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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 왕 에글론과 사사 에훗
삿 3:12-18
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18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삿 3:12-19 / [사사 에훗]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 여호와께서 지켜보고 계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못된 짓만을 일삼았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무시한 채 못된 짓을 계속하자 여호와께서는 모압 왕인 에글론의 세력을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다. 13) 에글론이 암몬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함께 조약을 맺고 연합군을 구성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쳐들어와 종려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성읍 여리고를 점령한 것이다. 14)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18년 동안이나 모압 왕 에글론에게 짓눌려 지낼 수밖에 없었다. 15) 이스라엘 사람들이 견디다못해 여호와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자 여호와께서 그들을 건져내시려고 해방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다. 베냐민 지파 사람인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왕 에글론에게 자기들이 모은 조공을 갖다 바쳐 달라고 에훗에게 부탁하였다. 16) 조공을 바치러 가기 전 에훗은 길이가 한 자되고 양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칼을 준비하여 오른쪽 허벅지 옷속에 감추었다. 17) 그러고 나서 모압 왕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러 들어갔다. 에글론은 몸이 매우 비대한 사람이었다. 18) 에훗은 조공을 바친 뒤에 그 공물을 메고 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19) 그리고 그 자신도 길갈 부근에 돌을 조각하여 세워 놓은 우상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임금님께 은밀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하고 에글론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에글론이 `모두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왕을 모시고 서 있던 신하들이 물러가자
두 번째 사사 에훗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12-14)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딸 사이의 근친상간으로 나온 족속입니다(창 19:32-33).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압 족속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업신여겼던 모압 족속에게 무려 18년 동안이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모압 족속이 점령한 곳이 종려나무 성읍, 즉 여리고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제일 처음에 정복했던 곳입니다.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서 상징적 도시인 여리고를 이방 족속에게 다시 점령당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고통스러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를 세워주셨습니다.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15-19) 성경 인물 중에 왼손잡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에훗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에글론을 죽일 때 “왼손으로 찔러 죽였다”고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왼손잡이의 말은 ‘오른손이 묶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손에 장애가 있거나 마비가 되어서 왼손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에훗은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약한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베냐민의 뜻이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지파에서 오른손을 못쓰는 왼손잡이로 사는 것입니다. 가장 약하고 차별받는 사람이 세워졌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입니다. 원래 에훗에게 주어진 임무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오른손을 못쓰기 때문에 사람들은 칼을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모압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데 최적의 사람이었습니다. 굴욕적인 임무였지만 이 굴욕적인 임무를 통해 에훗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됩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그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실패하여 돌아가는 길에 수행원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길갈에서 에훗이 단신으로 다시 모압 왕 에글론에게 돌아갑니다.
적용: 에훗이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면 수치스럽게 조공 바치는 일을 맡은 것을 비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에훗은 이 굴욕적인 임무를 비관하지 않고, 이 굴욕적인 임무를 통해 비상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은 없습니까?
‘친구는 나를 바보로 만들지만, 원수는 나를 왕으로 만든다.’ 학창시절 친구가 나와 헤어질 결심을 하며 편지에 적어준 어느 책의 문구입니다. 나를 배려하는 말이나 주변의 칭찬에 빠져있으면 더 이상 발전이나 변화가 없이 현실에 안주할 수 있지만, 나를 적대하는 세력들의 험담이나 비평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의 변화의 기회로 삼으라는 말일 것입니다. 나에 대한 칭찬은 달콤하고 우리 모두는 칭찬에 목마른 사람들이지만, 때론 우리에 대한 비판을 수용할 줄 아는 모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바른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하면 이롭다”[사마천 『사기』의 류후세가에서]
< 설 교 >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삿 3장 12~23절 / 채규현목사
오늘의 말씀은 사사 에훗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사 에훗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주일학교에서 자주 가르쳐지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에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의 리스트에도 별로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과연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야기할 때 과연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전체 스토리를 쭉 보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이 언제나 사사기의 정해진 포뮬라(formula)입니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여기서 이 “또”라는 말이 의미가 있죠? “또 악을 행하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또” 죄를 짓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럴 때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케 하셨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언제나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것처럼 그렇게 넘어뜨리기를 원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막으시지 않으시면 우리들은 그 사탄의 밥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탄의 권세를 능히 이길 수 있고 사탄이 우리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정한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일부 허용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는 식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괴롭게 하시거나 어렵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허용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여하튼 “모압 왕 에글론이 강성하여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성입니다. 이 여리고성은 해저 400m에 있는 도시인데 요단강이 지나니까 물이 많죠? 거기 자체적으로 샘도 나옵니다. 그럴 때 거기에 많은 종려나무들이 있어서 바로 종려나무 도시라고 하는데, 모압 왕이 그곳을 다스렸다는 것은 모압이 대단히 강성했다는 말입니다. 요단 동쪽, 사해바다 동쪽에 여러 이방 족속이 사는데, 사해 바다 제일 아래쪽부터 이야기하면, 남쪽 끝에 사는 족속이 에돔 족속입니다. 그리고 사해 바다 중간쯤에 사는 족속이 모압 족속, 그 위가 암몬 족속입니다. 지금 요르단의 수도도 암만이죠? 아마 암몬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모압 족속이 얼마나 강성해졌으면 사해 바다 위쪽까지 와서 바로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를 점령한 것입니다. 대단히 강성했을 때입니다. 그 모압 나라가 18년 동안 여리고성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남방 지방을 지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의 소리를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사사 에훗을 세우십니다.
