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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삿 2:16-23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삿 2:16-23 / 그래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시고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사사를 세우셔서 갑자기 나타나 재산을 약탈해 가곤 하는 자들을 막아내게 하셨다. 17)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께 등돌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에게 절하며 섬겼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잘 따르며 그분을 잘 섬겼던 조상들과는 달리 여호와를 저버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18)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이끌어 갈 사사들을 세우실 때마다 몸소 그 사사들과 함께 하셨다. 그래서 사사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원수들이 쳐들어와도 이스라엘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원수들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짓밟으려 할 때마다 그들이 여호와께 울부짖어 여호와께서 생각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사들이 살아 있을 때뿐이었다. 19) 사사들이 죽고 난 뒤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께 등돌리고 그 조상들보다도 더 못된 짓만을 일삼았다. 곧 다른 신들을 따라가 절하고 그 신들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겼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20) 급기야 여호와께서 화를 내시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예전에 그 선조들과 맺었던 계약을 이 백성이 깨버리는구나! 또한 내 말은 한마디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21) 너희가 그렇게 행동하니 나도 여호수아가 미처 몰아내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뭇 족속을 너희 앞에서 하나도 몰아내지 않으리라. 22) 그리고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떻게 하나 지켜볼 셈이다. 그 조상들이 나의 말을 잘 따르고 살았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정말로 내 말을 잘 들을지 두고 볼 참이다.' 23) 여호수아를 시켜서 뭇 백성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이스라엘이 섞여 살게 하신 까닭은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처신할지 지켜 보시려는 생각에서였다.
불순종과 징계의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징벌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참회하고 구원받았다가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범죄하는 것을 반복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세우신 대책이 사사였습니다.
사사들을 세우심(16-18)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구원을 요청하는 아우성을 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서도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 이스라엘은 다시 사사의 영적 지도를 받지 않고 사사의 말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신들을 음행하듯이 섬기고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유산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신앙정절을 지키며 살았지만, 사사가 죽으면 다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사사가 죽은 후에는 열조보다 더욱 타락하여 이방의 신들을 정력적으로 따라갔습니다. 이런 집요하고 뿌리 깊은 이스라엘의 패역에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조상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십니다.
사사들이 죽은 후에는(19-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범죄하면 그들을 회복하려고 사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사가 살아있을 때에는 바르게 살았으나, 사사가 죽은 후에는 또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였습니다.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둔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를 그들을 통해서 시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방 민족을 가나안 땅에 두신 까닭은 예상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사사가 되십니다. 그분께 순종하고 모든 생각을 그분의 뜻에 맞출 때 밝은 장래가 보장됩니다. 역경 속에서 믿음으로 걸어가면 하나님을 경험하고 확실한 증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시험을 허락하시는데 연단의 과정을 잘 통과한다면 정금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서 이스라엘이 배워야 할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적용: 세상의 것을 좇다가 영적인 나태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과학시간에 사용하던 리트머스 시험지는 산과 염기를 구별하는 지시약으로 가장 알려진 것입니다. 오늘날 리트머스는 전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가장 간편하게 사실관계나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처럼 관용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의 리트머스는 무엇일까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교회 밖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사회에서 아무리 인정받는 존재라 해도 가정에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린 시절 집에 돌아오면 “엄마!”라고 부르며 확인하듯이, 나의 가족에게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그런 평안함을 주는 존재인가? 가정에서 가족이 나를 보는 눈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리트머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설 교 >
순종을 위해 남기신 기업
삿 2장 16~23절 / 배의신목사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문화가 세계에 확산하면서 국격이 올라가고 온 세계가 열광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이 현상을 확인해보려고 각 선진국의 방송사나 유튜버들이 공개적인 사회 실험을 많이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시민의식에 관하여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물건을 훔쳐 가지 않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다니지도 못하며, 식당이나 카페 등에서 테이블 위에 함부로 물건을 두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페에 지갑이나 노트북을 두고 가져가지 않는지를 지켜보기도 하고, 길거리에 의도적으로 지갑을 흘리고 반응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무인 가게, 무인 우산 판매대 등.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을 파헤치고는 다들 놀라곤 했습니다.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할 내용은 대한민국을 높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정직하고 정이 많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민족임이 사회 실험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실험을 하나님께서도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사회 실험을 하신다니! 읽었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의 역사를 기록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사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명을 수행하는 통치자였습니다. 사사는 선지자였으며 동시에 제사장이었고 왕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자 아직 점령해야 할 가나안 땅은 많아서 지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땅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파마다 쫓아내지 못한 일부 민족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남겨진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강성해지면서 노역하는 사람들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서로 상생(相生)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방 민족과 어울리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통혼(通婚)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인들의 신을 따르는 우상숭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본문 앞쪽의 11-1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택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방 민족을 일으켜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난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방 민족을 남기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본문 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지를 시험(Test)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하신 사회 실험입니다. 만일 하나님만을 섬기고 순종한다면 형통하게 될 것이지만,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미리 경고하신 대로 고통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사회 실험을 하시겠습니까?
