많은 유혹들이 있고, 하루가 지나면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길지 도무지 앞날을 알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우리가 다음 세대들을 키울 수 있을까요? 저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역사의 전환기에 있었던 사사시대 를 통해 다음 세대를 키우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출애굽한 후, 40년간의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 가나안 정복전쟁 을 통해 대부분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또 정복한 땅을 각 지파별로 분배받아 이제는 열심히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도 주어졌습니다.
더 이상 떠돌이 생활 할 필요도 없고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는 공간도 생겼습니 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삽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암흑기와 같은 사사시대가 펼쳐집니다.
무려 300여 년 동안 범죄에 빠져서 고통 받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비극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가나안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 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의 삶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패역한 길 이었습니 다. 왜 여호수아가 죽고 한 세대가 지나자마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을까요? 왜 이런 사사시대의 비극이 벌어졌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교육의 실패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도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지 못하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신앙교육의 실패는 곧 개인과 민족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청교도 신앙의 유래는 바로 해적의 대명사였던 바이킹(Viking)이라고 합니다. 바이킹 족은 북게르만 족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AD 8-10세기경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의 템즈강 지역을 점령했고, 후에는 앵글로 색슨족과 합해져 영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바이킹족들은 머리가 대단히 우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머리 좋은 해적들은 자신들의 후손들을 어떻게 훌륭하게 키울 것인가 를 고민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여자를 찾아 결혼하는 것 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도덕적으로, 육적으로 순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예수님을 잘 믿는 여성을 잡아다가 강제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비록 억지로 끌려와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들은 아이만 은 신앙으로 키웠습니다. 성경을 들려주고, 기도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 정성을 다해 양육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라난 이들이 훗날 청교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해적 출신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바른 신앙 의 교육을 시키면 신사의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국,독일, 덴마크…
신앙교육은 바로 다음 세대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 교육의 날개는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인간중심의 교육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개인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교육은 신앙교육의 회복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믿음의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한 세대가 지나자 믿음의 단절이라는 비극이 일어났습 니다. 신앙의 교육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신앙교육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를 보십시오.
14절과 15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우상들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재앙을 경험하고 사방의 대적들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 다. 이러한 참담한 비극은 당대에만 끝나지 않고 무려 340년 이상 반복적으로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사시대의 비극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줄 아십니까? 자녀교육의 실패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사사기 2장은 자녀교육의 성공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실패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기를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 있다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같은 실패를 우리들로 하여금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삼아 바른 자녀 교육에 대해 알아 보고자합니다.
1) 믿음의 유산을 남기라
자녀들은 부모님들이 남겨 놓은 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모님들이 경건을 남기면 자녀들이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부모님 밑에 경건한 자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경건한 부모님 밑에 불경건한 자녀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아간은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에 어떠한 물건이라도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 다. 전리품 중에서 은과 금덩이와 외투 한 벌을 숨겼다가 자기 가족이 망했을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이성 전투에서 참패케 한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아간의 범죄가 기록된 여호수아서 7장 1절을 보면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여기서 아간을 이렇게 자세하게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간의 조상들이 다 좋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아간의 선조인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아내로 삼기도 하고, 나중에는 며느리 다말와 잠자리를 같이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세라입니다(창38장).
다시 말하면 불경건한 아버지에게서 불경건한 아들 세라가 나왔고, 거기에서 불경건한 후손 아간이 나온 것입니다. 범죄자 아간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닙니 다. 가족을 망하게 하고 민족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은 아간 뒤에는 패역한 조상들의 있었습니다. 그 자손들이 조상 자랑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간의 자식들이라고..
이와 같이 다음 세대들은 앞 세대들이 남긴 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의 패역한 행위 뒤에 그들의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장 27절 이하를 보면, 반복되는 말이 나옵니다.
27절을 보면 므낫세 지파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29절을 보면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30절을 보면 스불론 지파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31절을 보면 아셀 지파가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3절을 보면 납달리 지파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쫓아내지 못하매’ 혹은 ‘쫓아내지 못하고’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1세대들은 가나안 거민들을 그 땅에서 다 몰아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몰아내지 아니한 가나안 거민들은 다음 세대 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후 세대는 앞 세대가 남긴 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다음 세대들에게 남기시겠습니까?
오래 전에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한 분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축복된 미래를 살아가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결코 재물을 유산으로 남기지 마십시오. 그 대신 가치를 유산으로 남기십시오.” 저는 ‘유산을 남기지 않고 가치를 유산으로 남기라’는 이 말을 다음 세대를 키우는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한 것을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고 싶습니까?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 라는 책을 쓴 전혜성 박사의 교육은 귀감이 됩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남편을 만나 고학을 하면서 6남매를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남편을 포함해서 8명의 가족이 받은 박사학위 수가 11개입니다.
이들은 미국 이민 100년사에 가장 미국에 영향력을 끼친 100명 가운데 3사람이 뽑혔습니다. 그 놀라운 비밀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전혜성씨는 자녀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한 두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 재주가 덕을 앞지르면 안된다.” “둘째,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니다.
전혜성 박사의 교육의 핵심은 자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그래서 한국에서도 세계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이기심 의 노예로 사는 자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덕을 세우 는 믿음의 사람으로 교육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훌륭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2) 자녀에게 본을 보이라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한 두 번째 원칙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를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배우는 것 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잘못된다든지, 신앙적으로 잘못되는 것은 부모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교육전문가 하워드 핸드릭슨이 주장한 것처럼, ‘아이들은 부모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기 때문에, 결국 부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게 됩니다.
술 잘 마시는 부모 밑에 술 잘 마시는 자녀가 있습니다.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부모 밑에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자녀가 있습니다. 친구 좋아하는 부모 밑에 친구 좋아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놀기 좋아하는 부모 밑에 놀기 좋아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아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가나안 정복의 1세대들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약속하지 말라, 이방신을 섬기는 단을 헐어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습니다.
그들을 쫓아내버리는 커녕, 오히려 그들과 평화조약을 덜컥 체결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결국 부모들의 이러한 악한 모습을 다음 세대가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부모님들에게 엄청난 도전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우리 부모들을 다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자녀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별로 신통치 않는 성적표를 들고 온 아들에게 ‘야! 링컨은 너만할 때 책도 없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대통령이 됐는데 너는 왜 항상 빈둥 빈둥 놀기만하고 그 모양이냐? 링컨은 너만 했을 때 뙤약볕 아래 철길에서 일을 열심히 했단 말이야’ 가만이 듣고 있던 아들이 아빠를 빤히 쳐다보며 말합니다. ‘링컨은 아빠 나이에 벌써 미국의 대통령이 됐는데 아빠는 지금까지 뭐하셨어요?’
저는 이 유머가 시사해 주고 있는 메시지는 자녀에게 요구만 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지 않는 교육은 힘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많이 가르칩니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은 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12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자신의 삶을 몸소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몸이 아픈 병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늘 고쳐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할 때에는 몸소 겉옷을 벗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음 세대를 키워야 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않고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확실하게 가르치라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인 손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6절과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 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착 초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살펴본 대로 가나안 정복 1세대들이 다 죽고 나서 문제에 빠졌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10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1세대에 비해, 왜 2세대 들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을까요? 확실하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들을 다음 세대들에게 확실하게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가르침의 중요성입니다. 교육의 중요성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가 달라집니다.
19명의 자녀들을 한결같이 훌륭한 자녀로 키웠던 저 유명한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에게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자녀교육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수잔나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머리가 크기 전에, 좀 더 정확히는 다섯 살이 넘기 전에 그들의 의지를 꺾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요즘 우리 부모님들의 자녀교육 방법이 너무 지나치게 방임주의적으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가 됩니다.
