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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오늘,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던 중증의 근육병 장애인이 아무도 없는 사이 인공호흡기가 고장 나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오지석, 서른두 살의 청년이었다.
근육병은 신체의 모든 근육이 위축되거나 가성비대로 근력이 약화하여 점차 신체를 스스로 가누지 못하게 되는 진행성 질환이다. 결국에는 심장근육과 호흡근육까지 질환이 진행되면서 인공호흡기를 사용해야만 한다. 오 씨는 호흡기 없인 5분도 숨쉬기 어려웠던 최중증의 근육병 장애인으로 모든 일상생활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로 그는 최중증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활동보조 시간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복지부에서 받았던 활동지원서비스는 한 달에 고작 118시간. 여기에 서울시 추가 지원 100시간, 송파구에서 60시간을 받아 한 달에 총 278시간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는 하루 9시간가량 이용할 수 있는 양이다. 나머지 시간엔 그의 어머니가 오 씨를 온전히 돌봐야 했다.
그가 사고를 당한 것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4월 16일, 어머니와 함께 살던 송파구 장지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였다. 오 씨가 외출에서 돌아온 30분 뒤인 오후 5시, 그의 어머니가 어깨통증 치료를 위해 집 앞 병원에 갔다. 오 씨와 함께 외출에서 돌아온 활동보조인은 평소처럼 그가 침대에 누워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설치한 뒤 5시 10분에 퇴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분 뒤, 자신의 몸에 이상을 감지한 오 씨가 어머니와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의 말은 “호흡기가….” 곧이어 누나의 전화 너머로 인공호흡기기의 경보음이 울렸다. 누나는 황급히 119에 전화했다. 그러나 의식불명에 빠진 47일만인 6월 1일 새벽, 오 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 오지석, 호흡기 장애인 자조 모임 만들어 ‘함께 사는 세상’ 꿈꿔
오 씨는 근육병으로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근육병으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의 신체에 맞는 침대형 휠체어가 없어 20대 후반까지 계속 집에만 있었다. 병원에 가는 날이 유일한 외출 날이었고, 그 땐 병원에 전화해 구급차를 타고 가야 했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그의 세상 전부였다. 그러던 중 그와 같은 근육병 장애가 있는 친구가 그에게 침대형 휠체어를 선물하면서 2012년, 그는 세상에 나왔다.
오 씨가 죽은 지 1년, 그와 함께했던 동료들은 그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고 오지석 씨 1주기를 맞이하여 그를 추모하기 위해 1일 보신각에서 열린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권리 쟁취를 위한 집중 결의대회’에서 만난 그의 생전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민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동료지원팀장은 그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다. 남 팀장이 오 씨를 처음 만났던 2011년, 그는 환자복을 입은 채 집에 누워 있었다. 그때의 오 씨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삶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남 팀장은 회상했다.
그러나 세상에 나오면서 오 씨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가 부딪힌 세상은 장애인에 대해 극히 차별적이었다. 그럼에도 오 씨는 현재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전 농구선수 박승일 씨를 보며 삶의 희망을 가졌고, 자신에게 침대형 휠체어를 선물한 친구를 통해 “자신도 도움받은 만큼 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길” 다짐했다. 그래서 호흡기 근육병 장애인들의 자조 모임 ‘날으는 코끼리’를 만들어 그처럼 호흡기를 사용하는 중증장애인을 만나 함께 사는 삶을 도모했다.
김정훈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국장은 “사고가 있기 전에도 호흡기가 종종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 지석은 어머니가 늦게 오는 것에 대해 특히 많이 불안해했다. (살아생전) 그러한 일상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나눴다.”고 아픈 마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오 씨는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사회가 있다는 걸 깨닫고 자기 권리를 찾고 싶어 했다”면서 “사회에 나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고민하고 도전하며 이뤄나갔던 친구였다”고 김 국장은 오 씨를 기억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말한다. 그는 그저 평범한 한 청년이길 바랐다고. 여자연예인을 좋아하고 그들의 콘서트를 가고 싶어 했으며, 특히 연애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솔로대첩’에 나갔고, 연예인 팬미팅을 쫓아다니며 그가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직접 갔다. 그의 친구들이 기억하는 모습은 그렇게 ‘발칙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상을 소망했던 그는 너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호흡기가 고장 났을 때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 오지석 사망했지만… 중증 근육병 장애인의 현실 ‘변하지 않아’
오 씨가 죽은 지 1년, 그와 같은 근육장애가 있는 이들의 삶은 조금 나아졌을까. 이날 집회 현장에서 만난 다른 근육병 장애인들은 여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입을 모았다.
중증 근육병 장애인 조준석 씨(33세)도 하루 9시간가량밖에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 씨의 사고가 있기 전과 다르지 않다. 그는 근육병이 악화하면서 25살 때부터 호흡기를 착용했다. 현재는 호흡기 없인 2시간가량밖에 버티지 못한다. 그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전동휠체어의 컨트롤러를 조종할 수 있는 오른손가락 정도다.
그러나 그 역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로 최중증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서비스 최대치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 달 280시간, 이마저도 서울시와 은평구의 추가지원을 합한 시간이다.
그래서 활동보조인도, 어머니도 없이 그 혼자 있는 시간은 ‘불안’ 그 자체다. 하지만 그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인 그의 어머니도 나이가 들면서 어깨가 아파 그를 잘 돌보기 힘들다. 그 누구도 없는 ‘공포의 시간’을 조 씨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 감수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한국근육장애인협회 이사로 있는 이재익 씨(45세) 또한 오지석 씨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 씨는 현재 복지부로부터 392시간, 인천시로부터 80시간을 받고 있다. 하루에 15시간가량 이용할 수 있는 양이다. 나머지 시간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돌봐야 하지만 그의 어머니 연세는 75세. 어머니가 그를 돌보기보다 서로 돌봄이 필요한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 상태다.
그는 근육병으로 중학교까지만 학교에 다닌 뒤 도와줄 사람이 없어 20살까지 집에 갇혀 살았다. 그 또한 현재 인공호흡기가 필요한 중증의 근육장애인이지만 인공호흡기는 휴대하기가 힘들어 짧은 외출 시엔 잘 챙기지 않는다. 호흡기 없인 12시간 정도 ‘버틸 수 있다.’ 그는 “좀 힘들긴 하지만 버티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는 활동지원 시간이 부족해도 추가로 돈을 주고 이용하기 힘들다. 그래서 “시간이 부족해도 그에 맞춰 써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오 씨가 사고를 당하던 4월 16일, 그 다음 날엔 고 송국현 씨의 죽음이 있었다. 송 씨는 장애 3급이라는 이유로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 홀로 있던 시각에 발생한 불을 피하지 못하고 숨졌다. 시설에서 나온 지 6개월 만에 일어난 참사였다.
그 뒤 장애인계의 거센 요구로 일명 ‘송국현·오지석 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장애인활동지원 신청 자격 제한을 폐지하고 최중증장애인에게 하루 24시간의 활동지원을 보장하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장애인활동지원법」 개정안은 6개월째 여전히 국회에 표류 중이다.
이날 결의대회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시설에선 ‘장애인을 보호한다’며 재활교사들이 3교대로 돌아가면서 밤에도 지킨다. 그들의 용어대로라면 ‘우리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보조가 24시간 필요한 것 아닌가”라면서 “활동보조 24시간은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