사사기 3:4절입니다.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이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사용된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prove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입증하다’ ‘증명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행동으로 증명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하시는 신앙적 사회 실험입니다. 이 실험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주(主)되심을 입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개인에게도 이같이 실험하십니다. 창세기 22:1-14절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2절을 봅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에서 사용된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NIV, KJV)에서 “tempt”로 번역했습니다. 이는 test나 prove와는 그 쓰임새가 달라서 ‘좋지 않은 일을 하도록 유혹하다.’ ‘어떤 행위를 유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일은,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알고자 유도하신 것입니다. 이는 test보다 더 강력한 입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16:4절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 말씀에서도 “시험하다.”라는 단어를 ‘tempt’를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9:33절에서는 이사야 28:16절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서 사용된 “걸림돌”이라는 단어는 ‘proskomma’라는 단어인데,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넘어질 기회’ ‘배신의 기회’를 의미합니다. 문턱 같은데 발가락이 차이는 것과 같은 걸림돌을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8절입니다.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이 말씀에는 “부딪치는 돌”이라고 했는데, 앞의 걸림돌과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사용했는데, ‘걸리게 하다.’라는 ‘skandalon’(덫, 함정)이라는 단어를 겹쳐서 사용하므로 뜻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신구약을 통틀어서 이 모든 시험의 목적이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마음에서 거부감이 일어나거나 실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마음을 입증하도록 하시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11-12절을 봅시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목적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뜻에 합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디모데후서 2:21절도 봅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의 시험 기준에 합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선한 일을 위한 준비된 그릇이 됩니다. 많은 성도가 복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목회자들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하지만, 기도하고 축복받는다고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0:12-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복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어느 목사님이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운전 기사에게 차비를 내면서도 목사님은 교회 일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리에 앉아서야 그 운전사가 거스름돈을 더 준 것을 알았습니다.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얼핏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께서 내게 돈을 더 주시는구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자꾸만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심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드디어 교회 근처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려고 문 앞으로 걸어 나온 목사님은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까 기사 양반이 잘못해서 내게 거스름돈을 더 주었더군요.” 이때 운전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못 거슬러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어제 목사님 교회에 가서 정직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기도한 것들을 주시기에 합당한지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대를 통과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에 아이가 그것을 사용하기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2024년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인정받도록 영적인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유대인 지혜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한 편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지나는 마차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다리가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태워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답했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30분 정도가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그러자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아니, 아까는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유혹이나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달아보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회 실험에서 믿음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문 20-22절에서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 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이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시험에 믿음을 입증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과 은혜를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치우쳐 떠나서
삿 2:16-17 / 안양준목사
역사를 영어로 표기할 때 ‘History’라고 씁니다. 원래 ‘History’란 단어는 ‘His’와 ‘Story’가 결합된 것으로 번역하면 ‘그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의 이야기’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즉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인간이 역사를 움직여가는 것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배우처럼 잠시 무대 위에 서 있다가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과거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과거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역사가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역사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이나 지혜를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는 여러 가지 지혜들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살았던 이들의 행적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하고 또 우리의 삶까지도 변화시킬 때도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이 깨우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을 수 있고 과거에 반복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줍니까?”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모세난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 경허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역들을 이들은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자녀를 향한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부모들의 신앙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못할 때 다음 세대는 타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올바른 신앙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12, 13절을 보면 그들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신앙교육이 없을 때 후세대들이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 6: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까닭에 결국 그 자손들이 영적으로 타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나 가나안인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스다롯 등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섬겨야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잘못된 우상들을 섬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는데 14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17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청종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했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7절 후반에 보면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과 언약도 맺지 말고 다른 우상의 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아니하고 도리어 다른 신들을 좇아 그 앞에 절하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과거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죄악을 범함으로 고통을 당했던 사건들을 보면서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길잡이가 되고,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되풀이해서 범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사건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삶을 보면서 미래에 어떤한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를 뷴별할 수 있어야 하고 만일 내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다면 과감하게 고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시 1:1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죄악된 환경’을 멀리 하라는 교훈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에 깊이 빠져있던 가나안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자연히 자신들도 죄악의 자리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사람입니다. 그 죄로 인해서 좋지 못한 결과를 얻어 놓고도 또다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오직 현실만 바라볼 뿐 과거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예견을 전혀 하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사들을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청종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역사는 과연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과거 이스라엘 저질렀던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점점 죄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셨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이 생겨나기 원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길에서 전도를 하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한어른이 지나가다가 아이의 말을 듣고 “야! 이 놈아. 지옥이 어디있어. 니가 가 봤어.”하고 말하자 이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아저씨가 가시는 길로 쭉 가면 지옥에 가는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들은 어른이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 말이 머리에 맴돌아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환자에게 수술칼을 들고 환부를 째고 도려내는 의사를 보고 그것을 잔인한 행위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의사는 환자를 수술할 때 냉정하다. 왜냐하면 몸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의사의 메스처럼 본문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잘못된 환부를 도려내는 그래서 참된 생명을 얻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사 사
삿 2:16~23절 / 채규현목사
지난 주 설교가 뭐였죠?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되지, 주일날에만 신자이고 평일에는 내 삶의 다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죠.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기도 했고요. 그게 상당히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문제점을 보면서 그들의 문제점이 그들만의 문제점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그러한 문제점이다, 그들이 우리와 달라서-그들이 우리보다 더 큰 죄인이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는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갑자기 악해서 어느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데에서 금방 돌려서 바알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안 믿는 사람 이상으로 세상적인 것을 얻기를 원할 때, 안 믿는 사람 이상으로 “나도 물질을 얻어야겠다, 나도 명예를 얻어야겠다, 나도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겠다.” 그것이 강하게 들 때에 그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게 되고, 결국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나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어느날 갑자기 다른 신에게 가서 절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보다는 내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이 지나치게 강할 때 결국은 그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까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이 거듭거듭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보았던 말씀 중에 11절부터 오늘 읽은 말씀의 끝 23절까지는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점 죄악 중에 빠져 들어가는 죄의 악순환 과정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죄악을 짓습니다. 괴롭게 됩니다. 하나님이 구해 주십니다. 그러면 또 다시 죄악에 빠지게 되고, 괴롭게 되고…, 이것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 사사기의 역사이고 일종의 사사기의 요약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사기를 보면서(사사기뿐 아니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사사기를 보면서) 여기에 보면 계속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듭거듭 죄를 짓고, 온갖 전쟁과 배신과 죽임과 피흘림들이 난무해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하나님은 참 무서운 하나님이다. 말 안 듣는다고 이렇게 치고, 저렇게 치는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사사기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점점 심해지는 과정이 있을수록, 그 때마다 거듭거듭 계속해서 반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돋보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계속 두 가지가 반복이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괴로워하고 하나님이 구하시고, 또 죄를 짓고 괴로워하고 하나님이 구하시고…, 이게 거듭거듭 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깊어질수록 그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돋보이게 되고 점점 이 양쪽이 심화가 됩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결론이 어떻게 납니까? 사사기 제일 끝에 결론이 어떻게 납니까? 베냐민 지파가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르렀다가 제일 마지막에는 남자만 600명이 남았죠? 그런데 그 600명에게 온갖 방법으로 혼인을 시켜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의 부활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사기 전체에서는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면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점 죄악에 빠져가는 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구하시고 또 구하시고 하시는데,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이 결국은 이렇게 죄악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남겨주셨다는 이야기가 결론입니다.
