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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가 지난 18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인데 뒤늦게 옮긴다.
침대 아래 숨겨져 있던 여행가방에서 시작됐다.
때는 2009년, 안토니 이스턴의 아버지 피터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뒤였다. 안토니는 유언을 검인하는 까탈스러운 일에 참여하면서 햄프셔주 리밍턴 시에 있는 아버지의 낡은 아파트에서 작은 갈색 가죽 여행가방을 발견했다. 가방 안에는 깨끗한 독일 지폐, 앨범, 그의 삶의 여러 장을 기록한 메모로 가득 찬 봉투, 그리고 출생증명서가 들어 있었다.
"영국인 다움"과 (성공회 신도임에) 자부심을 가졌던 피터 로드릭 이스턴은 사실 베를린에서 가장 부유한 유대인 가문 중 하나인 페터 한스 루돌프 아이스너로 전쟁 전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는 성장 과정을 살짝씩만 알렸지만 여행가방의 내용물은 안토니가 거의 전혀 알지 못했던 과거를 비쳐줬다. 이 폭로는 홀로코스트로 황폐해진 가족, 수십억 파운드 상당의 사라진 재산, 나치 통치 하에서 도난당한 예술품과 유산을 드러내며 10년의 추적으로 그를 이끌었다.
흑백사진은 피터의 어린 시절을 엿보게 하는데, 아들의 런던 성장과 너무도 달랐다.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메르세데스, 하인이 있는 저택, 천사가 화려하게 조각된 계단을 보여준다. 더 불길한 사진에는 12세 피터가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 뒤로 나치 깃발이 펄럭인다.
안토니가 "과거에서 손을 뻗은 것 같았다"고 말한다. 화를 내기 쉬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아버지가 조용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피했고 약간의 독일 억양에 대한 질문에는 항상 입을 닫았다. 안토니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단서가 있었다... 그의 세상에는 어둠이 있었다"고 말한다.
엄청난 재산
안토니의 가족사에 대한 다음 큰 단서는 예술작품에서 나왔다. 그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여자친구에게 여행가방 속 문서들에 흩어져 나오는 Hahn'sche Werke 회사를 파헤쳐 보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그 회사 소유로 보이는 대형 제철소 내부를 묘사한 그림을 사진으로 안토니에게 보냈다.
용융 금속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뜨겁게 빛나며 바쁘고 세심한 작업자의 얼굴을 비춘다. 그것은 독일이 수십 년 동안 파괴적인 전쟁을 향해 돌진하던 시대의 산업력과 힘을 상징한다.
한스 발루첵(Hans Baluschek)이 1910년 그린 그림은 아이젠발츠베르크(Eisenwaldzwerk 철 압연기)라고 불렸다. 이 회사 Hahn'sche Werke는 철강 사업을 중부 유럽에서 첨단기술과 거대한 회사 중 하나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하인리히 아이스너가 소유했으며 관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행가방에 있는 서류에 따르면 이 사람은 안토니의 증조부다.
더 많은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하인리히는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 중 한 명, 즉 현대의 억만장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회사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 전역에 공장을 두고 관형 강철을 제조했다.
하인리히와 아내 올가는 대리석 바닥과 크림색 외관이 있는 도심의 인상적인 6층짜리 부동산을 포함해 베를린과 그 주변에 여러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반 사진에는 부드럽게 둥근 배와 곧은 흰색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담겨 있다. 하인리히는 검정색 양복을 입고 올가가 크리스탈 티아라를 쓴 채 그의 옆에 앉아 있다.
1918년 사망했을 때 하인리히는 회사 주식과 개인 재산을 1차 세계대전에서 싸우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 루돌프에게 물려줬다. 전쟁은 재앙이었지만 Hahn'sche Werke는 그 기간 번창해 독일군의 철강 수요를 충족시켰다. 루돌프와 그의 가족은 또한 종전 후 조국을 괴롭혔던 경제적, 정치적 혼란을 성공적으로 견뎌냈다.
