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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PBC 라디오 <김혜영의 뉴스공감>
○ 진행 : 김혜영 앵커
○ 출연 : 강우일 주교 / 前 제주교구장
(주요 발언)
"尹 추념사, 정부 차원 행정적인 말 안타까워"
"아픔과 희생 공감하는 내용이면 좋았을 것"
"4‧3 정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추구"
"4‧3 이름 없어, 성격 정리 고민해야"
"4‧3 치유, 알리고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
"미국 책임 있어…유감 또는 사과 표명해야"
"4‧3 왜곡과 폄훼, 적대감의 포로가 되었나?"
"전두환 손자 전우원의 사과, 놀랍고 감동"
"부끄러운 역사 참회하는 사람 있어 희망"
제주에서는 4월 3일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이 한날 한시에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만 1만 4천여 명. 70년이 넘게 흘렀지만 진상규명은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한과 눈물로 점철됐던 아픈 역사를 세상에 알리고 진상과 책임 규명을 호소해온 성직자가 있습니다. 바로 제주교구장을 지내신 강우일 주교님입니다. 오늘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도 참석을 하셨다고 하네요. 강우일 주교님 전화로 만나보겠습니다.
▷강우일 주교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은퇴하신 지 어느덧 2년이 넘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제주 공기 좋은 데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찾아뵙기도 하실 것 같은데요.
▶네, 방문객들 제가 이제 뭐 책임이 없으니까 시간 제한 없이 잘 기쁘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에 열린 제주 4.3 추념식에 참석을 하신 거죠?
▶네, 다녀왔습니다.
▷올해 추념식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못하다가 작년에는 아주 제한된 숫자밖에 참석을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제한 없이 유가족과 관계자들이 1만여 명 넘게 오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씨는 매우 좋았고요. 그러나 파란 하늘인데 바람이 아주 차서 참석자들 모두 아주 떨면서 참석했습니다.
▷저도 유튜브로 영상을 보니까 바람이 많이 불었던 것 같더라고요.
▶네.
▷윤석열 대통령이 오늘 추념식에 불참했습니다. 취임 후 첫 추념식이었는데 한미정상회담이나 미국 방문 준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한덕수 총리가 추념사를 대신 낭독했는데 어떻게 보셨습니까?
▶글쎄요. 추념사를 정부의 대표자로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그런 형식이 되나 생각을 했습니다만, 좀 더 희생 당하신 분들 또 유가족들의 아픔과 오늘날까지의 희생을 좀 더 깊이 공감하는 그런 내용이었으면 좀 더 좋지 않았겠나. 그런데 정부 차원의 행정적인 쪽으로 말씀이 이어져서 저로서는 좀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제주에서 4.3이 일어난 지 7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4.3을 잘 모르는 국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4.3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게 굉장히 복잡한 사건이라고 할까, 역사인데 간단히 말씀드려보면 해방 후에 1945년에 우리가 해방되고 나서 미군정이 3년 가깝게 지속이 되면서 미군정 치하에서 여러 가지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제주도민들이 1947년 3월달에 3.1절을 기념해 전무후무한 제주도민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3.1절 기념식을 제주 시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했는데 그때의 말하자면 왜 이렇게 많이 모였는가 하니, 너무 생활고도 그렇고 먹고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이 안 되고 일자리도 없고 그러면서 식량은 부족하고 그러면서 이제 해방 후에 우리나라가 독립된 새로운 한 나라로 발돋움할 것으로 기대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미군정 치하에서 남북 분단 상황이 전개되면서 남한만 따로 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한다고 하니까 그런 데에 대한 정신적인 실망감,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해서 1947년 3월 1일에 엄청난 인원들이 모였고 거기에 대해서 경찰이 빨리 해산을 시키려고 하는 무리한 해산 작전에 사람들이 6명이 죽습니다. 6명이 총탄에 쓰러지면서 제주도민 전체가 그것으로 인해서 아주 격분하게 됐고, 총파업에 들어갔고, 그러면서 전체적인 탄압 정국이 형성이 되고, 그 탄압 정국에서 사람들이 끌려가서 고문치사가 벌어지고. 그런 데에 대한 저항이 이제 확대되고, 그 저항이 일어나니까 거기에 대해서 미군정은 아주 강경한 군사작전으로 임했고, 그래서 결국은 도민의 10%가 넘는 3만여 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아주 전무후무한 비극이 제주도에서 벌어진 것이죠. 그 중에는 노약자, 어린 애들 정말 엄청 많이 희생이 됐고요. 그래서 집집마다 정말 연관이 안 되는 집이 없을 정도로 많은 도민들이 여기에 희생되었습니다.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4.3을 관통하는 정신은 뭐라고 보십니까?