에훗은 어느 지파 사람입니까? 베냐민 사람입니다.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나옵니다. 아마 그 베냐민 지파는 왼손잡이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 다음에도 보면 계속해서 베냐민 지파에 왼손잡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왼손잡이라는 말이 우리말로는 왼손잡이이지만, 히브리적 표현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적 표현으로 여기 그대로 나온 말로 표현하면 ‘오른손을 못 쓰는 사람’, 그러니까 그 방식대로 이야기하면 사실은 왼손잡이도 장애인입니다. 제 아내도 왼손잡이입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자기가 왼손잡이인 줄을 모르고 살았어요. 밥도 오른손으로 먹고 다 오른손으로 하는데, 돈을 셀 때 보니까 왼손으로 세는 거예요. 지금도 양손잡이라도 우기는데, 사실은 양손잡이가 대개는 왼손잡이입니다. 에훗이 바로 그 왼손잡이라는 데에 아주 묘한 하나님의 작전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을 보통 오른쪽 허벅지에 찹니다. 이 칼 길이가 1규빗이면 보통 40~45cm 정도입니다. 허벅지에 이 칼을 찼어요. 부엌칼처럼 한쪽에만 날이 있는 게 아니고, 보통 전쟁에서 쓰는 것같은 양날칼을 찼어요. 검이라고 할 수는 없고 도(刀)정도 됩니다. 보통은 칼을 왼편에 차죠? 아마 그것 때문에 감추인 것을 찾는 경호원들이 왼편만 봤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처럼 무슨 금속 탐지기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경호원이 분명히 봤을 거예요. 혹시 뭐가 있나하구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흔치 않은 왼손잡이, 에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지략과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물을 같이 바치러 갔다가 나오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보내고 자기는 다시 왕궁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에글론 왕 앞에 가서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러니까 왕이 또 주변을 물리쳐요. 이것을 읽으면서 ‘참 어리석은 왕이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히 자기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속국의 사람이 와서 뭔가 고하겠다고 하는데 주변을 다 물리칩니다. 그리고 에글론 왕이 어떻다구요? 비둔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의 코미디언 중에 뚱뚱이와 홀쭉이가 있었는데 그들이 생각납니다. 그런 식으로 비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굳이 이것을 밝히는 것은 전체 이야기를 상당히 코믹하게 희화화하는 것입니다. 다 물리치고 왕이 앉아있습니다. 다시 아무도 없을 때에 에훗이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께 고할 것이 있나이다.” 그러니까 왕이 그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일어납니다. 자기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잇는 것처럼 기대하면서 일어납니다. 누구를 보고 뚱뚱하다고 합니까?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만 저는 보통 자기 구두끈이 안 보이는 사람, 구두끈을 맬 때 호흡조정하고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 심지어는 못 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몸을 일으켜서 세우는데 바로 그에게 왼손잡이가 왼손으로 오른편의 칼을 빼서 찌릅니다. 40cm 이상의 약간 긴 칼이에요. 아마 배를 찌른 것 같아요. 그런데 찌를 때 아주 세게 찌르니까 손잡이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뒤에 칼날이 나왔죠? 뺄 수도 없어요. 그래서 내버려두고 도망가는데, 끝과 앞의 손잡이가 기름이 엉기었다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23절까지 읽었지만 그 뒤에 24절, 25절을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와서 다락문이 잠겼음을 보고 가로되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그때의 신하들의 모습들도 여러분이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 나가라고 해서 나갔더니 안에는 조용해요. “접견이 끝날 때가 됐는데….”하면서 문을 열어보려니까 문이 잠겼어요. “아, 왕께서 발을 가리우시는구나.” 이것은 무슨 표현이냐면 화장실에서 큰일을 본다는 표현입니다. 그런 줄 알고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와요. 그 앞에서 조급해하면서 기다리는 신하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에훗은 그 동안에 도망가는 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다가 정 안되니까 문을 열고 보니까 왕이 칼에 맞아서 기름이 엉겨가지고 엎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말에는 안 나와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잘 안 나오고 히브리어에는 나와 있는데, 25절 뒤에 보면 “열쇠를 취하여 열고 본즉 자기 주가 이미 죽어 땅에 엎드러졌더라” 이건 참 재미없는 표현입니다. 원래는 거기에 “힌네이”하는 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KJV번역에는 “behold”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해서 보면 “짠~”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짠~”하는 것이요. 문을 열고 보니 “짠~”하고 자기 왕이 죽어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바로 그 대목입니다. 그때는 이미 암살자 에훗은 멀리 떠나갔죠.
이렇게 해서 전체 이야기가 있는데 도대체 여기서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주시려고 하시길래 이런 암살의 스토리를 성경에 적어놓으셨을까요? 암살자 에훗이기 때문에 그렇게 성경의 어떤 위대한 인물이라고 많이들 이야기를 안 합니다. 에훗이라는 이름을 자녀에게 붙인 가족을 본 적도 없고요. 뭐, 이삭이나 모세나 다니엘이나 다윗이나 이런 이름은 많이 붙이는데, 에훗이라는 이름 붙이는 사람은 못 봤어요. 별로 그렇게 선하지 않은 구절입니다. 바로 이러한 구절들이 있을 때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관점으로 바로 봐야만 하는데, 많은 경우에 여기서 잘못된 방법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잘못된 방법 두 가지를 제가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영해라고도 하고 무슨 신비적인 해석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영해입니다. 그래서 이 에훗의 검을 무슨 성령의 검이니, 말씀의 검이니 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성경 전체에서 이런 영해를 하게 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영해가 뭐냐면요,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볼게요. 영해를 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제사장은 누구고 레위인은 누구고 사마리아인은 누구고, 여관집 주인은 누구고…, 대개 여관집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해요.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남기고 간 두 데나리온을 뭐라고 합니까? 어떤 사람은 구약과 신약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말씀과 성령이라고 합니다. 어떤 게 맞습니까? 둘 다 맞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도하지 않은 내용을 굳이 단어에 의미를 붙이는 것이 영해입니다.