그러나 몇 년 안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모든 것이 변한다
안토니가 여행가방에서 발견한 메모에서 피터는 부모가 나치 위협에 대해 속삭였던 것을 회상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지지자들에 의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와 그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비난을 받고 있었다.
루돌프 아이스너는 자신의 회사를 나치 정권에 귀중한 회사로 만들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한동안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유대인법이 점점 극단적으로 변하고 주변에서 목격한 학대가 악화되자 그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1938년 3월, 정부는 Hahn'sche Werke를 축출했다. 당국의 엄청난 압력으로 유대인 소유 회사는 나치 지지자인 최고경영자(CEO) 빌헬름 잔겐이 있는 산업 대기업인 마네스만(Mannesmann)에 매각됐다.
제3 제국 치하에서 유대인 기업 약탈을 되짚어본 책 '나치 억만장자'의 저자인 다비드 데 용은 "도난 당한 부와 자산이 오늘날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정량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2000년 마네스만은 1000억 파운드 이상의 거래로 보다폰에 인수됐으며, 당시 최대 규모의 상업적 인수였다. 그 매각에 포함된 산업 자산의 적어도 일부는 한때 아이스너 비즈니스 제국의 일부였을 것이다.
Hahn'sche Werke의 해체와 회사 구성원의 체포로 인해 아이스너 가족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1937년까지 독일을 떠나려는 모든 유대인은 소유한 모든 것의 92%를 국가에 넘겨야 했으며, 이는 제국 비행세(Reichsfluchtsteuer, Reich Flight Tax)로 알려진 많은 부과금을 내야 했다. 아이스너 부부는 남은 재산을 잃는 상황에 직면했다.
거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베를린기록보관소의 기록에 따르면 경제학자이자 세무 고문인 마틴 하르티그(Martin Hartig)가 아이스너 부부의 삶에 크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1930년대 내내 하르티그의 이름은 아이스너 시골 사유지의 방명록에 반복 등장하여 그들의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유대인이 아니었던 하티그는 나치에 의한 재산 몰수에 대한 해결책을 가족에게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개인 재산의 핵심 요소, 주로 그들이 소유한 여러 재산과 그 내용물을 그에게 양도함으로써 유대인을 겨냥한 법률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다.
안토니는 조부모가 언젠가 하티그가 자산을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믿는다. 조부모가 틀렸다. 대신 그는 아이스너 자산을 자신의 이름으로 영구 이전했다.
BBC는 독일연방기록보관소에서 판매 문서 원본의 사본을 발견해 세 명의 독립 전문가와 공유했다. 세 사람 모두 이 거래가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자산의 몰수를 설명하는 데 널리 사용되는 용어인 "강제 매각"의 증거라고 결론지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쌓아온 재산을 잃었는데도 안토니의 조부모와 부친은 1938년 독일을 탈출했다. 피터의 여행가방에 보관된 열차표, 수하물 태그, 호텔 브로셔를 통해 안토니는 그들의 여정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가족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로 가서 나치보다 간신히 한 발 앞서 나갔고, 1939년 7월 영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배 중 하나를 잡았다.
그들은 수십억 달러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었지만 아이스너 가문의 운 좋은 구성원 중 하나였다. 친척 대부분은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루돌프 자신은 다른 많은 독일 난민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대부분을 영국군에 의해 맨 섬에 억류된 후 1945년에 사망했다.
하티그와의 만남
안토니의 다음 단계는 아이스너 가문의 재산과 하티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수사관 야나 슬라보바를 고용해 정확히 무엇을 도난당했는지, 어떻게 주인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몇 주 안에 야나는 재산과 소유물에 대한 세부 정보를 포함해 친척에 대한 수많은 문서를 찾아냈다. 그녀는 안토니가 처음 여정을 시작했을 때 발견한 그림을 추적할 수 있었다. Eisenwalzwerk는 베를린의 브로한 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다.