▶제가 이렇게 제주에 와서 4.3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우리가 우리 민족이 조선왕조 치하에서 19세기 중반부터 굉장히 어렵게 살면서 참다 참다가 동학농민전쟁이라는 게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대한 동학농민전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과 권리, 평등 이런 것을 추구하면서 참다 참다 민중이 다 봉기를 한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런 국민들의 심성이라고 할까, 정신이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면서 3.1운동을 통해서 비슷하게 벌어지기 시작을 했었고, 그것이 3.1운동, 그러니까 우리 민족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수탈해가고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상황에서 일본 제국을 향해서 봉기를 전국에서 모든 시민들이 다 나와서 만세를 벌일 정도로 아주 대중적인 독립운동이었죠. 그런 정신의 맥을 이어서 해방 후에는 우리의 나라를 세우리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남북이 이렇게 강대국에 의해서 분단이 되어버리니까 거기에 대한 너무나 좌절감과 실망감이 작용을 했었고 그러면서 미군정에 대해서 또 이어서 그 정책을 이어받은 이승만 정부에 대해서도 제주도민들이 저항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볼 때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과 권리와 생명의 소중함을 찾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그런 맥락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생명의 존엄성, 권리의 소중함, 자주독립, 이런 정신을 꼽아주셨는데요. 4.3에 아직 정식 이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건이라는 분도 있고 항쟁이라는 분도 있습니다. 주교님 어떻게 부르십니까?
▶저도 이걸 뭐라고 하기가 그래서 그냥 오늘날까지도 4.3 뒤에 아무런 명사를 붙이지 않고 4.3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근데 어떤 분들은 ‘4.3이 통일운동의 한 맥락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그래서 스펙트럼이 다양한데, 이걸 뭐라고 성격을 정리를 할 지 좀 더 우리가 많이 고민을 해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4.3 진상규명이 계속 진행 중인 것 같아요. 재심을 청구해서 최근에 무죄판결 받은 분들이 적지 않으시더라고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그동안 4.3 때 직접 희생 당한 분들, 목숨을 잃은 분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만 그 때 연행돼서 육지의 여러 형무소에 분산 수용된 분들이 2500여 명 계십니다. 그 분들 중에 상당수는 다 세상을 떠났고, 살아계신 분들이 한 30여 명 계시는 것 같은데 그분들이 이제 법원에 재심 청구를 해서 무죄판결을 받으셨고요. 그 이외에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4.3의 피해자들이 이렇게 계셔서 그분들이 지금까지는 두려워서 트라우마 때문에 말을 못하고 계신 분들이 더러 계시다가 그런 분들이 이제 4.3에 대해서 4.3특별법도 제정되면서 배상도 받고 보상도 받고 그런 분위기가 되니까 안심하고 ‘나도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하면서 제소를 하는 분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좀 더 그런 분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대부분 다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조금은 아직도 살아계신 분들 중에 과거에 이렇게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을 하셨다거나 그런 분들이 계시니까 아직도 아마 소수이지만 대부분은 다 무죄판결을 받으셨는데 조금은 더 소송을 제기하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생자와 유가족들,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뭐라고 보세요?
▶사실 지금까지 저도 제주에 내려와서 제일 놀란 것이 4.3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성인들, 그러니까 지금 40~50대 이상 되는 분들에게 4.3에 대해서 경험한 것 있으면 얘기를 해달라고 제가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건네도 대부분의 분들이 부모님한테서, 직접 겪은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 직접 겪은 부모로부터 들은 것이 없는지 제가 많이 물어보고 대화를 나눠봤습니다만 대부분의 중장년 분들이 몰라요 잘. 왜 그런가 자꾸 들어보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못 들었답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그걸 겪은 분들이 너무나 끔찍하고 너무나 두렵고 그래서 그런 아주 참극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외 없이 겪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자식들한테도 입을 열지를 못했던 겁니다.
▷ 얼마나 상처가 됐으면요.
▶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50년 넘게 이 4.3에 대해서 국가가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금했고 그래서 그분들이 몇 십 년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알리고 기억을 하고 민족 전체, 우리 민족이 4.3에 대해서 좀 더 알고 기억하고 그래서 그분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럴 때 이제 치유가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교구장 시절에 교구 산하에 4.3 관련 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시고 제주의 아픈 역사를 보듬는데 힘쓰셨습니다. 가톨릭교회 차원의 이런 노력이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보세요?
