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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보다미아와 사사 옷니엘
삿 3:7-11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삿 3:7=11 / [사사 옷니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지켜 보고 계시는데도 못된 짓만을 일삼았다. 자기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 여호와가 살아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가나안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8)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을 보시고 무척 진노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을 다스리고 있는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겨 버리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8년 동안이나 구산 리사다임에게 짓눌려 살 수밖에 없었다. 9)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짓눌려 살면서 견디다못해 여호와께 살려 달라고 울부짖자 여호와께서 그들을 건져내시려고 해방자 한 사람을 세우셨다. 그는 바로 갈렙의 막내 아우이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었다. 10) 여호와의 기운이 옷니엘을 휘감자 그는 이스라엘을 이끄는 사사가 되어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을 다스리는 구산 리사다임과 싸우러 나갔다.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붙이셨으므로 옷니엘이 그를 내리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11) 그 후 그나스의 아들인 사사 옷니엘이 숨을 거두기까지 그 땅에 40년 동안 평화가 깃들였다.
우상 숭배에는 인간이 원하는 모든 쾌락이 담겨 있습니다. 쾌락과 경제적인 이득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는 것이 당시의 우상 숭배였습니다.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7-9)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기 시작하던 바알은 남성신으로 비를 주관하는 신이고,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성신이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하늘에서 성적인 결합을 하면 비와 풍요가 만나서 농사가 풍년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제때 비가 내리도록 바알과 아세라가 합방할 수 있게 부추기기 위해 신전을 찾아가 사제들과 음란한 행위를 합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가정이 깨어집니다. 자녀를 낳아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 나중에 몰렉이라는 새로운 우상에게 자녀를 불에 태워서 제물로 바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쾌락을 쫓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메소보다미아의 구산리사다임 왕의 지배를 8년 동안 받게 됩니다(8).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살기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따라갔는데 오히려 8년간이나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된 종살이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10-11) 구산 리사다임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구산은 지역 이름이고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한 자라는 별명입니다. 그렇기에 구산 리사다임의 뜻은 구산에 사는 두 배로 악한 자라는 뜻입니다. 짧은 본문에 구산 리사다임이 4번이나 반복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겪고 있는 고통이 이전보다 두 배는 더 힘든 상황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옷니엘이 메소보다미아 군대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여호와의 영이 옷니엘 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10).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이 붙잡으시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후 웃니엘은 평온한 가운데 죽을 수 있었습니다.
적용: 압제는 8년이었지만 하나님의 복은 40년이었습니다. 옷니엘처럼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서 고난을 넘어선 복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6학년을 담임하던 시절 옆 반에서 한 남학생을 몇 명의 아이들이 왕따를 시키고 심하게 괴롭힌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유명한 대학 역도부 활동을 했다는 건장한 아빠가 교장실에 찾아와서 학교가 발칵 뒤집혀 졌고, 부모와 학생들의 사과와 함께 전원 전학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언덕과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때마다 걸림돌들은 제거해버리고, 모든 산을 함께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이 기회에 아들의 동료로 만들어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도 곁에서 돕겠습니다.’ 분통 터지는 일이었겠지만, 결국 용서하는 방향으로 잘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처벌받게 하고 제거하기에 몰두하면 나의 영성도 망가지기 쉽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장애물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역으로 이용하고 극복하는 기회로 삼았음을 합니다.
< 설 교 >
성령 받은 옷니엘
삿 3장 9~11절 / 피종진목사
사람들은 부여된 신분에 따라 예우를 받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을 받지 않았느냐?’에 따라 그 신분이 크게 달라집니다.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쓸모가 없던 사람도 성령을 받아 크게 쓰임을 받고 그 삶의 가치가 크게 달라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옷니엘은 성령 받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성령을 받은 이후에 메소보다미아 왕도 두려워 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늘의 권세가 주어지므로, 우리는 모두 성령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성령 받은 옷니엘은
첫째, 대적의 손에서 승리로 이끄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삿 3:10)
메소보다미아의 압제를 받던 히브리민족이 어떻게 구산 리사다임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여호와의 신, 즉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많은 대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육체적 질병과 심적인 고통도 대적이 되고, ‘슬픔과 외로움, 불안, 좌절, 염려’도 대적입니다. 그리고 악한 세력도 대적입니다. 성도는 어두움의 권세인 이런 대적들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무기로도 이러한 대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시 20:5) 아멘.
둘째,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삿 3:9) 옷니엘은 많은 사람을 구하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옷니엘 한 사람을 택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①멸망에 처한 영혼을 구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②소외되고 버림받은 영혼을 구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삶에 지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삶에 지친 자들을 도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이 우리 성도들의 일입니다. 절망 속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 복음사역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③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모세나 옷니엘 사사처럼 민족을 구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온 땅에 태평성대를 이루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삿 3:11)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옷니엘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한사람의 성령 충만으로 온 민족이 태평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가정과 교회, 직장, 사업체가 태평해집니다. 성령을 받으면 삶의 목표가 좋은 방향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되는 것도 되게 하시고(슥 4:6), 실패자도 성공자로 바꾸어주십니다. 옷니엘이 받은 성령을 여러분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게 됩니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왕상 5:4)
사랑하는 여러분! 옷니엘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성령을 받은 이후에 대적의 손에서 승리로 이끄는 자가 되었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으며, 온 땅에 태평성대를 이루는 자가 되었습니다. 옷니엘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대적의 손에서 승리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태평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신 옷니엘
삿 3장 9~11절 / 피종진목사
오늘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즉 이방신을 섬긴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나라를 채찍으로 사용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소포타미아를 통해서 8년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 때에 가장 지혜로운 일이 무엇일까요?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 많은 군대를 양성하는 것, 또는 강대국과 함께 손을 잡고 그들과 연합군을 형성해서 대적하는 것, 여러 가지 방법이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즉각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구원자 즉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옷니엘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순간 그는
첫째, 강한 대적의 손에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10절) 옷니엘은 8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그들의 강한 대적 메소포타미아와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그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에게 여호와의 신 즉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마귀의 시험에서도 이겨야 되고, 죄악과 이단의 미혹에서도 이겨야 됩니다.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지면 사탄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죄악, 불신앙의 모든 일들은 신앙인의 대적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러한 대적과 싸워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할 때만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9절) 옷니엘은 무능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함으로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도 구원하고 영혼도 구원하고 백성들의 재산도 보호해주고 대적의 침략을 막아주는 엄청난 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될 뿐만 아니라, 가정과 국가도 보호받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바울, 썬다싱, 무디, 웨슬레, 성 다미안 이런 사람들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전생애를 다 바쳐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성 다미안은 몰로카이섬에 있는 700명의 나환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섬에 들어가 평생을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D.L 무디는 성령 받고 자기가 구원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천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여 100만명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성령을 받고 부패와 타락으로 위기에 처했던 영국을 구원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이미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도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28:19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고 외쳐야 됩니다. 가야 됩니다. 만나야 됩니다. 죽을 영혼을 주 앞으로 이끌어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생명줄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탄의 결박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지옥 갈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11절) 하나님의 신이 임한 옷니엘이 나라를 통치했을 때 그 땅이 40년 동안 태평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는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5:4에 보면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만이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모릅니다. 욥기 8:20에 보면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126:2에도 보면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한 자는 이런 평강이 주께로부터 임할 줄 믿습니다.
넷째, 민족을 위기에서 보호받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옷니엘은 8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기에서 보호받게 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들의 부르짖는 기도는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기 가운데서 보호받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국가의 심장과 같습니다. 심장이 없는 인생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14:34에 보면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의의 길을 선택해야 됩니다. 의를 위해서 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의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삶의 승부를 걸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3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지구촌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신이 임한 옷니엘은 강한 대적의 손에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승리자가 되어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었고, 40년 동안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렸으며, 민족을 위기에서 보호받게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인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나라와 민족을 평안케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순환의 고리끊기
삿 3장 7~14절 / 홍문수목사
송구영신예배 드리면 새해를 맞이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나갑니다. 이제 2005란 숫자에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년 초에 여러 가지 결심을 했는데, 과연 잘 지켜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혹시 흐지부지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남자분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습니다. 며칠은 잘 됐죠. 그러던 어느날 밥을 먹고 나서 무심결에 호주머니를 뒤적거렸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립니다. “아니, 담배가 어디 간 거야? 분명히 여기 넣어두었는데 ... 참 이상하네.” 한참 그러다 번뜩 생각이 났습니다. “아이고, 내가 담배 끊었었지~”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절에 다니던 분이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수개월이 지나 제법 교회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는데, 어느 날 궁금한 게 있어서 교회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마당에 관리집사님이 일을 하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물었습니다. “집사님! 주지 목사님 어디 계세요? 잠시 상담을 하고 싶은데 ... ” 아직 담임목사라는 말에 익숙지 않아 생긴 해프닝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래된 습관을 고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또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루에 성경 3장씩 꼭 읽어야지”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은 꼬박꼬박 읽다가 바쁘고, 잊어버리고, 결국은 창세기 몇 장 읽다가 그만 둡니다. 그래서 창세기 부분만 새까맣게 때가 묻은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왕왕 봅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우리 대부분 비슷한 모습일 겁니다. 종류는 각각 다르지만 신년 초에 했던 결심들이 하나 둘 무너져가고 있을 겁니다. 그 중에는 나쁜 습관을 버리겠다는 결심도 있을 것이고, 혹은 좋은 습관을 만들겠다는 결심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결심들이 하나 둘 식어지고 나면, 우리는 또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발전도 성숙도 없이 그저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나쁜 습관에 질질 끌려 다니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 마디로 ‘악순환’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이 과연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즉시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 살 동안 우리가 감당할 책임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특권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화’(거룩할 聖 + 화할 化)라고 부르죠.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취득하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 과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모습은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워지며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엡4:15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더 풍성한 생명과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요10:10에서 예수님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좋은 습관, 거룩한 습관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로 유명한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거룩한 습관을 들여가는 것이다.” 습관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인격은 곧 우리의 생애를 좌우합니다. 결국 나쁜 죄악의 습관으로 이어진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거룩하고 좋은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갈 때 금년이 그 어느 해보다 더욱 풍성하고 복된 해가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이 복되고 아름다운 생애가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죄악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힘차게 전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사기는 구약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는 책입니다. 사사시대라 함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시대를 가리킵니다.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여호수아 사후부터 왕정 시대 초대왕인 사울 이전까지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사사는 왕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직분입니다. 직역하면 재판관(Judge)이란 뜻인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 및 종교 지도자입니다. 흥미롭게도 사사는 왕처럼 세습되면서 항상 이어졌던 게 아니고, 필요에 따라 하나님이 그때그때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사시대의 특징이 있습니다. 흔히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바알 신 아세라 신 등 우상 신들을 섬기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시대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로 끊임없이 외적의 침략과 지배를 당했습니다. 대개 사사시대를 3백년으로 잡는데, 그중에 무려 1백년 정도 전쟁을 치르며 외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 고난은 사실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사기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죄악의 악순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1] 죄악의 악순환 : 범죄와 징계의 반복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반복하던 악순환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분석해 봅니다.
