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실에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살 수가 없다.
우리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빚어져 이루어져 여기에 기억의
지속성이 유지되어야만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시공에 매인다는 것은
자유보다 구속, 속박, 매듭지어져 있다는 뜻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인과률의 법칙에
따른다. 또한 세계와 사회, 자연, 생명간의 관계는 상호의존성을 띄운다.
시공성, 인과성, 상호의존성이 현상계의 법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fact)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fact)을 부수는 형이상학이 종교와 철학의 후반에 풍미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이름과 형상이 없는 (개념상 '무'에 가까운) 진리가
대두하게 되었는데 여기서의 법칙은 사실(fact)로서 서술될 수 없는 괴상한 법칙이
오히려 대두된다. 예를 들어,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는다라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형이상학계에서는 시공성, 인과성, 상호의존성, 이원성이 붕괴되는
초시공적 색채를 띄운다. 논리적으로 묘사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과 '저것'은 현실계에서 따질 수 있고,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도 현실계의 이법이다.
이런 세계를 불교에서는 나가르쥬나(용수)가 空으로 철학화 하였고 현실계는 오히려 가상이나
꿈에 가깝다고 말한다. 반대로 이런 초월계가 본류이며 진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세계의 원칙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가짜이다 진짜이다, 오른쪽이다 왼쪽이다,
바깥이다 안이다를 실제로 따져 볼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는 현실계에서 나누는
공론조차도 꿈속에서 떠들어대는 일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선 이런 세계가 보다 우화적으로
그려진다. 포도원 주인과 품삯꾼과의 대화이다. 오전에 일한 놈하고, 점심 때 일한 놈하고,
오후에 일하는 놈하고 돈을 똑같이 주는 법이 어디있느냐고 따지는 품삯꾼은 상대성,
가변성, 시공성, 인과성을 대표하고 있고, 포도원 주인은 그게 나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돈을 주는 것은 오야(주인) 맘대로 라고 대꾸한다. 말인즉 자기에게 그딴 걸로 따지지 말라고
그런다. 포도원 주인의 섭리는 하늘에 속하는 것이기에.
요약하면, 모든 종교에는 모든 개념화, 현실, 사실을 초월하는 어떤 특정한 근원, 법칙, 운용,
작용이 있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는 동시에 인간의 머리나 인식으로 포섭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잘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계산서가
안나온다. 이 모든 걸 총칭하여 대개 사람들은 함축적 의미로 '신'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은
신이 이슬라엘 민족이 섬기는 특정적, 특수화된 한 종족의 신이고, 그쪽 전통과 문화에서 이 신은
인격적으로 다루어지는데 이걸 가지고 신이 있는가, 없는가,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안했는가를
따지고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일리가 없다고 그런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지적이다.
신이 사실(fact)이냐, 아니냐, 존재이냐, 비존재이냐, 창조했냐 안했냐, 진화가 수용되나 안되나를
따지는 것은 모두에 밝힌 세계 속에서 진위여부를 따지는 일과 다름없다. 신은 현실계에서 사실로서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현실계 측면에서 보면 비사실적으로 여겨진다. 신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은유와 상징으로만 그것을 희미하게 그려볼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신은 없고 종교는
허위이다라고 무신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유신론을 맹렬히 공격하였는데, 신학자와 신자들 대부분은
리처드가 말하는 신은 어떤 신을 말하고 있는가? 그 자신이 신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신은 단지 초월성, 무한성을 상징하고 은유하는 의미로서만 의미롭기 때문에.
<코스모스>를 지은 칼 세이건은 신이 만약 있다면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대기권 위에 화염으로
자기의 이름을 써보면 될 것이다고 조롱한다. 즉 이들이 대결하는 신은 '신은 사실이다'라는 관념과의
전쟁이다. 종교계에서도 똑같이 '신은 사실이다'라고 믿는 사람들과 겨루는 논쟁이다. 서로 손바닥이
마주치니 소리가 날 수 밖에 없는데, 신은 우스개 소리로 말하면 한 손으로 손벽치며 내는 소리이다.