▶네, 교회가 이렇게 교회 바깥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저는 굉장히 우리 신앙의 아주 핵심적인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당신도 관심을 가지시고 거기에 동참하는 그런 삶을 사시기 위해서 그것이 천주강생 또는 우리가 육화라고 얘기하는데, 육화의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힘들고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시고 그들을 거기에서 구원해내시는 하느님이니까 그런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당연히 함께 고통과 우리 시대 아니면 우리 전 시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구체적인 증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교회로서 당연히 제주교구라는 지역교회는 제주의 도민들이 겪은 정말 끔찍한 아픔의 세월을 함께하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 교회로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에 UN에서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4.3과 관련해서 특별 연설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미국의 책임 있는 입장을 표명을 촉구하셨는데 지금도 같은 입장이신 거죠?
▶네,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 4.3이 일어난 것은 미군정 치하에서 1945년에서부터 1948년 미군정이 우리 한반도 남한을 다스렸고 그 리더십 하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이거든요. 여러 가지 미국에도 역사 기록 보관하는 보관소에 그런 기록들이 미군정에서 4.3에 관여한 그런 기록들이 나오고 있고 그래서 미국의 책임이 있죠. 그래서 그것을 미국 정책 담당자들도 그 사실을 대부분이 몰라요, 미국 사람들도.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나고 하니까. 그래서 그것을 알리고 미국 사람들도 미국 정부도 이런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확인한다면 아마 유감 표명, 사과 표명이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허위사실로 제주 4.3을 폄훼하거나 왜곡 발언을 하는 경우를 아직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4.3 특별법에 처벌 규정을 마련해야 된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망언을 하는 사람들한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글쎄요. 법적인 것은 법적인 것으로 대응을 해야 하겠고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3이 시작되었을 때 그때 결국 그 전에는 모두가 우리가 한 민족이고 한 혈족이고 다 같은 식구이고 그랬었는데, 4.3 이후 4.3과 연결된 여순 사건 이후에 온 나라가 완전히 두 쪽이 정신적으로, 땅으로 분단이 된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분단이 돼서 서로를 적대시하고 대결 구도 속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그게 아주 우리 뼈 속에 사무친 것 같아요. 그거는 우리가 극복을 해야 되지 않느냐.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과 미국의 분단, 우리에게 분단을 가져온 소련과 미국의 냉전구도 속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덮어 씌워져서 이런 일이 벌어졌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좀 뛰어넘어야 되지 않겠는가.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마지막 날 명동성당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집전해주셨습니다. 그 때 강론 말씀에서 제가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이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해야 된다’ 하는 그 복음을 읽은 후에 교종께서 우리한테 말씀해 주시기를 ‘여러분들은 같은 민족 아닙니까? 같은 피를 타고 나지 않았습니까?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끊임 없이 그런 적대감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까? 이제는 장애를 뛰어 넘고 대화하십시오. 만나십시오.’ 그런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4.3을 폄훼하는 사람들에게도 저는 똑같은 그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완전히 다른 사안이긴 합니다만, 지난주에 전두환 씨의 손자 전우원 씨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손자의 자격으로 5.18 유족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이 장면은 어떻게 보셨는지도 궁금해요.
▶아주 참, 어떻게 그런 한 가족의 직접 자기 할아버지 일인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저도 굉장히 놀랍게 느껴졌고.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런 결심을 하고 와서 광주에 가서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하고 하는 장면이 참 저에게도 아주 감동적으로 다가왔고. 우리 역사가 여러 가지 참 부끄러운 역사가 있지만 이런 참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는가 자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며칠 있으면 주님부활대축일입니다. 평화방송 청취자들한테 미리 부활 인사를 해주실 수 있을지?
▶오늘 벌써 성주간에 들어갔는데, 이제 며칠 후에 다가올 예수님의 부활대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직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서 미얀마의 고통 받는 이들, 여러 가지 우리 가슴을 옥죄이는 현실들이 많지만 그래도 모든 그 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또 역사를 주도하시기 때문에 주님께 우리는 희망을 두고 이 비극을 인내와 희망을 가지고 극복해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고 너무 우리가 좌절하지 말고, 봄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 저는 숲을 거닐면서 말라 비틀어진 가지에서 아주 연하디 연한 연두색 새싹이 돋아나는 걸 보고 감탄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식물들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도 그런 일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믿고 저는 희망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메시지 전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주 4.3 75주년 맞아서 제주교구장을 지내신 강우일 주교님 만나봤습니다. 주교님 건강하시고요.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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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