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얼룩소
이진희
엄마를 졸라 소풍을 가자
걸레를 깃발처럼 휘두르며 달리자
햇빛에도
공기에도
풀잎에도
닦아낼 얼룩이 없는 날, 믿을 수 없는 그런 날을 위하여
엄마는 얼룩소지만 엄마처럼은 싫으니까
걸레를 스카프처럼 목에 두르자
카펫처럼 부드러운 엉겅퀴 꽃밭에서 데굴데굴 구르자
엎어진 밥상, 부서진 창틀, 피 묻은 벽지
둘둘 뭉쳐 차고 놀자
울기만 하는 엄마를 닦아주자
엄마는 얼룩소여서
눈물로 얼룩진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지구보다 크고 푸르러 엄마가 얼룩소라는 걸 알기 전까지
바람처럼 날쌘 팔다리로 뛰놀았고
들판처럼 투명한 눈으로 저녁이 오는 걸 바라보았었지
오, 영원한 얼룩
오, 행복한 얼룩
오, 즐거운 얼룩
예- *
엄마는 얼룩소지만 얼룩소 엄마는 싫으니까
이제라도 새벽까지 엄마와 놀자
반짝이는 이슬이 맺힌 온몸으로
바람보다 날쌔게
들판보다 넉넉하게 엄마를 끌어안자
* 나미의 노래 <영원한 친구>를 빌려 씀
계간『시작』2007년 겨울호 발표
이진희 시인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 《문학수첩》신인상을 통해 등단.
☞ 추천시인: 김상미 시인
소풍 가는 얼룩소들
한 여자는 다른 여자의 부활이다. 딸이 엄마의 분신이듯이. 그래서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테야”라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길을 가게 된다. 한 여자는 다른 여자의 업이므로.
시인은 그것을 ‘얼룩’이라 표현하고, 그들을 ‘얼룩소’라고 칭한다.
얼룩소는 우리나라 토종 소가 아니다. 우리나라 토종 소가 아니면서 우리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얼룩소는 고통스럽다.
고통은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소외를 낳고 소외는 쓰라림을 낳고 쓰라림은 얼룩(상처)을 낳는다. 오 지긋지긋한,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여!
시인은 그 얼룩이 싫어, 얼룩 한 점 없이 맑은 날, 엄마에게 ‘소풍’을 가자고 조른다.
‘소풍’은 일종의 내적 자유, 일탈이며, 자아·정체성 회복의 시간이다. 그동안의 얼룩에 대한 낡은 시각, 콤플렉스를 버리고 새로운 시각, 정신건강을 되찾아 그것을 한껏 웃어넘기자는 도전에 가까운 이탈이다.
그동안 고통은(걸레, 엉겅퀴 꽃밭, 엎어진 밥상, 부서진 창틀, 피 묻은 벽지 등으로 상징) 겪을 만큼 겪었다. 그러니 이제는 소풍을 가자. 소풍을 가 온갖 얼룩들이 제 스스로 “오, 영원한 얼룩/ 오, 행복한 얼룩/ 오, 즐거운 얼룩/ 예-”하고 노래 부르며 새벽까지 놀게 해주자. “반짝이는 이슬이 맺힌 온몸으로/ 바람보다 날쌔게/ 들판보다 넉넉하게” 그 얼룩들을 인정하고 다시 끌어안아 자유롭게 되도록.
이 시를 읽는 내내 「델마와 루이스」(영화)가 생각났다. 그리고 괜히 신이 났다. 시 내부 깊숙이 스며 있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아마도 나미의 노래가 주는 리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함께 그 ‘소풍’에 동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얼룩소’라는 이미지 하나로 이토록 강한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뿜어낼 수 있다니…. 오랜만에 한 점의 조바심도, 억지 엄살도 없는, 깔끔하게 경쾌한, 서러운 시를 만나 정말 기분이 좋았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면서, 참으로 탁월하게 여성들만의 愁心을 잘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