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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6. 35년째 조사한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山名)의 시대별 증거』 |
★1595. 35년째 조사한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山名)의 시대별 증거』 <11> 3. 조선전기(1392~1600) <2>
★6.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밀양도호부 山川 條에 재악산(載嶽山) 기록
○daum cafe 밀양광장 게시일자 : 201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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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악산(載岳山) 증거
○山川 條에 재악산(載岳山) 기록되어 있으며 년도(시기)는 1481년(성종 12)입니다. 사진에 보시면 밀양도호부 山川 條에 載嶽山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88. 동국여지승람 발문(跋文)에 임금이 강조한 산천(山川)과 김종직의 감수(監修)
○daum cafe 밀양광장 게시일자 : 201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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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시기) : 成化(성화) 21년(1485년, 성종16년)
◎山川(산천) 부분을 강조한 왕명(王命) 전교(傳敎) 내용
<전략>山川(산천) 및 古實(고실)에 관한 것들은 더러 빠져서 소략한 듯하고 여러 사람들의 작품 중에는 거칠고 잡스러운 것도 꽤나 있으니 경들이 의당 다시 讐校(수교)하여 바로 잡아서 책이 精當(정당)해지도록 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凡例(범례)는 일체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를 본받아서 하라" <후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동국여지승람 발문(跋文)을 작성(跋文 내용)
①成化(성화) 21년(1485년, 성종16년) 3월에 上(상)이 승정원에 명하여 지금의 평안도 관찰사 臣(신) 成俔(성현), 충청도관찰사 臣 蔡壽(채수), 臣(신) 宗直(종직)을 부르게 한 다음 宣城府院君(선성부원군) 臣(신) 盧思臣(노사신) 등이 올린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내 보여 주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 전교(傳敎) : 임금이 명령을 내리다] " 이 책은 祝穆(축목)의 編書(편서)에 의거하여 그 중요한 사항들을 제기하고 겸하여 詩文(시문)까지 채집해서 널리 찾아 광대히 기록해 놓았으니 국가의 문헌에는 참으로 도움된 바가 있다.
②그러나 그 사이에 山川(산천) 및 古實(고실)에 관한 것들은 더러 빠져서 소략한 듯하고, 여러 사람들의 작품 중에는 거칠고 잡스러운 것도 꽤나 있으니 경들이 의당 다시 讐校(수교)하여 바로 잡아서 책이 精當(정당)해지도록 기해야 한다.
③그리고 그 凡例(범례)는 일체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를 본받아서 하라" 하였다. ④그래서 신들은 명령을 듣고 황공하여 마침내 경복궁의 홍문관에 局(국)을 개설하고 지금의 典翰(전한) 臣(신) 李昌臣(이창신), 副正(부정) 臣(신) 申從濩(신종호), 正郞(정랑) 臣(신) 金孟性(김맹성) 등과 더불어 삼가 원고를 열람하여 刪輯(산집)을 가하다가 그 후 얼마 안되어 旱荒(한황)때문에 그 일을 중지하였다.
⑤그랬다가 다음해 2월에 다시 신(臣) 종직, 臣(신) 창신, 신(臣) 종호에게 명하여 그 작업을 마치도록 하였는, 이 때 교리 신(臣) 李宜茂(이의무), 부교리 臣(신) 兪好仁(유호인), 수찬 臣(신) 崔溥(최부) 등도 서로 이어서 일을 함께 하였다.
⑥그리하여 그 山川(산천), 城廓(성곽)과 樓臺(누대), 廟刹(묘찰)에 관하여는 計吏(계리)나 邸主(저주)를 찾아 조사하고 建置(건치)와 풍속, 인물, 고적에 대하여는 여러 史(사), 子(자), 集(집)에서 질정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빠진 것들은 기재하였으며 序(서), 記(기), 詩(시), 銘(명)들로서 연혁, 創修(창수), 풍토, 景致경치)에 관계가 있는 것들은 혹은 그대로 두고 혹은 더 보태기도 하였으며 관계된 것이 아닌 경우에는 모두 산삭하였다.