① 범죄 : 7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의 범죄를 저지릅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정착한 그들은 세속적인 욕망에 눈이 멀었습니다. 이제 하나님보다 가나안의 토속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더 가까이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죄악에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갔습니다.
② 징계 : 범죄한 이스라엘을 오래 지켜보던 하나님은 마침내 진노하십니다. 8절에 기록된 대로 메소보다미아 구산 리사다임 왕을 통해 징계의 채찍을 내리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히브리어 ‘마카르’)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일종의 방임인 셈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 하에서 8년 동안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으시지만, 한편 공의로우셔서 끝까지 참지 않고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선민에게는 그것이 또한 사랑의 다른 방법이기도 합니다. 히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③ 일시적 회개 : 고통 중에 빠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울며 간구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긴 하나님이 옷니엘 사사를 일으킵니다. 옷니엘이 성령(여호와의 신) 충만하여 전쟁에 나가 구산 리사다임을 쳐부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평화가 회복됩니다.(9절~11절) 평화의 시기가 무려 40년 동안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8년이었지만 평화는 40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엿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주고 싶으셨던 것은 평화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회개가 온전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만 면하려는 임시변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닥쳐옵니다.
④ 범죄와 징계의 반복 : 12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 ” 이 구절에서 ‘또’(히브리어 ‘야사프’)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것은 사사시대를 묘사하는 데 반복된 단어입니다. 또, 또, 또 ... 그들은 끊임없이 범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징계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옷니엘 사사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모압 왕 에글론에게 압제를 당하게 됩니다.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 족속까지 모아 연합군을 편성해서 침략합니다.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성)이 함락되고, 그후 18년 동안 압제를 당하게 됩니다. 점점 그 징계의 강도도 심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악순환을 되풀이했습니다. 사사시대는 한 마디로 ‘악순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2] 악순환의 고리 끊기 : 철저한 회개와 새로운 삶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고통을 당하면 일시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로 숨통이 트이면 또다시 그 은혜를 망각하고 범죄하는 악순환을 거듭합니다. 말하자면 악순환의 근본 원인은 일시적인 회개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정말 철저하게 회개하고 새롭게 변화되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거죠.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애굽의 바로왕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내보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는 거절합니다. 그래서 재앙이 시작됩니다. 만일 단번에 순종했으면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앙을 당할 때는 잠시 순종하는 척했다가 상황이 호전되면 또다시 고집을 부리는 식으로 되풀이하면서 10가지 재앙을 다 겪게 됩니다. 정말 멍청하죠? 그런데 우리 중에도 신앙 생활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마늘 도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늘을 훔치다 들켜서 원님에게 끌려갔습니다. 원님은 호통을 치면서 벌을 줍니다. 그런데 그냥 벌을 주지 않고 3가지 중에서 선택하라고 합니다. 마늘 100개 먹기, 곤장 50대 맞기, 벌금 한 냥 내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그대로 벌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 도둑은 돈이 아까우니까 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20개쯤 먹으니까 속이 쓰리고 눈물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곤장을 맞겠다고 말합니다. 곤장을 20대쯤 맞으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벌금 한 냥을 내고 풀려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 빠져나갈 궁리만 하다가 쓸데없는 고통까지 당한 겁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불쌍한 노릇입니다.
우리는 혹시 잘못된 습관에 빠져 있거나, 죄를 범할 때 우물쭈물하거나 꾀를 부리지 맙시다. 그렇게 하면 계속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우리의 삶은 계속 꼬이고 혼란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시라도 잘못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회개가 있을 때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법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회개, 철저한 회개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한 마디로 ‘전인격적 회개’입니다. 인격의 3요소는 지(知), 정(情), 의(意)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회개란 지적인 회개, 정적인 회개, 의지적인 회개를 포함합니다.
① 지적인 회개 : 죄의 고백
회개는 우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적으로 죄를 인식하지 못하면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병의 치료와 비교하며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병자가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건강하다고 고집을 부리면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의사를 찾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의 치료는 ‘병식’(病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와 용서, 그리고 변화는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막2:17 참조)
② 정적인 회개 : 죄에 대한 애통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입술로 시인해도 만일 그 사실을 애통하게 느끼지 못하면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욜2:12~13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 ”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할 때 외적인 표현을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 그런데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마음 속에서 죄를 깊이 뉘우치고 통회할 때 유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 당시 그들은 옷을 찢으면서도 마음 속에서는 무덤덤했습니다. 요엘은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③ 의지적인 회개 : 죄악에서 돌아서 하나님에게 나아감
아무리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회개해도 마지막으로 의지적인 회개가 없으면 철저한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회개의 본질적 의미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를 표현하는 구약 히브리어 ‘슈브’나 신약 헬라어 ‘메타노이아’ 모두 방향전환을 가리킵니다. 180도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역동적인 의미가 내포됩니다. 종합적으로 말씀드리면, 의지적인 회개는 두 단계를 거칩니다. 하나는 죄악에서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Turning from sins to God) 즉 회개는 버림과 취함, 떠남과 향함으로 이뤄집니다. 이것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죄악된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i) 죄악의 습관 버리기 : 일반적으로도 발전을 위해서는 냉정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잘못이나 습관을 얼마나 철저하게 끊어버리느냐가 성숙과 변화의 관건입니다.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의 이야기입니다. 「이건희 개혁 100년」이란 책에서 본 겁니다. 옛날 불량품이 나올 때 이 회장이 공장 마당에 2천명 전 사원을 집합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량품이 나온 모델의 제품들을 몽땅 쌓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산더미처럼 쌓인 제품들은 해머로 때려부수고 불로 태우게 했습니다. 불량품 화형식을 한 겁니다. 그때 맷더미가 된 제품이 시가로 500억원이었다고 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비장한 각오를 했고, 그후 회사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전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철저한 회개는 나 자신의 악한 모습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입니다. 렘23:2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철저하게 악한 모습을 깨뜨려 버리고 불살라 버리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거룩한 파괴’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해 주십니다.
야곱에 20년만에 가나안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딸 디나가 세감 추장 아들에게 강간당하는 무서운 일이 생깁니다. 그러자 오빠들이 몰려가서 거짓으로 세겜 일족에게 결혼을 빙자하여 할례를 받게 합니다. 수술의 고통이 며칠 계속되는 동안 대학살을 감행합니다. 그 소식을 야곱이 듣게 됩니다.
잘못하면 그들의 보복으로 몰살당할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야곱이 집안에 있던 온갖 우상을 버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믿음의 족장이 아직도 품고 있던 죄악을 이제 단호하게 끊은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도우셔서 한 사람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큰 기적이었습니다.
ii) 거룩한 습관 들이기 :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고, 결국은 인생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습관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도 졿은 습관을 가고 사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100세까지 무병장수하려면 생활습관을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의학자들의 연구 결과 건강 문제는 유전적인 요인은 불과 20~30%에 그치고, 생활 습관이 70~80%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습관, 거룩한 습관을 가질 때 예수님을 닮은 인격을 형성하게 되고,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좋은 습관을 새로 만들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반면 허물어지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나쁜 습관은 가만히 있어도 잘만 형성됩니다. 반면 버리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좋은 습관을 들이고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런 예를 생각해 봅니다. 청년들이 군대 갔다 오면 생활이 절도 있게 됩니다. 일찍 일어나고 식사도 제 시간에 하는 등 ... 그런데 제대하고 나면 그게 얼마나 가나요? 본인이 특별한 결단을 하고 잘 관리하지 않으면 한 달도 못 가서 원 위치가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습관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결단이 필요하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결심이나 노력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좋은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도록 도와주시고, 또 그것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코카콜라 창업자 아사 G. 캔들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래 알코올 중독자로 밤낮으로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이 잘 될리 없죠. 주위에서도 권면하고, 본인도 여러 번 금주 선언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 마음 속에 벼락같은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일종의 영음이었겠죠. “너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거절하지 못하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자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남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말을 들은 캔들러는 통회했고, 부부가 서로 손 잡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후 그는 평안을 얻었고,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경건한 습관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기도하는 습관, 충실한 예배 습관, 수입의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는 헌금 습관 등 ... 그후 회사는 번창에 번창을 거듭하여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악순환 속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진정한 회개를 실천해야 됩니다. 작심삼일이라면 매일 매일 결단하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하기에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은 최고의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생애 정말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풍성한 삶이 펼쳐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괴로움을 자초하지 말라
삿 3장 7~14절 / 이수영목사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구약성경의 사사기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고 들어간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정체제를 갖추기 전까지 사이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필요할 때마다 이스라엘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신 이들을 사사라고 합니다.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중 7-11절에서는 그들 사사 중 첫 번째 사람인 옷니엘이 소개되고 있고 12-14절에서는 두 번째 사사인 에훗의 이름은 아직 언급되지 않은 채 그의 등장을 예고하는 정황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7-11절에서도 사사 옷니엘이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9절)이라는 것과, 그가 사사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과 싸워 이겼다는 것과(10절), 그래서 40년 동안 평온한 세월을 살고 죽었다는 것(11절) 외에는 그의 활동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사사의 행적치고는 너무나 간단하게 서술되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게다가 이 옷니엘이 싸워 이긴 상대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대국 메소포타미아의 왕이었습니다. 또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그의 이름의 뜻이 "악하기가 두 배나 되는 구산"이라는 사실이 암시하듯 그는 웬만해서는 상대하기조차 어렵고 더군다나 그를 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0절에서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쓰고 있듯이 정말 오직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기 때문에 이겼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사 옷니엘의 시대에서도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은 오직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강대한 나라 메소포타미아의 포악한 군왕과 맞서 이긴 싸움이라면 이야기거리가 풍성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친 이유는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크고 높게 드러나셔야 할 것임을 무언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첫 사사를 소개하는 이야기치고는 그가 행한 일에 관해서 별로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사 한 사람과 그의 시대의 역사이야기보다는 사사시대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사사시대 내내 반복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장 전형적으로 압축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역사란 배신과 고난과 탄원과 구원이라는 순서의 반복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역사입니다. 본문을 따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것입니다. 악을 행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율법을 어긴 모든 행위 중 가장 나쁜 것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입니다.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나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잊어버릴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 가지고는 택하신 백성의 도리를 다했다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도리는 그를 섬기는 것이고 오직 그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곧 그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바알과 아세라 같은 다른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한 말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그것보다 더 큰 악은 없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억압과 중노동 때문에 신음할 때 그들을 구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기적을 일으키시며 놀라운 은혜 가운데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크고 강한 가나안의 모든 군대를 다 이기게 해주시고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했는데 여기서 "자기들의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 만유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자기들 이스라엘백성에게 그토록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그래서 자기들이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잊어버려서도 안 되는 언약의 하나님이란 뜻이 다 녹아들어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이 그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엉터리 신들, 아니 그저 돌기둥과 나무기둥에 불과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이 다른 신에게 한눈을 팔 때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8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팔았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포악한 이방나라 왕의 손에 넘겨 팔 년 동안 그를 섬기게 함으로써 고난을 당하게 하신 일로 나타났습니다. 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그것도 보통 사람보다 갑절이나 포악한 자가 왕인 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35년간의 일제의 지배를 받아본 우리의 경험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민족의 자존심 같은 건 기본적으로 짓밟히게 되어 있습니다. 제 나라 말도 마음대로 쓰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민족정신의 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일입니다. 제 민족 고유의 이름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일입니다. 군사, 외교, 정치, 경제, 교육 등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지하자원이나 피땀 흘린 농사의 수확도 다 수탈당하고 맙니다.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합니다. 남자들은 어린 학생들까지 다 남의 전쟁터에 끌려나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합니다. 젊은 여자들은 닥치는 대로 끌려가 성노리개로 전락되고 온갖 치욕과 육신의 고통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그러고도 배상이나 사과는 고사하고 사실인정조차 받지 못합니다. 남은 사람들도 강제노역에 동원되거나 툭하면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거나 두들겨 맞거나 협박을 당해 원치 않는 민족의 반역자 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도 그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을 자초한 것입니다.