우리 인간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우리는 잘못하고, 그 잘못함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그러다가 또 하나님의 구해주심을 받고, 이것이 계속 반복이 됩니다마는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마지막의 결론은 “마침내 ○○성도가 천국에 갔더라.” 이게 결론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도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모든 이 세상의 악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탄과 그 졸개들의 권세도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고, 심지어는 사망까지도 멸망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천국에서 살게 하셨더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것은 마치 운동경기에서, 뭐 축구 경기나 농구 경기나 서로 1전 1퇴를 합니다. 누가 공을 가지고 있던지 현재 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현재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경기가 다 끝난 다음에는 “누가 이겼다” 결정적으로 한편의 손이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도 그거에요. 그러니까 한쪽면만 딱 잘라서 보면 한순간에는 사탄이 이기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서 멸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볼 때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승리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천국에 가더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것을 보통 우리가 신학적 용어로 이야기해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한번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셔서 천국가게 하시겠다는 것을 보통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전혀 엉뚱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니, 그러면 한번 예수님 믿은 사람은 그 뒤에 계속 죄를 지어도 천국가나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백성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살고 하나님을 찾더라도 지옥가나요?” 그런 얘기가 아니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끝까지 결국은 천국까지 이끌어 주시는데 이끄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자꾸 다른 길을 갈 때에는 하나님이 매를 대서라도 다시 돌이켜 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매를 대서라도, 두들겨 패서라도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천국 가는 길로 올 수 있게끔 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끝까지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하나님이 그냥 천국 보내시는 게 아닙니다. 그게 성경 전체의 역사이고, 오늘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이 한번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천국길까지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음대로 사십시오. 죄를 짓고 싶으면 지으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천국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런데 방법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엄청나게 괴로울 겁니다. 하나님께 호되게 맞고, 두들겨 맞고, 매우 치게 맞고, 아파하고 눈물 흘려가면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겁니다. 저는 그게 성도의 견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차피 종착역은 같으니까 마음대로 사셔도 돼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며 살면서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누리면서 살던지, 이리저리 딴 데 다니면서 실컷 괴로움 당하다가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그러다가 괴롭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와서 그냥 천국 가서 개털모자 하나 쓰던지,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지어는 인간의 죄악조차 이기시어,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게 하시어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그 사랑이 있다는 것이 사사기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신약과 구약이 다른 게 아닙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잘못 보면 그게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언제나 결론이 어떻게 나 있는지 제가 말한 이 관점으로 다시 한번 보십시오. 언제나 결론은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죠. 언제나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은혜로 그들을 지키시고 마침내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것은 사탄에 대해서만 승리하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백성들, 자기 백성들의 불신앙도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마귀는 우리를 두렵게 해서 자기 뜻대로 순종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달콤한 것으로 유혹해서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졸개, 자기의 노예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그것조차 용납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11절부터 13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갔더라”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14, 15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입고 괴로웠더라” 그 다음에 16절을 건너 뛰어 17절을 보면 “또 하나님의 은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갔더라” 19절까지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20절부터 23절까지 보니까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이 괴롭더라”하고 나옵니다. 앞에는 과거에 했던 것, 뒤에는 현재적으로 일어난 것, 반복해서 이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난 괴로움, 그리고 2장 16절 말씀이 나오고 또 하나님을 떠난 괴로움, 반복해서 나오면서 중간에 16절 말씀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이유가 뭡니까? 앞에도 보면,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이 괴로움을 당했다고 하면서 거기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뒷부분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이 괴로움을 당하는데 어느 정도냐면 18절에 보니까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서 그들을 구원하신 이유는 그들의 괴로움 속에서의 부르짖음, 그것을 듣고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 슬피 부르짖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부르짖는다는 말 속에 과연 회개의 의미가 들어있는가 하면,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개의 의미가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냥 괴로움 속에서 자기의 괴로움의 신음소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슬피 부르짖음” 바로 이 말이 구약 성경에서 3번 나오는데, 그 중의 2번이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면서 괴로운 상황, 그래서 슬피 부르짖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 의미가 명백한 것은 회개했다는 내용은 그 속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냥 괴로워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든 안 들으시든….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아요. 그냥 괴로움의 탄식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하나님께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르짖는 말이 내게 들렸도다.”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자기들이 죄를 지어서 어려움을 겪고 괴로움을 겪지만 그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는 그 신음소리, 고통소리를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면서 그 괴로움의 소리에 하나님도 괴롭더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요. 이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과의 관계를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 좀 잘 들으라고 하면 참 말을 안 듣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부모 말 안 듣고 어려움에 처하거든요. 저도 저의 어머니가 얘기하시는데, 어렸을 때 그렇게 걸어다니라고 이야기해도 걸어다니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요만큼만 가도 뛰어갔대요. 옛날 길은 아스팔트길이 아니고 전부 흙길에다 돌부리가 많잖아요. 뛰어가다 보면 거기 걸려서 탁 넘어지면, 고개가 한번 들렸다가 한번 더 찍는대요. 그래서 항상 얼굴이 긁혀서 다니고, 무릎에 상처가 있고 그렇게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치면 저의 어머니가 “고놈 참 싸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으셔요. 우선은 화가 나시죠. 그래서 다쳐서 아픈데 궁둥이 한번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뛰어다니지 말라니까 기어이 뛰어다니더니만….” 화가 나셔서 때리면서도 마음은 아픈 거예요. 자식이 다친 것에 대해서요. 그 마음이 여기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진노하십니까? 지난번에도 한번 설명한 것 같습니다. 사실 재판관의 입장에서는 벌주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아무런 감정없이 그냥 벌줘도 될 건데, 왜 화를 냅니까?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겁니다. 재판관이 화내는 것 봤습니까? 그냥 냉정하게 언도를 내리면 돼요.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화를 내고 진노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진노를 아주 심판주로서의 하나님, 그런 면으로만 생각하고 두려워하는데 그게 아니죠. 제가 넘어졌을 때 저의 어머니가 제게 혼내고 화를 내시는 것과 비슷한 심정일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입니다. 진노하심으로 두들겨 패다가도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그 신음소리를 듣고 뜻을 돌이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백성이 회개해서 뜻을 돌이키신 게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소리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약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으로 구약 성경이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품성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그러한 품성 때문에 거듭거듭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또한 사사를 보내시어 구원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품성이 있어서 죄악 중에 하나님을 떠났던 자기 백성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냥 죽으신 것뿐만이 아니고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듯이 “우리의 대제상으로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경험하셨다, 체휼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연악함 중에 괴롭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순간에 우리 주님도 그것을 같이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같이 그 괴로움을 느껴가면서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을 보면 시시때때로 우리 생각 속에 들어오는 죄악적인 생각들, 시시때때로 우리가 거짓말하고, 탐욕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구부리고,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말하고…, 이러한 것들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내 삶의 변화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통해서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바로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을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사기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돌이킴이 없어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사를 보내십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가 거듭 순환할수록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사사기 전체에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 여기에 “사사”라는 직임이 나옵니다. 