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인터넷뉴스 2011-08-29 오후 1:59:33
내 고장을 찾아와 문인들이 쓴 글을 대할 때면 무척이나 반갑다. 내가 느낀 그 이상의 글맵시에 감동하고 고향의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발자취를 쫒아가며 고향정서가 묻어있는 글을 찾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세련되지 못하고 어설픈 필자의 생각과 느낌을 대신한 문인들의 글을 옮겨본다. 내 고향이 무대인지라 이들의 글 속엔 향토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내용도 담고 있어 글쓴이의 문학적 재능은 물론 향토사를 공부 할 수 있는 정감 가는 글이 아닌가 한다.
내 고장 역사와 문화를 되새김하는 향토자료로 읽어주길 기대하며 글을 옮긴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모방은 천재의 어머니' 라는 말에 힘을 얻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DMZ연구소장(함광복)이 냉전의 유적지 (DMZ)를 돌아보며 금강산 철도 얘기를 적은『관광혁명 금강산전기철도』다.
관광혁명 금강산전기철도
"감영 안(營中)이 무사(無事)하고, 시절이 3월인 때, 화천(花川)의 시냇길이 금강산(楓岳)으로 뻗어 있다. 행장을 간편히 하고, 돌길에 지팡이를 짚고, 백천동을 지나서 만폭동 계곡으로 들어가니, 은(銀) 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고운 용의 꼬리 같은 폭포가 섞어 돌며 내뿜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퍼졌으니, 멀리서 들을 때에는 우렛소리(천둥소리)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이 날리는 것 같구나."
지금 관동별곡의 그 길 발자국을 밟으며 금강산전기 철도가 따라가고 있다. 그 옛날 일본의 구상은 그 철도를 외금강까지 연장해 안변에서 양양으로 이어진 동해북부선과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영락없는 강원도 관찰사 송강의 순회로(巡回路), 관동별곡의 그 길인 것이다. 그러나 철원 유곡리에서 한 번 끊기고 다시 김화 암정리에서 마저 끊긴 그 길로 이제 전철은 가지 않는다.
금강산전기철도. 그 냉전유적은 그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철원 역에서 출발한 금강산 전철은 사요, 동 철원, 동송, 양지, 이길 역을 지나 6번째 역인 정연 역에 도착했다. 철원에서 정연리 까지는 18km. 몇 군데 잡초에 묻힌 녹슨 다리 허리엔 ‘금강산 가는 철길’이란 흰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철도는 정연리에서 한탄강을 건너갔다. 철교는 ‘금강산 90키로’란 흰 글씨를 허리에 붙이고 강을 건너 민들레 벌판에 당도했다. 이토록 슬픈 듯, 애달픈 듯 이름을 가진 지명이 있을까. 그러나 민들레 벌판엔 민들레가 피지 않는다. ‘민들레 벌판’은 전쟁이 빚어낸 지명이다. 전쟁 전엔 거기 그런 이름을 가진 벌판은 없었다.
1987년 여름, 철원군지 편찬위원들은 생뚱맞게 등장한 ‘민들레 벌판’이라는 지명을 놓고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그 벌판에 나뒹구는 현무암 덩어리, 천연두 자국보다도 더 박색으로 얽은 숭숭 구멍 뚫린 구멍돌, ‘곰보돌(variolite)’에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 돌은 고열에 견디다 못해 온몸에 다닥다닥 발진을 일으키는 천연두를 앓은 어린아이 얼굴이었다. 바위마다 돌마다 온통 새까맣게 타다 못해 온몸에 가스가 빠져나간 구멍으로 박박 얽어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남남서에서 북북동 방향으로 양분하고 있는 추가령 열곡대, 그 불안한 협곡에서 3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했다. 평강 서남쪽 5km 거리에 솟아 있는 오리산(鴨山) 그리고 경원선 검불랑역 부근 680고지였다. 철원과 평강, 이천, 김화, 회양에 엄청난 현무암대지를 만들었다.
