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0일 연중 제 32 주간 수요일 - 감사(Eucaristia)와 구원
송명희라는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그렇듯이 얼굴과 몸이 비틀어져 거울을 보기도 싫었습니다. 몸이 그래서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서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 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은 장애인 학교 건립을 추진 중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부터 나병은 죄의 상징이었고 나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세례로 상징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 받는다는 보증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송명희 씨는 비록 개신교 신자지만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그녀를 바뀌게 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하느님의 공평함’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찬미 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가끔 미사시간에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억지로 나와 있는 듯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분들을 의외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미사는 파견한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감사(Eucaristia)’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으면 미사가 아니고 다른 이들이게 주님을 전하려는 사랑이 없다면 미사는 그 사람에겐 헛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미사는, 따라서, 오늘의 치유 받고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미하기 위해 제대 앞에 모이는 이는 비로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에 얼마나 인색하고 감사하기가 어렵습니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다고 느낄 불행한 순간에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양의 찬가를 지어 자연과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시는 그 분이 눈이 멀어 보이지 않을 때였다고 합니다. 눈이 멀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 분을 찬미하였기에 성인이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문구를 보았습니다.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그대, 사랑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바로 관계입니다. 말을 못 해도 엄마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찬미도 바로 이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하나만으로 능히 찬미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그분이, 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공동체 의식?
어떤 신부님께서 “요즘 주일만 다가오면 난 비가 와 주도록 기도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가족 나들이를 나가기 때문에 성당 자리가 많이 비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예로,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공동체의 화목을 도모하는 길일까요?
개신교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며,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믿느냐’입니다.
성경에서도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사도들은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줄 알고 그 믿음은 더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나병환자는 1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병이 고쳐지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제에게 보이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한 사람의 말만을 믿고 길을 떠난다는 것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병환자가 이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돌에 맞아 죽을 확률도 많았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병이 고쳐지지도 않았는데 길을 떠났다는 것은 커다란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마 그랬기에 10명 모두의 나병이 도중에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러 온 외국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나병이 나을만한 믿음이 있었지만, 구원받을 믿음이 있었던 사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줄 알았던 한 명의 외국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올바른 말이기는 하지만 참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라고 하며 믿음보다는 실천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웃을 심판하고 미워한다면 참다운 믿음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행동만 하면 구원받는 것일까요?
오늘 바오로 사도도 성령을 통하여 꾸준히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즉, 위선적인 선행을 하면서 그것이 믿음이나 사랑으로 하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외로워 사람을 자꾸 찾고 만나려고 하면서 그것이 사람을 사랑해서 그러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면서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밭에서 두 명이 함께 일을 하고,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아도 한 사람씩만 데려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하느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때,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이 양이냐 염소냐에 따라 심판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처럼 좋은 활동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의 물로 자신을 씻고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라고 했더니 어떤 사람은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며 기도를 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혼자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이 기도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당연히 그 공동체 사람들과도 친하지 못하고 서로 간의 불화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화목하려면 자주 만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더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부족한 사람들끼리 자주 만나야 싸움밖에 더 하겠습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이 없는데도 계속 오랜 시간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랑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주일이라 함께 여행가며 친목을 다지는 것보다 아이는 주일학교에서, 부모님은 미사 안에서 자신들의 본질을 더 변화시키는 것이, 오히려 오랜 시간 기도하지 않고 함께 있는 시간을 더 가지는 것보다 가정을 더 사랑가득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래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공동체가 사랑가득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한 사람, 그 공동체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는 한 사람이 더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어떤 때는 오늘 나머지 아홉을 떠나 돌아온 그 외국인처럼 공동체를 떠나 홀로라고 기도할 줄 아는 그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