스스로 초래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백성이 결국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9절의 첫머리 부분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이스라엘이 아무리 묵과할 수 없이 악하고 악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때에는 그 탄원을 외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백성을 이방 압제자에게서 구해낼 인물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평온한 삶을 회복시켜주십니다. 9절 이하를 계속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차례의 쓰라린 역사의 체험을 통해 영원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성실하고 충성된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고 나면 또 다시 과거의 조상들의 전철을 밟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곤 했습니다. 12절 앞부분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이 새롭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면 또 다시 하나님의 진노와 이로 말미암은 괴로움의 역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12절 이후를 계속해서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이스라엘은 새 이방지배자에 의해 또 괴로운 세월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렇게 두고두고 배신과 고난과 탄원과 구원그리고 또 다시 배신이라는 순서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했던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인간의 불신앙적 본성과 끊임없는 배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많은 복을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금방 망각하며, 헛되고 거짓된 것들에게 끊임없이 마음을 빼앗기는 죄악입니다.
둘째는, 이로 말미암는 괴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의로운 고난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함에 따른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이나 백성을 특별한 일에 크게 쓰시려고 일정한 연단을 주시는 일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는 고난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오는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이는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괴로움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초래하는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언제나 평온하고 만사가 형통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외침과 외세의 지배와 그로 인한 괴로움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자초한 일들이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백성의 배신의 죄를 결코 묵과하시지 않으시나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은혜의 구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끝없이 끝없이 범죄하는 백성을 한없이 한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채찍을 드시되 그 채찍으로 인한 상처를 친히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사기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나아가 성경전체의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갖기를 원하신 근본적 관계입니다. 이렇게 사사기는 하나님의 율법과 함께 복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이 본문이 대표하는 사사기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신앙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처럼 언제나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의 은혜를 망각하며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악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며 근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괴로움을 당할 때 먼저 우리 자신의 죄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고 그 안에서 복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용서와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찾을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피난처이시며 방패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고 특별히,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시고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채찍을 들 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의 죄악을 그대로 묵과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필요한 괴로움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과 삶을 최대한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되게 살아야지 쓸데없이 괴로움을 자초하여 낭비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녀를 반드시 용서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회개할 일을 알면서도 일부러 저지르며 살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괴로움을 자초하지 말라", 이것은 바로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은혜의 하나님"과 함께 사사기의 주된 메시지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들 개개인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 민족에게 주시는 공동체적 메시지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괴로움을 드리지 않는 착하고 지혜로운 백성들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안할 때에도 긴장하라
삿 3장 7~11절 / 황광민목사
프르디라는 사람은 역사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지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여러 세기를 가로질러 인생들에게 악의 결과는 나쁘고 선의 결과는 좋다는 중요한 진리를 소리 높여 외친다. 이 우주에는 도덕적 질서가 있으며 그것을 무시하는 자는 화를 자청한다.” 역사를 거울로 삼고 바르게 살아야함을 가르치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구약의 역사문서들은 교훈적 사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는 역사를 심판하십니다. 후세인들은 선인들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사기는 역사가 어느 기본 도식을 따라 반복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범죄를 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영원한 심판도 있지만 땅에서, 역사 속에서 심판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백성들은 평안한 가운데 다시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이 과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책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는 신명기적 사관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신명기에는 악을 행하는 백성에게는 저주를, 선을 행하는 백성에게는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도 반복하는 역사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이방의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메소포타미아 왕에게 붙여 8년간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시고 백성을 구원해 주시고 40년 동안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는 역사의 기본 도식의 전형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평안할 때에도 긴장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라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삿17:6). 그런데 역사는 어두움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은 위험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신앙적 차원에서 윤리적 차원으로 한 단계 추락합니다. 물론 윤리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윤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즉 하나님의 목전에서 성립하는 것이요, 인간관계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어떤 분과 대화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또 다른 어떤 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문제는 윤리적인 것이고 상대방의 문제는 법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윤리적인 문제는 법적으로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상대방의 죄가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는 법적인 죄나 윤리적인 죄나 똑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윤리적인 문제는 사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법적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으면 무시하기 쉽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법적 차원은 물론이거니와 윤리적 차원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법의 저촉문제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단계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진노의 날에는 회개가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고통을 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또는 내부의 혼란으로 인하여 내란이 일어나거나 경제공황을 당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타락하고 부패한 백성들에게는 심판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조심해야 하빈다. 우리나라는 부패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42등이었는데 46등이 되더니 이제는 50등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추측으로 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인터넷상에서 논문장사가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박사논문은 500만 원선, 석사논문은 300만 원선, 학사논문은 50만 원선에서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주일이면 유사한 논문들을 짜깁기해서 논문을 완성해 가져다줍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36년간 식민지 생활도 했습니다. 6.25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를 거울삼아 오늘의 난국을 타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8-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8년간 섬겼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아멘.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살길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18장 8절에서 하나님은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에스겔 18장 30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면 작정되었던 재앙도 돌이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기도는 조용히 할 수도 있습니다. 대화하듯이 속삭이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묵상으로 기도하면서도 진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용한 기도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간절히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성경에도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부르짖어 기도할 때 가장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위해 싸워주신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들을 위해 싸워 주십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옷니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에게 여호와의 신을 부어주시고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다”는 말과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붙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 싸워주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셨다는 증거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또한 이를 체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삼상17:47).
