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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학술세미나
근래에 있었던 '동아시아 종교학'에 관한 학술세미나 이야기입니다. 보통 학술세미나는 구체성보다는 원리적 문제를 다루는, 매우 한정된 소수의 관련 전문가들만의 교류가 보통입니다. 전문가라고 해도 자기 분야가 아니면 멀뚱멀뚱하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그 분야의 전문성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세상이 사분오열된 시대에 학문의 열림과 소통의 추구는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에서는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겪을 수 있는 종교적 갈등이 발표되었습니다. 두 가지 사례가 제시되었는데, 그것을 간추려 옮겨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
58세 K씨(남)는 1년에 여섯 번 치르는 제사와 명절이 너무도 괴롭게만 느껴진다. 그 다정했던 동생들이 '형제간의 인연을 끊든지 아내(형수)와 이혼하라'는 가혹한 양자택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맏며느리인 K씨의 아내는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닌 형제들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심한 분란이 있었지만, 가족의 평화를 위해 전통식 장례와 기독교식 장례를 두 번 치르는 것으로 일을 수습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잘해오던 K씨의 아버지 제사를 맏며느리는 기독교식의 추도예배로 치르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말을 덧붙였다. 형제들은 그렇지 않아도 장례식의 해프닝으로 세상이 부끄러운 판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여 맏며느리를 죽일 듯이 대했다. 맏며느리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차라리 죽이라고 했다. K씨는 누구의 편을 들 수도 없고, 정말 자신이 왜 사는지 한심한 처지에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마땅히 뾰족한 해결 방법도 없다.
두 번째 사례
대학생 L씨는 유교적인 가풍의 집에서 자랐다. 명절 차례는 물론이고 제사도 착실하게 지내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큰어른이신 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는데,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굴건제복을 한 가족들이 목사와 신도들이 주도하는 장례식에 어정쩡하게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인지라 더 이상의 소요는 없었다. 결국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유해를 모시는데, 마지막으로 절이나 올리려는 굴건제복의 가족들을 목사와 신도들이 극구 말리는 것이었다. 역시 '우상숭배'라는 교리 때문이었다. 가족의 장례식에 목사와 신도들을 불러온 것은 맏며느리였다. 꾹꾹 참고 있었던 '굴건제복의 가족'과 교리의 수호자인 '교회의 형제들'은 대판 싸움을 벌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두 사례는 특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일들입니다. 결과는 가족의 해체입니다. 형은 더 이상 형이 아니고, 동생은 더 이상 동생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둘을 묶고 있던 신뢰의 유대는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례를 분석하면서 학자들은 상례와 제례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이 가장 심한 경우를 드는 데 모두 동의합니다. 곧 맏며느리나 장남이 개신교도이고 나머지 형제들은 전통식을 고집하는 경우입니다. 장남이 아니라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상·제례에 불참하면 되지만 장남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명절 이후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도 이러한 종교적인 분쟁 탓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학자들의 실력이 문제인가요, 아니면 사안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가요. 별 마땅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겨우 가족들의 종교는 공통적이어야 한다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종교의 역설
두 사례를 보건대 가족들이 편을 갈라 싸운 가장 큰 이유는 '가족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종교적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 간의 분란은 종교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이 종교전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종교가 순수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종교(宗敎)의 종(宗)은 '마루 종'으로서, 우리말로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으뜸이라는 것은 자신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으뜸이 되질 않습니다. 으뜸의 가르침은 으뜸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해도 그것에 승복할 수 없으며, 그 가르침이 자신보다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본래 종교란 그런 것입니다.
이런 으뜸의식은 순수의식과 통합니다. 순수한 것은 잡티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말이 순수하고 으뜸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어느 것과도 어울릴 수 없습니다. 어울리면 그 순간에 순수가 아닌 잡스러운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만일 어울린다고 해도, 상대는 항상 자신의 밑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복속의 논리가 생겨납니다. 모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싹틉니다.
이러한 순수의식이나 으뜸의식이 공동체를 이루면 내적으로는 강력한 단결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과의 관계는 늘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라고 한다면 최소한 모든 다른 종교, 다른 으뜸 가르침들을 섭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종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종으로 향하는' 또는 '으뜸을 지양하는'이라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순수 역시도 이미 마련된 순수가 아니라 '순수를 지향해야' 합니다.
위의 두 사례에서는 시비를 가리기 전에 가족들의 지혜가 부족한 것이었고, 기독교인들의 지나친 으뜸의식과 순수의식이 분란에 불을 댕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대립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의 대립은 한쪽의 완전한 궤멸이 아니면 한쪽의 완전한 굴복, 두 가지밖에 길이 없습니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잘못된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순수한 것이 아니고, 으뜸을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를 포용하는 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며, 으뜸의식이 있다면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항상 낮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식의 사랑은 사랑의 탈을 쓴 오만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자성을 해야 합니다. 역사 초기에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도하면서 이 땅의 문화와 관습을 중시했더라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고, 이 땅의 문화와 결합하여 이방의 종교라는 의식도 사라졌을 것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참 복음을 더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상례와 제례는 유교라는 종교의 의식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문화와 관습의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삶의 한 양식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삶의 양식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자체가 요구하는 더 좋은 삶을 향한 충동'에 좋은 본보기가 제시될 때 삶은 자신의 충동을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양식을 수용합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라도 자신의 삶의 양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기를 바란다면 인위나 강제의 방식이 아닌 자연스러운 방식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종교가 승리했더라도 형제가 뿔뿔이 흩어지고 가슴속에 깊은 상처를 입고 결국 이 세상을 저주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종교는 과연 무엇인가요?
글 이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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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나라의 문화와 관습으로 보아야하고 , 우리들은 선조님들의 부모의 품에서 자란 후손들이니
조상을 숭배하며 감사하고 고마움을 표해야할것이외다! - 본인도 무교지만 아무종교를 갖지않고
나 자신을 믿고 현재까지 살아온 사람으로. 위 사례등 종교적으로 보지말고. 나를 낳아준 부모님.
그리고 선조님들을 생각하며 , 향후에도 후손들이 답습하도록- 합시다.
제사 때문에 생기는 갈등으로
각 가정 제사 문화도 많이 변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지 못한 관.혼.상.제.
에 대해 공부 많이 했습니다.
미션님!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