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8일 나무날
날씨: 안은 숨 막히게 더웠다가 등골 시리게 추웠다 하고, 밖은 촉촉하고 후텁지근했다.
겪은 일: 일어나 세수 - 김밥 말기 - 출근 - 네 시간 수업 및 잡무 - 방과 후 학생 상담 - 퇴근 - 친구 만나기 - 집 오기
제목: 김밥
네 시부터 울리는 알람을 10분씩 미루다 4:30이 되어 겨우겨우 일어나 밥을 안쳤다. 요 며칠 잠을 대폭 줄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더니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졸리다. 차는 놓고 버스를 타고 출근할까 생각했다. 버스에서 자야지 하면서.
일찍 출근해 교실에 앉아 하나 둘 오는 아이들을 환영하는 게 좋다.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엄청 밝고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면 아이들은 수줍은 듯 웃는다. 일찍 오는 아이들에게 특별히 간식으로 선심도 쓰고, 한두 마디 더 나눈다. 저마다 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생 사이에 앉아 함께 책을 읽으면 나도 회춘한 듯해서 좋다. 책도 더 잘 읽힌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나에게는 잠의 욕구가 1등이다. 앞으로 10분이라도 더 자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와 꼭꼭 약속한다. 이제 이번 주말 지나면 혁준이도 오는데 저녁에 일찍 자는 새나라의 어른이가 될 준비가 필요하겠다. 문득 거기에 생각이 이르니 몸이 뻣뻣해질 만큼 긴장됐다. 혁준이가 안동에 내려가 집에 없는 사이 준민이와 둘만 있는 시간이 익숙해지고 있었나 보다.
오늘은 준민이 터전살이하는 날이라 점심 도시락을 준비한다. 혁준이 네 살 때부터 김밥을 말고 있으니 6년 차다. 시간이 지나도 실력은 별반 차이가 없고 어째 김밥 굵기만 점점 굵어지는 것 같다. 오늘은 생오이 대신 오이소박이를 씻어 넣었더니 맛이 진하다. 가늠한 맛이 아니었다.
김밥은 두려움 없이 막 싸는 편인데 김밥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인 거 같다. 재료들을 이렇게 넣는데 맛없을 수 없다는 믿음.
내 김밥은 크게 두 가지 특색이 있다. 하나는 당근을 얇게 썰어 말아넣는 것, 다른 하나는 달걀을 달걀말이처럼 여러 번 말아서 두툼하게 만들고 굵게 잘라 넣는 것. 다른 이유는 없고 내가 당근 볶음과 달걀말이를 좋아해서.
그러나 오늘의 달걀말이는...... 대실패!
스테인리스강(스뎅) 프라이팬에 달걀을 부치다 보니, 뒤집다가 바닥에 들러붙은 달걀말이의 허리를 뚝 끊어 먹었다. 그냥 그대로 잘라 이어서 밥 안에 넣고 말면 되겠지 했는데 대수롭지 않.지. 않.았.다.(!) 길게 하나로 이어지지 않은 달걀-중간이 끊어진 달걀을 넣으니, 김밥이 잘 안 말렸다. 달걀 두 개를 이어 넣으니 겹치는 부분인 가운데는 볼록 튀어나오다 김이 터지고, 가운데를 살살 달래 누르다 보면 양옆 꽁다리 쪽으로 달걀이 쏘옥 밀려 나왔다. 난도가 높아져서 고생했다.
머릿속에 메모.
‘재료가 끊어져 있으면 김밥 말기 어렵다.’
모두가 길게 한 줄인 상태라야 쉽게 말린다.
(시금치, 당근 등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것들 제외)
선생님 거, 준민이 거, 혁준 아버지 거 나누고 김밥을 써는데 볼록한 가운데 부분이 툭툭 터진다. 터진 건 아침 식사용으로 쌓아두었는데 그 양이 꽤 됐다. 다 썰고 나서야 다음에 어떡할지 요령이 생긴다.
어쨌든 김밥 도시락 미션 컴플리트!
밥 안의 재료가 저마다 조금씩 부족한 맛을 낸다 해도 나는 김밥이 그렇게 맛있다. 질리지도 않는다. 다양한 재료가 여러 가지 맛을 내니 그런 거 같은데... 그게 김밥 공동체의 힘인가 하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오늘 간 보면서 집어 먹다 보니 아침 한 끼로 김밥 공동체 세 줄은 먹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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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민이 마주이야기>
- 아닌 밤중에 홍두깨 아니고 ‘아닌 변기에 물방개’
혁준이가 안동에 내려가고 없어서 준민이 이야기로 올려요.
준민이가 형아 없으니까 데이트하자고(맛있는 거 사 먹자는 뜻)해서 쌀국숫집에 갔다.
실컷 먹다가 쉬 마렵단다.
준민이와 나, 둘이 화장실에 갔는데 먼저 빈 칸에 들어간 준민이가 말했다.
준민: 엄마 누가 있는데? (오싹)
나는 나오라는 손짓을 하며 물었다.
나: 누가 있어?
준민: 여기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변기 안에 개미만 한 까만 벌레가 물 위에 떠 있었다.)
나: 아~ 벌레?
준민: (바지를 내리며) 물방개인가?
나: 물방개?
쉬가 물방개(?)를 건드리자 조금 옆으로 조준(?)하며
준민: 아, 물방개, 미안!
쉬의 끝자락, 물을 내리며
준민: 잘 가~ 안녕.
변기에 대고 손을 흔든 뒤 바지를 추켜입기.
준민: (쿨하게) 가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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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끄읕
첫댓글 우와~ 김밥먹고 싶어라ㅎ 준민이 표정도 그려지고요ㅎ
덴마크서 오시면 언제라도 몇 줄이라도요👌
혁준 어머니 김밥 진짜 맛있어요. 맛있는 집김밥!
저녁밥이 늦어 배고픈채로 글을 읽다보니
김밥이 너무너무너무 먹고싶어지고
속이 쓰리기까지 하네요 ㅎㅎㅎㅎ
저도 집김밥 넘 사랑하는데 글 읽다보니 담에 같이 모여 김밥싸먹어도 좋겠다 생각이 드네요❣️🙂
김밥공동체 왜인지 부럽기도하네요
좋아요 좋아요
맛나다고 소문 난 혁준네 김밥 궁금합니다잉~~
와 얘기를 하는데 유머와 진심을 겸비한 혁준, 준민 어머님 . 글을 봐도 목소리가 들리네요 너무 재밌어요 !!! 😍
혁준어머니 글은 김밥처럼 참 맛나네요ㅎㅎ 혁준어머니 김밥도 언젠가 맛보고 싶어져요~~
김밥 공동체.. 네이밍 넘 사랑스러워여........
나 그 김밥 담에 맛좀 보여줘용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