알레고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가 지금 예를 들었듯이 구약과 신약입니까, 아니면 말씀과 성령입니까? 어느 것도 바른 해석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는 거죠. ‘두 개니까 어떻게 하면 두 개가 맞을까?’ 속으로 고민하다가 그냥 붙이는 겁니다. 아무것도 맞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 데나리온 두 개는 사마리아인 그만큼 마음이 넉넉하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으로 자꾸 의미를 붙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기 강대상의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강대상도 있고 의자도 있고 꽃도 있고 스피커도 있는데, 이게 다 소품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기는 설교를 하는 곳이고,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설교가 중요한 것이지 ‘스피커가 어디 제품인가, 스피커가 왜 흰색인가?’ 여기에 굳이 의미를 붙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죠. 스토리가 있으면, 물론 구체적으로 봐야 할 구절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울 서신 같은 거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 때에는 대부분 거기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물품이나 그런 것들은 일종이 소품과 같습니다. 연극에서 소품을 가지고 하나하나 구체적인 의미를 따져나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그 세팅 속에서의 진정한 의미, 중요한 의미, 그게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고 그렇게 성경공부를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미국에 있는 저희 교단의 고시부에서 목사 될 사람들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제가 그 때 고시부 서기였는데, 그 때 고시부에서 문제를 낸 것이 에스겔서 47장 거룩한 강의 환상을 가지고 주해를 해서 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내고 제가 고시부 전체 위원들에게 공언한 이야기가 “만약에 이 내용을 주해하면서 발목 신앙, 무릎 신앙, 허리 신앙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전부 탈락이다.”하고 미리 공언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에스겔서 47장의 거룩한 강 환상을 설교하는 사람마다 발목 신앙, 무릎 신앙, 허리 신앙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내용이 뭡니까? 성전 문지방에서 생명수가 나와서 물이 점점 그 사람의 발목까지 차고, 무릎까지 차고, 허리까지 차고 전체를 덮쳐서 온 사방에 생명을 주어서 생명이 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환상이에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전에서부터 출발해서 온 세상을 창궐하게 해서 생명을 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계시록 20장 이후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에서 그 일이 진짜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보좌로부터 물이 나옵니다. 생명수가 나옵니다. 그래서 온 예루살렘 성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물을 공급하고 생명나무가 그 생명수로 살아납니다. 그 일이 마지막에 있을 일이에요. 그러면 지금-종말이 시작되고 아직 마지막 종말이 오기 전인 지금의 상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인 지금에는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냐면 예수님이 증거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명수가 솟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우리가 바로 주의 성령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생명수가 나옵니다. 우리를 살리는 생명수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완전히 인간적인 면으로 바꿔서 발목 신앙, 무릎 신앙, 허리 신앙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발목 신앙은 뭐라고 합니까? 자기 발로 교회는 다니는 신앙, 이렇게 설명하죠? 그러면 무릎 신앙은요? 무릎을 꿇는 거니까 자기가 알아서 기도할 수 있는 신앙까지를 말한다고 하죠? 그러면 허리 신앙은 뭐라고 들었습니까? 허리에 온갖 힘이 들어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이라고 이야기하더라구요. 제가 어느 부흥회에서 들은 이야기는요, 그 말씀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드디어 깨달았다고 하는데, 허리를 보니까 지갑이 있더라는 겁니다. 지갑이 거기 있으니까 지갑을 내놓는 것이 허리 신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로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설교 듣고 성도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이야, 말씀을 기가 막히게 쪼개네.” 의미를 붙이지 말아야 될 곳에 의미를 붙여가면서 계속 없는 것을 기어이 파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의미를 집어넣는 것이 쪼개는 겁니까? 저는 그런 식으로 한다면 말씀을 모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성경 전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니까, 문맥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봐야 되니까요. 하여튼 구약에서 나무만 나오면 무조건 십자가래요. 엘리사가 나무를 던져서 도끼를 뜨게 하는데 그것도 십자가고, 어디에 나오든 나무는 무조건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곤란합니다. 원래 그것을 의도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요. 마치 우리가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암호문이 그 밑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요. 그러나 성경은 글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글은 “글”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을 가지고 쓰는 사람, 읽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공통적인 어떤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성경을 아무렇게나 해석한다고 됩니까? 그것은 내가복음이죠. 문맥과는 상관없는,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영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요. 왜 이 영해가 문제있다고 하냐면요, 바로 영해가 익숙해진 성도들에게 이단이 들어오는 겁니다. 이단이 쓰는 방법이 뭡니까? 이단도 성경을 사용합니다. 성경을 사용하면서 성경의 구절을 굳이 보여줘가면서 이게 무슨 의미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전부 영해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의미를 갖다 붙여서 쓰는 겁니다. 그런데 참 비통할 일은 이단들이 그렇게 성경을 가지고 영해를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성도들의 마음을 끌어가려고 할 때에 성도들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영해에 너무 교회에서 익숙해져 있어요. 수많은 강단에서 영해로 설교를 하니까 영해에 익숙해 있어요. 그런데 영해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성경에 의미를 붙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원래의 성경의 뜻이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요. 아까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게 구약과 신약입니까, 아니면 말씀과 성령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붙이는 거예요. 허리 신앙을 돈이라고 붙이든지 일이라고 붙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붙이는 거예요. 거기에 너무 익숙해지니까 이단들이 그런 식으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데도 아무런 의심없이 끌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경계합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 지역에 왜 이단들이 이렇게 흥행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회 책임이고, 일차적으로 목사의 책임이고, 일차적으로 설교자의 책임입니다. 성경을 바로 보는 눈을 키우지 않은 것입니다. 영해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영해가 쉬워요. 공부를 안 해도 돼요. 잠자리 속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생각하다가 “아, 그렇지! 지갑 여기있구나.” 생각나면 되는 겁니다.