⑦그리고 諸司(제사)의 관직과 州郡(주군)의 姓氏성씨)와 邊徼(변요)의 烽燧(봉수) 같은 것은 특별히 주상의 재가를 받아서 중요한 사항만을 첨입시켰다.
⑧그리고 天文(천문)의 분야는 또한 漢書(한서)를 상고하여 平壤條(평양조)에 기록하였고 각읍의 속현 및 향, 소, 부곡 등으로서 지금은 폐해져서 촌락이 된 곳들은 모두 고적에 붙였고, 兩界(양계)의 邊塞(변새)에 가까운 地分(지분) 및 해외에 있는 대마도 등의 섬들에 대해서는 또한 지경이 연접한 땅에 붙였다.
⑨그리고 券首(권수)의 總圖(총도)에는 祀典(사전)에 실려 있는 嶽瀆(악독), 名山(명산), 大川(대천)을 기록하였고, 八道(팔도)의 각 도에는 州縣(주현)의 鎭山(진산)만을 기록하였으며 그 四至四到(사지사도)는 모두 도면에 부착하였다.
⑩그러고 보니 산삭한 곳이 비록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다 보탠 것이 실로 많았기 때문에 다시 55권으로 고쳐 만들었는데 모두 8개월에 걸쳐서 완성하였다.
⑪臣(신) 宗直(종직)은 삼가 생각컨대 중원의 땅은 비록 치우친 지방의 작은 고을이라도 圖志(도지)가 있지 않은 데가 없으므로 만일 찾아서 책을 만들려고 한다면 매우 쉽게 해 낼 수가 있다.
⑫그런데 우리 동방의 경우 삼국시대 이래로 朝廷(조정)에도 오히려 簡籍(간적)이 없는 지경인데 더구나 郡邑(군읍)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지금 이 編書(편서)가 이루어진 것은 俗諺(속언)의 견문들을 주워 모은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고 버리고 취하고 산정한 것도 그 타당함을 얻지 못하였다.
⑬그러나 이 강역 안에 소재한 고금에 걸쳐 이미 드러난 자취들이 精粗巨細(정조거세)를 막론하고 한번 책을 펴면 일목요연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비록 대명일통지에는 감히 비길 수 없으나 方輿勝覽(방여승람)에 비한다면 실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⑭그러니 이 책을 四方(사방)과 후세에 널리 보도록 한다면 반드시 작은 도움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박순문 변호사의 “점필재 선생 발문 중, 산천 편을 강조한 내용에 붙이는 글”
위 글에서 보듯이 당시의 성종이나 신하들이 매우 신중하게 山川 부분을 다룬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종직은 고향이 밀양이고 밀양에 관한 시, 그 중에서도 재악산(載岳山)을 넣은 시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재악산(載岳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으며 밀양의 지리나 지도에 특별히 신경을 썼을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국여지승람에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라고 기재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 행력
<前略>
38. 성종 16년(을사 1485년, 55세)
○1월,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홍문관제학 성균관사에 제수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 남평 문씨(南平文氏)와 서울 명례동(明禮洞)에서 혼인하다.
○왕명으로 성현(成俔), 채수(蔡壽) 등과《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정하다가 가뭄으로 인하여 중지하다.
○여름, 병으로 사직하고 밀양으로 돌아오다.
○9월, 첨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다.
○10월, 가선대부 홍문관 제학에 제수하고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니, 왕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다
39. 성종 17년(병오 1486년, 56세)
○3월, "예문관 제학"이 되다.
○왕명으로《동국여지승람》을 다시 편찬하여 12월에 탈고(脫稿)하고, 여지승람발(輿地勝覽跋)을 짓다.