제가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사사라는 말은 영어로는 “Judge”라는 말로 심판관, 재판관입니다. 명맥상 재판관인데 실제 사사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재판관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용사들입니다. 챔피언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거나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으로, 리더로서 대적과 싸워서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고,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사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자적 역할을 사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압제를 다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독립하고 자유롭게 살게 될 때에 사사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특별히 사사들이 무슨 역할을 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거듭 그 다음에 읽을 때마다 나오는 말씀이 “그 사사들이 사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평하였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사들이 사는 동안에는 태평했어요. 그렇다고 사사들이 대단한 집안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거기 나오는 사사들을 보면, 뭔가 문제점이 있고 연약하고 그래요. 입다라는 사람도 비류중의 한 사람이었고, 서출이었고, 그렇지만 하나님이 택할 때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라는 사람도 므낫세 지파의 가장 연약한 집안이라고 자기 스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이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삼손 같은 사사는 여러 가지 자기 개인적인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쓰셔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한 은혜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그대로 그러한 면들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사로 여러 사람들을 세우시지만, 목사가 여러 사람 중에서 뛰어나거나 가장 잘났거나 가장 신실하거나 뭐 그래서 뽑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뽑는 것 같애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담대히 여기 나와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첫인상이 좋은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보는 사람들이 저를 상당히 여러 가지 장점이 있을 거라 기대하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제 아내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가까이 볼수록 허점과 약점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저와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로 교회 일을 하는 리더들, 특히 우리 장로님들이지만, 제가 항상 장로님들께 감사한 것이 제 부족한 점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분들인데, 그래도 저를 목사로 인정해주고 감싸주시고 같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러나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리더로 세우실 때마다 꼭 그 사람의 배경이나 그 사람의 인격, 품성을 보는 게 아니구나. 오히려 약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만 나타나는구나.’ 이것을 알기 때문에 저도 담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리더로 세우시니까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있을 때 온 이스라엘이 평안해요. 태평해요. 그런데 반복해서 나오는 소리가 그들이 죽을 때, 죽고 난 뒤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 중에 갑니다. 반복해서 나옵니다. 사사가 죽으면 죄로 가고, 또 사사가 죽으면 죄로 가고…. 왜 그럴까요? 거기에서 우리 죄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외부적인 환경이 주어지면 죄를 안 지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내 속의 죄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죄란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는 그것이 죄가 아닙니다. 죄는 더 깊은 뿌리가 있습니다. 죄는 우리 마음을 노예로 만드는 권세가 있는 것이 죄입니다. 내가 외부적으로, 행동으로, 어떤 특정한 죄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서 적절한 환경만 주어지면 행동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 그 내 마음속의 어두운 권세, 이게 죄입니다. 이것을 사사기에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사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리더이고, 옛날에 승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의 말을 들어요. 그 분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죽을 때,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다시 그 마음에 있던 죄의 권세가 행동으로 드러나서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그런 우리 마음의 죄성이 하여튼 환경만 맞으면 나오고, 외부적인 어떤 환경이 바뀔 때마다 나오게 되는 그러한 일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난 주의 설교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죠? 교회 오면 교회적 환경에서는 마치 사사가 있을 때와 비슷한 환경이에요. 그래서 여기서야 거룩하게 대하죠. 웃으면서 평안하게, 모든 사람과 같이요. 지금 교회안의 이 표정만 가지고는 능히 천국이 돼요. 그런데 교회에서 떠나서, 교회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 내 직장에서나 사업장에서나 아니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여기서 삶을 살아갈 때 거기서도 여러분은 변화된 인격으로, 주일날 교회에서 보던 그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혼자 있는 그 순간에,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합니다. 또 아무도 보지 않는 내 생각 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속에서 수천 가지,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바로 그 속에서 여러분은 깨끗한가요? 경건한 삶을 살고 있나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밝히 보여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의 죄성을 밝히 보여주시는 이유는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 의지하기 위해서요. “그렇구나. 바로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분이구나.” 이것을 다시 느끼고 그 분에게 가서 피난처를 찾고, 그 분의 위로를 받고, 그 분 안에서 변화하려고,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목적입니다. 우리 다같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비록 우리가 이제까지의 모든 삶에서 잘못된 일이 많고, 앞으로도 또 넘어지고 쓰러질 일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내게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다시 힘을 내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은혜를 미리미리 예표해 놓은 것이 바로 사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사사이며, 진정한 왕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바로 그 분은 사사처럼 죽지도 않으십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언제나 새 힘으로 승리할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시 같은 이웃
삿 2:20~3:6 / 조상호목사
먼저 헤리 채핀(Harry Chapin)이 지은 한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제목은 “요람 속의 고양이”입니다.
어느 날 내게,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왔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홀로 밟아야 할 단계가 있었고, 지불해야 할 계산서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또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말도 배웠습니다. 나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기에 아이가 언제 그런 것들을 배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늘 내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래요. 아시겠죠? 난 반드시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언제 집에 오실 거예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바빠서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빠가 시간이 나면 그 때 놀자꾸나. 그 때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을 거야.” 어느 날, 열 살이 된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공을 사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은 저랑 함께 놀아주시겠어요? 공 던지는 법도 좀 가르쳐 주시고 말이에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얘야, 오늘은 안 된단다. 오늘은 할 일이 너무너무 많거든” 그러자 아들은 알았다며 혼자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야.”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언제 집에 오실 거예요?” 내가 대답합니다. “글쎄, 오늘도 바빠서 늦을 것 같구나. 하지만 이 다음에 아빠가 시간이 나면 그 때 아빠랑 함께 지내자꾸나. 그 때 우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야.”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아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리 외서 내 겉에 앉아 보렴.” 아들이 머리를 저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빠! 제게 지금 필요한 건 아빠 자동차 열쇠랍니다. 물론 빌려주시겠죠? 그럼 나중에 뵈요.” 세월이 자꾸 흘러 나의 머리가 점점 희어져 갑니다.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언제 집에 올 거니?” 아들이 대답합니다. “글쎄요. 아버지 바빠서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가 한가해지면 그 때 함께 지내도록 해요. 아셨죠? 그 때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 후, 더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은퇴하여 집에 있은 지 오래 되었고, 아들은 먼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느 날, 나는 아들이 너무나 보고파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들아! 너만 괜찮다면 널 한번 보고 싶구나!”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님! 저도 아버님을 무척 뵙고 싶습니다. 그런데 통 시간이 나질 않습니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요즈음은 세상 살기가 너무나 힘들고 바쁘답니다. 게다가 지금 제 아이들이 심한 감기에 걸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양해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빠!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래요. 아시겠죠? 난 반드시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그 아이는 꼭 나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 아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하던 행동을 자녀가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쟤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래? 우리 집안에 저런 애가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애가 나왔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누굴 닮긴 누굴 닮았겠습니까? 자녀는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를 닮지 않고 부모를 고스란히 닮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의 모습이고, 자식은 부모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자녀교육의 실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그들은 첫째로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기지 못했고, 둘째로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지 못했고, 셋째로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들을 확실하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자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방의 대적들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한창 힘들여 농사짓고 있는 논밭에 갑자기 몰려와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기도 하고, 추수 때가 되면 갑자기 쳐들어와 힘들게 거두어들인 곡식을 탈취하기도 하고, 금이야 옥이야 키워놓은 자녀를 보는 즐거움에 살아가던 어느 날 저녁 떼로 몰려와 사랑하는 딸들을 업어가기도 하는 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시 같은 이웃이 주는 교훈을 몇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이웃으로 말미암아 내가 고통을 당할까요?
