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못한 아픔이 있었답니다. 무엇보다도 본인들 스스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고 (실효도 없으면서)파문 역시 만만치 않을 거라 염려돼서 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렵니다.
오늘로 아시안 게임 대표 23명의 명단이 확정 발표됐고 관련자들의 거취도 결정된 만큼 알려진다고 해서 큰 피해가 없을 거란 판단 때문입니다.
대표팀 1차 명단이 발표되고 나서 며칠 뒤의 일입니다. 국민타자 이승엽이 김인식 감독에게 넌지시 이런 뜻을 비쳤습니다. 말씀 드리기 아주 죄송스럽지만 대표팀에서 빠질 수 없겠냐고.
조심스런 의사타진에 돌아온 김인식 감독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안들은 걸루 하겠다" 당연하죠. 감독 입장에서 이승엽 없는 대표팀 타선 생각이나 하고 싶겠습니까. 그렇다고 이승엽이 이런 사실 몰랐을까요. 알면서 왜그랬을까요.
이정도면 야구판 사정에 정통하신 분들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특히 LG 팬들은. 맞습니다. 이승엽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서용빈을 위해서 였습니다. 자기 대신 서용빈이 대표팀이 되면 어떻겠냐는.
이승엽이 이런 뜻을 밝히기 까지는 싸나이 우정이 있었습니다. 8월 5일 대표팀 1차 엔트리 발표가 있었고 여기서 이름이 빠진 LG 서용빈이 사실은 시즌 중에 공익요원으로 입대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외부로 알려졌습니다.
제일 먼저 팀 선배 이상훈이 나섰습니다. 최종 엔트리가 아니니까 어떻게 서용빈을 대표팀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는 의사표시를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했던 모양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회장님 송진우도 힘을 보탰습니다. 사실 송 회장으로선 선수협 활동 때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서용빈이 시즌 중에 군에 가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을 겁니다.
송진우와 이상훈 등 몇이 의견을 모은 결과 나온 방법이 대충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서용빈과 포지션이 겹치는 이승엽의 자신 사퇴. 또 하나는 이승엽 뿐 아니라 송진우와 이상훈 등 3명이 사퇴하고 대신 채종범 등 병역미필자 이면서도 성적이 좋은 후배들이 대표팀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선배들로부터 이런 방안을 전해들은 이승엽은 고민을 거듭하다 어렵게 김 감독에게 사퇴의 뜻을 비쳤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물론 두 번째 방안 역시 대표팀 코칭스태프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분명히 했구요.
물론 이들이 한 번의 거절로 사퇴의사를 접었던 것은 아닙니다. 몇차례씩 의견을 나누고 이런 저런 사정들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공표단계에서 참기로 했습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팬들의 여론입니다. 당시 서용빈에 대한 동정이 만만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만약 이승엽이 사퇴를 선언하고 나섰을 때 '국가대표로 봉사하랬더니 저 만 생각한다'고 비난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상훈, 송진우 역시 후배들을 위하는 마음 못지 않게 대표팀 선수로 봉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자유로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위기에 처한 프로야구를 살려야 한다는 명제에 누구나 공감하고 있으니까요.
다음은 이번 대표팀이 김인식 감독 등 코칭스태프의 주도아래 구성됐다는 점입니다. 김 감독은 대표팀 감독에 선임될 때 부터 구단간 나눠먹기나 병역면제 수단으로 대표팀을 구성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고 실제로 일부 구단의 압력을 물리치고 소신껏 예비엔트리를 짰습니다. 이런 마당에 선수들이 먼저 동료들의 병역면제를 위해 대표팀을 자진사퇴한다면 그야말로 김인식 감독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자칫하면 대표팀 코칭스태프 전원이 사퇴해야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습니다.
또 하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서용빈이었습니다. 서용빈은 선후배들의 마음씀에 무척 고마워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자칫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퇴를 검토하던 선수들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태도였다는 군요.(그리고는 팬들의 연호와 동료들의 헹가레를 뒤로 하고 19일 군에 입대했습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이런 사연으로 인해서 이승엽, 이상훈, 송진우의 국가대표팀 사퇴는 빅뉴스가 되지 못하고 없었던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동료를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 거기다 앞뒤 상황까지 신중하게 고려해 처신한 분별력 등은 남겨 놓고 싶어서 제가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당시 서용빈 팬들이 이승엽의 사퇴를 많이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