출애굽기 17장에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싸워주신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싸우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패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싸워주심으로 승리한 것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여호와 닛시, 즉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백성을 위해 싸워주시는 관심과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평안할 때에도 긴장하라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여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할 때에도 긴장하라는 하나님의 경계의 말씀입니다. 11-1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땅이 태평한 지 40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평안이 40년간 계속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를 잊고 또 다시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에도 긴장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가 위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돈 생기고 시간이 생기면 나쁜 짓을 합니다. 평안하면 더욱 감사드리고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런 전철을 밟았습니다. 어려울 때에는 기도하다가도 평안하면 해이해집니다. 하나님을 떠나 엉뚱한 길을 찾습니다. 패망의 길 인줄도 모르고 점점 깊이 빠져 버립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삿 3장 7~11절 / 조상호목사
1998년 1월호 뉴스위크의 표지에 <케네디 가문의 저주: 또 다른 무모한 삶과 비극적 죽음>이라는 제목이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 뉴스위크지에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가문에 발생한 또 다른 비극에 대해서 언급되었습니다. 1998년 1월2일에 마이클 케네디가 콜로라도주 에스핀의 스키장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피살과 사고사, 각종 추문으로 얼룩진 케네디 가문의 비극에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사실 마이클 케네디의 죽음은 케네디 집안의 여섯 번째 비극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삼촌인 존 에프 케네디는 대통령이었던 1963년 11월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46세의 나이로 암살되었습니다. 아버지인 로버트 케네디 역시 1968년 6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 선거운동을 하던 중 켈리포니아에서 42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맏형인 조세프 케네디 주니어는 2차 세계 대전 중 29세 때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여동생 캐슬린 역시 28세 때인 194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도 자신이 암살당하기 전에 애디슨병을 포함하여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7개월 전, 막내 동생 테드 케네디는 비행기 사고로 허리를 다쳤습니다. 또한 테드 케네디는 그의 형 로버트 케네디가 살해된 지 12개월 후에 동승했던 여자의 익사사고에 연루되었습니다. 마이클의 형 데이비드 케네디 역시 1984년 플로리다에서 마약 과다 복용으로 숨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 석 달 전, 미숙아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 이틀 만에 숨진 비운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케네디 가문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공통점은 젊은 나이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케네디 가문의 문제가 무엇일까? 계속되고 있는 케네디 가문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케네디 가문의 비극의 원인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가게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메릴린 하키여사입니다. 그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에서, 계속되고 있는 가문의 저주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치유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을 놓고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전달되는가?”라는 논쟁도 벌어졌습니다. 1997년과 1998년 당시 한국의 <빛과 소금>이라는 기독교계통의 잡지에서 이런 주제의 특집 기사를 게재함으로 한국교계에 굉장한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로마서 1절과 2절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크리스챤들에게 죄와 저주가 유전되는가’라는 말하며, 저주는 결코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창세기 8장 21절 하반절에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말씀과 로마서 5장 12절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라.”는 말씀에 따라 죄와 저주는 유전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5~6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논쟁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러한 주장들을 보면서 재 스스로 한 가지 결론은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한 개인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죽은 조상으로부터 찾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조상이 후손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는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 세대에서 종종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정 치료학과 상담 심리학, 그리고 현대 의학에서 입증됩니다. 또한 지나간 역사를 보아도 입증됩니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에 있었던 사사시대를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적이 있는 5절부터 6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그 다음에 1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번에는 4장으로 넘어가서 4장 1절을 보겠습니다.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6장으로 넘어가서 6장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는 단어가 무슨 단어입니까? ‘또’, 영어로 'Again'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후손들은 범죄 한 후에, 또 다시 반복하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앞 세대의 악습이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의 잘못이 후세대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사 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 즉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대의 범죄를 반복하여 답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징계를 가하고,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엎드립니다. 그러면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340년 동안이나 이러한 악순환을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반복되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 악순환의 사슬을 끊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사기의 역사는 악순환의 끊임없는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악순환의 첫 번째 장면입니다. 7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살도록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8절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원래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이름은 ‘두 배나 악하다’는 뜻의 'double wickedness'로서, 그는 대단히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악명 높은 자에게 무려 8년 동안이나 짓밟혀 고통 가운데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 비로소 그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배신하고 떠나갔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세웠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옷니엘입니다. 그는 첫 번째 사사였습니다. 원래 이 사사(士師)라는 말은 영어로 Judge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판단하는 사람’, ‘재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사가 재판관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매우 다양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 비상시국에는 국방부장관으로서 역할을 했고, 평상시에는 정치지도자로서 나라 일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비록 사사는 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왕에 버금가는 나라의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후,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회개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옷니엘이라는 한 사사를 세워주셨습니다. 저는 이 옷니엘이 어떻게 해서, 무슨 이유로 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사람
첫째로 옷니엘은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성경에서 인물을 소개할 때, 일반적으로 ‘누구누구의 아들 아무개’라고 합니다. 3장 15절을 보면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3장 31절에도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옷니엘은 조금 다르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나스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갈렙의 아우’라는 말이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갈렙이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갈렙이란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나이 40세 때, 가데스 바네아에서 민족의 지도자 모세로부터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서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나이 85세가 되었을 때에도 어느 젊은이 못지않은 용기를 가지고, 후에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인 헤브론 산지를 점령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건국 역사의 기둥 같은 인물 입니다. 그는 45년 전의 광야생활 때나, 45년 후 가나안 정착 때나, 40세의 젊은 나이였을 때나, 나이 들어 85세가 되었을 때나,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사람입니다. 또 신명기 1장 36절에서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이라고 언급된 것을 보면,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던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갈렙의 특징을 정리한다면 일관된 믿음과 철저한 순종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사 옷니엘은 바로 그 갈렙의 아우였습니다. 옷니엘을 소개하려면 당연히 형 갈렙을 소개해야 할 만큼 갈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옷니엘은 가나안 정복전쟁의 영웅 갈렙을 형으로 둔, 다시 말하면 믿음의 형을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가문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녀가 어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자녀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자녀들을 결혼을 시킬 때 꼭 배우자만 볼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가정까지 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가정에 입만 열면 “이 놈, 저놈, 이 새끼, 저 새끼”하면서 늘 반말을 쓰고 욕을 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 자녀 역시 부모를 본 받아 반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녀가 갑자기 자기 아빠에게 오더니 “아빠, 진지 드셨어요?”라고 아주 고상한 말을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야, 너 어디서 존댓말을 배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가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야! 나는 농담도 못하니?”라고 말했답니다. 피할 수 없이 자녀들은 부모를 닮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이 있고, 서양에서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Like father, like s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부모 밑에 좋은 자녀가 나옵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요, 탁월한 설교가요, 훌륭한 교육가로서, 프린스톤 대학교 총장이었던 죠나단 에드워드에 대해서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는 가난한 목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역자의 생활은 좀처럼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분주했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만 있으면 밤 시간에 자녀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같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또 새벽 일찍 일어나 촛불을 켜놓고 아내와 자녀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훗날 미국의 역사를 주름잡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죠나단 에드워드가 떠나간 지 200년이 넘었는데, 그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부통령이 1명, 지사가 3명, 사장이 3명, 고급공무원이 80명, 대학총장이 13명, 변호사가 100명, 교수가 65명, 법대 학장이 1명, 판사가 3명, 의사가 36명, 의과 대학장이 1명, 그 외에도 수백 명의 목사와 선교사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역사를 주름잡는 수많은 인물들이 죠나단 에드워드의 믿음의 가문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반말하는 부모 밑에 반말하는 자녀가 나오고, 믿음의 부모 밑에 믿음의 자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문제 가정에서 문제 자녀가 나오고 믿음의 가정에서 믿음의 자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이라면 부모님의 믿음을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둔 부모님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옷니엘과 갈렙처럼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
둘째로 옷니엘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었습니다. 옷니엘은 단순히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것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교인 하나가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쓴 글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는데, 이 부부는 부부라기보다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부부가 각자 다른 방을 쓸 뿐 아니라, 만나기만 하면 “이 원수”, “저 원수”하면서 서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똑같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남편은 아내가 너무 예쁘다고 하고, 아내는 남편이 너무 귀엽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원수지간이었는데, 은혜를 받고나서는 서로 죽고 못 사는 관계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하루는 그 댁에 심방을 갔더니, 그 집의 부인이 목사님한테 불평할 게 하나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 소리에 목사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속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그 동안 받은 은혜의 약발이 이제 끝났나보다. 큰일 났구나.’ 그런데 부인이 하는 말이 기가 막힙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이 잘 때 눈 감고 자게 만드셨나 몰라요?“ 그 목사님은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듣고 보니 자기 남편이 너무 예쁘게 보여서 밤에 잘 때도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고 싶은데, 하나님이 눈 감고 자게 만들어서 남편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은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으면 푼수가 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풀 한 포기도 예쁘게 보입니다. 호박 하나도 귀엽게 보입니다. 다 예쁘게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와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예쁘게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 든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모든 것이 다 불평불만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꼴 보기 싫습니다. 이 사람을 보아도 시험거리, 저 사람을 보아도 상처거리입니다. 이쪽을 보나, 저쪽을 보나 불만입니다. 이것은 주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은혜가 떠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부정적으로 보고, 입에서는 불평불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입만 열면 불평불만을 쏟아놓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험담한다면, 그 사람은 현재 은혜가 떠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러한 상태라면 그 때가 바로 위기입니다. 성령 충만 달라고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혜를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옷니엘은 단순히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것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의 용맹스러움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의 용맹스러움을 인정합니다. 여호수아 15장 16절과 17절을 보면, 가나안 정복 전쟁의 영웅인 갈렙이 헤브론 남서쪽 20Km 지점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인 기럇 세벨을 공략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포상으로 걸자, 옷니엘은 그곳을 단숨에 공략할 만큼 전쟁에 능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그런 용맹이나 어떠한 병법이나 능력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비결이 있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옷니엘이 메소보다미아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의 재능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용맹스러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사사 옷니엘은 사실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처럼 연약하고 실수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우리가 가진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그처럼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1982년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목사님께서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의 일입니다. 밤낮 영어로 공부하다보니 기도할 시간이 줄어들어 자꾸 마음이 건조해져서 꼭 사막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공부를 해서 목회학 박사는 받을지 모르지만, 목회를 더 이상 못할 것 같게 되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습니다.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공부를 뒤로 하고, 가장 먼저 기도부터 하고 그 다음에는 성경을 한 시간 이상씩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한인교회를 나가면 현지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봐, 한인교회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집 마당에 있는, 앉으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인 개집 속에 들어가서 매일 한 시간, 두 시간씩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개집 안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랐던 눈물이 회복되고,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치 사막에 오아시스가 이루어진 것처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다시 한 시간씩 성경을 보고 나서 공부를 했는데, 놀라운 것은 공부가 기가 막히게 잘 되더랍니다. 심령이 컬컬하고 답답한 가운데 공부할 때는 공부가 잘 되지 않았는데, 기도를 충분히 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나서 공부를 하니까 논문도 잘 써지고 오히려 공부가 빨리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승리의 비결은 세상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세상의 방법들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재주와 재능을 중요시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중요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성령의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셋째로 옷니엘은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옷니엘이 사사로 버티고 있는 40년 동안에 이스라엘은 전쟁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옷니엘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이 찾아왔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인생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남서울 평촌교회에서 시무하시는 김태권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없어야 될 사람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둘째,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있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티가 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수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없어야 될 사람입니까? 있으나마나한 사람입니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저 그런 사람입니까? 없어서는 안 될, 꼭 있어야 할 옷니엘과 같은 사람입니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서는 안 될,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의 가정이 복을 받고,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가 복을 받고,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니는 직장이 복을 받고,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민족이 살며, 세상이 복을 받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1년 전 남선교회에서 처음으로 토요기도회를 시작했을 때, 참석하여 말씀을 전하면서 소개한 적이 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을 다시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1739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사람이 미국의 예일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예일 대학은 반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대학이었습니다. 무신론적인 분위기가 캠퍼스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1740년 8월 브레이너드는 병 때문에 대학을 휴학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몸이 회복된 후에도 브레이너드는 영적으로 눌려있는 대학으로 돌아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커다란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대학으로 돌아왔고, 캠퍼스에서 기도운동과 전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성냥불’ 같은 작은 불씨였습니다. 잠시 붙었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꽃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불꽃이 마른 풀에 붙어 거대한 불길로 번져나가듯이 결국 예일 대학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불길은 예일 대학 안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 시대를 사르는 커다란 불길로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브레이너드는 인디언 선교를 위해 헌신하다가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한 시대를 살리셨습니다. 내성적이던 한 청년의 헌신이 냉랭한 한 시대를 녹이는 불꽃이 된 것입니다. 1802년 앞에서 잠깐 소개한 적이 있는 죠나단 에드워드의 외손자 티모티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예일 대학의 학장으로 부임했을 때, 예일 대학은 다시금 영적인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 때 티모티 드와이트는 캠퍼스의 변화를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그 일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지도하던 225명의 학생 가운데 75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흥의 열기는 도처로 퍼져나가 근처의 프린스턴 대학에서도 105명의 학생 중 80명의 학생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이 대학의 아쉬벨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조용히 이슬이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 거의 4주 동안 대학 구내에서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에 영향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열정적인 개인기도의 장소로 사용되지 않는 방 또한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누가 신앙에 열심이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신앙에 열심이 없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점차 메말라가는 이 크라이스트처치와 뉴질랜드와 세계를 살리는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나 티모티 드와이트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닳아 없어지고 마는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옷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은 믿음으로 훈련 받고,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냉랭한 캔터베리 대학과 링컨대학과 폴리텍과 티쳐스 칼리지 등의 캠퍼스와 수많은 영어학교에 부흥의 불을 붙이는 거룩한 방화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중병에 걸려 점차 죽어가고 있는 세상을 치료하는, 영적인 의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
삿 3장 7~11절 / 박기완목사
지난주에는 '예배에 성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다만 아멘과 순종만 있을 뿐이지...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면 복이요,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신28장).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기 위하여 연구하고 고민할 수는 있겠으나 의문을 갖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말씀을 상고하고 연구하는 베뢰아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신사'라고 불렀습니다(행17:11).