대부분 서구의 일신종교군에서 인간이 바로 신이 된다는 개념은 광오하고 건방진 소리로 여겨진다.
그래서 '내가 신이다'라는 사람은 신성모독죄로 십자가형이나 화형에 처해졌다. 예수가 사형당한
죄목도 형법상 이 죄에 속한다. 유교와 도교에서 신은 대개 비인격적, 비존재적 '법칙'으로 받아들였기에
사람이 그 자체가 된다는 논리가 잘 발달하지 않았다. 체득과 내면화 정도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생성된 힌두교와 불교는 사람이 그 자체가 바로 되어야 한다는 직접론이 가능한 종교군이다.
스스로 깨달게 되면 바로 그것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가 이쪽 계열에서는 천연덕스럽게 펼쳐져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나=신의 공식이 통용되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는 걸 첫번째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불자들은 부처와 신은 전혀 다른 것이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일반명사로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이런 통칭이 고타마에게 적용되어 고유명사화
된다. 그래서 붓디즘이란 종교가 형성되었다. 고타마 살아생전에는 없던 말이었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걸 목표로 삼는 종교가 즉 불교이다. 그런 붓다가 함유하고 있는 속성을 일컬어 '불성'이라고
불교에선 말한다. 불성(Buddha's characters)은 과연 무엇일까, 순수한 깨달음(각성), 순진무구, 자성청정심,
자비의 화신, 가장 근원적인 본래 성품.........이걸 나열해 보면 신성의 목록과 거의 같아진다.
따라서 불성=신성이라고 놓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불성은 불교의 불자들이 가장 거룩하고 참된
진리를 구현한 존재에게 부여한 최고의 가치가 될 것이다. 외연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달라 보이는
어휘가 내포라는 의미로 재구성하면 결코 상응하는 유사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는 시작부터
신이란 실체를 내걸지 않았다. 업종신고를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는 완전히
신을 배제하는 종교도 아니다. 힌두교의 최고 신으로 여겨지는 '시바'는 불교의 경전에서 '대자재천'
이란 신으로 등장한다. 그런 존재를 부정하였다면 적에 올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대형 경기장에 들어가는 입구는 수십개가 있다. A01, K09 같이 서로 들어가는 문이 달라도
들어가 보면 원형 경기장이란 스타디움에 함께 앉게 되는 법이다.
불교가 '신'을 내걸지 않는 실익도 있다. 초장부터 신을 유념하고 자나깨나 신을 숙고하며 명상하고
최종적으로 신을 깨닫는 것이나, 처음부터 어떤 신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자기의 내면이나 자기의 실존만
궁구하여도 곧 자신이 바로 신이란걸 깨달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신'대신에 '붓다'이지만)
사람들이 신이라고 하면 자기 머리 속으로 온갖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그것도 제멋대로 그림이기
일쑤이기에, 애초부터 신 이나 세계 대신에 '나'를 상정하는 편이 어떤 사람에겐 가장 직접적이기도
한 것이다. 즉 나의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고갱이가 역설적으로 말하면 신이기도 하다.
좀 더 멋지게 말하면 본원적, 우주적 나를 발견하는 것이기에.
이 모든 세계를 모두 자신이라고 여기는 사람,
오로지 신만 존재하고 그것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
그 스스로를 완전히 신이라고 믿는 사람......
세 방향이 모두 순수하게 다함이 없다면 어떤 길이든지 무방하다.
그리고 '신'이란 말에 심리적 거부감을 느끼는 분으로 불자라면 '부처'라는 말로
바꾸어 새겨도 관계가 없다.
첫댓글 이런 세계를 불교에서는 나가르쥬나(용수)가 空으로 철학화 하였고 현실계는 오히려 가상이나 꿈에 가깝다고 말한다.