아이를 하나나 혹은 둘 정도만 낳다보니, 아이를 너무 소중한 존재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기를 꺾지 말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 입니다. 기를 꺾어야 합니다. 잠언 13장 24절에는 “초달(횟초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면 회초리를 사용해서 확실하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또 잠언 22장 6절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린 자녀들을 천방지축 자라게 하지 말고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는 것 입니다. 그러면 나이가 들어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비전의 사람이 되게하라.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동양의 문명이 서양보다 훨씬 탁월했 음에도 불구하고 뒤쳐진 이유를 자기 자리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더 넓은 세계로 도전했느냐의 차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 동양을 대표하던 중국과 서양을 대표하던 로마 제국의 차이를 만리장성과 도로로 설명합니다.
중국인들은 그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반면 로마인들은 점령하는 곳마다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로마인들은 사람과 마차가 다니는 길과 수로를 거미줄처럼 연결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의 침입을 도와 주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로 끊임없이 도전하며 나아가는 개척정신이 서양문명의 저력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서구문명이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땅을 향해 계속 개척해 나가는 모험적인 사고방식을 우리 다음 세대에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물고기도 난류와 한류가 만나 격동하는 지점에서 잡힌 고기가 힘도 좋고 맛있다 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처한 어려움은 오히려 더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그리스도 가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계속 전진하고 도전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는 실패자 입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섬겨라.” 남을 배려하고, 섬길 줄 아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성공적인 자녀교육의 원리입니다.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집 아이가 잘 되어야 내 아이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잘못된 이기적인 교육의 태도를 버려야합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한풀이 식의 자녀교육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고 다음세대에게 그대로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사사시대의 실패를 통해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
어떤 것보다도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모본이 되는 삶… 마땅히 행할 것을 확실하게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비전의 사람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어그러진 세상에서도 온 세계 가운데 주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위대한 인물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
사사기 2장 6-10절 /박상일목사
사사기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사기 1장은 ‘은혜의 시대’ 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시간 사사기 2장은 은혜의 시대를 지나 ‘보김의 시대’ 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2장 1-5절 말씀에서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사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의 시대였지만 그들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보김의 시대’ 즉 ‘우는 자들의 시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사사기 2장 6-10절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사의 시대는 은혜의 시대였지만 그 은혜의 시대에서 보김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와의 종이라 불렸던 여호수아가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이루었던 동역자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게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 10절에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에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 전에 여호수아 시대에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경외하던 신앙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알고는 있지만 이방인의 우상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이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여호와만을 섬기며 경외하던 신앙이 사라져버려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가르침에 젖어들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백성이 되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의 시대는 어떻게 됩니까? 이 후 사사의 시대는 계속적으로 이방인의 압제로 인해서 통곡하며 우는 보김의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바로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 그 여호와만을 섬기며 경외하지 않는 세대는 결국 여호와의 다스림이 아닌 이방민족의 압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세대는 그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세대입니다. 그들은 그 이전 아버지 세대가 불순종으로 인해서 광야에서 모두 죽고 그 후에 일어난 새로운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였고 이제는 장막이 아닌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장막이 아닌 땅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살아갈 때는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경외하고 의지하며 살았는데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면서 그 일에 몰두해서 살아가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아가면서 그 땅을 일구는 일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방민족을 완전히 몰아내라는 여호와의 명령도 무시하고 이방 민족들을 노예로 삼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일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이제 여호수아와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자 그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정말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시대가 바로 이러한 시대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일구는 일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세상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오늘 우리들의 자녀들의 세대가 바로 오늘 사사기 2장 10절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 즉 여호와만을 섬기며 경외하지 않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사사기의 말씀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 자녀들의 세대 즉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 일어날 일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앞으로의 세대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아마도 앞으로 살펴볼 사사시대의 모습을 보면 우리의 자녀들의 세대 즉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 일어나게 될 일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세대가 사사시대와 같은 고통스러운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전해 주어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 말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들에게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17절 말씀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아기의 교육은 평생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유대교에서는 12살 때가지 말씀의 철저한 교육을 시킵니다. 우리들도 자녀에게 그 어떤 것보다 말씀을 올바르게 교육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바르게 성장시켜야 하며 교회도 주일학교 교육에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고 너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시대의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경은 아닙니다. 아마도 영어나 수학등이 가장 소중한 덕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나 수학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영원한 생명은 바로 성경 속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시대에 최의 엘리트였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자신의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식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지식으로 알고 성경을 가르치고 교육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에 보면 링컨의 성경사랑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영의 식탁에 나가기 전에 육의 식탁에 나간 적이 없다.’ 라고 링컨은 말했습니다. 성경 없는 링컨은 없습니다. 링컨의 인생은 성경과 함께 숨쉬고, 성경과 함께 산 위대한 생애였습니다. 미국 학생들의 교재 중에 미국을 사랑했던 사람들(The American Patriot's Handbook)이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링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 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지만 '성경을 읽고 또 읽어'(He read and reread the Bible)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어린 링컨이 친어머니로부터 유일하게 물려받은 것은 바로 손때 묻은 성경책 한 권이었습니다. 어머니 낸시는 틈만 나면 통나무 의자에 앉아 성경책을 펼치고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이야기로 시작해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모세,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 유대임금 다윗의 역사, 욥의 인내,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의 이야기 등 어머니의 성경 이야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링컨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성경 이야기가 귀에 쟁쟁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성경으로 키워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링컨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정식으로 학교 교육을 받는 대신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성경은 링컨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링컨의 유일한 교과서는 성경이였고, 유일한 교사는 어머니 낸시였으며, 유일한 교육 내용은 성경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성경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키워 나갔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노예제도 문제로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국은 전쟁의 소용돌이로 아비규환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이러한 전쟁 상황 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참모들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인데 어떻게 이토록 평온하실 수가 있습니까?" 링컨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성경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국가의 미래를 그분께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기만 하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결국 링컨의 확신대로 남북전쟁은 연방군(북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전쟁이 링컨의 승리로 끝나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흑인들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유를 허락한 링컨에게 의미 있는 감사의 선물을 전달하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었습니다. 그들은 580달러라는 거액의 돈을 들여 가죽 성경에 금박을 입히고, 성경의 겉표지에 쇠사슬에 매여 있는 흑인 노예들의 족쇄를 벗겨 주는 링컨의 모습을 새겨 그에게 선물했습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으로 나라의 어려움이 계속되는 동안 시편 34편 6절의 말씀을 암송하여 이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이 말씀이 링컨을 낙심과 좌절에서 일으켜 세워 주었습니다.
지금도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있는 링컨 도서관을 방문해 보면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성경구절 시편 34편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링컨의 손때 묻고 눈물로 얼룩진 성경은 그의 성경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그가 사랑했던 시편 34편의 말씀이 링컨을 붙들어 주고 미국을 구원한 사실에서 성경 말씀의 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식 석상에서 조그맣고 낡은 성경책을 들고 나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낡은 성경책은 바로 어머니께서 저에게 물려주신 성경입니다. 저는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대통령이 되어 여기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링컨은 성경이 만든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자녀들도 링컨과 같이 성경이 만든 사람들이 되어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 그 다음 세대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음세대에 여호와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은 전하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행하셨던 여호와의 놀라운 일들을 그 자녀들에게 정말 감격적으로 전했다면 그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해 주셨던 놀라운 일보다는 현재의 그들의 삶에 집중해서 자녀들을 교육하고 양육했던 것입니다.