작품을 되찾으려는 초기 시도는 증거와 관련한 문제에 부딪혔다. 안토니는 그 책의 판매가 나치의 박해와 관련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합법적으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야나가 판매 당시 박물관과 미술상의 서신을 발굴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됐다. 미술상은 1938년 하티그가 인수한 부동산인 아이스너의 이전 가족 집 중 한 곳에서 그림을 팔았다. 하티그는 1965년 자연사하기 전까지 베를린 함락 당시 손상된 건물을 꼼꼼하게 복원해 남은 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하티그가 사망한 후 재산은 현재 80대인 딸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2014년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집을 선물했고, 시골 별장으로 이사해 안토니와 야나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노부인은 그들에게 차와 케이크를 만들어줬고, 그들은 거실에서 두꺼운 테 안경과 기름칠 머리, 얼굴이 수척하고 검정색 양복을 입은 아버지의 초상화 아래 먹었다. 그림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에 그려졌다.
하티그의 딸은 안토니와 야나가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항상 나치에 반대했으며 그녀가 훌륭한 친구라고 묘사한 아이스너 가족을 홀로코스트로부터 구하는 것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가족에게 "여기에 머물 수 없다. 영국으로, 런던으로 가라"고 말했다고 돌아봤다.
그녀의 아버지는 또한 그들이 그림을 액자에서 꺼내 옷 사이에 숨겨 독일에서 밀반출하는 것을 도왔다고 말했다. 1938년 그녀의 가족이 아이스너 부부로부터 인수한 부동산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그것들이 모두 합법적인 구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합법적으로 집 두 채를 샀다. 항상 매우 정확해야 했다."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조상이 아이스너 가문을 착취했을 가능성에 더 개방적이었다. 하티그의 증손자인 빈센트는 20대이며 목수가 되려는 훈련을 받고 있다. 그는 한때 안토니의 조부모가 살았던 자신의 집이 불편한 과거를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물론 어느 시점에 궁금했던 것은 우리 가족이 사는 이 좋은 곳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였다. 나는 또 상황이 어땠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안토니의 유대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빈센트는 아이스너 부부가 자신의 재산을 증조부에게 물려줄 때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돈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안토니는 조부모의 재산에 대한 배상 소송을 제기할 방법이 없다. 루돌프의 미망인이며 안토니의 할머니 힐데가르트는 1950년대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하티그의 법적 도전에 물러섰다. 나치 박해의 유대인 피해자가 옛 서독의 재산을 주장할 수 있는 시효도 이미 지나버렸다.
그러나 아이스너 가문에서 가져온 예술작품은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이 여전히 남아 있다.
올해 초 베를린의 브로한 미술관은 안토니에게 아이젠발츠베르크 그림을 헨리히 아이스너의 후손에게 돌려줄 계획이라고 통보했다. 박물관은 절차가 진행 중이라며 BBC의 인터뷰 제의를 거부했다.
또 다른 그림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안토니에게 반환됐으며, 오스트리아의 예술작품에 대한 세 번째 주장도 미결로 남아 있다.
안토니의 조사에서 발굴된 증거 중에는 게슈타포가 만든 목록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친척들로부터 압수한 특정 유물과 그림이 자세히 설명돼 있다. 그의 가족은 앞으로 더 많은 자산을 찾아 회수할 가능성이 있다.
안토니는 "항상 배상에 대해 말했는데, 그것은 물건과 돈, 재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의 과거를 조사하면서 그는 부친과 조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되찾았다. "이 모든 과정은 그들을 실제 삶을 살았던 실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지식은 이제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졌다. 아이스너란 이름은 1939년 피터가 영국으로 항해했을 때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되살아났다. 지난해 8월에 태어난 안토니의 증조카 카스피안은 아이스너를 중간 이름으로 받았다.
안토니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가족을 기리기로 한 조카의 결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카스피안이 있는 한 그 이름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중간 이름이군요. 거기 무슨 얘기가 있지요?'라고 말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