한탄강이 이 용암대지를 갉아내 곰보 돌을 끊임없이 남쪽으로 굴려 내렸을 것이다. 한탄강에 커다란 현무암 돌덩어리 들판이 형성됐다. 철원사람들은 그 구멍 숭숭 뚫리고, 박박 얽은 돌덩어리들을 ‘구멍돌’이라고 불렀다. 나중엔 ‘구’자도 빠졌다. 그냥 ‘멍돌’로 고쳐 불렀다.
멍돌로 뒤덮인 벌판 '멍돌 들' 은 마을에서 멀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위 벌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먼 '먼 멍돌 들' 이 됐다. '구멍돌' 도 '멍돌' 이 되는 판에, '먼 멍돌 들' 은 어느새 '먼들' 이 됐을 것이다.
이 지방의 방언음운은 'ㅓ' 'ㅕ'를 'ㅔ' 로 발음하는 버릇이 있다. 철원이 낯선 군인들에게는 '먼들' 이 '멘들'로 들렸을 것이다. 미군은 작전지도에 이 '먼들'을 'Mendle'로 표기했다.
어떤 이들 귀에는 영어로 옷을 갈아입은 ‘먼들’이 ‘민들레’로 들렸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걸 ‘민들레’로 읽기도 했을 것이다. 정작 이 민들레 벌판엔 민들레가 피지 않는다.
민들레 벌판의 신화
민들레 벌판을 동서로 가르며 한탄강이 남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고 DMZ와 금강산전기철도가 한탄강을 건너 나란히 민들레 벌판을 남북으로 가르며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DMZ와 금강산전기철도와 한탄강이 만나는 그 민들레 벌판 언덕은 그 옛날 시인묵객의 체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창랑의 물 맑으면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던 굴원의 어부사를 민들레 벌판에서 만난다는 것은 참 의외이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월탄(月灘) 황근중(黃謹中)은 조선조 광해군 원년(1608) 광해정란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정연리 민들레 벌판에 정사를 짓고 하필 어부사의 시구를 따다 '창랑정(滄浪亭)' 이라고 편액 했다.
그러나 지금 민들레 벌판에서 그 이름은 너무 호사스럽다. 병자호란을 겪던 인조 13년 육진서 돌아오던 월탄의 외손 정대화(鄭大和)는 외할아버지가 지은 창랑정에 투구와 갑옷을 벗어 걸어두었다. 청나라 병사는 '조선 장수의 집' 이라며 창랑정을 불태웠다. 월탄의 5세손 참봉 황손(黃遜)이 할아버지의 그 창랑정을 복원했으나 6・25전쟁 와중에 전소됐다.
창랑정은 혼자 멋을 부리기가 쑥스러운 듯 한탄강가의 육모정(六牟亭), 무릉정(武陵亭), 적벽(赤壁), 약수(藥水), 월탄(月灘), 백운봉(白雲峯), 풍혈(風穴)을 모아 '정연 8경'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여기가 월탄이고 저기가 백운봉이라고 짐작 될 만 한 곳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전나무 숲이 사라진 ‘정연 8경’은 별 볼일 없는 바위 언덕이다.
금강산전기철도는 이 바위언덕 위에 현대판 전설 하나를 새겨놓았다. 철길 없는 금강산전기철도변에서 천연덕스럽게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전선휴게' 의 사연은 이렇다. 전선휴게소 주인 김영범・김순희 부부는 민통선마을 정연리 출신들이다. 멍돌 바위 틈새로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이었다.
동네오빠와 동네동생은 남몰래 한탄강 멍돌 바위 뒤에서 마주 앉았다. "오빠는 희망이 뭐야?" "나는 저 푸른 민들레 벌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 거야." 마침 남진의 노래 '님과 함께' 가 공전의 히트를 하고 있었다. "오빠의 사랑하는 우리 님은 누군지 참 좋겠다." 동생은 그가 누군지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오빠는 숨이 막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고 동생도 숨이 막혀 더 이상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남편은 연애시절 약속을 지켰다. 민들레 벌판이 개간되기 시작됐다. 남편은 군청을 찾아가고, 군부대에 애원하며 10여 년을 매달렸다. 그리고 전선휴게소를 지었다. 정말 '푸른 민들레 벌판 위에 세워진 그림 같은 집' 이었다. 하필 왜 전선휴게소일까? 언젠가 끊어진 저 철길이 이어져 열차가 오게 될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미리 휴게소를 세운 것일까?