링컨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왔지만 찬송가 199장 ‘나의 사랑하는 책’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1절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임금 다윗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읽어주시던 그 성경의 말씀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전하기에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3절에서는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음 세대에 꼭 전해야 하는 것이 바로 3절의 가사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 일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그 놀라운 일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항상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매우 놀라운 표정을 지으면서 읽어준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그 말씀을 읽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린다면 자녀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4절 가사를 보면 ‘그때 일은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니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 합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어머니께서 읽어 주셨던 성경의 말씀이 그의 삶에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 자녀의 삶을 바르고 옳은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찬송의 작사가인 윌리엄스 목사님도 어린 시절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 찬송을 지었다고 합니다. 찬송의 배경은 1893년 보스턴에서 6000명 정도 모였던 ‘세계 기독교 사역자 집회’입니다. 그 집회에서 윌리엄스 목사님은 ‘성경’을 주제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설교 후 함께 부를 찬송가를 찾지 못하자 틸만 목사님께 알맞은 찬송가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틸만 목사님은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32곡의 성가집을 출간했습니다. 틸만 목사님은 윌리엄스 목사에게 작사를 해주면 작곡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윌리엄스 목사님은 조용히 성경을 붙들고 기도를 드렸는데, 문득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랜 세월 고이 간직해온, 눈물을 흘리며 읽고 애독하다가 자신에게 물려준 손때 묻은 그 성경책 이었습니다. 기도 후 성경 뒤 빈 공간에 연필로 ‘어머니의 성경(My Mother’s Bible)’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어머니가 가르쳐주셨던 말씀, 또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고 읽으며 눈물 흘리셨는지 그 어머니 모습을 그대로 적어내려 갔습니다. 15분도 못 돼 작사를 했고 틸만 목사님은 그 시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순식간에 곡을 완성했습니다.
찬송이 만들어진 배경처럼 어릴 때부터 성경말씀을 통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지는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전해 주세요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의 말씀 즉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가르쳐주어야 하고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전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몸으로 실천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한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오래 참는 것부터 시작을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오래 참는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랑은 계속 끝없이 나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많은 가르침들이 있지만 사랑에 대한 가르침만큼 놀랍고 귀중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갈수록 세상에 사랑이 사라져 감을 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메말라가고 세상은 점점 더 삭막해져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서 물질이 풍요로와 졌지만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공부해서 지식이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 이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지식이 늘었지만 그만큼 사랑에 대한 지식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잊어가고 있습니다. 물질과 지식에는 풍요로워졌지만 사랑에는 빈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자녀들에게 사랑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세상의 헛된 것을 쫓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이유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제가 설교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박상진 장신대 교수님이 쓴 ‘천대의 복을 누리는 가문 세우기’ 라는 책의 내용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나는 동네친구들을 만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었다. 하지만 놀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난번 해놓았어야 하는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고 박용묵 목사)가 꼬박꼬박 숙제 검사를 하시는 것도 아니라. 나는 '오늘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어느 순간부터 성경 공부를 게을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한구석이 찜찜했던 것은 아버지가 혹시라도 내 게으름을 아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우리 쌍둥이들, 그동안 성경 공부 많이했나?" 라고 물으셨다. 순간 나는 밥알이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했다. 나와 쌍둥이인 상은과 넷째형의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었다. "아버지는 쌍둥이가 어려서부터 말씀 속에서 잘 크길 바란다." 우리 셋은 방으로 돌아와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경책을 펴들었다. 나는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러자 상은은 방해된다며 조용히 하라고 했고, 넷째 형은 우리 둘 다 시끄럽다며 말씀을 써가면서 읽으면 되지 않냐고 했다. 티격태격하며 셋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졌다. 성경에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말씀이 있다. 너희들이 왜 다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내가 왜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것 같으냐? 아버지가 기도하고 전도하러 다닌다고 너희가 천국 갈 수 있을 것 같니? 너희가 신앙생활을 잘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 성경 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신앙을 키우라는 뜻이다. 신앙은 스스로 키워야 한다." 그날이후 나는 성경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훈계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이어졌다.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은 형식적인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랑을 이루도록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나가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와 우리들의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넷째 체험적인 신앙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체험한 세대들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요단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며 가나안의 왕들을 멸하시던 놀라운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체험하고 믿었던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는 그 체험이 없는 세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는 여호와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체험하지 못한 체험이 없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을 든든히 서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 세대를 봅니다. 저의 세대만 하더라도 참 많은 체험을 했던 세대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참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새벽예배는 못 나갔지만 수요예배 주일예배와 저녁예배 그리고 중간 중간 특별예배까지 참 열심히 참여를 했습니다. 저의 친구집 친척이 기도원을 하셔서 기도원에 가서 뜨겁게 기도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세대는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는 이런 체험이 전혀 없는 세대입니다. 예배도 주일학교 예배 한번이면 끝입니다. 기도도 잘 할 줄을 모릅니다. 이런 세대가 자라서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외하는 세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전 우리세대가 경험했던 체험적인 신앙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는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체험적인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 신앙이 오늘 저를 이곳까지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학원보다 예배에 참여하게 하고 육적인 양식보다 영적인 양식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물질의 가치를 추구하게 하기보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올려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외하는 삶, 즉 복된 삶, 영원한 소망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사의 시대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로인해서 그 다음 세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압제를 받고 고통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를 바라봅니다. 사사시대와 같은 잘못을 또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나라를 바라보면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다음세대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음세대에 마땅히 가르칠 것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는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를 감격적으로 들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적인 신앙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세대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는 세대가 아니라 여호수아의 세대가 되어서 세상을 이기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세대가 되길 기도합니다.
다음 세대를 준비하라
>성경본문|
삿02장 06절 ~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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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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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양인순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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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5월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가정마다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는 우리 교회의 미래요, 다음 세대의 주역입니다. 한 교회나 나라의 흥망성쇠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는 우리는 지금보다 더 좋은 가정, 더 좋은 교회,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바르게 양육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의 현주소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교육비는 매년 약 24조원이 듭니다. 우리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자녀교육에 쏟아 붇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부부가 이산가족이 될 각오를 합니다. 어린 자녀의 유학을 위해 엄마가 따라 나섭니다. 기러기 아빠는 더 이상 낮선 단어가 아닙니다. 자녀를 위해 가정 수입 절반 이상을 지출합니다. 심지어 모자라는 자녀 학비를 위해서 엄마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젊은 부부를 중심으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취업이민을 많이 갑니다. 이민 브로커들에게 4-5천만 원씩 주고 취업이민을 간 뒤에 그들이 일하는 곳은 닭 공장입니다. 닭을 잡아서 가공하는 일은 미국 사람들이 꺼리는 3D 업종입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씩 중노동을 합니다. 손마디에 관절염이 생기고, 서서 일하기에 다리는 퉁퉁 부어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허리 디스크에 걸립니다. 그런데 이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대기업 임원이나 금융기관의 중역 출신이 대부분입니다. 이 땅에서는 힘주고 살던 엘리트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낯선 땅에서 서러움을 견디면서 죽도록 고생할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빨리 영주권 받아서 좋은 환경에서 자녀 교육을 잘 시켜보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식 하나 교육 잘 시키려고 우리 부모들이 보여주는 희생은 가히 눈물겹습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자녀교육에 헌신적인 민족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정성을 쏟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의 목표를 바르게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녀교육의 현실적 목표는 무엇입니까? 좋은 대학 진학=좋은 직장=돈과 권력=인생의 성공이라는 등식이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저 집 자녀들은 다 성공했어’ 라고 할 때 성공이라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결혼해서 자식 낳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일류대학의 졸업장, 좋은 직업, 넉넉한 수입, 안정된 생활, 이것은 모두 눈에 보이는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군들 일류대학이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일 년에 우리나라에 수능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이 약 60만 명입니다. 그런데 소위 일류대학의 정원은 몇 만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를 위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조기 영재교육에 들어갑니다. 영어의 수준이 그 인생의 수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어교육이 뜨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도 제대로 배우기 전에 영어 단어를 외웁니다.