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려면 성경 말씀을 가지고 끊임없이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뭔가 머릿속에서 스쳐가는 생각하나로 그냥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영해입니다. 성경에서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지역에서 횡행하고 있는 이단이 하고 있는 게 뭡니까? 성경공부입니다. 이단이 제일 먼저 접근하는 것이 “우리 성경공부하자”하고 접근합니다. 그들이 성경공부하는 내용이 뭡니까? 성경 가지고 이야기해요. 가장 대표적인 출발점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네 군데에 씨를 뿌렸는데 세 군데는 나지 않고 한 군데에만 씨가 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 뒤에 보면 “천국의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고 너희에게만 허락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이용합니다. “봐라, 마음 밭이 좋아야 되는데 마음밭이 나쁜 사람은 다 이해 못하고, 마음 밭이 좋은 사람 일부 소수만 이해하는데 그게 우리다.”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게 우리다. 그게 우리니까 저 교회 사람들은 다 성경 모르고 우리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만 십사만사천에 들어가는 거다.” 그렇게 꼬입니다. 그리고 온갖 영해로 성경을 여기다 붙이고 저기다 붙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영해를 하는 데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전부 갖다 뜯어 붙여서 자기들만 십사만사천이고, 자기들만 선택받은 백성이고, 교회 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무식한 나머지 세 개의 밭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와, 이제까지 몰랐던 성경이 확 트이네?” 이렇게 표현합니다. 전부 영해인데, 전부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한 것인데요. 너무나 마음이 아파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전부 어떻게 설교를 해 왔냐면 “마음밭을 갈라, 좋은 밭이 되어야지 가시덤불 밭이나 다른 밭이 되면 안 된다.”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니까 그게 금방 먹히는 겁니다. 거기는 밭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씨를 뿌리는 사람과 씨 뿌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씨의 생명력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천국의 비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정말 중요한 비유인데, 그것은 다 어디가고 마음밭을 갈라는 도덕적으로 박혀있기 때문에 이단이 거기에 스며드는 겁니다. 제가 비로소 이야기하지만 바로 거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 사람으로서 우리 교회 장년 몇 사람, 청년 몇 사람이 은밀하게 출교했습니다. 앞으로도 거듭거듭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허락없이 성경공부 다니지 마십시오. 앞으로도 그런 분은 계속해서 주의해서 보고 유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계속해서 성도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각자 바르게 성경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지 않은 거예요. 여러분이 각자 성경을 보면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저 설교나 교회에서 하는 그런 성경공부나 여기에만 의지하려고 하니까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영해라는 것은 바로 그 이단의 문을 열어놓고 성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성경의 의도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것이 교회에 심각한 독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잘못은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주의 안에서는 별로 나오지 않고, 특히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런 면을 많이 씁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경우에는 “독재자의 최후-독재자는 이렇게 기필코 멸망하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독재자를 물리친 것처럼 우리도 독재자를 물리치자!” 이런 내용의 설교도 있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교회나 사회복음 이야기하는 곳에 가면 이런 것이 비일비재하게 설교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잘못 보면 또 어떤 때에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봐라, 왜 혼자 있느냐? 같이 있을 때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데 혼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독재는 반드시 위와 같이 무너뜨려야 한다. 하나님도 독재는 싫어하신다!” 이런 설교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환경과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이 느끼는 대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안목으로 우리 입장에서 그냥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성경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우리나라 이야기를 한 가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1931년 4월 29일,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하에 있을 때 일본 왕의 생일날입니다.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내용을 정리한 것을 잠깐 읽어드리겠습니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 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의 주인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하였다. 4월 29일 홍구 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쳐졌다. 윤봉길 의사는 새 양복에 새 구두로 정장을 하고 유유히 입장하였다. 도시락을 들고 물통을 메었으며 오른손에는 일장기를 하나 들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본인 유지쯤 되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누구 한사람 감히 검문하는 자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메고 있는 물통과 도시락이 그가 고향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항전의 폭탄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봉길 의사는 태연하게 군중 사이를 헤치고 식장 뒤편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단상 위에는 그 당시 상하이 파견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 중장, 9사단장인 우에다 중장, 그리고 주중공사인 시게마쓰,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이런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있었다. 마침내 그는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렀다. 폭탄을 던지기에 가장 알맞은 자리로, 벌써 수차례나 현장 답사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국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영원하여라.~’ 윤봉길 의사는 수통용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후 앞사람을 헤치고 나가 온힘을 모아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마쓰의 면전에서 폭발했고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그 폭발로 상하이 파견군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는 즉사했다.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 중장은 실명했고, 9사단장인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짤렸다. 주중공사였단 시게미쓰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 이외의 사람들도 중상을 입었다…” 피바다가 됐죠? 죽었죠, 실명했죠, 다리가 짤렸죠, 중상을 입어 다 쓰러져 있는데, 그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그 다음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독립운동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개석은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중국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어 국민당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게 하였다.” 지금 임시정부청사가 바로 홍구 공원 앞에 있습니다.