민들레 벌판에서도 철길은 농로로 변해 있었다. 농로는 유곡리에서 끝났다. 북쪽의 오성산과 남쪽의 성제산 사이에 넓은 개활지가 펼쳐졌다. 철길이 그 DMZ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무심히 DMZ 한가운데를 지나 구 김화읍 읍내리를 향해 다시 남쪽으로 빠져 나오게 될 것이다.
읍내리 앞으로는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50리 밖 금성에서 흘러오는 강이다. 그 옛날 금강산 가는 철길과 도로는 모두 이 강을 거슬러 나란히 북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길들은 지금 암정리에서 모두 끊겨버렸다. 남대천 철교마저 철책선 앞에서 무너져 있었다.
그동안 금강산전기철도는 역과 역 사이를 5리, 10리 간격으로 아기자기하게 이어져왔다. 철원~사요(四要)1.6~동철원 3.2~동송(東松) 6.0~양지(陽地) 10.3~이길(二吉) 14.2~정연(亭淵) 17.5~유곡(楡谷) 21.5~금곡(金谷) 24.5~김화(金化) 28.8km. 그 남한 땅 10개 역은 지뢰밭에 풀 섶에 묻혀있다.
그리고 북한 땅 14개 역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광삼(光三) 33.0~하소(下所) 36.3~향정(杏亭) 40.1~백양(白楊) 45.8~금성(金城) 51.0~경성(慶城) 54.0~탄감(炭甘) 59.6~남창도(南昌道) 65.6~창도(昌道) 67.6~기성(岐城) 75.3~현리(縣里) 82.7~도파(桃披) 90.0~화계(花溪) 94.7~내금강(內金鋼 ) 116.6km.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는 말은 옳다. 1944년 이후 열차는 마의태자의 망국한(亡國恨)이 서린 단발령을 넘어가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일본은 창도에서 내금강까지 50km에 이르는 오로지 관광 목적의 이 사치스런 철도를 걷어내 군수물자로 조달했다.
그 후 금강산 전철은 금강산까지 가지 못했다. 나머지 역들도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의 전쟁물자 수송을 끝으로 모두 사라졌다. 철원~내금강 간 116.6km 구간 가운데 지금 전철이 움직이는 곳은 없다.
사라진 전철, 그 냉전유적이 복원된다. 우선 남쪽 구간 철원~유곡 간 22.9km를 복원키로 했다. 이 사업에 투입될 예산은 437억 1,000만 원이다. 산술적으로 그 다섯 배인 2,200억 원을 투입하면 전구간의 복구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북한은 북쪽 구간을 복구할 의사가 없을 것이고, 재원조달 방법도 없을 것이다. 결국 투자비용이 고스란히 남쪽 몫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것도 북한이 문을 열어줄 때만 가능할 것이다.
반조각도 못 되는 5분의 1 조각 금강산 전철 관광열차는 당분간 철원~유곡 간을 왔다 갔다 하며 DMZ관광이나 하게 될지 모르며, 전선휴게소 김씨 부부는 승차권을 팔며 조금 일거리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금강산 전철의 복원, 그것은 잃어버린 반세기 세월을 복원하는 것이다. 번득 의문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있다. 누가, 왜 금강산 전철을 놓았을까.
어떤 기록은 금강산전기철도 건설은 창도 일대에 무진장으로 묻혀 있는 유화철이 발단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은 이 유화철을 어떻게 본국으로 반출할지를 찾고 있었다. 일제는 전략물자 조달을 위해 적재적소에 제련소를 세우는 정책을 채택, 1933년 10월 함경남도 흥남 흥남제련소를 세웠다. 진남포제련소, 장항제련소와 함께 이 땅의 3대 제련소였다.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됐다. 창도 일대의 유화철을 철원으로 끌어내면 경원선을 통해 흥남으로, 다시 일본으로 손쉽게 반출할 수 있었다. 철춘(鐵春)철도주식회사의 '철춘' 은 철원과 춘천의 첫 자를 따다 붙인 이름이다. 1921년, 그 회사가 철원 역에서 추가령 열곡대를 따라 가장 토목경비가 적게 드는 경제성 있는 철도부설을 착수했다. 1926년 창도까지 철도가 이어졌다. 철춘 철도주식회사가 부설한 흔적은 몇 가닥 남지 않은 철로에 아직도 남아있다.