신앙교육은 어떻습니까? 입시위주의 치열한 경쟁 구조 속에 있다 보니 교회학교역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졌습니다. 교회 내의 콘텐츠 부족이라는 면도 있지만 현실 자체가 아이들이 주일 날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주일이면 학원에 가서 밀린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 각종 인증시험을 봐야합니다. 내신 성적이나 수능성적만으로도 안심이 안되니까 부모들의 강요에 의해 여러 가지 자격시험을 봅니다. 그러다보니 교인자녀들마저도 주일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오케스트라에서 봉사하는 학생들은 대단한 아이들입니다. 자기 부서에서 일찍 예배를 드리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힘찬 박수로 격려를 해주십시오.
입시위주의 교육이나 자기 이기심을 극대화시키는 교육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자녀들을 보십시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가장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역경 앞에 너무나 쉽게 자신을 포기하는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의존적인 성인아이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것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군들을 키울 수 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사사시대의 비극의 단초를 보여줍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7년 동안의 가나안 정복전쟁을 마칩니다. 그 모든 전쟁은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신 승리임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는 백성들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합니다. 애굽에서 섬겼던 신이나 가나안 땅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우상들을 치워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들에게 좋지 않게 보인다면 너희들 스스로 섬길 자를 택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믿음의 고백과 결단을 내립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그 말을 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맹세합니다.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습니다.’(수24:15,21,24)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 앞에서 세 번씩이나 하나님의 말씀만을 청종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모든 백성들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들은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사사시대가 펼쳐집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처럼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수아와 동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이적들을 직접 경험한 세대들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한 세대가 지나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같이 10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전쟁 1세대가 죽고 난 후에 태어난 다음 세대는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사기의 결론 말씀처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삽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암흑기와 같은 사사시대가 펼쳐집니다. 무려 300여 년 동안 범죄에 빠져서 고통 받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비극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가나안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들은 무려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 전쟁을 하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의 삶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패역한 길이었습니다. 왜 여호수아가 죽고 한 세대가 지나자마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을까요? 왜 이런 사사시대의 비극이 벌어졌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교육의 실패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도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지 못하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신앙교육의 실패는 곧 개인과 민족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청교도 신앙의 유래는 바로 해적의 대명사였던 바이킹(Viking)이라고 합니다. 바이킹 족은 북게르만 족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AD 8-10세기경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의 템즈강 지역을 점령했고, 후에는 앵글로 색슨족과 합해져 영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바이킹족들은 머리가 대단히 우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머리 좋은 해적들은 자신들의 후손들을 어떻게 훌륭하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여자를 찾아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도덕적으로, 육적으로 순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예수님을 잘 믿는 여성을 잡아다가 강제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비록 억지로 끌려와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들은 아이만은 신앙으로 키웠습니다. 성경을 들려주고, 기도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 정성을 다해 양육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라난 이들이 훗날 청교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적 출신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바른 신앙의 교육을 시키면 신사의 나라,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은 현명한 악마를 키우는 것과 같다.’ 신앙교육은 바로 다음 세대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 교육의 날개는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과과정을 가지고 열린교육을 하고, 평준화 교육을 하고, 3불 정책을 써도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중심의 교육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개인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교육은 신앙교육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믿음의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한 세대가 지나자 믿음의 단절이라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의 교육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신앙교육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을 말합니다. 야망은 인간 스스로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갖는 꿈입니다. 비전이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비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전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비전은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왜 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은 편협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기심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상대적 경쟁에서의 승리보다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미국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선발할 때 세 가지를 중시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Competence(능력), Character(인격), Committment(헌신)입니다. 첫째로, 능력은 3가지를 갖추어야 하는데,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정할 수 있는 능력, 비전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입니다.
둘째로, 인격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태도(compassion)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즉 자존감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셋째로, 헌신은 자신의 야망을 위한 삶이 아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비전입니다. 미국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을 가지며, 자유를 누리며 살 권리가 있다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을 통합하고,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지향하고 있는 교육의 방향은 너무나 협소합니다. 내가 어딴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삶을 살 것인가의 비전이 없습니다. 인생의 비전을 위한 교육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을 이기고 자기만 높아지고자 하는 이기적인 교육입니다. 그 결과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결국 자기 욕망의 노예로 삽니다. 오히려 능력이 있고, 권력을 가질수록 공동체에 더 큰 실망과 피해를 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교육의 방향이 좀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넘어 온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키워야 합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동양의 문명이 서양보다 훨씬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쳐진 이유를 자기 자리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더 넓은 세계로 도전했느냐의 차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 동양을 대표하던 중국과 서양을 대표하던 로마 제국의 차이를 만리장성과 도로로 설명합니다.
중국인들은 그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반면 로마인들은 점령하는 곳마다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로마인들은 사람과 마차가 다니는 길과 수로를 거미줄처럼 연결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의 침입을 도와주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로 끊임없이 도전하며 나아가는 개척정신이 서양문명의 저력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서구문명이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땅을 향해 계속 개척해 나가는 모험적인 사고방식을 우리 다음 세대에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물고기도 난류와 한류가 만나 격동하는 지점에서 잡힌 고기가 힘도 좋고 맛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처한 어려움은 오히려 더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위기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그리스도가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계속 전진하고 도전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둘째로,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는가로 평가됩니다.
오늘 우리의 교육 현실은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항상 최고의 엘리트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이것은 결국 서로를 라이벌로 여깁니다. 싸움의 대상자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갈등과 분열, 미움과 증오가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진정한 사랑과 평화, 조화와 협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섬겨라.” 남을 배려하고, 섬길 줄 아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성공적인 자녀교육의 원리입니다.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집 아이가 잘 되어야 내 아이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잘못된 이기적인 교육의 태도를 버려야합니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 라는 책을 쓴 전혜성 박사의 교육은 귀감이 됩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남편을 만나 고학을 하면서 6남매를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남편을 포함해서 8명의 가족이 받은 박사학위 수가 11개입니다. 이들은 미국 이민 100년사에 가장 미국에 영향력을 끼친 100명 가운데 3사람이 뽑혔습니다. 그 놀라운 비밀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전혜성씨는 자녀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한 두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 재주가 덕을 앞지르면 안된다.” “둘째,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니다.
전혜성 박사의 교육의 핵심은 자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그래서 한국에서도 세계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사는 자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덕을 세우는 믿음의 사람으로 교육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훌륭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본을 보여주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대로 따라옵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라 말하기 전에 정직하게 사는 자의 형통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말하기 전에 계속해서 공부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내 입장에서 자녀를 평가하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책망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나지 않습니까?
별로 신통치 않는 성적표를 들고 온 아들에게 ‘야! 링컨은 너만할 때 책도 없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대통령이 됐는데 너는 왜 항상 그 모양이냐?’ 가만이 듣고 있던 아들이 아빠를 빤히 쳐다보며 말합니다. ‘링컨은 아빠 나이에 벌써 미국의 대통령이 됐는데 아빠는 지금까지 뭐하셨어요?’
