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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살전 2:1-12
○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모범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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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명규목사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사회에 기독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교회가 몇 만개나 되고, 교인이 천 이백 만 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 사회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마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악해졌습니까? 김대중 정권이 출범 때 국회의원 1/3이 기독교인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부정과 부패가 심한 때가 지금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기독교인구 10%였을 때 로마의 문화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이런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스스로를 냉정하게 비추어 보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가 올 세상에는 과학 문명은 더욱 더 발달할 것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시대가 올지 모르겠어요. 이제 인간은 줄기세포의 발견으로 여러 가지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들이 열리고, 게놈 프로젝트 덕분에 120살 수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학 문명이 발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위기의 사회입니다. GNP가 올라갈수록 이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욕의 종이 되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 정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벌어질 것입니다. 모든 사회 전문가들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점점 살기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되기보다는 위기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날로 흉폭화되고 있고, 범죄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기는 좋아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단적인 예로 오늘날 청소년 범죄가 얼마나 늘어나고 있습니까? 1970년대에는 성인과 청소년의 범죄 비율이 9:1이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도에 들어서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청소년의 범죄가 성인들의 범죄를 앞질렀어요. 몇 일전 M.B.C T.V프로그램중 PD수첩에서 초등학생들의 성폭력이 심각하다는 것을 집중 보도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 술 담배, 마약 그리고 폭행, 임신, 강간, 강도, 자살, 이런 것들이 오늘날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범죄입니다. 청소년의 비행이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 넣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우리 사회를 장차 짊어지고 갈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자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사회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라고 정의하기보다 점점 위기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위기로 치닫는 이 사회를 누가 변화시키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당신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더 강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사야 60:1절 말씀처럼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절대 그냥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아침에 읽은 본문은 이방의 도시요, 우상의 도시였던 데살로니가를 바울과 그 팀들이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죄악이 팽배했던 우상의 도시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 오늘의 본문은 자세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위기의 사회를 변화시키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이 도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할 때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복음송 작곡가인 최용덕 씨가 이런 찬송을 지었습니다.
다 같이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1.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져가고
온 거리마다 넘쳐나는 죄악의 물결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오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2. 사람들은 참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어둠의 길을 방황하며 소리지르네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오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3. 어느 누가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으랴
하나님 없는 저들에겐 오직 죽음뿐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오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찬송만 한다고 세상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만 있다고 세상이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1.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6)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의 일행들의 삶의 동기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을 동기는 무엇 이였습니까?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것 이였습니다.
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가슴에 항상 올바른 동기를 품고 살아야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겉모습을 봅니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외모를 치장하는데 열심을 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모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겉모습으로 인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을 보았습니까? 우리는 늘 겉모습을 좋아하지만,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겉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올바른 동기를 가질 때 내 주위의 사람들, 내 자녀들, 내 남편, 내 아내는 비로소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삶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삶의 동기와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겉은 화려하지만 그 마음에 동기가 불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겉으로는 웃음을 띄지만, 속으로는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 겉으로는 우리에게 좋은 말을 내뱉지만, 속으로 저주를 품고 있는 사람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가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 마음에 동기가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그 팀이 우상의 도시 데살로니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생활하고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올바른 사람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데살로니가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생활하니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奸詐)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마음의 동기를 설명하는데 간사도 아니요, 부정도 아니요, 궤계가 그 마음에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5절과 6절에서 이 세 단어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시느니라"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간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간사와 아첨의 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를 유혹시키는 과장된 말, 포장된 자세를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위를 보세요. 