1) to Punish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생깁니다. 물론 저의 이 말에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고통을 죄의 결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이 당한 고통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그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은 죄로 인한 징계가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에게 고통을 가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욥의 삶을 통하여 무언가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그를 보고 주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입니까?”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모든 고통을 죄의 결과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죄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20과 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렇게도 누누이 강조하며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라, 그들과 상종하지 마라, 그들의 딸들을 취하지 말고, 그들에게 아들들을 주지 말라,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지 아니하자,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가나안 땅에 남아있는 원주민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가시 같은 이웃을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고난 가운데 두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주위에 그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 같은 이웃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가시 같은 이웃으로부터 계속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불순종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잘 압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 혹은, ‘열국의 아비’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본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씻을 수 없는 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네 몸에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하고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주인과 여종이 서로 싸움박질 하는 큰 소동이 그의 가정에서 일어나, 결국에는 한 쪽이 가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당대에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4,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스마엘 후손인 아랍 사이에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자살폭탄 공격을 받아 수 십 명이 죽고 다치는 참극이 벌어졌는데, 이 비극은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시 같은 이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가시 같은 이웃이 이스라엘 주위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교회가 살고, 우리의 사회가 사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순종의 삶’이 이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며 순종을 빗댄 유머가 나왔겠습니까? 2차 대전 말, 2개월간 재교육 소집 명령을 받은 어떤 중위가 다음과 같이 전보를 쳤습니다. “소집에 응할 수 없어 유감임. 누가복음 14장 20절을 참조하기 바람.” 그 전보를 받은 육군성 직원이 성경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육군성 직원도 전보로 다음과 같이 회신을 보내었습니다. “귀하의 전문에 관하여 마태복음 8장 9절을 참조하기 바람.” 그 성경 구절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2주 전에 오셨던 시드니순복음교회의 홍금란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즈음 순종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습니다. 다 순종의 중요성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순종보다 제사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은 하지도 않은 채 예배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순종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성가대나 교사나 구역장 등의 봉사부서에 임명할 때는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순종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기도할 때는 무슨 일이든 순종하겠다고 하고, 자녀들에게는 순종을 요구하지만, 정작 본인은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보다 더 완벽한 신앙은 없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절정입니다. 여러분!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회사 최고 경영주의 입장에서 누구를 쓰겠습니까? 항상 잔머리나 굴리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아니면 비록 머리는 조금 부족하지만 오더를 내리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경영주는 머리는 부족해도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을 씁니다. 스포츠 감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월드컵 축구 4강의 영웅이었던 히딩크 감독이 어떤 선수를 좋아한 줄 아십니까? 순종하는 선수였습니다. 자기 지시에 철저하게 따르는 선수를 선발하고 그 선수를 기용했습니다. 그런데 감독에 오더에 따르지 않는 선수는 가차 없이 선발에서 제외했습니다. 대표적인 선수가 꽁지머리를 날리며 골 넣는 골키퍼라고 해서, 한 때 최고 인기선수였던 골키퍼 김병지 선수입니다. 그 선수가 자기 골문을 비워두고 중앙선까지 몰고 가다가 볼을 빼앗겨 골을 먹을 뻔한 이후, 김병지 선수는 오랫동안 대표선수로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렵사리 월드컵 대표단에 합류가 되었습니다만, 선수로 뛰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포츠 감독은 순종하는 선수를, 자기의 지시를 잘 따르는 선수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쓰실까요? 똑똑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To Test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테스트하기 위해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놓습니다. 2장 22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또 3장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또 3장 4절을 보겠습니다. “남겨 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는 ‘시험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이 ‘시험’이라는 단어와 ’유혹’이라는 단어가 구별 없이 똑같이 ‘시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test 라는 ‘시험’과, temptation인 ‘유혹’이라는 단어가 구별되어 있습니다. test와 temptation이 어떻게 다릅니까? test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temptation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test는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므로 언제나 건설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그러나 temptation은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test하시지만, temptation하지는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test가 아니라, temptation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test하십니다. 이 test는 매우 중요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test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학생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학생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test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선생님의 배려입니다. 만약 숙제도 없고 test도 없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test를 통해서 학생들은 자기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게 되고, 보충해야 할 부분을 알게 됩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님께서 온누리교회 부설 두란노서원에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갑자기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분위기에서, 훌륭한 강사를 초빙해서 목사님들을 훈련시켰는데,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않더랍니다. ‘그 이유가 뭘까?’하고 하용조목사님께서 고민하다가 드디어 그 원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test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test가 없었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한 목사님들이 공부를 등한히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처럼 test는 꼭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test하기 위해서 가시 같은 이웃을 우리 곁에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시 같은 이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때로는 가시 같은 이웃으로 인하여 나의 삶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한 단계 Up-grade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로마라는 가시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에서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사도행전 4장 29절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그들은 로마라는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며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로마라는 가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킬 수 있는 실력자로 만들어준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힘들게 하는 가시 같은 이웃이 하나님께서 나를 test하시는 시험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있다할지라도 너무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test를 잘 통과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To Teach
세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기 위해 우리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놓습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하나님께서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놓으신 것은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통해서 전쟁 기술을 가르치시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대비하여 이들도 여호수아 때처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가시 같은 이웃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우리에게도 각자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가시 같은 이웃이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 하필이면 우리 가족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라고 탄식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는 명심하십시오. 가시 같은 이웃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가시 같은 이웃도 우리 주위에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감당할만한 시험이기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등산을 가르치는 교관이 한번도 등산을 해 본 적이 없는 왕초보 등산가에게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쉬운 코스를 택하여 오르는 훈련을 시킨 후, 점차로 암벽 타기 등의 어려운 코스를 오르는 훈련을 시키고 결국에는 높은 산의 정상에 도전하게 합니다. 수영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실내수영장에서 수영을 가르칩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까지 훈련을 진행하다가 다음에는 넓은 강을 건너게 하고, 나중에는 넓은 바다를 건너는 모험도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들을 훈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만한 한계 내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훈련을 통해 우리의 실력을 계속해서 향상 시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있는 가시 같은 이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시 같은 이웃을 통해서 나의 삶이 훈련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훈련되어지며 성숙되어집니다.