우리들이 교육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머릿속에 남습니다. 자꾸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베스트 원(best one)이 아닌 온린 원(only one)의 인생을 살도록 격려해 주십시오. 모두 다 1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 분야에서 최고의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리 원의 인생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사랑으로 기도해주고, 매일매일 축복해 주십시오. 그 속에 다음 세대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한풀이 식의 자녀교육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고 다음세대에게 그대로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실은 뒤에서 밀면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앞에서 끌어야 바르게 따라옵니다. 자녀교육은 실을 앞에서 끄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와보라 데이 선포식’을 합니다. 아직 세상의 가치만을 붙잡고 몸부림치고 있는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함을 전해야 합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 된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 성지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할 때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세상의 유혹과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달려가도록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보다 더 탁월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더로 세워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결단
삿 2장 6~10절 / 권오서목사
들어가는 말
과거 로마인들이 유태민족을 억압하던 시절, 그들은 유태인을 말살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를테면, 유태인 학교를 폐쇄시키고, 예배와 민족적인 축제를 금하고, 유태인의 지혜를 깨우쳐 주는 책을 불태우고, 랍비의 교육까지도 금하였습니다. 랍비가 정해진 교육을 마치면, 졸업식과 같은 랍비의 임명식이 있는데, 이때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랍비를 임명한 사람이나 임명을 받은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발생한 지역은 마을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도자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태 민족에게 있어 랍비가 없어진다는 것은 유태 사회가 정지되는 것을 뜻합니다. 랍비는 정신적 지도자임은 물론 의사요, 변호사이며, 유태인들의 모든 권위의 대변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랍비를 탄압했고, 랍비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랍비를 끊임없이 세우고자했던 것입니다.(biblenet.co.kr 예화 : 유태인에게 있어 랍비의 의미)
본 론
1.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오늘 본문 사사기 2장 10절을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다함께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400여년 간의 노예생활을 하고 40년 간 광야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오합지졸이었던 이스라엘을 이끈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동안 강한 군사가 되었고,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승전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여호수아도 죽고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일어서게 되었는데,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전지하심도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다음 세대를 키우지 못한 것입니다.
간혹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가 훌륭합니까? 여호수아가 훌륭합니까? 물론 둘 다 훌륭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정착시킨 것은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상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크게 부각되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에 대한 평가는 모세에 미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모세는 여호수아라는 다음 세대 지도자를 키운 반면, 여호수아는 아무도 키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늘 곁에 두고 그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아무도 자신의 곁에 두지 않았습니다. 키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호수아도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여호수아 23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마지막 권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24장 1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여호수아의 태도가 믿기지가 않습니다. 15절 말씀을 볼까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말씀입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요? 여호수아도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손들에게 신앙을 가르침에 있어서 이렇듯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니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심을 심어주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받아들이면 심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반드시 심어주어야 합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믿겠지!”하는 생각 정도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부모는 자녀를 대할 때마다 “오늘 아니면 더 이상 자녀에게 신앙을 심어줄 수 없다!”는 다부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함에 있어서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면 언제든 쓰시겠지!” 물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면 언제든지 변화시켜서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방치해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목자가 양을 방치해놓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목자가 없으면 양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 방치해놓는 목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1850년 콜체스터의 한 교회에서는 조그만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날은 폭풍우가 매우 심하게 몰아치던 날이었습니다. 이날 교회학교의 한 교사가 날씨가 나쁜데도 교회에 미리 가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를 했습니다. 잠시 후 17명의 학생들이 왔고, 이 교사는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날 한 학생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찰스 스펄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찰스 스펄전 목사님 아시죠.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가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음 세대에 위대한 결실을 보고 싶으십니까?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담임목사로서 우리 성도들을 향한 바램이 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로 많이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꼭 가르치는 교사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학교에서는 차량봉사를 할 교사도 필요합니다. 전도현장에 나갈 교사도 필요합니다. 새가족을 담당할 교사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데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교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녀를 그 학교에 맡기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교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해서 부흥해 나갈 때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간식을 담당하는 교사도 필요합니다. 다음 세대를 키우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다음 세대는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 속에서만 세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주 애정어린 말을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이 말씀을 보면 당시 디모데의 나이가 비교적 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충실한 일군이 되었는데, 문제는 나이가 좀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얼마든지 어린 디모데를 지도자로 세우지 않고 우선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오랜 시간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세워집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향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변치 않는 사랑을 가지고 대할 때 훌륭한 지도자가 세워집니다.
모 월간지(월간조선)에서 사회 名士(명사) 38人을 대상으로 「내 人生을 바꾼 교사의 말 한마디」라는 주제로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설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답해주었습니다. 설문에 응답한 분들은 정말 교사의 말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했습니다. 金在奎(김재규·74) 영동대 총장, 웨이터 徐相祿(서상록·64)씨, 성악가 嚴正行(엄정행·57)씨, 영화배우 엄앵란씨 등은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열등생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동양화가 金炳宗(김병종·48)씨, 탤런트 崔佛岩( 최불암·61)씨, 디자이너 앙드레 김, 방송인 裵漢星(배한성)씨 등은 선생님의 칭찬에 고무되어 자신의 재능을 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소설가이자 국회의원 金洪信(김홍신·54)씨, 시인 鄭浩承(정호승·51)씨, 시인 金光林 (김광림·72)씨, 李海仁(이해인·56) 수녀, 소설가 朴婉緖(박완서·70)씨 등은 『글 잘 쓴다』는 한마디에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반면 全商國(전상국·61)씨는 『너 같은 녀석이 작가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 다』는 선생님의 말에 오기가 생겨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피라이터 李萬才(이만재·57)씨, 수필가 皮千得(피천득·91)씨, 숭실대 명예교수 安秉煜(안병욱·81)씨 등은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오늘날 자신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각각의 사연은 다 다르지만 공통점을 보면 칭찬이든 꾸지람이든 그것의 바탕은 애정이 배어 있어야 하고, 개인의 개성을 잘 찾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준 경우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의 역사는 말의 역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을 비롯해, “고기는 낚싯바늘로 잡고, 사람은 말로써 잡는다”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또한 덴마크에는 “바다는 사람의 손에 의해, 세계는 사람의 입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biblenet.co,kr 예화 : 인생을 바꾼 교사의 말 한마디) 이처럼 말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데, 여러분의 말에 애정을 담으시기를 바랍니다.
3. 구체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디모데전서 4장 12절 말씀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아끼는 마음으로 다섯 가지 영역에서 본이 될 것을 말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분명 우리가 다음 세대를 끼움에 있어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⑴ 언어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과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까? 함께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이들의 표현이 너무 직설적일 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즘 아이들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아주 딱 부러지게 말합니다. 부모들은 이런 자녀들을 보면서 표현력이 좋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좋아할 것이 못됩니다. 사실은 너무나도 직설적인 표현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약 외모에 자신이 없는 여자에게 “너 정말 못생겼다!”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형편이 좋지 못한 친구에게 “너희 집은 왜 이리 못 살아!”라고 말한다면요? 그런 말을 듣는 아이들이 받게 될 상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듣는 아이만 상처를 받습니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반드시 상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의 말에 대한 교훈의 책을 보면 “거짓말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진실 역시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조심해서, 상대방의 처지와 형편을 헤아려 조심해서 말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에게 현명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상대방을 배려하며 말할 줄 알도록 가르치세요.
⑵ 행실 훈련을 해야 합니다.
부모의 눈에 비치는 자녀의 행동은 사실 못마땅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부모는 언성을 높이며 자녀를 훈계하려고 합니다.