반대로 이런 초월계가 본류이며 진짜라고 말한다.//이강님
불교에서 멀하는 공(空)이란 모든 제법은 중연의 화합으로 나타나는 법이어서 아트만같은 <실다운 법이 없다>는 뜻 입니다.
게다가 법이란것도 연이있으면 나타나고 연이 다하면 즉시에 사라지기에 법의 자상(自相)이 없습니다.
법의 자상이 없기에 허망한 법이어서 실로 있는것이 아니지만...세속의 언설로 가명(假名)으로 <있다>고 하는것이지...
메트릭스와 같은 <가상의 세계>를 뜻하는 것도...<가상의 세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다가 법의 들고 남이 잠시의 머뭄도 없어서 실다움은 없고 꿈과 같이 허망하기에 꿈과 같다 하는 것이지...
꿈 그 자체와 같다거나 이 세계를 떠난 초월의 세계가 있는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세존을 가리켜 삼계(三界))의 도사라는 명칭도 삼계를 떠난 제 사계(四界)에 계심을 뜻하지 않듯이...
지금 이 자리가 부처님에게선 불국정토요, 청정한 마음자리라 생각합니다.
일상의 현실이란게 과연 존재할까요? ~~~벗어나, ~~~넘어서, ~~~차원을 달리하여......저도 초월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다른 말로 적합한 걸 잘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 '내일'이란 말은 언제나 '오늘'을 지칭하는 말이기에 그걸 미래로 믿으면 종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죠. 초월은 요즘 절묘하게 감추어지고 절묘하게 드러나는 ...'절묘' 란 부사를 넣어야 맛이 난다는 사람도 있더군요.
서울 남자가 부산 애인을 찾아가 부산 터미널에 내려 여자집에 전화를 했는데......전화기 너머로 '거가 오딘데요?' 하고 묻길래 '부산 터미날입니다'하고 대답했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세 번을 공중전화 하여도 '거가 오딘데요?" 자꾸 묻길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장소를 묻는게 아니라 자기 딸에게 전화한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걸 어렴풋히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며칠전 들었습니다.
초월이나 신비도 그런거지요. '거가 오딘데요?'
고백하면 제가 글을 쓸대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기승전결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한마디 해야 겠다로 시작하여 이 말하다보니 저 말 나오고 써다보니 글이 지 맘대로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또 간혹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를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짧은 글이라면 모를까...장문의 글을 쓰다보면 많은 사람들도 그렇지 싶습니다.
그래서 저같은 경우는 장문의 본문글은 자제할려 합니다.
귀찮기도 하고 생각도 많이해야 되고...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의 현실이란게 과연 존재할까요?//이강님
현실이라는 것도 이미 지나갔다면 과거요, 아직 오지 않았다면 미래일 것이요...
현재,또는 현실이라는 것도 잠시의 머뭄이 없어서... 현실의 존재라는 것은<세간에서 쓰는 말>이지...
현재,또는 현실이라는 것은 실로 <공한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세간의 사람과 부처님의 제자가 보는 관점의 차이는...
세간사람은 모든 현상이나 법들이 실답다고 보아서 <있다는 유견상>을 보이는 반면...
부처님의 제자는 모든 현상과 법들이 실답지 않음을 보지만 세간의 언설과 그 관습에 따라 <있다는 언설>을 합니다.
따라서 승의제와 세속제는 차별이 없지만...사람의 유견상이 무명이 됩니다
정말 우스갯소리로 이강님이 목회자가 되었다면 대형교회가 나올 뻔 했습니다. :-)
이강님의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요즘은 유신론,무신론,범신론 등등 모든 神論이 별로 다른 말처럼 해석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부처나 道 등도 동양적 神論이 아닐까 생각이 들구요. 과학의 절대성과 상대성 논쟁처럼, 우주의 절대성(神)과 상대성(空,虛)이 동서양의 神論(또는 우주론)의 형태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