○7월, 아들 김숭년(金嵩年)이 태어나다
<後略>
★66.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나온 『재악산(載岳山)영정사(靈井寺)삼층석탑개수비문, 일명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에 재악산(載岳山) 산명 기록
○daum cafe 밀양광장 게시일자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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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6.2 밀양 표충사(靈井寺) 삼층석탑 보수공사 시 출토된 석비(石碑)인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 일명 개수탑기비』에 삼층석탑의 보수 내용을 새긴 비문의 제목은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岳山靈井寺也), 일명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입니다
◎년도(시기) : 홍치(弘治) 4년 = 서기 1491년
◎비문 내용 :
①이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의 탑으로서 탑 속에서 비문과 함께 발견된 여러 기(基)의 불상은 신라시대의 시대별로 층위가 확인되는 것으로 조선시대 성종 년간인 1491년(홍치 4년)에 기울어져 영정사의 조사(祖師)님들께서 삼층석탑을 보수를 하고 보수를 한 내용을 새긴 비(碑)입니다. 이 비문의 우측 첫줄에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岳山靈井寺也)”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이 산의 이름은 재악산(載岳山)이고, 이 절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이다” 라는 뜻입니다.
②재악산(載岳山)이라는 수없이 많은 증거 중에 하나의 증거인 이 돌 비문의 증거와 같이 표충사 뒷쪽 창공에 제일 높이 솟은 해발 1189m인 사자봉의 명칭은 천황산(天皇山)도 재약산(載藥山)도 아닌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라는 것입니다
③비의 제원(諸元) 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❶서문(비문의 머리 글자) :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嶽山靈井寺也)
❷제 원 : 넓이(59cm), 높이(68cm), 두께(10cm)
❸재 료 : 석재(石材)❹글씨체 : 명조체❺글자 형태 : 음각(陰刻)
❻비문 기록 연대 : 홍치(弘治) 4년❼기록된 총 글자수 : 119자 정도
❽대략 확인된 글자수 : 95자 정도(미확인 글자24자 정도)
❾개수비문 출토 날자 : 서기1995.6.2
출토지 : 재악산 영정사 삼층석탑 (현재의 "표충사 삼층석탑"내)
보관 장소 :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 유물관
◎개수비문 원문 내역 (상태)
아래의 비문(碑文)의 원문(原文)은 510년 동안, 지하에서 석재(石材)에 함유된 물질이 녹고 부식되므로써 음각된 글자도 일부 부식되어, 정확한 원문(原文:글자)의 확인은 탁본 등의 방법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육안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육안으로 확인된 글자와 돌이 부식(腐蝕)되어 확인이 불가능한 글자는 "동그라미"로 표시하여 글자의 순서대로(원래 세로로 새긴 글자를 가로로 적음) 다음과 같이 공개합니다. 그리고 확인된 글자도 일부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 이 개수비문의 명칭을 기록한 글씨는 지금도 명확하게 보입니다.
◎원문 : 한글
명 재악산 영정사야(비문의 서문)/홍치사년 신해 이월 일 개수 탑기/부①탑개창②③경위퇴락기연비구④/⑤동⑥비구문일신료목일견유중신지/지이진한⑦수⑧우⑨성조지휘처/⑩⑪정⑫심⑬의⑭⑮㉮거대중백/팔여㉯일야선종대선사계㉰백동㉱㉲시/도㉳지조시주㉴산주서동/㉵주㉶오/화만/각기설인
◎원문 : 한자 : 비문의 글자는 세로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새겨져 있슴
名 載岳山 靈井寺也/弘治四年辛亥 二月日 改修塔記/夫①塔開창②③傾危頹落旣然比丘④/⑤同⑥比丘文一信了木一見有重新之/志以振義于興(⑦)遂成(⑧)造指揮處/⑩⑪正⑫心⑬義⑭⑮㉮居大衆百/八餘㉯日也禪宗大禪師戒㉰百同㉱㉲施/都㉳智照施主㉴山主徐同/㉵主㉶午/禾万/刻記雪印
◎원문중 한자 확인 불능 글자로서 원문과 유사하게 보이는 글자 :