미국 샌디에고 대학의 로버트 엡스타인(Robert Epstein) 교수는 ‘소리를 지르거나 매를 들지 않고 아이들의 행동을 교정하는 9가지 방법’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환경을 바꿔 준다. 예를 들어, “밥 먹기 전에 과자 먹지 말라고 했잖니!”라고 잔소리 하는 대신 애초에 과자를 감춰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문제가 된 상황을 재현해 준다. 친구와 싸우고 들어 온 경우, 아이는 친구의 역할을, 부모는 아이의 역할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기분과 어려움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심호흡을 가르친다. 넷째, 스스로 책임지도록 가르친다. 스스로 정리해야 할 일들을 상기시키는 쪽지를 직접 써 붙이도록 하고 일이 잘 진행되어가는지를 체크하게 하여 스스로 자랑스럽게 해줍니다. 다섯째, 효과적으로 벌주기.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한쪽 구서에 가서 가만히 있도록 하는 벌을 주는 것만으로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부드럽게 제지한다. 아이가 늦장을 부리면, 소리를 질러 재촉하지 말고 아이를 감싸 안고 “오늘은 바쁘니까 차에서 머리 빗자.”하고 부드럽게 대하세요. 일곱째,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에 대한 분명한 구분선을 두어야 한다. 여덟 번째, 채찍보다는 홍당무를. 구두닦이,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울 경우 약간의 보상을 하면 그 일들을 즐겁게 해 나가는 습관을 길러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부모와 자녀 간에 계약을 맺음으로써, 부모도 아이들에 대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솔직하게 사과한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바른 행실을 할 수 있도록 좋은 습관을 심어주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자녀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⑶ 사랑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사랑을 받는데 익숙합니다. 뭘 사줘도 고맙다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받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사랑할 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베푸는 것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과 같이 봉사활동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놀토에 놀러만 가지 말고 자녀들과 사랑을 나누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⑷ 믿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귀히 쓰임 받는 차세대 목회자들을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이분들이 어릴 적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젊었을 때부터 하나님께 쓰임받는 비전을 놓고 몸부림치며 자신을 훈련시킨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십대를 겪어봐서 잘 아시잖아요. 이때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때입니까? 질풍노도의 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때 믿음이 우리 자녀들의 삶에 반석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믿음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곁에서 기도해주고 있음을 늘 기억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⑸ 순결의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순결에 대한 의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지난 2004년 서울시 여성발전기금의 지원으로 20~30대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응답자 중 49.2%가 ‘사랑한다면 혼전 성관계도 가능하다’고 답했고, ‘결혼을 전제로 가능하다’고 대답한 사람도 무려 27.4%에 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류 역사상 망한 나라들의 보세요. 순결의식이 약해지고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을 무분별한 음란물에 노출시켜서는 안 됩니다.
정 리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희망찬 미래를 위한 결단입니다. 다음 세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혼란스러운 사사시대가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음세대를 키우지 못한 데 있지 않습니까? 다음세대를 키워야 합니다. 다음 세대는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세워집니다. 애정어린 말 한 마디로 다음 세대를 세웁니다. 다음 세대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언어, 행실, 사랑, 믿음, 순결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춘천중앙교회 성도는 다음 세대를 키우는데 앞장서기를 바립니다. 목회자만 나선다고 되지 않습니다. 교사가 있어야 하고, 가정이 믿음 안에서 바로 서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어 부흥의 불꽃이 이어가는 데 값지게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개혁
사사기 2:7-10(P.362),에베소서 6:1-4(P.315) / 이성희목사
서론
아메리카의 ‘오세이지’(Osage) 인디언에게는 훌륭한 풍습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의 젖을 물리기 전에 신들과 대화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을 방에 모시고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일이 끝나기 전에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습니다. 아이가 물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다시 거룩한 사람을 모십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의 신성한 기원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나이가 되면 다시 거룩한 사람을 모십니다. 그리고 곡식을 비롯한 다른 식물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단순한 생리적인 현상이 아닌 신성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고, 좋은 생활습관, 좋은 신앙습관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가장 좋은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자녀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마음을 어릴 때부터 만들어 주는 것은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며, 가장 유익한 일입니다.
인간의 일반적 사고는 늘 기복이 심합니다. 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up and down)을 반복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편안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게끔 되고,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혼이 날 만큼 매를 맞으면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사사기 17:6과 21:25에는 같은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회와 국가의 객관적인 윤리, 규범, 법, 도덕이 사라진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주관적인 자기 생각, 자기 판단에 따라 사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시대는 흔히 자기 판단이 확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튀어야 생존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자기 개성이 뚜렷한 시대라고 합니다. 객관성보다 주관성이 강조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사회성이 필요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자기 생각보다 남의 생각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시대와 이스라엘 왕정 시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판관인 사사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의 역사입니다. 사사기는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의 손에 의하여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옷니엘부터 삼손까지 12명의 사사가 활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은 410년 동안 사사를 통하여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통치가 혼란했고, 자녀교육이 없었고, 국가나 가정이나 개인이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이 없으면 나라나 가정이 잘 될 수 없습니다. 이때는 나라가 천국과 지옥을 왕래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장로들이 죽은 후에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출애급과 광야생활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은총들을 알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요엘 1:3에는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와 후손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의 대를 잘 세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후대에게 잘 전수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세습입니다.
UNESCO의 보고서에는 ‘왜 교육하느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교육의 이유는 첫째는 알게 하는 것입니다(to know). 둘째는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to do). 셋째는 함께 살게 하는 것입니다(to live together). 그리고 넷째는 사람답게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to be).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복음의 대가 끊어졌습니다. 복음의 대가 끊어졌을 때에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성경시대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유럽이나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대가 끊어지면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우리에게 복음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잘 보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녀와 후손에게 잘 전수하는 우리와 우리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사사기 2:7에는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적 구원을 본 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이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기적을 본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출애급하게 하셨고, 광야에서 어떻게 먹이셨고,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게 하셨는지 다 보고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체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믿음은 살아 있는 체험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생생히 만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사도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여 듣고, 보고, 만진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얘기를 해도 은혜 받지 못하고, 구원의 감격이 없고, 마음의 열정이 없고,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바닥에서 하는 수영연습’이란 말이 있습니다. 땅바닥에서 아무리 열심히 연습을 해도 진짜 수영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경험이 없이는 어떤 것도 확실할 수가 없습니다.
꿀맛이 무엇입니까? 꿀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꿀맛을 설명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맛을 본 사람은 꿀맛이라고 하면 무슨 맛인지 금방 압니다. 한 번도 보지 않은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체험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포스트모던 경제는 경험 경제라고 합니다. ‘몰입 생활’(Immersion living)의 시대라고 하는데 어느 특정한 삶에 몰입하여 경험하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감성 시대인데 포스트모던인은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정확한 정보 보다 극단적 경험을 더 원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신앙의 세계는 오늘날이 아니라 옛날부터 체험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을 보세요. 사무엘은 하나님은 거짓이 없다고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사자 굴에 들어가고, 불 풀무 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의심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이 체험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순교자 폴리캅은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다고 당당히 말하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기독교 역사 상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는 이시고,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이신 것을 체험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귀갑(龜甲)보다 연공(年功)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험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나이가 있는 만큼 경험의 차이도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세계도 많은 신앙적 경험을 가진 사람이 갑작스런 열정을 가진 자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체험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5:13에는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마치 아기가 젖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은 하루 시간의 9%를 글쓰기에 소비하고, 16%를 읽기에 소비하고, 30%를 말하기에 소비하고, 45%를 듣기에 소비한다고 합니다. 듣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며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듣기를 많이 합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에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 흔히 ‘베드 사이드 스토리’(Bed side story)라고 하여 아이들이 잠이 들기 전에 어머니가 침대 곁에서 아이에게 하나님과 율법을 이야기해 줍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많은 어휘를 가지고 자리기 때문에 머리가 좋아진다고 합니다. 신명기 6장의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하는 ‘쉐마’ 부분도 아이들에게 많은 말씀을 들려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잠수함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잠수함이 어떻게 항해를 합니까? 잠수함은 소리를 듣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잠수함은 수천 개의 감지기가 보내는 음향 데이터를 분석하여 음향의 안내를 통해 전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전진하는 안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백문불여일견’이란 말도 있지만 윌리엄 버로우의 ‘산산조작난 티켓’이란 소설에는 듣는 것이 보는 것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듣는 것이 시력을 향상시킨다고 합니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고, 어른들은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잘 들어야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17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듣는 것은 믿음을 가지게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은 후에 태어난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사기 2:10에는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여호수아 시대가 지난 후의 슬픈 일을 적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은 다음, 다른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모르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 출애급과 광야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자녀들이 알지 못했다기 보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인간은 올바른 영적 교육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악한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 가르침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성도의 자녀라고 자동적으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교육, 말씀의 전수 없이 저절로 신앙인이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인 홈니와 비느하스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에서 신앙을 떠난 폐륜아를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쉐마’인 신명기 6:6-8에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말씀을 잘 준수할 순서가 있습니다. 우선 부모인 본인입니다. 그리고 자녀입니다. 집에서 말씀을 잘 따라야 하며 그리고 집밖에서 말씀을 잘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자신의 몸에 잘 지녀야 하고, 그리고 집안에 잘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령입니다.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지 않은 죄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론은 그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를 잘 못 가르쳐 아들들이 여호와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제단에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홈니와 비느하스라는 아들들을 잘 못 키워 집안뿐만 아니라 나라가 어려워졌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사사요 선지자였지만 그의 아들들 요엘과 아비야는 백성들의 재판을 잘 못하여 비난을 받고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위대한 호교의 왕이었지만 그의 아들 므낫세는 왕이 되어 산당을 짓고 우상을 섬긴 악한 왕이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의 가정에도 잘못된 자녀가 많습니다.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고, 신앙을 전수하지 않는 죄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그리고 조상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경우를 보세요. 아들들인 홈니와 비느하스가 악을 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고 나쁜 소문이 있음을 알고도 “내 아들아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라고 합니다. 따끔하게 질책하지 않고 경책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 결과가 가문이 멸망을 당했습니다.