멋진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이 신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신사요 숙녀입니다. 반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거짓말쟁이요 깡패요 도적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중심'을 헤아려 보십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아무리 귀하고 비싸도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으면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자신을 살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도록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가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으므로 안색이 변하고 분을 품더니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인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예배의 중요한 본질과 가치를 상실하면 예배 때문에 더욱 실패한 인생, 저주받은 인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느냐 안드리느냐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예배에 실패한 사람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리 없으니.... 그가 받은 직분이나 사명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책망꺼리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기왕에 예배드리는 것... 시간 낭비하지 말고 기어이 성공하기 위하여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넘어지는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니 요단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창일한 강물을 바라보면 들어가기가 엄두가 안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려고 다짐하고 발을 내디뎠을 때... 강물은 갈라졌습니다. 강물이 허리에 이르고 목까지 차오르도록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발목에 차니... 하나님은 즉시 강물이 쫘악 갈라지게 하셨습니다(수3:13∼17).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을 명하지 않으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할 수 있는 것... 감당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30:11절 이하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그랬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서.... 거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와서 행하라는 것도 아니요, 바다를 건너가서... 거기에 있는 것을 가져와서 지키라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4절에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순종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습니다.
일이 안되고 어려움이 닥쳐오고 괴롭고 힘들면 하나님을 찾다가도... 일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셨습니다. 괴로움이 심하니까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할 사사를 하나 세워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시기의 역사입니다. 사사기는 이런 역사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찍을 들고... 다시 회개하면 사사를 세워서 그들을 구원케 하시고... 또 평안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시 죄를 짓다가...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임하면 또 하나님을 찾고.... 이것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의 역사는...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도 같은지....
돈이 많아지고 형편이 좀 좋아지면 열심히 봉사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어려웠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으나.... 잘살게 되고 형편이 좋아지니까.... 하나님은 뒷전이고 세상일과 자기 일에 바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지금도 감당을 못하는데...
물론 풍족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충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형편보다는 믿음이 앞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허락해 주셨는데, 문제는 비어있는 땅이 아니라 가나안땅에는 일곱 족속이 있었습니다(신7:1).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그 옛날 조상 때부터 말씀하시던 내용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땅을 차지하거든.... 이렇게 해라"
그러면서 누누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불렀습니다(출3:8).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숫자도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어 있는 땅을 주셨으면 좋을텐데... 왜 그러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기 2:22절을 보면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지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지기 않고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지으면 그들로 하여금 빼앗아가고 약탈해가고 전쟁을 일으켜 혼을 내주려고... 제동장치로 남겨 두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사기 3:1∼2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다음 세대에 전쟁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남겨 두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준비하거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언제 그런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알게 하신다는 의미는... 모든 전쟁에서 그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이길 수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가나안 땅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사사기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다시 말하면, 가나안 땅에 원주민들을 남겨두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함께 교류하고 함께 거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지를 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주변에는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기꾼, 도둑놈...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왜 저런 인간을 보고만 계실까?..." 할 정도로 못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는 것 없이... 별 이유도 없지만 싫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시고.... 그러한 악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를 선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왜 가나안에 원주민들을 남겨 두셨는가 하는 것은.... 왜 이 땅에 불의한 사람들을 보고만 계시는가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요 나를 위함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실 지나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그 수많은 사람들을 포진시켜 놓으신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통하여 나를 보게 하시고.... 내가 그 길을 갈까봐.... 미리 그 사람을 통하여 보여 주시므로 학을 띠고....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 곁에.. 내 주변에 악한 사람이 있다면... 너무 미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저 사람을 포진시켜 놓으셨구나" 하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과 고통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게된 이유는 지난날의 실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바라는 대로 성공하고.... 원하는 대로 풀렸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더 큰 은혜이지만.. 대부분 실패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한 것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더 감사의 조건입니다. 나를 실패로 몰고 간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는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을 듣다보니 하나님을 보게 되고 믿음이 생기니 비로소.... 내가 보이고 나의 잘못됨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문제를 해결 할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고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원주민들을 남겨 두셨는데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과 결코 혼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를 어긴 것입니다. 그들과 혼합하고 그들과 결혼하여 살아가므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으므로 그들이 가져온 우상을 섬겼습니다. 처음에는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예배에도 성공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쏘옥 들었습니다. 그가 구한 지혜 외에도.... 부귀영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여인과 결혼하므로 우상을 섬기게 되고 정체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세상과 구별하여... 주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구별한 우리를 세상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피하여 산 속에 가서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세상에 속하여 살면서..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내가 양을 이리에게 보내는 것과 같구나!" 하면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마10:16). 그래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빛을 발해야 되고...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열매를 맺고... 삶의 현장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 경건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체하고 반듯한 자세로 기도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마3:7).
경건이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내가 누군가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때로 인간은 물질의 어려움으로... 혹은 여러 가지 시험이나 고난으로 인하여 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속에서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풍습이나 그들의 관습 속에 다 동화되고... 그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바알들... 아세라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많은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당시에 바알은 농경 신이고, 아세라는 행운의 신을 말합니다. 농사를 잘 짓게 해 달라고 많은 바알들을 섬겼고...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 아세라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기서... 악을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나오는 악인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인생을 가리켜 악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악이요, 그런 사람이 악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에 보면 믿음이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계신 것과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붙이셨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은 못된 왕입니다. 악을 배나 더하는 왕... 포악한 왕에게 마음대로 하도록.... 이스라엘을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자그마치 8년 동안을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9절 말씀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랬습니다.
억압과 착취를 당할 때 얼른 돌이켜 회개한 것이 아니고... 8년 동안을 버틴 것입니다. 별짓을 다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찾다가 안되니까... 그제서야 8년 만에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자기가 모아둔 돈이나 배경이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다가 바알신에게 부르짖었고 아세라신들에게 부르짖었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을 8년동안 섬겼다는 말은 8년동안 고통을 당했다는 얘기이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8년 걸렸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기 전에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꼭 맞아야만 정신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워낙 맷집이 좋아서인지 맞아도 감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은 옷니엘을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갈렙이 누구입니까?....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보고할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보고했던 사람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다짐했던 사람.... 다시 말하면 믿음의 집안입니다(수24:15).
안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믿음의 가정... 하나님을 잘 섬기는 집안의 자녀들이... 안 그런 자녀들 보다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귀한 일을 감당하는 제목들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자자손손...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많이 나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랬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그랬습니다.
옷니엘의 지혜와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붙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40년을 태평세월로 보냈습니다.
옷니엘이 생존하는 동안... 자그마치 40년 동안을 태평세월로 지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렇게 된 것인데....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한 줄 압니다. 무엇을 이루면 의시대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도록 그들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응답하셨습니다. 기도만 하면 즉각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미리 기도하는 것이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8년 동안이나 못된 왕에게 고난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고통 받는 그들을... 가슴 아프게 보고 계십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오기를 날마다 문어귀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니까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잘못됐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즉각 조치를 취하실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기도는 잘하지만... 교회 생활은 잘 하지만... 인간 관계가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는 잘 드리는 것 같지만... 사람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하는 사람....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은 인간 관계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5:9).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외상값도 빨리 갚아야 합니다.
누구나 가까이 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담이 되는 사람.... 남들이 꺼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늘 인상을 쓰고... 우울한 얼굴은 주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쫙... 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기도 하시지만.... 다른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은 남을 도와주는 일을 잘 못합니다. 꼭 자기가 해야 돼요.... 그러나 눈을 높이 떠서....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유리한 사람이 있다면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고 힘껏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나바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받기를 원하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그런 위대한 하나님이 종이 되었습니까?...
바로 바울이 바울되게 만든 사람이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옥에 잡아 가두는 일에 열심이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로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사람을 믿겠습니까?.... 그를 보면 다 도망을 가고... 아무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의 곁에서 바울을 변호해주고... 바울이 바울 되도록.... 그의 배후에서 묵묵히 도왔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장 왕성하게 쓰임을 받을 즈음... 그는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바나바는 당시에 가장 인정받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행11:22-24).
원래 바나바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즐겨 불렀는데, '바나바' 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위로자' '격려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는 철저히... 사람들을 격려하며 살았던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서도.... 보이지 않게 숨어 봉사하는 사람들이 더 귀합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 은밀한 봉사와 헌심을 다 아십니다.
훗날에 우리가 깜짝 놀라게 될 사실은.... 상을 많이 받을 줄 알았는데... 적게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의외의 사람이.... 상을 많이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숨어서 봉사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죽으라고 해도...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네!" 그러면서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르는게 더 좋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하면... 이미 상을 다 받은게 돼서... 주님께 받을 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몰래 흘린 눈물을 아십니다. 주를 위하여 애매히 받은 고난.... 그런 상처와 아픔을 다 아십니다.
바울만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바나바의 수고와 헌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연이 있기 위해서는 많은 조연자들이 필요합니다. 조연이 없이는 주연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꼭.. 잘난 사람만 쓰지 않으십니다. 나만 사용하시지 않아요... 거시기한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는 여러분이 주님앞에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되어도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누가 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실 때에는 힘도 주셔서 세우십니다. 그가 감당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셔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모세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주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입을 만드신 자가 누구냐?... 내가 네 입에 할 말을 넣어주리라" 그러셨습니다(출4:12).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 집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작으며 나는 우리 집에서도 제일 작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제가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할 때에...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셨습니다(삿6:16).
그러므로 제직으로 세우고 직분자로 세우고 주의 일을 위하여 부르시면 두려워하지 마세요... 너무 사양하는 것도 겸손이 아니예요....
모세가 자꾸만 꽁무니를 빼면서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하니까... 하나님이 화를 내셨습니다(출4:13∼14).