①사(四),전(典) ②치(치),복(卜) ③어(於) ④?/⑤남(南),학(學) ⑥웅(熊) ⑦흥(興),오(奧) ⑧성(成)/함(咸) ⑨착할 숙의 古字 ⑩? ⑪장(掌),도(導)/⑫의(義),재(載) ⑬滿(만) 洪(홍) ⑭母(모),丑(축)⑮王(왕),玉(옥)/㉮착할 숙의 古字(고자) ㉯自(자),迫(박) ㉰起(기),定/(정) ㉱來(래),表(표),木(목) ㉲刹(찰),耕(경),親(친)/㉳術(술) ㉴欣(흔),欠(흠) ㉵? ㉶能(능),造(조)
★87. 524년 만에 드러난 『재악산(載岳山) 영정사(표충사) 삼층석탑 개수비문"의 탁본』
○daum cafe 밀양광장 게시일자 :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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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년도(시기) : 1491년
②개수탑기비 행방불명과 찾은 경위 :
❶1995.6.2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일명 개수탑기비)가 표충사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후에 그 해에 행방불명이 되어 손흥수와 도재국이 비를 찾아 7년여를 헤매다가 2002.4.5 무이거부 스님이 꽃나무를 심기위해 표충사 담장 부근 땅을 파다가 땅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해 가을 무렵에 도재국은 표충사유물관 관람대 아래에서 우연히 이 비를 발견하여 탁본을 하려 했으나 표충사 측은 비가 닳는다고 사진조차 찍는 것을 금지하여 탁본은 전혀 할 수 없었고, 그 이후로 손흥수와 도재국이 표충사에 수십 번을 가서 비문을 확인했습니다
❷그 이후 2015년 4월에 산중 토굴에 주석하시던 무이거부 스님이 그 탁본 사진을 도재국과 손흥수에게 주셨습니다. 개수탑기비가 표충사삼층석탑에서 발견된지 무려 21년만에 도재국과 손흥수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비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정식 명칭 : 재악산(載岳山) 영정사(靈井寺) 개수비(改修碑)
①서문(비문의 머리 글자) :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嶽山靈井寺也)
②제 원 : 넓이(59cm), 높이(68cm), 두께(10cm)/③재 료 : 석재(石材)
④글씨체 : 명조체/⑤글자 형태 : 음각(陰刻)/⑥비문 기록 연대 : 홍치(弘治) 4년
⑦기록된 총 글자수 : 119자 정도/⑧대략 확인된 글자수 : 95자 정도(미확인 글자24자 정도)
⑨개수비문 출토 날자 : 1995. 6. 2
⑩출토지 : 재악산 영정사 삼층석탑 (현재의 "표충사 삼층석탑"내)
⑪보관 장소 :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유물관
⑫일반인 : 유물관 개방 시 일반인 관람 가능
◎개수비문(일명 개수탑기비) 탁본 상태 :
도재국과 손흥수는 탁본을 하면 비문을 모두 확인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탁본을 보니까 우리가 눈과 손가락 지문으로 확인한 비문 내용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7.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밀양도호부 山川 條에 재악산(載嶽山) 기록
○daum cafe 밀양광장 게시일자 : 2015.02.24
○daum → 밀양광장(재악산 산명증거 게시판), 속성 → 주소(URL) :
◎문헌 내용 요약 :
○山川 條에 재악산(載岳山) 기록/○년도(시기):1530년(중종 25)/○시대:조선/○ 성격:관찬 지리서/○편저자:이행,윤은보,신공제,홍언필,이사균/○권수·책수:55권 25책/○소장처:규장각 도서,
◎신증동국여지승람 내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 신증동국여지승람
다음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캡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의 밀양도호부 편의 사진입니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 사진 1 ] 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원문"의 첫 페이지 화면입니다
[ 사진 2 ] 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원문"의 산천(山川)조(條) 페이지 화면입니다
[ 사진 3 ] 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번역문"의 첫 페이지 화면입니다
[ 사진 4 ] 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번역문"의 산천(山川) 조(條) 화면입니다
①위와 같이 밀양 표충사 뒷편에서 가장 높은 산의 이름이 재악산(載嶽山)입니다. 載嶽山은 약자로 載岳山으로도 표기합니다. 특히 돌이나 나무에 판각할 때는 주로 약자로 새기기도 합니다.