유화철 화차는 증기기관차가 끌고 다녔다. 창도를 출발한 기차는 철원으로 나와 경원선을 타고 평강고원을 넘어 흥남제련소로 들어갔다.
창도에서 내금강까지는 지척의 거리이다. 창도에서 유화철광이 터지자 금강산 관광수요가 폭발했다. 1931년 7월 1일, 창도~내금강 간 50km에 이르는 이상한 철도가 부설됐다. 전력을 공급하는 전기철도가 등장했다. 전기기관차는 내친김에 철원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철원역에는 이 철도를 운영하는 금강산 전기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총 연장 116.6km, 소요시간 4시간, 역무주재원 역 14개, 간이역 14개소를 갖춘 관광철도가 등장한 것이다.
1937년도 통계(철원읍지)에 따르면 하루 8회를 운행하던 그해 이 철도를 이용한 승객수는 15만 3,992명이었으며, 수하물량은 1만 6,420개에 1만 423톤. 당시 운임이 쌀 한 가마 값에 맞먹는 7원 56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관광수입을 빚어내던 철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금강산 전기철도사는 수백 번 곱씹으며 되새겼던 얘기다. 금강산전기철도를 복원하면서 묻히고 사라진 진짜 스토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강 물줄기 화천(花川)의 기적
1915년 송강 정철의 그 시내길 화천을 일본인 실업가 구메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가 걷고 있었다. 54세의 이 공학박사는 거의 공상 수준의 구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회양군 안풍면 판유리(板踰리)에서 북한강 상류의 큰 물줄기를 발견했다. 강은 표고 500여 미터 높이에서 흐르고 있었다.
만폭동 계곡을 빠져나온 강은 백천동을 지나, 회양 땅을 휘돌아 창도를 향해 남행하고 있었다. 강은 화천, 춘천, 가평을 지나 양수리에서 남한강을 만나 서해에 이르기까지 320km, 무려 800리 길을 흐르고 있었다.
태백산맥, 그 등줄기가 바다로 가는 그 길을 멀게 하고 있었다. 판유리에서 통천 동해바다까지는 48km,고작 100리. '구메(久米)' 에게는 그게 매력 있었다. 태백산맥에 굴을 뚫어 화천의 물고를 그곳으로 튼다면 수 백 미터의 낙차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해 쪽 가파른 경사지로 떨어뜨린 물로 수차를 돌린다면 1만kw 정도의 전력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다섯 달 째 화천을 측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시도해보지 못한 아시아 최초의 유역 변경식 발전소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은 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고운 용꼬리 같은 폭포, 멀리서는 우렛소리, 가까이서는 눈 날리는 것 같다." 던 그 물줄기를 에너지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에너지의 공급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전기철도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철도로 관광객을 금강산으로 끌고 온다는 구상이었다.
'구메(久米)'는 기상천외의 돈벌이를 생각해 놓고 있었다. 서쪽으로 흐르던 물줄기를 동으로 돌려놓는 것 그것은 물을 에너지로 둔갑시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금강산유람을 금강산관광이라는 돈벌이로 바꿔놓는 혁명이었다.
한반도를 디자인 하던 일본인들에게 금강산은 무척 매력 있는 땅이었다. 경원선 노선을 결정할 때도 금강산 경유는 논란거리였다. 통감부철도관리국이 1909년 호남선 철도 건설계획을 내놓자 조선총독부 내부에서는 '호남선보다는 경원선이 먼저' 라는 건의도 함께 제기됐다.
금강산을 철도로 연결시키겠다는 야심을 내비친 것이다. 당시 서울과 관북, 관동을 잇는 교통은 두절상태로 봐야 한다.
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경원선 철도부설은 절실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할 경우 일본, 만주지방에서까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어 철도 경영상 흑자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경원선 철도부설 당위성이었다. 따라서 "경원선 노선은 반드시 금강산 아래쪽으로 바싹 붙어서 통과되도록 부설해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금강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건설해야 한다." 는 주장들이었다.