자, 이 이야기를 보고 여러분은 어떻게 느낍니까? 이 글을 읽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한 마디로 통쾌함입니다.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실명하고, 모든 사람이 다 뒤집어 있는 그 처참한 순간에 한국 사람이 느끼는 것은 통쾌함입니다. 특히 그 당시에 그 일본인들에게 온갖 고초를 당했던 그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통쾌함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저 일본을 무찌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들 때, 바로 이 스토리와 에훗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십시오. 에훗의 이야기를 읽거나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느낄 것 같습니까? 칼이 들어가고, 기름이 엉기고, 그 뒤에 신하들은 허둥대고 하는 그 모든 광경들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느끼겠냐는 것입니다. 그들도 분명히 우리처럼 통쾌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그 사람들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구나.’ 이 사실을 느끼는 것이죠. 바로 이런 것은 마치 옛날의 멋진 스토리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특히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이방 족속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뭘 느끼겠습니까? 아주 이상하리만치 에글론이 어리석죠? 다 내보내고, 귀를 기울이고, 일어서고 하다가 결국 칼에 찔려 죽습니다. 그런데 자기 왕궁 가장 한복판에서 죽는데도 신하들은 그것도 모르고 허둥대고 있고 “화장실 가셨나?”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런 광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박수를 치면서 박장대소하는 것입니다. 다시 듣고 싶은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새겨지겠습니까? ‘하나님이 에훗을 세우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과 고난, 분명히 하나님이 아시고 반드시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에 구원하시겠구나.’ 이 마음이 들겠죠. 그들은 18년 동안이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18년 후에 마침내 그들을 압제하던 에글론 왕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에글론 왕을 죽이는 장면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칼끝이 나왔고, 손잡이가 끝까지 들어갔고, 기름이 엉겼더라….” 저는 이 장면을 보면 서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서부 영화보면, 왜 악한 사람은 한결같이 그렇게 악한지 모르겠어요. 좋은 사람은 꼭 그 악한 사람에게 먼저 당합니다.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자기 아내가 죽고, 온 가족이 죽고, 모든 일이 다 벌어집니다. 그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저 놈을 죽여야 하는데….’ 이 생각이 들게끔 만듭니다. 그런데 결국 제일 마지막에 누가 나타납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나타납니다. 나타나서 악인과 대결해서 드디어 악인에게 총을 쏴서 죽일 때 악인이 죽는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나옵니다. 막 피가 튀기도 하고, 온갖 괴상한 표정을 짓고 괴로워하면서 죽는데, 그 때 극장에서는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칩니다. 마치 현실인 것처럼 통쾌해서 “와!”하면서 박수를 쳤어요. 그 박수치는 대목이 바로 거기에요. “칼날이 뒤까지 나오고 기름이 엉기고...” 이 대목입니다. 이러면서 마지막에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지킬 것이며, 자기 백성을 괴롭게 하는 그 모든 사람들을 기필코 심판하시고, 이렇게 아주 괴롭게 심판하시리라.”하는 약속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어리석음들을 다 보면서 박수치고 웃으면서도 그 마음 속 깊이에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가 깊이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역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심지어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마침내 구원하시는 분이시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날에는 우리의 대적은 이렇게 처참하게 멸망할 것이구나.’ 이 스토리가 사실은 성경 전체 스토리의 축소판입니다.
성경 전체 스토리가 그거 아닙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하고, 악인은 처참하게 멸망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스토리를 통해서 느낌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하나 뒤집어 파봐야 나올 게 없어요. 단어 하나 가지고 이 의미를 굳이 따지려고 해도 나올 게 없습니다. 이것은 전체 하나의 스토리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 안목으로 읽어보십시오. ‘왜 이렇게 암살이 있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윤봉길 의사를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게 아니죠. 바로 그 면에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에 ‘역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반드시 승리케 하시는 분이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면이 성경을 보면서 다시 새롭게, 새롭게 나타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오히려 성경을 읽음으로 더 큰 힘을 받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왼손잡이 사사
삿 3장 12~20절 / 류영모목사
I. 약점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알렉산더 플래밍(Alexander Flenming)에게 노벨 의학상을 안겨준 페니실린은 의학계의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플래밍의 약점 때문에 얻은 거룩한 수확이었습니다. 플래밍은 좀 덜렁거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가 영국 런던 의과대학 교수시절 - 당시 어린아이들에게 유행하던 부스럼 치료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실험접시마다 세균을 배양하여 오랜 세월동안 연구하다가 깜빡 뚜껑을 닫지 못하고 퇴근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하고 보니까 실험접시마다 새파란 곰팡이들이 끼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랜 시간 동안의 연구가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그 접시들마다 잔뜩 배양돼 있던 세균이 온데 간데 없어진 것입니다. 푸른 곰팡이가 세균을 몽땅 잡아 먹어버린 겁니다. 바로 그 푸른 곰팡이로부터 페니실린을 발명하게 되었고 폐렴 늑막염 등 모든 우리 몸의 염증을 제거하는 탁월한 약품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훗날 플래밍은 그렇게 술회했습니다. “나의 발명은 위대한 실수가 가져다 준 축복이었다. 나의 성격상 약점이 오히려 내게 복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흔히 약점이 없는 사람, 재능이 탁월한 사람, 남다른 장점이 많은 사람만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람만 좋아하시고 그런 사람만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풍성한 재능과 재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만 쓰신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진 장점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들이 가졌던 장점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에만 집착하고 썩을 세상일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론 장점이란게 하나님 앞에서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미남자였습니다. 부자요 걸출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향락과 즐거움에 빠져살다 죽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내 인생은 말라빠진 낙엽 한 장과 같구나. 나는 버러지처럼 살았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슬픔과 고독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권세를 한 몸에 지니고 세계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떠들었지만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살 때에 “나는 세상에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사렛 예수여 당신의 나라만이 영원합니다. 당신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았던 솔로몬 왕이 있습니다. 부인이 천명이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모든 궁을 금으로 장식했습니다. 지혜와 지식,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남다른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그렇게 고백하지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1:2-3)...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이 땅에 자신이 가졌던 장점 때문에 망해간 사람들의 얘기는 백과사전을 기록하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약점이 많은 사람, 평범하고 잘난 구석이 별로 없는 사람-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며 살았던 사람들,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말츠라는 심리학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95%의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약점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약점이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약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느냐 여하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링컨은 학력의 약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 곁에는 결정적인 장애를 통해 하나님께 쓰임받은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한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심각한 폐병을 앓은만큼 건강상 약점을 지니셨던 분입니다. 큰 교회를 이뤘다고 큰 인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 교단에서 지금 가장 큰 교회를 이루고 한국교회를 섬기는 세분을 꼽아 보면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 주안교회 나겸일 목사님 정도입니다.
