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자현 생가 터
남자현 생가 터_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3-6(석보로 204)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남자현이 만주로 가기 전에 살던 곳이다. 생가 근처인 394번지(석보로 208) 일원에 생가를 복원하고 성역화사업을 하였다. 남자현南慈賢(1872~1933)은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출신이다. 19세에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하였으나, 1896년 의병항쟁에 나섰던 남편은 전사하고 말았다. 그 뒤 유복자와 시어머니를 돌보며, 평범한 여성으로 살던 남자현은 1919년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에서 그녀는 50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까지 교육을 통해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1927년 일어난 ‘길림사건’을 계기로 의열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이 사건은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 47명이 중국관헌에게 체포된 일이다. 독립운동계는 구명운동에 나섰고, 남자현이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 뒤 사이토총독 암살기획(1927), 김동삼 구출활동(1931) 등을 펼쳤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 1933년 만주국 주재 일본전권대사 처단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드러나면서 체포되고 말았다. 60세의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러다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음식을 끊은 지 9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감옥을 나온 남자현은 마지막을 맞았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조국광복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바로“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이현규 생가 터
이현규 생가 터_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415-5(지경2길 16)
1905년 청송에서 창의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한 이현규의 생가가 있던 곳이나, 옛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이현규李鉉圭(1874~1917)는 1905년 11월 김대규金大圭·신형일新衡一·권이달權理達·조완이趙完伊 등과 함께 청송 주왕산 대전사大典寺와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해 12월 안동·청송·진보·영양 4군의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주왕산에서 의병 500여 명을 훈련시키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906년 2월에는 영양군 입암면 교동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며, 1906년 4월에는 무등武藤이 이끄는 일본군 헌병부대와 진보 장수령에서 수십 차례 교전하였다. 진보 오누지전투에서는 무등을 비롯한 1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집사 조완이가 전사하고, 이현규도 총상을 입었다. 1906년 5월에는 울진 죽변에 있는 왜관을 격파하였다. 이어 영양 북방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역습을 당해 도포장 김대규가 전사하고, 이현규도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이현규부대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이현규는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에 은거하며 아동 70여 명을 모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17년 2월 3일 총상의 여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엄순봉 생가 터
엄순봉 생가 터_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 942
아나키스트로 상해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엄순봉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옛 흔적은 없어지고, 빈 터에 <독립투사 엄순봉의사 생가지> 표지석이 있다. 엄순봉嚴舜奉(1906~1938)의 다른 이름은 엄형순嚴亨淳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1929년 7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참여하였다. 이는 아나키즘 단체이다.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던 엄순봉은 1930년 상해로 향했다. 그는 상해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이론을 더욱 심화시켜 갔다. 이어 상해 프랑스조계로 옮기고, 1932년 12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흑색공포단(BTP)이라 불렸던 이 단체는 일제 통치기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다. 1932년 무등武藤 암살기도, 1933년 육삼정六三亭 의거와 친일파 옥관빈玉觀彬 처단, 1935년 이용로李容魯 처단이 그 대표적인 활동이다. 이 가운데 엄순봉이 주도한 의거는 이용로 처단이다. 1935년 3월 25일 이른 아침 엄순봉은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이용로를 처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체포된 엄순봉은 사형을 선고받고, 1938년 4월 9일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 벽산 김도현 생가
벽산 김도현 생가_ 영양군 청기면 상청1리 298(벽산길 3)