"하나님 힘 주실꺼죠?...." "능력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감당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와 순종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칼을 빼어 들었을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독자 이삭에게 아무런 손을 대지 말아라... 이제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라고 하셔서 보니...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다고 했습니다(창2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순종할 것을 아시고 수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편이요,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진리는 세 가지 입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
3) 세 번째는 능력을 주셔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금년 한해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삿 3장 7~11절 / 김형준목사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사람을 슬프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 나는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지금 너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저 사람들이 훨씬 중요해.”, “네 몫은 없어.”, “너보다 잘 하는 사람 얼마든지 많아.”, “이제 너 할 일은 끝난 것 같다.” 등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힘이 쫙 빠지면서 인생이 슬퍼집니다.
반대로 “당신은 나에게 참 귀한 존재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내 삶이 행복해 졌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인생이 참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자녀들이 “아빠! 엄마! 세상에 많은 부모가 있지만 내가 엄마와 아빠를 통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라는 말을 부모에게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것입니다. 저도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분이예요.” 라고 하면 무척 행복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제가 “성도님! 성도님은 우리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이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이 민족과 이 나라가 일깨워져 갈 소중한 분들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참 행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가치를 존중받을 때 인간의 마음속에는 행복이 찾아옵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쓰임 받는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을 받고 살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 하겠습니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이겨 낼 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워도, 조롱과 비난을 받아도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옷니엘은, 8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 함을 얻게 해주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40년간을 평안함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한 사람 때문에 온 민족이 괴롭힘 속에서 자유함을 얻고 이 민족이 태평함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무너져 가는 역사를 다시 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나 쓰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그 중에 선택을 받았던 사람은 12명 뿐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가정에서는 여러분 때문에 화평함을 다시 찾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며, 교회에서는 성도님을 통해 우리 교회가 회복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삶의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 원리를 옷니엘의 삶을 통해서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쓸모없어 보인다고해서 그냥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쓰실 수 있게 훈련하시며 갈고 닦으십니다. 쓰임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목표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고민하면서 옷니엘을 통해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 옷니엘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9절 말씀에 보면 백성들이 회개와 더불어 그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할 때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했는데 바로 ‘옷니엘’ 이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옷니엘을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통 성경에서는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만 갈렙과의 관계를 명시해 놓음으로서 그의 사역과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5:16~17 에 보시면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함으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유다지파와 갈렙이 헤브론을 치러 갈 때에 갈렙이 기럇세벨을 치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담대하고 용감하게 공격에서 승리한 사람이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은 자신의 삼촌이자 장인이 되는 갈렙과 함께 믿음의 생활을 함께 해왔습니다. 믿음생활을 함께 하다보면 가치관이나 습관들이 닮게 마련입니다.
신명기 1:36에 보면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갈렙의 순종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을 칭하는 다양한 명칭 중 ‘순종의 사람’은 가장 특징적인 것입니다. 이 순종의 사람과 함께했던 옷니엘 역시 갈렙과 함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의 공통점은 순종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업을 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고용하시겠습니까? 유능한 사람이나 친척의 부탁을 받은 사람입니까? 물론 그런 사람을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 자신은 잘 알지 못해도 리더의 의도에 따라주는 사람을 선호하실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드는 사람,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람, 또는 여러분의 경영 마인드와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일하는 사람은 절대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행하신 일들을 바라보고 그 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좇아서 온전히 순종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에 주님은 앞에 놓인 홍해도 갈라 주셨고, 요단강도 갈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그 사역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돌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훈련시켰던 것 역시 이 백성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것’ 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 테니 날 내버려 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 지식과 기준들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이 삶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기를 꺾어 놓습니다. 교육학자들은 우리의 자녀를 교육 시킬 때에 5세 이전에 아이들의 기를 반드시 한번은 꺾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아이가 자신의 고집대로 살면 반드시 그 인생은 엉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고의로 여러 가지 사고를 내고 다니는 아이들의 행동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이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 순종 할 수 있는 절대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데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쓰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뜻대로, 내 돈으로, 내 노력으로 삶을 산다고 할 때 여러분의 그런 삶 가운데 힘들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건강이나 목숨까지 위협하시면서 여러분의 삶에 관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가는 삶이 우리가 볼 때는 옳아보여도 그것은 필경 죽음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고를 받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이 자꾸 늦추어 집니다. 기도 응답도 늦고 자녀와 자신의 삶에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주시고, 삶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제자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라가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주님을 길을 따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다 세우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승리 하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엔진 , 디자인 , 내장 등을 갖춘 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핸들과 브레이크가 작동 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차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핸들이 고장 나면 차가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면 차를 세울 수 없어 큰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말씀의 브레이크를 밟아도 자신의 욕심대로 가느라고 서지 않습니다. 말씀의 핸들을 꺾어도 하나님의 말씀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겠습니까? 계속 이렇게 자기 뜻대로만 간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결국 매를 드실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따라가는 삶만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옷니엘의 삶 속에는 이러한 순종이 있었습니다.
성 프란시스 사제단에 한 청년이 지원했습니다. 사제단은 이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테스트를 거쳐 이 청년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지도자인 수도사가 청년에게 말합니다. “저기 심어져 있는 배추들을 거꾸로 다시 심으세요.” 이것은 상식에 맞지 않고 얼토당토 않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스승이 하는 말에 대해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려는 사제단의 목적이었습니다.
순종하지 않을 때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쓰임받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 길을 열어 가시며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끌어가는 것은 현재는 좋을 것 같지만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일평생 산다는 것은 낭비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 옷니엘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둘째, 옷니엘은 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옷니엘이 사사로 부름 받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여든 살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와 함께 있던 갈렙이 여든 다섯 살이었으며, 이때 옷니엘이 쉰 살 쯤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지 삼십년 뒤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사사로 불렀으니 옷니엘은 여든 살쯤 되었던 것입니다. 여든 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옷니엘은 이미 갈렙과 함께 많은 전과를 올렸었고, 개척시대에 누구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많은 승리들을 거두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도자로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나이 여든이면 노년으로 자신의 남은 생을 편안히 마감할 준비를 할 때입니다. 이미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터라 굳이 자신이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그 삶은 충분히 윤택하고 신뢰받고 이해받을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옷니엘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에 옷니엘은 나갔습니다. 10절 말씀에 그가 나가서 싸웠다고 말씀합니다.
이 전쟁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전쟁으로 8년 동안 심하게 압박을 받아왔습니다. 메소보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이름은 영어로 보면 Double wickedness입니다. 얼마나 사악한지 그 사악함이 두 배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강했고 그의 지배하에 심하게 고생을 해온 백성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과의 전쟁에 여러분을 부르신다면 여든의 나이에 나설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하는 의식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으로 인해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평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옷니엘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이 도전하신 이 일 앞에 자신의 안녕, 삶의 평안, 안전, 건강을 고려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른여덟 된 집사님 부부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지난 주일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큰 기업에서 일을 잘 하고 계셨는데 자신의 삶이 단지 이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하시면서 다시 한 번 도전의 삶을 살고자 영국의 공과대학 박사과정에 도전하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기업의 부장이셨던 집사님 한 분은 하프타임 설교를 들으시고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두셨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고 결심을 하고 새롭게 인생을 개척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LA에 있는 대학 MBA과정에 도전하셨습니다. 1년 반 정도 만에 오셨는데 고생은 정말 많이 했지만 배운 것이 무척이나 많다고 하셨습니다.
부딪히는 일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힘이 들었지만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크고 엄청난 것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한 번 도전해 보십시오. 할 수 없다고 주저앉지 마시고, 하나님의 그 부르심을 따라 자신의 인생과 신앙, 그리고 가족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써 보시길 바랍니다.
초밥의 명장인 안효주씨가 있습니다. 이 분은 20년 전 일식당 주방의 냄비닦기로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이 초밥의 전문가로 성공해야겠다는 도전의식이 있었습니다. 남들 모르는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꿈과 같은 일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가 생선초밥 한 개를 위해 밥을 쥐면 3백 50톨, 안주용은 280톨, 여성손님이 다이어트용으로 주문하면 2백 78톨이랍니다. 공개적으로 시험한 결과 10번 중 8번이 한 톨도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이것뿐만 아닙니다. 10대 후반 성공하면 남을 돕고 살자는 그의 결심으로 지금은 한 달에 두 번씩 외로운 노인들에게 초밥을 대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도전 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전하며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일의 타성에 젖어서 안주하고 싶은 마음, 둘째 대강주의에 빠져서 그럭저럭 살고 싶은 마음, 셋째 인간의 본성적인 악한마음, 넷째 도전받기를 싫어하는 보수주의 및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비전센타를 건축하는 일 역시 편안한 것에 젖어 있는 분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돈도 부족하고 많은 일들을 계획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면 누구라도 그 일을 감당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가지고 그 부르심 앞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비전센타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가지고 기도와 도전으로 교회의 비전을 세워가겠다는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금년 초에 교회에서 예산을 선정할 때 제가 10%정도만 올리자고 이야기 했을 때 불가능 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현재 헌금이 10%이상 더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불경기일 때, 이렇게 어려울 때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계산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계산으로 관철시키고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도전은 누구에게나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삶과, 가정과, 신앙의 역사에 새롭게 도전해 보리라 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시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게 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동안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도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기도하며 나아간 우리 선배들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도전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부름 앞에 응답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결단 아래 하나님은 기적의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셋째, 옷니엘은 영적 리더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본문 11절에 보면 ‘그 땅이 태평한 지 40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유지해 가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주부님들이 왜 김치냉장고 사려고 합니까? 김치냉장고에 김치를 넣어놓으면 오랫동안 보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신선함을 보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이것은 대단한 과학 기술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이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역된 것을 보면 악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앞에는 사악한 것이고, 사람 앞에는 해로운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지 않고 엉뚱한 자리에 하나님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섬기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고통 속에 몰아넣으심으로 하나님을 다시 찾게 했던 것이 이 사사기 역사의 순환적 모습입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평안했다는 것은 옷니엘이 영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할 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영적 리더십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백성을 이끌어 가는 힘입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계신가요? 아빠가 회초리 한번 들면 자녀들이 꼼짝 못하는 것은 회초리의 리더십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리더십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엄마와 아빠를 생각할 때 부모를 보면서 바른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족입니다. 처음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하려할 때 자신들은 텐트 치는 데에만 전문가이지 농사를 짓는 데에는 문외한임을 알았습니다. 양력과 음력을 살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바알은 태양을 숭배하는 신이었고, 아세라는 달을 숭배하는 신으로 양력과 음력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옷니엘이 가르쳐 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이들의 종말이었습니다. 허무와 죽음뿐인 하나님 없는 삶의 종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죄와 쾌락과 어둠과 멸망 가운데 사는 그들의 실체를 보여주며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조금 불편해 보이고 손해인 듯 보이더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고 복된 삶임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때 마다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그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바뀌지 않습니까? 이것을 계속적으로 일깨워 줄 때 우리 신앙생활이 점점 하나님 앞에 복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사람이 영적 리더십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정에서 얼마나 영적 리더십을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계십니까? 가족 구성원들이 일평생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고 계십니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 이상으로 초월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을 열어주고 일깨워주는 일들을 하고 계십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에 새로 나온 분들이 저에게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교회에 먼저 믿은 분들이 담임 목사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때로는 험담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보면 그 생각이 떠올라서 마음이 어려워지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라고 합니다. 물론 제가 많은 부분 부족합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먼저 그들 마음에 심어주시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역할에 맞는 행동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바꾸어서 “우리 목사님 부족한 것은 많지만 성도님들이 함께 도와서 여기까지 올수 있었습니다. 성도님도 함께 우리 목사님이 더 하나님 앞에 이 교회를 잘 이끌어 가실 수 있도록, 영적으로 신령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시는 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대화가 더 영적으로 영향력 있는 말이 되겠습니까? 부정적인 이야기를 자녀들이나 배우자가 듣게 되면 반발감이 생겨 결국 자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내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내 구역 식구들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영적 영향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왜곡되고 비뚤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이러한 영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드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족에게, 사랑하는 믿음의 이웃 식구들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일깨워 줄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치약 중에 콜게이트라는 치약이 있습니다. 이 회사를 창립한 윌리엄콜게이트라는 사람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16세 때 고향을 떠나서 배를 탔는데 자신의 옆 집 할아버지인 그 배의 선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제가 열여섯 살이 되었는데 이젠 부모님께 더 이상 의존하기가 죄송해서 뉴욕에 가서 제 꿈을 크게 한번 펼쳐보려 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 선장님이 이 소년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얘야, 인생을 살아갈 때 세 가지만 반드시 기억 하거라. 첫째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라. 보이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너를 보고 계시단다. 둘째는 열의 하나, 십일조는 하나님 것이니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한다. 세째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는 이 노인선장의 말을 일평생 간직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경영에 참여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십일조를 반드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고, 십의 사조를 드리다가 급기야는 그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나머지는 이웃들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인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어린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할아버지 선장님의 영적인 영향력이 현재 세계의 유수한 기업의 리더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매우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삶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자녀의 말에 마음이 기우뚱하여 그것에 순종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돈과 자존심에 쏠려 그것에 순종하는 삶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무엇에 잘 순종하는지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이 따라가는 순종의 모습으로 내 삶의 궤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십시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주님이 약속하신 그 세계를 향하여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한번 도전하고 결단해 보십시오.