세 분 다 건강상 큰 약점을 가진 분들입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폐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셨고, 나겸일 목사님은 간암으로 사선을 넘었던 분이고 하용조 목사님은 무려 6번 암수술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삭개오란 사람이 나옵니다. 직업상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체상의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고 사회적으로 고독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 때문에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큰 헌금을 드린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약점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II. 오른손 장애인 에훗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싫어하고 버린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9)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그리스도는 내 약한 것을 이용하여 강하게 역사하신다.
사사기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큰 약점을 지닌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또”란 말에 엑센트가 있습니다.
사사기를 살펴보면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나면 울면서 회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고 사사를 보내 구원하고 평안한 삶을 허락합니다. 인간이 조금 편안해지자 살만하다 싶으면 금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악된 길로 들어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시기 위해 모압 왕 에글론을 불러옵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입니다.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는 족속이요 더구나 모압 왕은 암몬과 아말렉과 함께 연합하여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종려나무 성읍” 여리고를 점령하고 무려 18년간 이스라엘로부터 조공을 받아 갑니다. 여기 종려나무 성읍을 빼앗아 갔다는 말은 모압이 당시의 경제요충지대 오아시스지대를 다 빼앗아, 먹고 살길조차 막막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에훗이라는 사사를 보냅니다.
본문에 의하면 에훗은 모압의 에글론 임금을 죽이기 전까지는 나라를 해방시킬 수 없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공물을 모아서 임금을 만나러 갑니다. 갈 때에 오른쪽 바지 주머니 속에 45cm나 되는 칼을 숨겨서 들어갑니다. 공물을 바치고 아부를 떠는 척 하다가 독대를 청하게 됩니다. 독대하는 자리에서 칼을 뽑아 에글론의 배를 찌릅니다. 칼이 얼마나 깊이 들어갔던지 칼 끝이 등 뒤로 튀어 나갔고 칼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기름이 엉겨 붙었습니다.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로 올라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내가 에글론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잠자던 백성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달려 내려가 일만명이 넘는 모압 족속들을 다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에훗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짤막하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두 번째 그는 왼손 잡이였다는 것입니다. 이 베냐민이라는 뜻이 퍽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벤”이란 말은 “아들”이란 뜻입니다. “야민”이란 말은 “오른 손”이란 뜻입니다. “베냐민”이란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힘이 있는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의 지파에 아들이 하나 태어났는데 왼손 잡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에훗입니다.
“왼손잡이”라고 번역된 이 말이 오른손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왼손을 잘 쓸수 있도록 훈련된 양손잡이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에훗이 왼손을 잘 쓰도록 훈련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우선 사사기 20장 16절에서 찾고 있습니다. 거기보면 에훗과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 가운데는 왼손을 잘 쓰는 700명의 특수요원이 나옵니다. 에훗도 이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왼손잡이”를 “양손잡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훗이 오른손 핸디캡을 가진 장애인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우선 히브리어 원어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왼손잡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isuy itter yad - yemino)”는 “오른손이 묶인 사람” “오른손에 제한이 있는 사람” 즉 오른손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에훗은 오른손이 힘없이 매달려 있었거나 조막손처럼 생겨서 누가 보아도 금방 장애인 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당시 장애인은 노예로도 팔려갈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쓰임받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공을 바치는 치욕스런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또 이 분명한 장애 때문에 모압왕 에글론도 아무 의심없이 에훗을 독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둔한 자”라고 된 이 말은 에글론 왕은 엄청난 거구였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이 괴력을 지닌 거구를 죽였다는 파격적 사건을 말한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베냐민 지파의 사람 에훗! 오른손의 아들이 오른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끝장난 사람이지요. 그 왼손잡이를 하나님이 들어 쓰셨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아들이 태어나면 당당히 힘있는 오른손 잡이가 태어나야 되는데 왼손 잡이가 태어났습니다. 오른손을 쓸 수 없는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힘있는 사람만 쓸 것이라는 세상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지요. 에훗 때문에 베냐민 지파에선 왼손을 잘 쓰는 특수병들을 훈련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이 위대한 일을 하므로서 위대한 칭찬을 듣는 역사가 아닙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하므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역사입니다. 할렐루야.
III. 약점을 강점으로.
당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각자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살던 시대였습니다.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살던 때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잘나고 똑똑한 사람, 용맹스럽고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을 뽐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시대에 메시지를 던지는 겁니다.
너희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느냐.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없는 자를 택하사 있는 자를 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택하여 높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그 메시지를 당대에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강한 자도 하나님이 버리면 망합니다. 약한 자도 하나님이 쓰시면 불가능이 가능해 집니다.
우리의 편견과 교만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이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에훗입니다. 한 성경학자는 에훗을 연구하다 말고 한 줄을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던 에훗, 그는 자신의 단점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그랬더니 주님의 오른손이 에훗의 오른손이 되었다. 하나님이 친히 에훗의 오른손이 되어 주셨다” 할렐루야.
약점과 부족함이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할 때 주님의 오른손이 에훗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의 오른손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나의 약점을 하나님께 맡겼더니 하나님이 나의 강점이 되어 주셨다. 이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에훗은 조공을 바치는 과정에서 모압왕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으나 기회를 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공을 바치고 돌아오는 길에 19절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을 지나다 말고 혼자 돌아와 에글론을 만납니다. 여기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 왜 사명이 되살아 났을까요? 왜 죽음을 각오하고 왕궁으로 들어갔을까요?