시편 78:5에는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 개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법도를 정하시고 자손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은 죄, 신앙을 전수하지 않는 잘못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가르침은 받지 못하는 자보다 더 큰 죄가 가르치지 않은 자에게 있습니다. 제자보다 가르치지 않은 스승이 더 큰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자녀보다 전수하지 않은 부모가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3:8에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은 자의 죄가 피 값을 치른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지 않아 죽은 자의 피를 전하지 않은 우리에게서 찾는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먼저 받은 자가 전하지 않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다른 세대”(another generation)라는 말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대는 다른 세대입니다. 나와 같은 세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지 않는 세대를 다른 세대라고 합니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사명을 등한히 하면 자녀들이 다른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인 애급인에 대한 재앙이나, 드라마 같은 출애급, 가나안정복 등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과 다른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은 세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부모와 전혀 다른 세대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레너드 스윗은 신세대를 토착민이라고 하고, 기성세대를 이민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문화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토착민과 이민자는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토착민은 이민자보다 감각적입니다. 이민자는 이성적으로 따지지만 토착민은 이민자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인간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잘 가르치지 않으면 다른 세대가 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인이 됩니다. 남편이 잘못하면 남의 편이 되듯이 우리의 자녀가 우리 편이 아닌 남의 편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지난 번 헝가리개혁교회 총회에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이란 1809년도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넷(Nat)이란 소년이 어릴 때부터 추장의 총기를 받아 배에 세 점을 가집니다. 추장은 이 아이의 삶의 목적이 지혜, 용기 그리고 통찰력이라고 합니다. 그는 미국에 노예로 끌려와서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노예생활을 합니다. 어느 날 백인 부인이 이 아이가 글을 읽을 줄 안다고 데려가서 가르칩니다. 이 아이에게 세상 책이 아닌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는 성장해서 전도사가 되어 ‘터너’ 댁에 노예가 되어 주인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백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흑인이 백인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채찍을 맞고 행동가로 변신하여 자유를 선포하고 악을 척결하려고 합니다. 흑인들을 규합하여 무기고를 털려고 백인과 싸움을 하고, 결국 동료들이 많이 죽고 자신도 잡혀서 교수형을 당합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하늘의 천사가 그를 맞아주고 웃으면서 세상을 떠납니다. 넷은 비록 짧은 삶을 살지만 성경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투쟁과 노력은 실패 같아 보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탄생의 기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미국 탄생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 생각과 삶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일상성’이라고 합니다. 습관적 신앙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간절함과 열정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한국전쟁, 가난, 군사독재 등을 거치면서 교회와 신앙인이 가지고 있던 복음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좋은 신앙의 체험들을 다시 살리고 우리 자손들에게 잘 전수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인간은 성공을 위한 ‘삼력’, 학력, 재력, 매력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공부 잘 하는 것을 부모는 원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원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신앙생활에는 그것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심지어 무관심한 부모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확인해보시고, 복음을 잘 전수하여 다음세대의 신앙을 개혁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대교체와 신앙계승
삿 2장 07절 / 문기태목사
온 백성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을 잘 섬겼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 일을 모두 눈으로 직접 본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을 잘 섬겼다.
주님의 종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백열 살에 죽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가 유산으로 받은 땅의 경계선 안 에브라임 산간지방인 가아스 산 북쪽 딤낫헤레스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그 세대 사람들도 모두 죽어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 신들을 섬기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이집트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 조상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백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며 경배하여, 주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분노하셔서, 그들을 약탈자의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였다. 또 주님께서는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 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맹세하신 대로, 주님께서 손으로 그들을 쳐서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그들은 무척 괴로웠다.
그 뒤에 주님께서는 사사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약탈자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다.(사사기 2장 7-16절)
지난 토요일에 김규동 장로님 집에서 장로님들과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데, 장로님들의 은퇴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은퇴 연령에 이른 장로님과 젊은 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조금 일찍 은퇴를 하겠다는 장로님들이 있었습니다. 연령이 되신 분은 어쩔 수 없지만 세대교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되도록 다른 분들은 내년에 새로운 장로님들이 선출되면 내년 말에 은퇴하시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제가 은퇴를 하면 후임 목사님이 거주할 사택의 준비를 위해 미리 지금부터 적립을 하고 적금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논의했습니다. 준비를 안하고 있다가 코 앞에 닥쳐서 우왕좌왕하면 어려워집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세대 교체를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싫든 좋든,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세대교체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대교체가 잘 준비되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그러나 세대교체가 안 되거나 교체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심하게 나는 교회는 몸살을 앓고 그 후에 동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일찍부터 은혜로운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세대교체가 되도록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대교체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호수아의 세대가 죽은 후에 뒤를 잇게 되는 새로운 세대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세대는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을 잘 섬긴 세대였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세대는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세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 바알 신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주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세대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경험하며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나라를 세운 세대입니다. 반면에 새로운 세대는 불신을 일삼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원수들의 침략을 받아 패배하고 약탈당하며 주신 축복을 빼앗긴 세대입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갔는데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앞 세대는 믿음을 보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어 맨 몸으로 넓은 땅을 정복하며 승리한 세대이며 영웅적인 삶을 산 세대입니다. 그런데 뒤 세대는 앞 세대의 신앙을 계승하지 못하고 앞 세대가 사라지자 곧바로 우상 숭배를 하며 불신앙과 불순종을 일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이어지고 무능하게 되어 패배가 일상이 된 비참한 세대입니다. 부모세대가 잘 닦아놓은 기초 위에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세워야 하는데 부모세대가 고생하며 어렵게 닦은 기초까지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다음 세대를 향한 신앙 교육의 부재가 큰 원인이었습니다. 왜 새로운 세대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새로운 세대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합니까?
부모의 세대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세대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이스라엘을 위해 어떻게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틈 나는 대로 반복해서 들려 주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상세히 가르쳐 주었어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절대 우상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망하고 만다고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세대는 신앙계승을 위한 교육을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당연히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대교체가 되고 나니 부모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교육을 소홀히 한 결과 외모는 부모를 닮은 판박이인데 믿음은 부모를 하나도 닮지 않고 전혀 다른 변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자녀의 세대도 부모가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또 따분한 이야기를 하나보다 생각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체험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대에 뒤 떨어지는 옛날 이야기 정도로 간주하고 귓 등으로 듣고 무시했습니다. 자신들의 관심사와는 먼 이야기,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로 단정하고 귀를 닫았습니다. 결국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세대가 모두 죽고 나니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쉽게 그들과 가까이에 사는 이들, 가나안 주민들을 본 받아 세속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대신 가나안 주님들을 따라 바알 신, 아스다롯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시자 그들은 괴로워 견디기 힘들게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더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의 천사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사가 왜 갑자기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 왔을까요? 그리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았다고 책망하기 시작할까요?