말로만이 아닌 타인의 삶에 실제적으로 영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정말 존귀하게 쓰십니다.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결단하며 여러분의 삶의 궤도를 수정 해 나가는 그러한 주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라
삿 3장 7~14절 / 박인걸목사
저의 아버지는 긴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태우거나 봉투에 담긴 담배를 신문지나 종이에 말아 피우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꼴초는 아니었지만 끊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년 정도 다니시더니 담배를 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 달도 못 되어 담배를 다시 피웠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진짜 담배를 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한테 들켰습니다. 돗자리를 뒤져 전에 숨겨 놓았던 꽁초 담배에 불을 붙여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 후 돌아가실 때 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저한테 들킨 후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것입니다.
악순환이란 순환이 좋지 않음, 또는 나쁜 현상이 끊임없이 반복됨을 이르는 말입니다. 빈곤의 악순환, 복수의 악순환, 미움의 악순환 같은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되풀이되어 상황이 악화되는 일로서 예를 들면, 인플레이션 말기에 물건 가격이 오르면 임금이 오르고, 따라서 통화가 증발되어 다시 물건 가격이 오르는 현상 따위입니다. 후진국에서는 가난 때문에 자본이 형성되지 않아 생산력을 높일 수 없어 빈곤이 악순환하게 됩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너크시(Nurkse, R.)의 이론입니다.
세상사 만물의 법칙에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순환이고 다른 하나는 악순환입니다. 잘못 뿌려진 씨앗 하나가 엄청난 재앙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순환은 얼른 선순환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즉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지난주부터 새벽기도회에 사사기를 읽으며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가나안 정복시대로부터 사무엘 선지자가 등장하기까지 약 400년간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왕이 없는 때였기 때문에 사사들, 직역하면 재판관(Judge)이 다스리던 시대를 말합니다. 사사의 역할은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로서 하나님이 필요할 때 마다 영을 부어 주어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일종의 똑같은 싸이클이 돌아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임합니다. 그들은 회개합니다. 사사를 보내십니다. 적들을 궤멸합니다.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런 현상이 12명의 사사가 활동하는 동안 반복 되었습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약 400년간 같은 일이 반복 된 것입니다.
북한은 남한을 협박하고 그러면 그들에게 돈을 주고, 일정 기간 지나면 또 협박하고, 그러면 또 달래며 돈을 주고 그렇게 지난 60년을 왔습니다. 돈 주고 사는 평화였습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개인적인 삶을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어느 날부터 주님을 멀리 합니다. 틀림없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생활, 예배생활, 봉사생활을 합니다. 다시 회복이 됩니다. 오래 못가서 또 시험에 들거나 어려움을 만납니다. 언제까지 그런 생활을 반복할 것입니까?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십시오. 특히 여름철에 신앙이 다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생활적으로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전천후 신앙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끊어야 할 악순환의 고리는 무엇입니까?
(1) 불신앙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9, 15)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7절)하나님이 진노하사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그들을 넘겨주었습니다. 8년 동안 이방 임금을 섬기며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어 그들의 손에서 구원했습니다. 40년 동안 그 땅에 평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잊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또“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니라.”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팔았습니다. 8년 동안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5절) 하나님이 왼손잡이 에훗을 보냈습니다.(15절) 그가 맹활약했습니다. 그 땅에 80년 동안 평화가 왔습니다.(30절) 그런데 4장 1절에 보면“여호와의 목전에 또 악을 행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이 약 400년동안 지속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은혜를 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절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첫째 유월절입니다. 애급에서 그들을 구원한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수장절 혹은 초막절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고생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신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도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죄 가운데 빠져 살던 인생들입니다. 예수 믿지 않았다면 구원의 축복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며,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불행한 운명적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영원한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일반적인 은총으로서 가정을 주셨고, 직장을 주셨고, 일터를 주셨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주셨습니다. 아내, 혹은 남편, 자녀와 일가친척을 주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주셨고, 먹고 생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내가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큰 은혜입니다. 대한민국에만 약 50,00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들 가운데 어느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입니까? 수주중앙교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지구에 200개 이상의 국가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유부남이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제일입니까? 내 남편입니다. 어떤 여자가 가장 좋습니까? 내 아내입니다. 어떤 아이들이 가장 예쁩니까? 내 자식입니다. 어떤 신이 가장 위대합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믿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영적 간음입니다. 내것 보다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남의 남편, 남의 아내, 남의 자식, 남의 집, 남의 차, 남의 물건, 남의 교회, 남의 나라 좋아 보이면 탐심이 생기고 유혹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렸습니다. 불신앙했습니다. 그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그 결과가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누리고 있는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또 끊어야 할 악순환의 고리는 무엇입니까?
(2) 영적 타락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7, 12)
“이스라엘에 또 여호와의 목적에 악을 행하여”라는 구절이 7,12절에 반복 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적인 일입니다. 예배, 기도, 찬양, 경외, 헌신 모두 영적인 일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요4:24)고 했습니다. 예배 자체가 영적인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여호와의 목전에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린 죄악입니다. 이런 죄악들은 모두 영적 간음입니다. 무서운 죄입니다. 자신의 남편을 두고 다른 아내를 취한다든지, 자신의 아내가 있는 사람이 다른 여인을 취하는 일은 간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면 이것은 영적으로 간음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영적타락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한 발은 교회에 있고, 한 발은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 문화는 우리를 영적으로 간음하게 합니다. 주일에 놀러가는 일, 기도 안 하고 텔레비전 보는 일, 수요일에 예배 안 오고 쉬거나 놀고 있는 일, 금요기도회에 연속극 보느라 교회 오지 않는 일, 엄격하게 말하면 영적 간음입니다. 세상에 취해서 삽니다. 자기 일에는 몰두하면서 하나님 일은 게으릅니다. 자신을 위하여 쓰는 돈은 아깝지 않게 펑펑 쓰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눈꼽만큼도 안 드리려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아내하고는 외식 한 번 안 하면서 다른 아가씨 한데는 비싼 음식을 사준다면 아내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똑같은 원리입니다. 우리 영적으로 타락하지 맙시다.
이스라엘에 왜 영적으로 타락했을까요? 첫째,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왕도 없습니다. 선지자도 없습니다. 그들을 바르게 이끌어 줄 지도자가 없습니다. 사사가 있는 동안에는 평안 했지만 사사가 없는 순간 그들은 악순환을 되풀이 했습니다. 우리는 나의 영적 지도자들은 귀하게 생각하고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구역지도자, 교회학교 지도자 모두 귀한 분들입니다. 목회지도자는 내 영혼을 살리는 분입니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영원한 지도자는 우리 주님입니다. 주님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둘째, 눈앞에 평안함에 안주하였습니다. 40년 평안하니까(11절,30절) 그들은 안주했습니다. 안락에 빠졌습니다. 우리나라는 6,25 이후 산업 혁명을 이루었고, 사회가 잘 살게 되었습니다. 빌딩은 마천루처럼 치솟고, 86.아시안, 88.세계올림픽을 유치했고,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가경쟁력은 국제사회에서 탄탄해 졌습니다. 국민들은 자존감과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어깨에 힘주고 살았습니다. 1997년 11월 IMF가 왔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영적으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평안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어려움이 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과거의 고통을 잊었습니다. 8절을 보세요.“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8년 섬기며” 큰 고생을 했습니다.13절을 보세요. 에글론이 모압과 아말렉군사들과 함께 동맹하여 종려나무 성읍, 즉 여리고를 빼앗았습니다. 18년간 그들을 섬겼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통에서 건져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과거 가난했던 시절을 잊으면 안 됩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고쳐준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실패하고 쫓겨 다닐 때의 고통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죄짓고 방탕하던 때의 생활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가정불화와 각가지 갈등들로 고통하며 살 던 때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은혜를 잊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는 6,25를 잊지 말자고 하지 않습니까? 보릿고개를 잊지 말자고 하지 않습니까? 일제의 36년 압박과 설움 당한 일을 잊지 말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도 잊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기 바랍니다. 영적 태만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이제 또 끊어야 할 악순환의 고리는 무엇입니까?