“돌 뜨는 곳”이란 건축현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우상을 만들어 상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그토록 우상을 파괴하라고 말씀하시고 할례를 행하시던 길갈 근처에서 말입니다. 열불이 날만도 했지요. 어쩌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이나 만들어 먹고 사는 이꼴이 되었단 말인가? 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 것이지요.
에훗이 “은밀한 일 - 은밀한 정보”를 드리겠다고 하니 에글론은 주위 사람들을 물리쳤습니다. 20절 “왕이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란 말은 쉬고 있었다는 말도 되고 화장실에 앉아 볼일을 보고 있었다는 얘기도 됩니다. 둘만 마주하고 있을 때 에훗이 “내가 말한 은밀한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당돌하게 말합니다. 놀란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준비한 칼로 그를 찔러 죽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그것이 뒤에서 나왔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무 놀라 똥을 쌌다는 말입니다. “놀라서 똥싸고 죽은 임금!” 치욕스런 죽음을 말합니다. 모압에겐 치욕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겐 통쾌한 일이지요.
에훗은 에글론을 죽인 후 다락방 문을 잠갔습니다. 에훗이 나간 후에 왕에게 가 보았더니 24절 “왕이 지금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라고 말합니다. 난외주에 “용변을 보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큰 볼일을 보신다고 말합니다. 왜요? 똥을 쌌으니 냄새가 밖에까지 났던 게지요. 그 사이에 에훗은 멀리 도망을 갔고 이스라엘 군사들을 모아 당황하고 있던 모압을 쳐 들어와 주둔군 1만을 죽여버립니다.
이 얼마나 상황이 기가 막히게 척척 맞아 떨어집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니 가장 큰 약점이 가장 큰 장점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컴퓨터처럼 정확히 돌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훗처럼 신체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신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환경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태어나고 자라온 배경에 약점이 있습니까? 약점에 갇혀 살지 마십시요. 허물이나 죄성 그리고 악습은 빨리 버리십시요. 또한 약점 때문에 낙심하지도 마십시요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시고 약점을 장점으로 삼아서 쓰시길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약점 때문에 콤플렉스 - 열등감을 가지고 살면 불평분자가 됩니다. 초라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약점있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연약한 사람, 흠있는 사람, 인생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주님, 십자가의 능력은 뒀다가 어디 쓰려고 당신의 약점을 끌어안고 근심하며 사십니까? 약점에 짖눌려 열등감에 시달리며 사십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아 가십시다. 십자가는 참 신비한 곳입니다.
십자가!
그곳은 죽음이 영원히 패한 곳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는 곳입니다.
죄인들에게 용서가 선포된 곳입니다.
죄인을 위한 용서가 대기하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용량은 인류 역사상 모든 죄인을 품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약점을 품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IV. 성령이 임하시면
에훗에게 “여호와의 영감” 성령이 임하셨다는 기록은 본문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사로 부름받았다는 말속엔 성령의 강림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말입니다.
1. 우리의 약점 위에 성령님이 임하시면 이제 우리는 약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약점을 제거해 달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나는 너의 약점을 통해 더 큰 일을 이루길 원하노라. 네가 겸손하여 평생 나를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내가 원하노라. 약점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려무나.
니이버(R. Niebuhr)라는 신학자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기도문이 나옵니다.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은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내게 주시고, 내가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게 주시옵소서.”
2. 성령님이 내 눈을 여시면 내 약점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약점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병들든지 건강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내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높아지든지 낮아지든지 내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약점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고칠 수 없는 약점 안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젊은이가 몹시 사랑을 했습니다.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남자 친구가 전쟁터에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군대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이 약혼을 했고 이 여인은 날마다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근무하는 조그마한 산지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한쪽 다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불구의 몸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와 결혼을 하겠지만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거짓으로 사망통지서를 그 여인에게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서 가까이 살지는 못하고 먼 곳에 살면서 몰래 몰래 이 여인을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결혼을 한다는 겁니다. 진정으로 축복하고 싶었습니다. 결혼식장에 도착했는데 이 여인이 휠체어에 탄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끌고 들어가 결혼식장에서 결혼을 하는 겁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자기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부족하다고 하나님을 피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부족한 사람을 들어 쓰실 것입니다. 내 한 다리 때문에 자학하고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두 다리 없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야 마실 것입니다.
3.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내게 임하면 약점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약점으로부터 해방을 얻으십시오. 오히려 그 약점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선언하는 겁니다. “나는 약점에 갇혀 살지 않는다. 나는 주 안에서 자유인이다.”