그 노선은 아마도 송강이 관동으로 가던 그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강이 말과 가마를 타고 가던 그 길은 철도를 적합하지 않았다. 금강산에 가까운 회양 쪽은 너무 높은 산들이 가로 막고 있었다. 도무지 철도가 철령을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경원선은 금강산을 포기하고 삼방고개를 넘는 길을 택했다. 거의 100km를 우회해 동해안으로 넘어갔다.
증기기관차로는 험준한 산을 넘어 금강산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아쉬움을 '신작로' 로 달랬다. 경원선의 평강과 원산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신작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금강 장안과 외금강 온정리 까지 직영 자동차를 운행했다.
증기기관차가 갈 수 없는 금강산. 아마 '구메(久米)'는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는 그을음 나지 않고, 힘 좋고, 젠틀한 전철을 생각해 냈다. 이미 서울 한복판에 전차가 활개 치며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 교통수단은 낯익어 있었다. 다만 어디서 그 전력을 공급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송강의 금강산으로 가던 그 화천에서 유역변경식 발전소의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드디어 대역사가 시작됐다. '구메(久米)'는 금강산 철도 부설허가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작은 기관차와 작은 객차 그리고 궤도가 좁은 경편철도(輕便鐵道)였다. 경편철도는 금강산 산길에 알맞은 철도였다.
그의 신청서대로라면 강원도 화천 땅으로 철도가 지나갔다. 그는 철원~화천 82마일, 화천~말휘 19마일의 노선을 결정했다. 총 자본금은 500만 엔, 본사는 동경에 두기로 했다. 연간 영업수익은 32만 4,229엔. 따라서 충분히 흑자경영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금강산편철도의 주식 모집은 대인기였다. 총 5,325명이 응모해 신입주식 1만 790여 만 주를 모집했다. 모집예정을 350배나 초과했다. 연간 50만 엔씩 넣기로 한 불입자금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아졌다.
1921년 9월 5일, 판유리(板踰리) 화천에서 통천군 백양면 중대리(中臺里)까지 추지령(楸地嶺)밑으로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중부 영서지방에서 관동과 관북지방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해발 643m의 추지령을 넘어 통천읍으로 내려갔다. 서쪽 70리의 철령(鐵嶺:685 미터)과 함께 국도가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유명한 고개이다.
착공 2년 만인 1922년 9월 4일, 추지령 밑으로 길이 1,442m짜리 굴이 뚫렸다. 회양군 회양면・풍안면의 북한강 상류의 물이 땅 속에 묻힌 철관을 관통해 동해안 가파른 산비탈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923년 11월 14일, 중대리(中臺里) 발전소 1호기가 완공되고 166.9km 거리에 66kv를 송전할 수 있는 목주(木柱) 송전선로가 세워졌다. 이듬해 1월 30일부터는 경성전기가 금강산 전철로부터 수전을 개시했으며, 그해 8월 1일 철원~김화 구간에 전기철도 운전을 개시했다.
그리고 1925년 4월, 중대리 발전소가 7,000kw규모로 마저 준공됐다. 중대리발전소에서 내버린 방수는 향천리(香泉里)발전소로 들어가면서 2천6백kw를 생산하게 됐다.
1927년 2월, 720kw 규모의 판유리(板踰里) 발전소가 준공됐다. 판유리 발전소는 저수지의 방수를 이용하는 방법인 언제식(堰堤式) 발전소다. 1928년 11월 22일, 중대리 발전소에서 1차 발전을 끝내고 방수된 물을 이용한 향천리(香泉里)발전소가 준공됐다. 3,250kw 규모였다.
때맞춰 1931년 7월 1일 철원 역에서 내금강산역에 이르는 116.6km의 전철 구간이 완전 개통됐다.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는 이들 구간의 공사를 8회에 걸쳐 준공했다.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 ▲1925년 12월 20일, 김화~금성(金城) ▲1926년 9월 15일, 금성~탄감 ▲ 1927년 9월 1일, 탄감~창도(昌道)▲1929년 2월 9일, 창도~현리 ▲ 1929년 4월 15일, 현리~화계(花溪) ▲ 1930년 5월 15일, 화계~말휘리(末煇里) ▲ 1931년 7월, 말휘리~내금강. 금강산수력발전소에서 생산해낸 전기는 모두 1만 7천 570kw 규모였다.