(3) 죄의 세력을 끊어야 합니다.(7,12)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해하여”여기서‘악’은 하나님 앞에 범죄함을 말합니다. 죄의 속성은 ① 그 마음에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싫어합니다. 거부감을 자아냅니다. 예배도 싫고, 기도하는 일도 싫고, 교회가기도 싫습니다. 그 속에 죄가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증상이 있습니까? 죄가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게에 예수를 팔 마음이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죄가 그 마음에 들어간 것입니다. ② 생명과 인격을 망칩니다. 죄가 들어가면 우선 인격적으로 망가집니다. 전에 그 사람이 아닙니다. 착하고, 순하고, 진실하고, 성실하던 그 모습이 없어집니다. 교만하고, 추하고, 악하고, 나쁜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영적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③ 사단의 종이 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지으니까 곧바로 이방 나라가 그들을 지배합니다. 메소보다미아 구산 리사다임(3:8),모압 왕 에글론(3:13) 가안 왕 야빈(4:2), 미디안(6:1), 암몬(10:6-7), 블레셋(13:1),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이방나라의 종이 됩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면 사단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 가난 마귀에게 종노릇 합니다. ⓑ 질병마귀에게 종노릇 합니다. ⓒ 명예마귀에게 종노릇합니다. ⓓ 감투마귀에게 종노릇 합니다. 저도 한 때 감투마귀에게 종노릇 했습니다. 노회, 총회, 동문회, 이런데 가서 감투 씌워 준다고 오라고 쫓아다녔습니다. 사람만 망가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높여 주어야지 내가 높아지려하면 추한 사람이 됩니다. 지금은 그런 곳에 오라고 해도 안갑니다.ⓔ 불평마귀에게 종노릇 합니다 입만 열면 불평입니다.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 근심마귀의 종이 됩니다. 주님은 염려, 길, 행사, 짐을 모두 맡기라고 하십니다. ⓖ 교만 마귀의 종노릇 합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겸손했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상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리를 끊으십시오. 싹뚝 잘라버리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평강이 찾아옵니다.
죄의 세력을 끊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사가 등장하여 적들을 이겼습니다. 끊었습니다. 그 땅에 평화가 왔습니다. 여기서 사사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입니다.9절을 보세요.“구원자를 세워”15절을 보세요“구원자를 세워”라고 했습니다. 구원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을 끊은 분입니다. 박살낸 분입니다.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서 평강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함이 내 어두운 심령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불교를 다니던 분이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마당에서 일하고 있는 사찰 집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집사님, 주지 목사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분은 불교에서 주지 스님이 입에 배어 교회를 왔어도 주지 목사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나의 습관을 고치는 것이 이처럼 힘들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래도 끊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살아야 합니다.
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기 바랍니다.
② 영적 태만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③ 죄의 세력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영구적인 평안이 우리들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사사 웃니엘
삿 3장 7~11절 / 양인국목사
1. 사사기에 언급된 사사는 웃니엘을 시작으로 삼손까지 12명이 언급되고 있다. 사사기에서 사사들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어두운 시대 가운데서도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사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하여 세워진 자들로서 언급한 것처럼 부패한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한 자들이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스라엘에서 사사로 불린 첫 번째 인물 웃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확인하기 원하고, 또한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이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때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복이 얼마나 큰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한다.
2. 웃니엘은 성경에 사사로 불린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이다. 그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갈렙과 그나스는 믿음이 사람이었다. 갈렙은 이스라엘 열두 정탐군 가운데 여호수아와 함께 믿음의 사람에 속하는 자였고(민13:30, 14:6-9), 갈렙의 아우 그나스는 갈렙이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차지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믿음으로 그 땅으로 가서 그들을 쳐서 그 땅을 정복한 자다(삿1:11-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사로 세운 웃니엘을 말할 때 갈렙과 그의 아버지 그나스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웃니엘이 갈렙과 그나스로부터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가정은 후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웃니엘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사사로 세운 사람들 모두가 특별한 자격에 따라서 선택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고자 택하실 때 많은 경우 자격에 따라 선택하지 안으시고 주권적으로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두 아들 가운데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을 약속의 자녀도 택하신 것(롬9:10-13)과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택하신(갈1:15) 예들이 바로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는 놀라운 은혜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 것은 아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이방 여인들의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일에 실패했고 사울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일에 실패했다. 그들의 실패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했다. 그러나 택함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을 때 그들의 삶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복된 삶으로 인도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복된 삶으로 세워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어째서 택함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복된 삶으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니”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땅이 평온한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 죽었더라”라는 말씀이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니(3:10)”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특별한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특별한 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은혜가 없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이 은혜가 없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일지라도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으므로 자신이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는 사람도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말씀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11절의 말씀이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것은 웃니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평온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한 공동체가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를 말한다. 그가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동체를 인도하고 공동체가 그의 인도를 받는다면 결과적으로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게 됨으로 공동체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성경의 역사와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볼 때 그 공동체의 샬롬은 공동체 전체의 어떠함에 의존되어 있기 보다는 오히려 지도자의 어떠함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례를 들면 사사기의 부패한 시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세대를 연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어떠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 사람 사무엘의 지도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고, 사울로 인하여 넘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떠함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다윗의 지도력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동일한 예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의 지도력은 자기 시대뿐만 아니라 후세대의 역사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역시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 때 이처럼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가운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공동체 가운데 특별한 사람을 선택해 주시고 그에게 주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그를 통하여 공동체가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받고 형통하도록 하셨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의 영을 허락해 주심으로 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도록 하셨다(고전3:16). 그러므로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고 부르심에 따라 산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를 복되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을 택하시고 그에게 주의 영을 허락해 주시고 그로 하여금 백성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증거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오늘 이 말씀처럼 우리 모두,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우리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평온하기를 소원하자.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요청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안에 주의 영이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이다. 언급한 것처럼 고전3장 16절은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처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항상 내주해 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 수 있다. 여기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성령님과 의논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요청 되는 것은 부르심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성취해야 할 것이 바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고 또한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변화의 주체로 살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가 모세, 다윗 또는 바울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서나 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특별한 부르심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 내에서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불러주신 것은 그 공동체 내에서 한 지체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약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은사론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각자의 부르심은 공동체 내에서 자신에게 요청되는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가정에서 부모의 위치에 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부모의 위치에서 가족들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부모로서의 부르심이고, 부부라면 각자의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할 일 역시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녀의 위치에서 요청되는 일도 자녀로서의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이든지 그곳에서 자신에게 요청되는 것을 부르심으로 안다면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부르심에 응답며 살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변화의 주체로 살 수 있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공동체는 평온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목회자로서 개인적인 바람은 목회자로 있는 동안 서신의 가족 모두가 평온함을 누리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하나님,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우리로 인해 공동체가 평온함을 누리게 해 주옵소서.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양인국목사 / 삿 3:7-11.
1.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겼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임하여 이스라엘은 메소포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8년 동안 지배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메소포다미아 왕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
2.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기업으로 받은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말해 주기 때문이다.
1절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겼더라” 이 말씀은 우리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없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이다. 여기 여호와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채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는가? 사사기는 이 물음에 대하여 두 가지 대답을 주고 있다. 하나는 전쟁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 “전쟁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오늘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바꾼다면 믿음의 삶에 대하여 오는 도전들에 대하여 어떠한 응전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이방인들에게 미혹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것에 잡착하여 세속화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믿음의 삶에 대하여 도전해 오는 것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전함으로 체험적 지식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여기 체험적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의 믿음의 삶의 여정에서 믿음의 삶에 대하여 도전해 오는 것들이 없다면 그리고 그 도전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전하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도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믿음의 사람들이 삶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복음서들은 주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은 사람들이 이야기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 가운데 공통점은 치유함을 받은 사람들은 질병으로 인하여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치유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갔다는 것이다. 여기 그들이 믿음의 여정에서 만난 질병은 믿음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고, 치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간 행동은 믿음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주님을 치유의 주님으로 알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전쟁을 통하여 주님을 체험적으로 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교훈은 오늘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즉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도전해 오는 것들에 대하여 응전한다는 것은 믿음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떤 도전들에 대해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세속화로 인하여 주님에 대한 무관심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을 통하여 예배소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의 운동에 대하여 알고 있다. 이 부흥의 운동은 믿음의 사람들을 새롭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즉 사회 전체를 변화시킨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부흥 운동의 시작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서부터 일어났다. 사도행전은 이 부흥 운동을 가져온 작은 모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8-12)” 만일 바울이 두란노사원에서 제자들에게 2년 동안 말씀을 강론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제자들이 말씀을 사모하여 이년 동안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지 않았더라면 이 부흥운동이 일어났겠는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을 때 세속화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심령들이 각성(覺醒)되어 믿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세속화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마음을 각성시켜 믿음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을 생활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8절의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진노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고 또한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여기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상실로 나타난다. 건강에 대한 상실, 소유에 대한 상실, 행복에 대한 상실, 관계에 대한 상실 등을 상실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실 때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은혜를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있는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사48:22).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복된 삶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불행에 빠진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복된 삶을 위하여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3:9)”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있었다. 그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았다.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있을 때 자신들은 전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이와 같은 무기력함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들은 진노하심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들은 의의 길로 행할 때가 아니었고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있던 때였다. 하나님은 이때도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든지 그곳에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기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도 함께 있는 것이다.
요나의 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잘 말해 주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바다에 던짐을 당하여 물고기에게 삼킨 바 되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로 하여금 육지로 향하게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가 육지 가까이 이르렀을 때 요나를 해변에 토해내게 하셨다. 만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자신의 절망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구원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은 사실은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도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 우리가 주목한 말씀들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겼더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3:9)” 이 말씀들은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문제의 출발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 또는 무관심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고 또한 이로 인하여 세속화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하여 허락해 주신 은혜들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이 상실들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길은 기도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현재 좌표를 확인하기 바라고 또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보다 더 온전함으로 나가기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요청되는지 귀를 기울이기 원한다. 그리고 주신 말씀의 인도하심에 따라 삶으로 세상에 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현재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주시고 또한 온전함에 이르기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 요청에 응답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