1896년부터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며, 1914년 자결 순국한 김도현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1852~1914)은 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영양지역 곳곳을 다니며 의병항쟁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호응이 없자, 그는 1896년 2월 17일 청량산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시작하였고, 3월 18일에는 예안의 선성의진宣城義陣과 합세하였다. 선성의진의 중군장을 맡은 김도현은 1896년 3월 태봉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김도현은 영양으로 돌아와, 1894년 무렵 사재를 털어 자신의 집 뒷산에 쌓은 검산성劍山城에 주둔하였다.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김도현은 1896년 10월 15일까지 경북 동북부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는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최장기간에 걸친 항전이었다. 이어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이 있자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는 한편 각국 공관에 포고문을 보내 역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그는 상소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6년 1월 21일 5읍 도집강 때 활동하던 포수들을 규합하여 다시 거의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06년 가을 김도현은 각 지역에 격문을 발송하고 다시 거병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1909년에는 사립영흥학교私立英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에 힘쓰기도 했다. 항일투쟁을 이어가던 김도현은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자진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1914년 부친이 운명하자, 자정순국의 의지를 결행하였다. 그는 1914년 11월 7일 동짓날, 집을 떠나 영해의 대진으로 향하였다. 절명시를 읊은 그는 관어대 앞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선택한 도해순국蹈海殉國은 일제가 지배하는 이 땅에 자신의 육신을 맡길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순국 투쟁은 밖으로는 일제강점의 부당성에 대한 전면적 저항이었고, 안으로는 민족의 자존심을 지킴과 동시에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5. 검산성 의병전투지
검산성 의병전투지_ 영양군 청기면 상청1리 산23
김도현은 검각산劍角山에 성을 쌓고, 1896년 6월 무렵부터 본진을 설치하고 의병항쟁을 이어갔다. 이후 중·후기의병 시기에도 이곳 검산성을 중심으로 영양·안동·청송·영덕·영해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김도현이 쌓은 검산성은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검산의 정상에서 서쪽과 남쪽에 축벽을 쌓아 올린 것이다. 서쪽의 경사면에는 약 200m 가량의 길이에 토석을 성벽으로 쌓았으나, 토석은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 석축이 남아 있었다. 이를 영양군에서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6. 사부령 의병 순국지
사부령 의병순국지_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478·479 일대
이곳은 1896년 6월 22일 김도현부대에서 활동하던 의병 30명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곳이다. 1896년 6월 22일(음 5.12) 정성첨鄭聖瞻은 의병 30명을 이끌고 사부령思夫嶺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진보 쪽에서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하여 사부령 고개로 이동하다 접전하게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화기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전하였고, 정성첨을 포함한 11명이 순국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사부령순국지사합동기념비思夫嶺殉國志士合同紀念碑>가 있다.
7. 3.1운동 사적지
청기면 3·1운동지 청기면사무소 터_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791-1 청기면사무소(청기1길 9-6)
청기면 3·1운동지 – 청기면 사무소 터 1919년 3월 24일 저녁, 4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이 날 청기마을 사람들은 면사무소 유리창을 부수고, 마을을 돌면서 마음껏 만세를 불렀다. 다음날 25일 영양장날에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던 경찰이 이곳까지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위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은 3월 25일 영양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10시경에 흩어졌다. 면사무소 위치는 그대로이나 건물은 없어지고, 새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영양시장 3·1운동지_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329-5 일대
영양시장 3·1운동지 1919년 3월 25일 영양군민 1,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만세 열기가 고조되고 만세 행렬이 헌병분견소로 향하자, 일제 경찰은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때문에 오석준을 비롯한 167명이 붙잡혀 금융조합 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대부분 조사 후 모두 풀려났으나 류동수는 징역 6년, 오석준은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옛 시장의 모습은 없어지고, 현재는 도로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8. 청년동맹 활동 사적지
영양청년동맹 석부지부 창립지 석보예배당 터_영양군 석보면 원리2리 302(두들마을길 66)
1928년 12월 26일 지역청년 40여 명이 모여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를 창립한 곳이다. 교회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현재 두들마을 한옥체험관인 다원茶院이 있다. 석보지부 회원들은 1930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장날에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규탄하고,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한국인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800여 장의 격문을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로 말미암아 회원들이 체포되고, 청년운동은 침체를 맞게 되었지만 석보지부 청년들이 이끌어낸 이 만세운동은 매우 의미있는 민족운동이었다.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만세운동지 원리장터_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286-5·269-13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