웃음을 띄우면서, 멋있는 자세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멋있는 자세로 남편과 아내 노릇을 하고, 목사와 교사 노릇을 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에 간사가 있는 거예요. 자신의 유익을 위해 늘 포장된 말을 합니다. 말을 부풀립니다. 말을 바꿉니다. 고린도후서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도 바울은 얘기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 마음에 이런 간사, 아첨의 말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이란 말을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5절에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죠? 욕심이 있기 때문에 부정을 저질러요. 왜 비리가 생깁니까? 돈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적인 부정을 저지르죠? 성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이 탐심의 탈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궤계란 전술, 전략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6절에서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6절을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하니 술수를 쓰고 전략을 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 마음에 동기를 올바르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하듯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그리스도께하듯 성실하게 일하고, 교회에 나와서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하던지, 무슨 봉사나 일을 하던지,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그 마음의 동기가 올바른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 주위의 사람은 변하고, 우리 사회는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에 들어갔고, 그 결과 이 우상의 도시, 죄악의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난 변화를 맞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사람이 몰라줘도 괜찮아요. 교회에서 봉사할 때, 가정에서 일을 할 때, 사업을 할 때, 사람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이 사회는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앞으로 위기의 사회가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죄악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통해, 수많은 다른 것들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변화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의 온전한 보혈로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올바른 동기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동기뿐 아니라)
2.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7-12)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그들을 대할 때 두 가지 태도로 대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10절 말씀과 1:6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삶이 본이 되었고,
둘째, 7절에서는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고, 11절에서는 아비가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7절 봅시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유모'라는 말은 여기서는 어머니란 뜻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닌데 어떤 어머니인가?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를 둔 어머니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제일 강할 때가 언제인줄 아세요? 아기를 금방 낳은 어머니입니다. 그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자신의 생명을 다해 아이를 보호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을 때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갓난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그 아기를 기름과 같은 태도로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11절에서는 아버지처럼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 당시 로마 사람에게 아버지는 교육을 책임졌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교육했어요. 어떻게 교육했는가에 대해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권면하고' 이 말은 격려했다는 말입니다.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것은 뭡니까? 독려하는 거예요. 경계한다고 해서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격려하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어떤 태도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중요한 핵심은 8절에 나타나 있는데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무엇까지 주기를 즐겨하였다고 하였습니까?
목숨까지. 왜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았고,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점이 무엇인 줄 압니까?
왜 우리 주의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요점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죠. 목숨을 주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요새 부모도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요. 목숨을 주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워요. 심리학자들의 일관된 증언은 "사람은 결코 기술로 변화되지 않는다. 오직 사랑으로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 심리학자들의 결론이에요. 오늘날 우리 주위에 기술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요.
여러분, 씨랜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유치원생 23명이 수련회를 가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다가 그 날 아침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가운데 18명이 한 방에서 죽었습니다. 그 18명이 전부 창가에 모여 소복이 새까맣게 타 죽었습니다. 무슨 얘기예요? 그 아이들이 문을 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창문으로 나가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창가로 모여서 그 창문 앞에 소복이 모여 타 죽었던 것입니다.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자다가 연기가 나고 뜨거워 일어나 깼습니다. 방문을 열려고 했는데 교사들이 밖에서 문을 다 잠가놨어요. 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창문으로 나가면 살겠다는 것을 알고, 발버둥치며 창문 앞에 모여 얼마나 부모를 외쳐대며 불렀겠습니까? 그러다가 그들은 모다 타 죽었습니다. 그 때 교사들은 무엇을 했나요? 새벽 1시에 모여서 소주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신문 기자는 얘기합니다. 교사 1명만이라도 그들과 같이 잤더라면, 그 방에만 있어 주었더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사랑이 없는 교육,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킵니까?
우리의 태도입니다.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사랑하는 삶을 살면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은 주님께서 섬김의 본이 되는 모습과 사랑 때문 이였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죄책감과 실패와 좌절과 낙심에 빠져 절망 중에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찾아와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변화되어 역사를 바꾸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 가운데 한 분이 지으신 찬송 가사를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373장.