독일에서 전해내려 오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을에 농부들이 농사짓기가 너무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비를 요구할 때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면 안 되나요? 우리가 햇빛을 요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시면 안 되나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어떤 기도라도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부지런히 씨를 뿌렸습니다. “하나님 비가 필요해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었습니다.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야 했습니다. “하나님,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 필요해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햇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가을 녘 들판에 나가 곡식을 거두려 하는데 알곡이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알곡들 대신 쭉정이가 널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때를 따라 햇볕을 주셨는데, 우리는 왜 알곡을 거둘 수 없는 것입니까?” 이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꽃들이 피었을 때는 수분 작용을 위해서 바람이 필요 하느니라. 때로는 그 바람 때문에, 폭풍 때문에 곡식들이 신음할 수 있고, 쓰러질 수 있고, 넘어질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비바람을 통해 곡식들이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니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역경이 있을 때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면 이것이 증명됩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경이적인 부흥이 일어나던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평탄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였습니다. 그 때는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 각오로 예수를 믿으니까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최고로 부흥한 교회를 들라고 하면 중국교회라고 합니다. 왜 중국교회가 부흥했습니까? 문화혁명이라는 핍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안문 사태를 기점으로 엄청난 핍박이 가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 풀 꺾였지만, 한국교회가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는데, 한국 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이룬 시기는 평안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룬 일등공신은 북한의 김일성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100% 다 수용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그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원래 한국 기독교는 장로교는 평양을 중심으로, 감리교는 인천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가질 만큼 다분히 지역할거 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켜 이북에 있는 성도들을 다 흩어버렸습니다. 전국으로 피난민들이 골고루 퍼졌습니다. 하다못해 울릉도에도 피난민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 북한에서 내려온 성도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제주도에는 지금은 모르겠지만, 수년전까지 가장 큰 교회가 이북에서 내려온 분들이 세운 영락교회입니다. 6.25 때만 그랬습니까? 교회가 기도 안하면 이북에서 무장공비들이 내려오고, 목사들이 한심한 짓만 골라 한다 싶으면 비행기가 납치되었습니다. 조금 살만하다싶으면 불바다니 피바다니 하며 전쟁 위협을 가해왔습니다. 그 때마다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기도했습니다. 텅텅 비던 금요철야 기도회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조용하던 새벽기도회에 통곡하며 조국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한국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때로는 가시 같은 이웃으로 인하여 우리가 한 단계 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주위에 자꾸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 같은 이웃이 있습니까? 너무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못살게 하고, 나의 삶을 곤고하게 하는 가시 같은 이웃이 있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이 자꾸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생긴 가시 같은 이웃이 주위에 있든지, 나의 부족한 인격과 실수로 인해 생긴 가시 같은 환경 속에 처해 있든지,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으로부터, 가시 같은 환경으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돌이켜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가시 같은 이웃이 있다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test를 잘 통과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시 같은 이웃을 통해서 나의 인격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훈련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삿 2:16-23
뉴욕의 한 교회를 섬기는 흑인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한국에 급파된 미군 병사였는데, 하루는 짚차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너다가 연료계기 판을 보니 기름이 다 떨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캠프로 돌아가서 기름을 재공급 받으려고 하는데, 아기의 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엔진을 끄고 들어보니 처량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깊은 사람으로, 아기가 우는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동사했고, 어머니의 옷에 싸인 아기가 죽어 가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그는 아기를 안고 캠프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밤새껏 울고 또 우니 어머니 때문에 우는가 해서 아기 어머니의 시신을 서울 공동묘지에 장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 미군은 아기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양녀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아이가 장성해서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딸에게 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 딸은 “아빠, 어서 나를 서울로 데려가 주세요. 어머니의 무덤을 보여 주세요.”하며 졸랐습니다. 그래서 겨울 휴가 기간에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서울로 왔습니다. 마침 눈이 내려서 어머니의 무덤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 선 딸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무덤을 감쌌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한나절 동안 계속해서 울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무덤에 자기 옷을 덮어드리며 희생적인 사랑에 감사하는 딸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녀가 참된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감사하는 제자가 참된 제자입니다. 남편의 땀 흘리는 수고를 기억하여 남편에게 감사할 줄 아는 아내가 훌륭한 아내입니다. 박봉이지만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아는 남편이 훌륭한 남편입니다. 하나님과 교회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감사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 감사하는 사람은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 되고, 따돌림을 받아 외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이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가 벽을 향해 공을 치면 그 공이 튀어 돌아오듯, 우리가 어떤 분에게 감사하면 그 감사가 다시 내게 되돌아옵니다. 이로 인해 내 마음이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판하면 그것도 역시 되돌아오기 때문에 먼저 자신의 가슴이 아프고 그의 마음은 사막이 되고 황폐해지게 됩니다.
데이비드 클링크 박사는“오는 감기 가는 감기 다 걸리는 사람, 특별히 노이로제 신경성 환자들의 대부분은 날카롭게 비판하고 불평하는 사람이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그런 병에 걸리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잠언 17장 22절에도“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기쁨도 있고, 존귀함도 있고, 건강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복된 민족이 아닙니까? 세계에 수많은 종족들이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택하여 복을 주신 민족이 이스라엘 아닙니까? 이들이 받은 복이 얼마나 큽니까? 그들이 받은 복을 기억한다면 항상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겨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바알 신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그 우상 앞에 절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애굽에서 채찍을 맞으며 노예로 살아야 했을 텐데, 그 불쌍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에 양식이 없으므로 하늘에서 양식을 떡가루를 눈처럼 내리셔서 40년간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늘이 전혀 없는 뜨거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햇빛을 막아 주셨고, 춥고 캄캄한 밤에는 불기둥으로 불을 밝혀 주시고 따뜻한 난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포도 한 송이가 얼마나 컸던지 두 사람이 메고 갈 정도의 비옥한 땅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 없이 그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음란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맞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은혜가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은혜만 못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을 하는 애굽땅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마귀의 노예, 죄의 노예, 지옥의 노예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그들은 떡가루처럼 떨어지는 만나를 먹었지만 우리는 신령한 말씀의 만나를 먹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았지만 우리는 우리 가슴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셔서 날마다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천국에서 살게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모습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1.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악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쉬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17절말씀에“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한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악습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었던 인간의 공통된 못된 습관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의 호세아서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 호세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창녀 고멜과 혼인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창녀가 선지자의 아내가 되었으니 얼마나 복된 여인입니까? 그 귀한 남편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꾸만 가출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또 몸값을 주고 다시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집나간 아내를 또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수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면 더 행복할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탕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에겐 불행의 길이 행복의 길처럼 보였습니다. 패망의 길이 성공의 길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그 어디에도 참된 행복이 없습니다. 이것을 밝힌 성경이 솔로몬의 참회록인 전도서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장 2절에 외도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깊이 깨닫고 고백하기를“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마러린 먼로는 금세기 최고의 미인이었습니다. 최고의 인기 배우였습니다. 전 세계 남성의 우상이었습니다. 미국의 존 F케네디 대통령도 자기 생일에 귀빈은 한명도 초대하지 않고 비밀리에 먼로를 초대하고는 기뻐했다고 합니다. 영국 왕실에서도 마러린 먼로를 특별히 초대해서 극진한 예우를 했다고 합니다. 그야 말로 마러린 먼로는 인기 정상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헐리우드에 가면 상점 에 있는 사진 10장중에 8장은 먼로의 사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살했습니다. 인기 정상에서, 부의 정상에서 살았지만, 타살인지 자살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나신으로 죽었습니다. 그녀의 시신 옆에는 메모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씌어 있는 글이 바로 이것입니다. “돈, 인기, 명예, 이 모든 것은 찰나적인 행복의 요소에 불과했다. 돌아보니 내 인생은 한 손으로 손뼉을 친 인생이었다.”라는 글을 남기고 죽은 것입니다. 한 손으로 박수가 가능합니까? 허공만 날리게 됩니다.“내 인생은 허공만 날렸다.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라는 뜻입니다. 허무했다는 것입니다.
한 손으로는 박수가 불가능 합니다. 인생은 예수님과 부딪쳐야, 예수님과 만나야만 피어나는 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뒹구는 낙엽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이 없고, 인기가 없고, 혹 병들고 초라해도 예수님을 만나면 그 삶은 행복합니다. 송명희 시인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이 비밀을 모두 깊이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나라가 망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본문 19절~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잘된 나라나 가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소련이 공산화된 다음에 “하나님은 죽었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하나님은 없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지 나라가 되어서 라면 하나도 제다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03년에만도 레닌그라드에서는 800명이 청부 살인자에게 죽고, 1,500명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청부 살인업자에게 300달러, 500달러만 주면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도 죽인다고 합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으니 불안하여 살지 못할 지경이라고 어느 선교사님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자 그 잘살던 소련이 거지나라가 되었습니다.