장진강수력발전소의 25분의 1, 조진강수력발전소의 3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력은 금강산전기철도가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객차 15량, 화차 18량을 끌고 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오히려 전력이 남아돌았다.
사실 금강산전기철도에 필요한 전력은 중대리, 향천리 판유리 발전소의 생산량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태백산맥 동해안쪽 산비탈에 계단식 발전소를 건설한 것은 전철 수요뿐만 아니라 남는 전기를 경성으로 송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6년 11월 20일,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는 4번째 발전소 신일리(新日里) 발전소(2,600kw)를 준공했다. 마지막으로 건설됐지만 추지령 밑으로 빠져나와 1차 중대리 발전소의 터빈을 돌리고 쏟아져 내려오는 북한강 물을 받아 2차 발전하는 하늘 아래 2번째 발전소인 셈이다.
전력은 더 남아돌았다. 따라서 서울 방면으로 2천 5kw의 전력을 송전하면서 철원・포천・평강・통천 일대의 8천 8백여 호가 전깃불을 밝혔다. 광산, 정미소 등 모두 2만 9천여 호가 금강산발전소의 전기혜택을 받았다. 비로소 구 철원읍이 밤마다 불야성을 이뤘다던 그 전깃불의 출처가 밝혀진 것이다.
금강산, 신문명까지 열린 그곳은 전기불과 관광, 돈과 환락, 모든 것이 풍부한 곳이었다. '꽃을 잡고' 와 '능수버들' 을 불러 인기를 모았던 평양 명기 선우일선은 그 무렵 '조선 팔경 가' 를 내놓았다.
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관광열차는 매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5시 10분 막차까지 7회를 운행했다. 그러나 성수기엔 8회까지 연장 운행했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소요시간은 4시간에서 4시간 30분, 요금은 6원이었다. 그 후 대동아전쟁의 전쟁자원으로 내금강 일대의 철로를 걷어가 마지막 관광열차가 운행되던 때는 최고 7원 56전까지 올라갔었다.
서울 용산역에서 경원선을 타고가다 철원 역에서 금강산 전철을 갈아타자면 자그마치 운임은 21원42전이나 됐다. 당시 목수 일당이 1원 90전, 쌀 한 말 값은 3원 50전이었다.
최초의 금강산수력발전소는 온 땅의 꿈과 낭만과 사치의 상징으로 태어나던 금강산관광산업을 가동할 에너지원으로 탄생했었다. (출처 : 2009년6월호-냉전의 유적지 DMZ를 찾아서)
조선시대 철원지도
古地圖에 나타난 철원지명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는 '광여도(廣輿圖)' 는 180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이다.
회화식 지도로 제작된 이 지도는 모두 7책으로 구성돼 있고 그 중 강원도 ‘철원부(鐵原府)’편에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호구, 병사, 전, 답, 창(倉), 면, 경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지도와 달리 풍수지리사상에 근거한 경관 인식이 잘 나타나 있어 지도에 묘사된 산줄기를 중심으로 독해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고지도를 쫒아 옛 철원부와 김화현의 역사도 공부하며 고향의 정서를 느껴보자.
제1편 鐵原府 지도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땅의 고암 산에서부터 삼부연 폭포와 용화산 그리고 좌측에는 지금의 경기도 행정구역인 永平界가 들어있어 방대했던 鐵原府의 행정구역과 생활상을 알 수 있다.