"1.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뿐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위해 저희들 오래 참고 있었네
2.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3.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왜 우상을 섬기는지 아십니까? 사랑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4.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저희 소리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 되기 위해서는
첫째,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3. 올바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4)
바울과 그의 일행들은 데살로니가도시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았고, 부모의 심정으로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개인적인 삶의 능력이 아니라 이런 삶을 가진 사람이 전한 복음의 능력 때문 이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살고,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산다 할찌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이 궁극적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그의 일행들은 능욕을 당하고 많은 싸움 중에라도 복음을 전하였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불리 웠던 [장기려] 박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위로 전도를 해요? 생활로 전도를 한다구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입술로도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분은 슈바이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성자처럼 사는 분인데도 생활로만 전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입술로도 전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의 생활을 보고 예수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극히 드뭅니다. 생활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균형이 필요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결정적으로 내 입술을 열어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교회성장학자 [엘머 타운즈] 박사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처음에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유형별로 연구했습니다. ‘친구나 친지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86%)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조직적 복음전도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6%), ‘목회자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6%), ‘광고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2%) 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친구나 친지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선배, 부모, 배우자, 형제, 친척 등 가족의 권유로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이 86%나 됐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 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전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미련한 것입니다.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좀 믿으시죠." 하면 '뭐 이런 이상한 놈이 다 있나. 재수 없게 시리...' 이런 눈으로 쳐다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전도는 너무나 어리석은 방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예수를 믿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련해 보이는 이 전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선교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할만한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전도입니다.
27살 때에 선교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중국으로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중국으
로 건너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 있는 한반도에 사는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민족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 싣고서 대동강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그 때는 대원군이 한참 쇄국 정책을 펴고, 카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을 전해 주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 우리 관군들의 공격에 의해 배가 불타게 되고, 그는 강변으로 끌려 내려 칼날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하는 그 순간에 그는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던져 주며 "이것을 읽어보시오."라고 소리치고는 죽었습니다. 그를 칼로 친 사람이 그 성경을 주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읽고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피가 그 강변에 흘렀기에 그 피 값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게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이 땅에 와 쏟은 수많은 벽안의 선교사들의 피와 땀을 먹고 우리의 생명은 싹텄고, 한국교회라는 나무는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기초하고 있는 이 희생의 반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빚진 감정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희생 없이는 생명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희생 없이는 지옥으로 가던 영혼이 천국으로 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희생하셨는데 어떻게 희생 없이 전도가 되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희생!!
우리 모두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매우 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만 구원을 누리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는 잃은 양들을 찾아서 하나님의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심정을 알면서도 어떻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무런 희생과 노력 없이 내 이웃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희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썩어 문드러진 한국 사회가 치료되어 건강한 나라로 거듭나기를 기대 할 수 있을까요? 희생 없이 과연 이러한 일들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희생 없이는 생명도 변화도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예전에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쓴 『Why not the best?』(왜 최선 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글을 읽고 깊은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자기 교회의 전도집회를 10년 동안 참가했었다고 합니다. 매년마다 전도집회가 열렸는데 매년마다 14가정을 꼭 책임지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0 년 동안 그 전도집회에 참석했으니까 140가정을 전도한 것입니다. 매우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 믿은 사람도 있다.'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66년도에 주지사로 출마를 하여 선거운동을 하였는데, 3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주지사에 당선된 뒤 그의 마음에는 부끄러운 가책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3개월에 30만 명을 만나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14 년 동안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니... 이것은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카터 전 대통령이 느낀 가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가책을 받아야할 부분은 없을까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붓고, 없는 시간도 억지로 라도 만들고, 돈도 아낌없이 쓰며 전력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은 양, 기회 놓치면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는 시간도 별로 안 드리고, 돈도 안 쓰려고 하고 관심도 별로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한 희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사랑이라는 나무는 희생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 올바른 동기-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기를 가지고 살 때 가능합니다.
둘째, 올바른 태도,- 본이 되는 태도,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 때 가능합니다.
셋째, 이런 동기와 태도를 가지고 올바른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되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