본문 18절에“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하셨습니다. 사사란, 이스라엘 왕조가 들어서기 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가 사사였습니다. 사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길 때, 대적을 물리쳤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조가 들어섰을 때에는 대신 선지자를 세우시고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뜻을 따라 순종했을 때에는 언제나 평강을 누렸습니다.
훗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회개케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케 하시므로 넘치는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부의 사촌 되시는 윤치호 선생이 미국 유학중에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야! 이것이야.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예수님만이 살 길이요, 예수님 안이 천국이구나.”라고 확신하고, 집에 돌아와서 안국동의 윤씨 가문 전체를 전도해서 그 가문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사람,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만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는 8남매의 자녀를 두었는데, 특별히 그 막내딸의 믿음이 좋았다고 합니다.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가는데 자기 아버지만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니, 막내딸은 마음이 아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끝까지 믿지 않자 단식 투쟁을 했습니다. 금식하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영혼을 구원해 주세요. 아버지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알아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는 딸이 그렇게 금식을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홍, 며칠 굶으면 안 먹고 견디나 보자.”그런데 끝까지 먹지 않으면서 “아버지, 아버지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저는 이대로 죽습니다. 저는 죽어도 괜찮아요. 천국에 가요. 그러나 아버지가 걱정이에요. 제가 죽더라도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윤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제사상을 차렸다고 합니다. 제사상 앞에서 막 울면서 하는 말이“조상님들, 죄송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제사상이니 마음껏 드십시오. 앞으로는 제사상이 없습니다. 조상님들, 죄송합니다. 많이 많이 드십시오. 앞으로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없습니다. 제 딸이 제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딸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교회에 나가더니 은혜를 받아서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부자이니까 매주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온 교인들에게 다 다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제사보다 더 귀한 의미 있는 추도예배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아흔아홉 칸짜리 집에 교회 성도들을 초대해서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할아버지가 대장이 되어 온 식구가 교회에 가서 성가대원으로 교사로, 마치 교회를 섬기기 위해 사는 것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 집안에서 서울대학교 총장, 농림부 장관, 대통령 등 한국의 별들이 부지기수로 나왔습니다. 지금도 굉장한 가문입니다. 또한 모두들 효성이 지극해서 신혼여행 갈 때도 아버지를 모시고 갈 정도라고 합니다.
한 학자가 “한국의 큰 재벌 중에는 명예와 재물을 3대 이상으로 물려준 가문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 양반들이 다 몰락해서 명예와 재물을 지금까지 이어가는 가문은 한국에 오직 두 집안뿐이라고 합니다. 그중 한 집안이 윤보선 대통령 집안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분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축복의 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행복의 길이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나 가정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시므로 반드시 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풍조는 바뀌어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험한 세파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 2장 16-23절
그룹성경공부
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이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의 괴로움이 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통가운데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구원할 사사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사사들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다른 신들을 음란한 듯 좇았고, 그것들에게 절하였으며 또한 그들의 열조와는 달리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함을 받아서 고통 가운데 슬피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과 함께 하여 주셨고, 사사들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죄악에 대한 징벌로 고통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러한 괴로움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는데, 이것을 통하여 구원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삿2:16-18, 시3:8, 욘2:9, 롬9:15-16, 엡1:5)
(매튜 핸리)
Ⅲ.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곤고를 당할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구원 하시었다. 저들이 당하는 고통은 그들의 죄에 대한 벌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 고통 중에서 구원함을 받았다(16~18절).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1. 구원의 길로 저들을 인도하심. 그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서 온 것으로, 그 근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뉘우친 것이" 아니라 17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죄를 계속 범했다.)" 저들이 괴로워함으로 써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신음은 저들의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영원히 멸망 받아야 마땅하며, 또한 오늘날은 하나님의 인내의 날이요 우리에게는 시련의 날이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진노를 다 발하시지는 않음이 사실이다. 공의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어야 하겠지만,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런 일을 행하실 수가 없었다.
2. 그들의 구원의 도구.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천사들을 보내시지 않으셨고, 또한 그들의 조력을 위해 어떤 외국의 세력도 끌어 들이지 아니 하시고, 때에 따라서 그들 자신들 중에서 사사들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어 부르셨으니,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구원해야 할 사명과 놀라운 성공으로 관 씌우신 위대한 사명에로 부르신 자들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세우셨을 때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원자들이 되었다.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교회가 가장 깊은 타락과 곤고를 당할 때에, 하나님은 교회를 거기에서 구원하고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울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2) 공적인 사명에 유용한 사람을 시기에 합당하게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그들에게 행동하고 모험할 수 있는 기백을 주신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 국가에 주시는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 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그는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임재를 허락하시어 그가 세우신 자들에게 그는 함께 하실 것이다.
(4) 한 나라의 사사(재판자)들은 그 땅의 구원자들이다.
(박윤선)
2:16, 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지도자로 "사사"(士師)를 세워 주셨으나 그들이 극히 타락했을 때에는 사사의 지도도 순종하지 않았다. "사사"란 말의 히브리어는 재판하는 자를 가리키지만(D.K. Budde, der Grundbegriff dafurist Recht schaffen), 이는 일반 국가 행정에 속하는 재판장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을 "사사"라고 번역함보다는 구원자란 뜻을 내포하는 "심판자"라고 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쫓아" -(17절 상반)란 문구의 히브리어)는 "다른 신들을 쫓아 음란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음란하여"란 말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니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섬기는 자를 가리켜서 음란한 자라고 하시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다.
(1) 참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시니 만큼, 신자가 마땅히 섬겨야 할 분은 여호와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만 섬겨야 된다(신 6:5). (2)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신자를 사랑하시되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 같이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것(엡 5:25). 그러므로 그는 신자도 그렇게 전심 전력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신자가 하나님을 그렇게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때에 그는 질투하신다고 하였다(출 20:5). 이것은 신자에게 대한 그의 사랑이 불 붙듯하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속히 치우쳐 - (17절 하반). 여기 "속히"란 말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얼마 전까지 하나님 여호와를 공경하던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속히 타락했을까 함이다. 그러나 이 난제는 쉽게 해결된다. 인류가 아담의 타락 후 이미 종교적으로는 타락되어 있으니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는 그의 부패성이 발동하게 된다. "치우쳐"란 말은 배반함(turned aside)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쫓는 배신 행위를 가리킨다.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 (17절 끝). 곧, 사사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신실했던 선조들처럼 행치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2:18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동기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가 사사를 세우신 동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 때문에 일어난 그의 긍휼이었다. "슬피 부르짖으므로." 곧, 그들이 애달프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큰 죄인이라도 그 지은 죄를 진실히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호 6:6).