갈말면(乫末面) 객사(客舍) 거북로(去北路) 거안협로(去安峽路) 경로(京路) 고남산(古南山) 고석정(孤石亭) 고암산(高巖山) 고을파면(高乙坡面) 관인면(官仁面) 궁왕고도(弓王故都) 금학산(金鶴山) 대현(大峴) 도덕진(道德津) 동변면(東邊面) 마산(馬山) 면산(面山) 무장면(畝長面) 보개산(寶盖山) 봉(烽) 북관정(北寬亭) 북면(北面) 삼봉(三峯) 삼부연(三釜淵) 상현(霜峴) 서변면(西邊面) 선창(船倉) 소리산(所里山) 소현(小峴) 송내면(松內面) 송현(松峴) 심원사(深源寺) 아(衙) 어운동면(於雲洞面) 용화산(龍化山) 요동백사우(遠東伯祠宇) 일봉산(日峯山) 적석사(積石寺) 창(倉) 평원(平原) 풍전역(豊田驛) 할미산(割眉山) 향교(鄕校) 험흘진(險屹津)
철원부는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북면, 묘장면과 포천군 관인면, 연천군 신서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다. 고을은 내륙의 광활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도에도 平原이란 글자를 넣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주기를 보면 밭이 논의 열 배를 넘고 있어 아직도 논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후삼국시기 태봉의 궁예가 都城를 만들었던 곳을 弓王故都로 표시하였다. 이 도성에는 外城과 內城이 있었는데 모두 土城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휴전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다.
읍치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고 풍수적 관념이 들어가 있다.
그 아래에 있는 遼東伯祠宇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여진족 建州衛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8)를 배향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褒忠祠이다. 고을은 두 개의 큰 물줄기로 갈라진다.
지도 오른쪽이 임진강의 큰 지류인 한탄강이고 왼쪽이 마곡천이다. 철원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용암대지로 나오는데 오른쪽 한탄강은 바로 그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이다.
따라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 아래로 강가의 절벽이 이어지는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들고 있다. 孤石亭은 이러한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일찍이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았다는 기록이 전해오며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 민 호 : 3019호
○ 속 오 군 : 785명
○ 감 영 군 : 217명
○ 관할구역 : 동변면 외 9면
○ 기 타 : 성곽 없음. 창고 2개소. 나루터 2개소. 봉화대 2개소.
사찰 2개소
제2편 金化縣
지도 제작당시의 행정구역과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북쪽의 평강, 서쪽엔 철원 동쪽으로는 금성이니 철원 평강 금성 가운데 김화현이 들어있다. 낯 설은 금강산 길목의 水泰菴도 눈에 띤다.
가고개(加古介) 객사(客舍) 고산성(古山城) 남면(南面) 등고개(登古介) 마현(馬峴) 백치(白峙) 불정현(佛頂峴) 생창역(生昌驛) 서면(西面) 성조고개(成造古介) 소고개(小古介) 수태암(水泰菴) 아(衙) 애현(艾峴) 우관(郵館) 원북면(遠北面) 유림대첩비(柳琳大捷碑) 이동면(二東面) 주필봉(駐驆峯) 중현(中峴) 창(倉) 천불산(千佛山) 철원거로(鐵原去路) 초동면(初東面) 초북면(初北面) 충열사(忠烈祠) 충현산(忠峴山) 칠대암(七臺岩) 하고개(遐古介) 향교(鄕校) 현내면(縣內面)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김화읍, 서면, 근남면, 근동면, 근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다. 고을 동·남쪽의 물을 받은 남대천이 고을 서쪽으로 흐르는 한탄강과 합류한다. 지도에는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싸고,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겹겹이 감싼 전형적인 풍수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 있는 柳琳大捷碑는 병자호란 때 平壤兵使로서 이 고을에서 승리를 거둔 柳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忠烈祠도 이 고을에서 平壤監司로 있었던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또한 고개의 표시를 '古介'와 '峴'으로 표시하여 두 가지가 당시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충열사 아래쪽에 있는 郵는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종6품의 銀溪察訪이 머무는 곳으로서 生昌驛과는 구별 짓고 있다.
당시 민호는 철원부 민호(3019호)보다 적은 2257호로 적혀있고 감영군도 1/4 수준인 49명, 피난 곡 또한 철원부의 2838석 보다 적은 846석이어서 부와 현의 행정 규모를 알 수 있다.
○ 민 호 : 2257호
○ 속 오 군 : 266명
○ 감 영 군 : 49명
○ 경지현황 : 전 196결17부, 답 13결 45부
○ 기 타 : 피난곡 846석 , 驛 1(생창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