②載嶽山은 봉우리 명칭으로 사자봉(獅子峰)이라 하며, 높이는 1189m입니다. 사자봉이라 하는 이유는 표충사의 유물관과 표충사당의 앞마당(광장)에서 북쪽으로 재악산(載嶽山) 정상을 올려다보면 산 정상에 거대한 사자 한 마리의 표충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자봉이라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③사자봉에서 생겨난 지명이 전국에서 가장 넓은 고산습지인 사자평고산습지(獅子坪高山濕地)와 밀양 산동초등학교의 분교인 "사자평 고사리학교"입니다. 현대화의 물결에 밀려 고사리학교는 오래 전에 폐교가 되었습니다. 위와 같이 우리 민족의 최고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재악산이라고 명백하게 적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울산의 향토사학자였던 이유수가 천황산일식명설고찰 즉, 천황산이 일본식 명칭인가를 고찰한다. 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작성하여 민족의 명산인 載嶽山을 말살하고 그 자리에 天皇山이라는 일제식(日帝式) 산명을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유수는 "천황산이 민족의 산명이다" 라고, 황당한 주장을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민족의 수많은 지리문헌에 기록된 載嶽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산명인 載嶽山을 말살하는 민족 정서에 맞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은 행위입니다. 사실이 이런 데도 불구하고 울주군과 울산광역시 측은 이유수의 주장을 근거하여 載嶽山을 말살하고 天皇山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④2015.12.4에 국토교통부 산하의 국토지리정보원에 소속된 국가지명위원회가 지명심의를 할 때 국가지명위원 15명이 심의에 참여하여 11명의 국가지명위원이 울산 측의 天皇山이 주장이 맞다 하고, 4명의 국지명위원은 밀양 측의 載嶽山이 맞다고 심의를 했습니다. 우리는 울산 측과 그 당시 국가지명위원 11명에게 묻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우리 민족의 수많은 지리문헌에 기록된 載嶽山 산명과 표충사의 경내에 있는 개수탑기비와 경자갑보월비에 새겨진 載岳山과 밀양 영정사(표충사의 옛 이름)에서 증보하여 간행한 원각경(圓覺經) 등에 새겨진 載岳山과 지금 밀양 표충사 일주문에 걸어놓은 현판에 기록된 재악산 載岳山과 또 지금 표충사 산문에 걸어놓은 산문의 현판에 기록된 載嶽山이 제1봉인 사지봉으로서 현행 지도상의 천황산의 위치입니다. 이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이 어디로 갔습니까? 속 시원하게 대답 한번 해 보십시오. 이러고도 2015.12.4에 여러분들이 "지명(산명) 심의"를 바로 했다고 하겠습니까? 제발 속 시원하게 대답 한 번 해 보십시오. 21세기 대명천지에 그런 지명심의가 어디 있습니까?
⑤민족역사의 진실을 보전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할 최고의 위치에 있는 여러 지도자 여러분!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10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 청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민족을 참혹하게 유린한 일제천황을 위한 또 식민지 공고화를 위한 상징인 천황산이 아닙니까?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위해 조작한 일제잔재 천황산을 그토록 붙잡고 있어야 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재악산 #수미봉 #도재국 #재악산 표충사 #사자봉 #載嶽山 #載岳山 #재악사 #載嶽寺 #載岳寺 #영정사

첫댓글 박순문 변호사는
●밀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장과
●밀양문화원 부원장을 역임했으며
●다음 카페 밀양사람을 통하여 밀양의 수많은 향토사에 대한 조사 내용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151.『 이덕무(李德懋 :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지(卷之) 55 앙엽기(盎葉記) 二중 "해인사(海印寺)의 장경(藏經)"의 배부처에 載岳寺 기록
위에서
장경(藏經)이란
팔만대장경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