2. 사사들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그들의 열조보다 더 부패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기면서 그것들에게 절하였으며, 그러한 행위들과 완고한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기 새로운 다음 세대는 이전의 과거 세대보다 더욱 악한 세대가 되었는데, 이것을 통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면서 죄를 짓는데 더욱 대담해지는 죄인들의 모습에 대하여 서로 대화해 보십시오. (삿2:19, 창6:5, 렘17:9, 요3:19-20, 엡4:18-19)
(매튜 핸리)
Ⅳ.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개선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사들에 의해서도 돌아서지 않았다(17-19절).
1. 그들의 사사들이 그들과 함께 있어 개혁사업에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에게는 "사사를 청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로 그 때에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았고" 우상에 미쳤으며 완고히 치우쳐 타락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혼인한 관계였지만 혼인계약을 파기하였으며, 이들 신들을 쫓아 음란에 빠졌던 것이다. 우상숭배는 영적인 간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도덕하고 천박한 것이며 불성실한 것이다. 그들은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완고하며 오직 거기에 골몰해 있을 뿐이었다.
2. 개혁의 시기에 바른 길로 가기 시작하던 그들도 다시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옛날과 같이 여전히 악하여졌다. 그들은 그들의 경건한 열조가 행하던 그 길을 떠났다. 그것도 그들의 열조의 선한 전승과 그들 자신의 좋은 교육의 영향에서 새 출발을 한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경건한 조상을 가진 악한 자녀들이 그와 같이 행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책임이 그만큼 클 것이다.
" 사사가 죽은 후에는 우상 숭배를 막고 있던 뚝을 터놓은 것 같아서 우상 숭배의 홍수는 다시 넘쳐 흘러 그들은 더욱 파괴하여졌다. 그래서 개혁을 지향하던 때보다 그 다음 세대가 더욱 악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19절)" . "그들은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조상들을 능가하였고, 속되고 불경한 의식을 창안하였다. 곧 저들은 개혁자들의 길과는 모순되는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고, 가장 추악한 우상 숭배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가장 야만적인 자들에 대해서도 혐오를 가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완고한 길에서 한 걸음도 돌이키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고백했던 하나님의 선한 길을 저버린 사람들은 흔히 죄에 대하여 아주 대담하고 파격적이어서 그들의 심정은 극도로 완악해지게 된다.
(톰슨)
2:19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사사를 통해 대적의 압제로부터 구원받는 체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의 죽음과 더불어 또다시 흉악한 범뵈에 물두하였다. 이러한 반복적 범죄는 마치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다름 없는 아둔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벧후2:22). 진실한 자기 반성과 새로운 삶으로의 주체적 전황이 수반되지 않는 뉘우침은 일시적일 뿐이며, 더 큰 죄악으로 되돌아갈 위험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마3:8). 왜냐하면 사악한 본성은 악으로 달려가는데에는 무척 신속하며(잠1:16). 마치 새가 그물을 향햐 날아가면서도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줄을 전혀 알지 못함과 같기 때문이다(잠7:23)
(박윤선)
2:19-21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지도자가 별세한 뒤에는 또 다시 우상을 섬기며 범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 (19절 끝)란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강퍅해진 사실을 지적한다. 사람의 일반적 범죄는 성령을 근심케 하고(엡4:30), 그의 강퍅성은 벌을 초래한다.(창 6:5-7).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열국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고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시험하려고 하셨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또한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서로 대화해 보십시오. (삿2:20-23, 창2:15-17, 신7:4, 고전10:12)
(매튜 핸리)
Ⅴ. 이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결심은 그들 위에 계속 채찍이 머물게 하시었다.
1. 그들의 죄는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계약과 그들에게 준 계명을 멸시하고 파괴하면서 행한 일이었다(20절).
2. 그들의 벌은 그들이 남겨 두었다. 그 가나안 족속이 저들에게 대한 채찍이 된 것이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은 모두 여호수아의 손에 맡기시지는 않았다(23절). 우리 주님께서도 "권세와 권능을 쳐부수셨으나" 처음부터 완전한 승리를 하시지는 않았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모든 것이 주님에게 굴복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땅에 가나안 족속들이 남아 있었듯이, 교회에는 사탄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여호수아는 영원히 살아 있다. 마지막 심판날에는 그의 완전한 정복이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가나안 족속을 치는 일이 오랜 기간 동안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섞이게 되었고 그들과 친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추방하지 않으려 하셨다(21절). 만일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 거할 만큼 친밀한 자들이 있거든 그리 하도록 버려두라. 그리고 거기로부터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게 하라. 하나님은 그들의 미혹을 택하여 주실 것이다(사 66:4).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부패한 욕심과 정욕을 좋아하며 거기에 빠지게 되고 그런 것들을 억제하기보다는 조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파멸해 이르는 죄의 세력에 그대로 버려 두신다. "그리하여 그들의 운명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그것은 그들 자신이 택한 것이다." "그들(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를 시험하기 위해 남겨진 자들이다(22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시험하려고 한 것이었다.
(1)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앞에 내놓은 우상 숭배에 대한 유혹을 저들이 이길 수 있나 없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길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었다(신 7:4).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다. 내가 너희를 시험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시험한 결과 그 유혹자들의 매력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거짓되며 사악한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슬픈 체험을 통하여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참이었는가를 감지한 후에야 그것을 믿게 된다.
(2) 남아 있는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주는 괴로움과 그들이 야기시키는 괴로움을 그들이 선용하여 그것을 통해 죄를 뉘우치고 겸손해져서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 본분을 다할 수 있는지 없는지, 또 그들로부터 오는 계속적인 경고를 받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고 거역하기를 두려워하는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톰슨)
2:22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본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시험이나 시련의 주원인은 사람들에게 있다. 왜야하면 인간의 불손종으로 인해 생겨난 여러 장애 요인들이 곧 시험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창22:1). 한편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보다 순수하고 차원 높은 신앙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시련을 선용하시기도 한다(신8:2; 벧전1:7). 1. 하나님께서는 곤경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게끔 인도하신다. 2. 하나님은 보통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극복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사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자들만 구원하시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은총 가운데 인도하시면서, 다만 겸허하고 진실하게 순종할 것만을 요구하셨다(마11:30).
(박윤선)
2:22,23 이 부분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의 거민, 곧 여호수아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던 그 족속들을 더 이상 쫓아내 주시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시는 목적을 밝혀준다. 그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 (22절 하반)고하였다. 여기 "시험"이란 말은 시련(試鍊)을 의미한다. "시험하려 함이라"고 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할 때에 그 땅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으로 인하여 연단을 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잘 믿는 신자들의 주위에도 가시와 같이 괴롭게 하는 시험거리들을 남겨두신다. 그가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역시 그들을 시련하시려는데 있다. 신자들은 시련을 통하여 성화(聖化)되어 간다. 벧전1:6-7; 욥 23:1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