오래전부터 믿음안에서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집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그 가정에 장애아이가 한명 태어났습니다. 부인 집사님이 시집식구 얼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괜히 자신의 죄 때문에 이 아이가 태어난 것 같아서 남편 얼굴 보기도 민망했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아이의 언니가 학교에 갔다 오더니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엄마, 재 우리학교에 보내지마! 친구들이 날 보고 병신 언니래!” 큰 아이를 꾸중했지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흐느껴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이 딸의 무슨 죄 때문에 이런 무거운 짐을 우리가정에 맡겨 주십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습니다. “딸아, 장애 아닌 사람이 누가 있더냐? 몸에 장애가 있는가 하면 정신의 장애, 성격의 장애, 영적이 장애가 있는데 너라고 장애가 없더냐? 그리고 이 세상에 장애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더냐?” 그랬군요. 내가 장애인이었군요. 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딸아, 그 아이가 네 딸인 줄 알았더냐? 바로 나다. 나를 사랑하듯이 그 아이를 사랑해라. 나를 섬기듯이 그 아이를 섬겨라. 이 아이를 누구 집에 보낼까? 네가 사랑해 줄 것 같아서 너희 가정에 복주기 위해서 너희 가정이 나를 아껴줄 것 같아서 그 아이를 너희에게 맡겼노라. 나를 보듯 그 아이를 사랑해라.” 얼마나 눈물이 났던지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실컷 기도하고 방문을 열고 나올땐 이미 자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부끄럽게만 여겨졌는데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손잡고 밖에 나가지 못했는데 당당히 그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 갑니다. 파티장에 가서 귀여운 자기 딸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스스럼없이 볼에 키스를 하고 그 아이를 안고 좋아합니다. 이미 하늘을 나는 자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약점(弱點)을 약(藥)으로 삼아 강점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약점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나의 약점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까? 내 약점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도록 할까? 이것이 주의 백성들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내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V. 내 모습 이대로
제게도 여러분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약점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도 약점이 있고 여러분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어요. 주님 날 도와 주세요. 우리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디엘 무디가 복음을 전하고 봇짐을 싸고 있는데 한 소녀가 달려왔습니다. “선생님 나도 선생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쓰실는지 성경을 읽어보렴.” “선생님 저는 글을 배우지 못했어요. 성경을 못 읽어요.” “네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것을 내려 놓아봐라. 조그마한 헌금이라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써 달라고 기도해 보려무나.” “선생님 우리 집은 가난해요. 엄마 아빠한테 용돈을 못 탔어요. 가진 것이 없어요.” “네 몸을 하나님 앞에 바쳐보렴.” “나는 장애가 많아요. 나는 병이 많아요. 이런 몸도 하나님이 쓰실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실까요?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그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 그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길 원하신단다.” 이 아이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데 그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디엘 무디의 전도단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그 아이의 몸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중얼중얼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받으세요.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받으세요.” 거기에 영감을 받았던 엘리자 헤밀턴 여사가 조용히 시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를 땅에 떨어뜨리자 주워 읽은 사람이 생키입니다. 생키가 피아노를 두둘기며 거기에 곡을 붙였습니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곳마다 상처난 심령들이 치료를 받았고, 이 노래가 불려지는 곳곳마다 연약한 사람들이 새 힘을 얻었고, 절망에 사로잡혀 삶을 포기하려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고, 이 노래를 부르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주님 나를 쓰시겠습니까?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겠습니까?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픈 장애를 가진 에훗을 들어 거대한 체구에 온갖 권력을 가진 모압의 에글론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에훗이 일어날 때 이스라엘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짓눌려 살던 패배주의를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조롱하던 한 장애인을 하나님이 들어 못난 우리를 조롱하시는구나. 주여 용서하소서. 이 백성을 쓰소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 영광스런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장애를 이스라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을 에훗은 얼마나 찬양했을까요? 오늘 본문 마지막 30절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삿 3장 12~30절 / 양인국목사
1. 하나님은 죄 가운데 거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 모압의 왕을 강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는 우리의 대적들을 강하게 하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강하게 하시는 대적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들은 때로는 이웃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 질병, 환경 등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 모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대적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기 위하여 강성하게 하신 것들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는 고통스런 문제들 즉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강한 것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셨기 때문이고 그것들 자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강함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동안만 강할 뿐이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대적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기 위하여 대적들을 강하게 해 주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므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기 위하여 그들을 강하게 해 주셨다면 우리가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으므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싸움의 대상도 모압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모압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 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때까지 18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에글론의 지배아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성하게 하셔서 우리를 대적하게 하신 대적들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면 우리는 대적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적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물론 우리는 대적들을 만났을 때 해야 할 일이 있고 또한 대적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도 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대적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강성하게 해 주심으로 우리를 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 때 얻을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들을 강성하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많은 예들을 찾을 수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바로의 강성함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를 강성하게 해 주심으로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바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바로의 강함으로 인하여 출애굽을 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강하게 하심으로 다윗을 쫓게 하신 것 역시 사울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다윗을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의 결과를 볼 때 하나님께서 사울을 강하게 해 주신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동일한 예를 페르시아의 하만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하만을 강하게 해 주심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하만의 강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페르시아에서 안전과 자유를 보장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예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싸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언제나 승리는 대적들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강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대적하도록 하신 것은 대적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인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대적들이 우리를 칠 때 그들과 싸우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대적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서 그 뜻에 따라 행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대적들을 만났을 때 해야 할 일이고 또한 대적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대적들을 만났을 때 그들 혹은 그것들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강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치게 하셨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가 그것들과 싸워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적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해 주셨던 힘을 다시 취하여 가시도록 하고 대신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도록 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대적들의 재배 아래 고통스런 삶을 살 때마다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였던 한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3:15)” 이 말씀은 사사기에서 노래의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다. 즉 사사기 전체를 하나의 노래라고 한다면, 그 노래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역사를 그 노래의 한 소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한 소절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반복하여 부르는 후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죄를 범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은 그 자체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진정한 싸움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여기 하나님께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바로 그와 같은 의미로서 싸움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고통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고자 하는 행위를 싸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싸움을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이 대적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기도는 그 자체가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가게 해 주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도록 해 주고,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힘과 방패와 피난처와 구원으로 신뢰해 주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세속화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변화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는 삶에서 승리하면 결국 대적들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속적인 마음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싸움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 자체를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을 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워 주셨다. 우리는 여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기도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기도를 마치 기계에 코인(coin)을 넣으면 코인의 가치만큼의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그릇된 지식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도에 대한 갈등만 증폭 시킨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는 표현이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단 몇 번 기도한 행위를 표현한 언어이겠는가? 결코 그런 표현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모압의 에글론으로부터 지배받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글론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까지 18년 동안 기도한 행위를 부르짖음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한다. 언급한 것처럼 기도는 기계적인 과정이기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갖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도 하는 결단이 이루어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기도를 부르짖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화해 간다. 이런 기도를 부르짖음이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사사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모압의 지배아래 있든지 아니면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든지 또는 다른 어떤 나라에 지배를 받고 있든지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대적들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고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대적들에게 패하여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 나가 부르짖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해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