길갈은 여호수아 5장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요단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길갈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갑자기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모세의 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호수아 세대는 아직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복 전쟁에 앞서 그들을 구별하시려고 모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지금 사방에는 대적들이 무장을 하고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때 적들이 공격이라도 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심을 믿고 순종을 합니다.
길갈은 목숨을 내 놓고 순종한 장소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충만하여 적들을 싸워서 물리쳤습니다. 무기도 변변치 않고 군사 훈련도 받지 못했으며 철옹성을 지키고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적들이지만 믿음이 충만하니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싸우니 아무리 높은 성도 문제가 되지 않고 아무리 용감한 장수가 막아도 쉽게 물리칩니다. 연전연승을 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합니다.
세월이 흘러 대부분의 땅을 점령하고 나니 백성들의 마음이 느슨해졌습니다. 보김에서 천사를 만날 때는 처음의 열정이 다 사라졌습니다. 목숨을 바쳐 순종하는 사람이 몹시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책망합니다.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헐어야 한다고 했는데 너희는 나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결국 그것이 너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옭아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
길갈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죽을 각오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정복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에는 적당히 타협합니다.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종으로 부리면 더 이익인데,' 하고 계산을 합니다. 오래 된 이방 신상의 제단을 헐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전히 말씀대로 다 순종하려니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적당히 순종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천사가 무섭게 책망합니다. 그 책망을 듣고 백성들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이 이름을 '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긴 보김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을 그렇게 크게 울고 감사 예배를 드리고는 끝입니다. 큰 소리로 울었으나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가나안 주민들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우상의 제단을 헐지도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호수아 세대는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미지근한 모습을 그들의 다음 세대들이 주목하여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믿는 하나님은 목숨을 바쳐 순종할 만큼 절대적인 분은 아니구나!' 새로운 세대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하는데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대의 고민이 무엇일까요? 우리 자녀 세대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입니까? 자녀 세대에게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해 주는 것입니까? 저들에게 좋은 직업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입니까? 저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아름다운 믿음을 물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지 못할까 봐 불안합니다. 교회 안에 다음 세대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너무 괴롭습니다. 세대 교체는 이루어졌는데 신앙의 계승은 이루어지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부모세대가 믿음의 교육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족들이 모여 예배 드리고 자신들이 체험한 믿음의 이야기를 날마다 또는 매 주 들려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을, 말씀 따라 온전히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부모님의 믿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젊은이들이 주도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며 이끌어 가야 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일찍부터 믿음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사단과 세상의 유혹 앞에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 다음 세대처럼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신앙계승이 성공한 세대교체를 이루어 갑시다.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교회
삿 2장 8~10절 / 김경년목사
얼마전에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교회 옥한흠목사님이 65세로 조기 은퇴하시고 LA 남가주 사랑의 교회 오정현목사님이 위임목사로 취임하셨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한국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이유는 옥한흠목사님이 조기은퇴를 하신 것뿐만 아니라 벌써 5년전부터 후임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를 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후임자를 준비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교회들을 봅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조직이 마찬가지입니다. 그 조직의 후임자를 어떤 사람으로 세우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즉 다음세대를 이끌어 갈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사를 시작합니다. 모세는 출애굽 1세대의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1세대는 광야세대입니다. 그들은 배고픔이 뭔지, 종살이가 뭔지, 추위가 뭔지, 목마름이 뭔지, 고생이 뭔지를 아는 세대였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다음세대를 이끌어 갈 지도자를 발굴하는 일에 매우 신중했습니다.
모세는 많은 사람 가운데 여호수아를 후임자로 세웁니다. 그리고 모든 권한을 그에게 위임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한을 위임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갑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처럼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는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아이성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한 가지 실수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어 장사한 뒤에 그 세대 사람들도 다 죽은 뒤에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합니까?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란? 광야 후 세대, 가나안 세대, 신세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전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행하신 분인지 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후에 재앙이 임하여 괴로움이 심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해도 안됩니다. 괴롭습니다. 인생의 끝이 고달프지 짝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무엇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인생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아무리 잘나가도 조물주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잘 나가는 물건이라도 만든 사람을 능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될 일이 없습니다.
사사기의 총 주제는 21장 2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면서 살았습니다.
인생이 자기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 타락합니다.
여러분 몸(육신)이 하고 싶은 대로 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런 통제 없이 가만 내버려 두면 편할 것 같지만 결국 타락하고 맙니다.
인생은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버려두면 타락합니다.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생각대로 다 되면 좋을 것 같지만 결국 타락하고 맙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서 살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가르친 것은 한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믿음의 삶’ 오직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그에게 인본주의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나타납니다.
하루 한바퀴 돌고 이레째는 일곱 바퀴를 돌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이 무너지기도 전에 외치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성이 무너질 때 백성이 소리친 것 같지만 먼저 소리를 치고 성이 무너집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벽이 무너졌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있었던 아이 성과의 전쟁에서 여호수아는 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자 실패합니다. 아간의 범죄를 찾아서 해결한 후에 하나님은 승리케 하십니다.
한 사람의 죄도 용납지 않으시고 철저히 가려내시는 하나님을 경험케 하십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믿음으로 사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여호수아는 그 다음세대에게 이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사람 편한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인본주의로 빠졌고 우상숭배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히11:6)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새로운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수아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기성세대, 먼저 믿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여호수아가 신세대에게 믿음을 전수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는 누구 때문입니까? 결국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성세대, 먼저 믿은 우리 책임이 큽니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전통과 율법 관습, 형식을 앞세워 젊은이들의 문화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생각을 무시한 결과 청년들이 교회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제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시골학교가 폐교되고 가정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원인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교에는 아이들이 터져나가게 많습니다. 학교에 아이들이 너무나 많지만 교회에는 아이들이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아동부 아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부모가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이 전부입니다. 부모님이 교회 안다니는데 나오는 아이는 극소수입니다. 부모가 나오는데도 우리교회 나오지 않는 이이도 있습니다. 이것은 중고등부 청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가 35년이 되었는데 앞으로 교회학교가 점점 줄어들면 10년 20년 30년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교회가 교회학교 교육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장차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갈 주인공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 제직 전교우가 다음세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교육을 교사에게 일임하고 팔짱만 끼고 판단만 한다면 우리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팔을 걷고 나서야 합니다.
지금 가정마다 사교육비 부담이 얼마나 큽니까?
공교육이 무너져서 사교육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교육이 무너지면 모든 교육이 흔들립니다. 교회교육이 다시 살아야 사회교육이 살고 공교육이 삽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힘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시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다른 것을 소망삼지 말고 다음세대에게 희망을 걸고 투자해야 합니다.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교사들이 다시 각성해야 합니다.
교회교육을 하는 교사가 기도 없이 말씀 없이 예배 없이 학생들 앞에 서면 안됩니다. 철저하게 예배를 드리고 훈련받고 먼저 은혜 받고 학생들을 영적으로 지도해야 합니다.
세상교육이 아닙니다. 세상교육을 능가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학교 교실에서 변화 받지 못합니다.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말씀 앞에서 교회당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수련회에서 부흥회에서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이러한 체험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결 론
2004년도 우리교회 실천목표는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금년 한해만 가지고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계속해서 이런 비전을 가지고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교회로 계속 발전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기성세대가 신앙의 본을 보이고 다음세대가 신앙의 교육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더욱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지금보다 5년 후 10년 후가 더 좋은 교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