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박동희기자의 스포츠춘추
http://blog.naver.com/dhp1225/120093380802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년 전인 1997년 10월 25일 잠실구장. 나는 그곳에 있었다. 해태(KIA의 전신)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5차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좀체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추위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목안에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걸려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당시 내가 무엇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년 전의 오랜 기억은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과 ‘추웠다’라는 느낌만으로 존재할 뿐이다. 어차피 과거의 기억이란 예전의 집 주소처럼 하루 중 절반은 기억났다가 나머지 절반은 기억나지 않는 법 아닌가. 각설하고.
결국, 해태가 우승하고 친구들과 야구장 주변에서 뒤풀이를 했다. 우리는 반으로 나뉘어 해태의 우승에 환호했고, LG의 좌절에 슬퍼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가 해태의 우승처럼 밝고 찬란할 것이라는데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했다. 태엽이 풀린 장난감처럼 그때만큼은 ‘취업 준비’라는 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 달 후.
IMF가 터졌다.
그리고 1년 후.
해태가 하위권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리고 4년 후.
해태가 사라졌다. 영원히….
해태가 야구연감 속으로 사라지며 우리들의 젊음도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해태의 우승처럼 밝고 찬란할 것 같던 우리들의 미래도 실상은 삶의 치열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해태도, 젊음도, 미래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던 12년 동안 야구팬들은 더는 타이거즈를 강팀으로 생각하지도 않게 됐다. 강하면서도 너그러웠고, 너그러우면서도 매서웠던 그때 그 해태를 기억하는 건 젊은 날의 우리만이었을까.
그렇게 12년이 흐르고. 마침내 타이거즈가 ‘V10'를 달성했다. 호흡처럼 빈번했던 한국시리즈의 우승이 이토록 간절할 줄은 타이거즈팬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나지완의 한방으로 시리즈가 끝나고 조촐하게 뒤풀이를 했다. 타이거즈의 우승이 기뻐서, 와이번스의 분패가 아쉬워서, 한국시리즈 7차전의 감동이 하도 진해서, 그래서 잔을 들었다.
무엇보다 한 이가 떠올라 내렸던 잔을 다시 들어야만 했다. 그 한 이는 바로 전 해태 투수 고(故) 김상진이었다. 그가 떠올라 갑자기 코가 시큰해지고 어느덧 눈엔 충혈된 달이 떴다.
동행인들을 의식해야 하건만, 순간 나는 넋이 나간 이처럼 그저 한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상진아, 보고 있니? 네가 도와준 거니? 네가 눈 감기 전 유일한 취미가 무엇이었는지 병원관계자에게 들었던 기억이 나. 그 관계자가 그러더구나. ‘김상진 씨가 밤이면 불 꺼진 병실에서 혼자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비디오테이프를 봤다’고. 그것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래, 네가 5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됐지.
그 이야길 듣고 가슴에 금이 갔단다. 그런데 그 병원관계자가 등을 돌리려는 내게 한마디를 더 하더구나. 지금도 그 말이 귀에 생생해. 그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 그이가 뭐라고 했느냐고? 이랬어. ‘그 젊은 야구선수가 그랬어요.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요. 저, 야구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그 팀 우승했나요?’
난 그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단다. ‘네, 우승했습니다. 우승했고 말고요. 다시 우승하는데 고작 12년밖에 걸리지 않았어요.’라고.
상진아, 이제 그곳에선 새 비디오테이프로…갈아끼렴”
천상비애 해태투수 고 김상진
http://blog.naver.com/dhp1225/120070029417“내일 선수들이 유니폼 왼쪽 소매에 검은색 리본을 달기로 했습니다.” 6월 9일 목동구장에서 만난 KIA 관계자의 말은 그랬다.
검은색 리본이라, 마음 한편이 쓸쓸해진다.
“지난해도 유니폼에 ‘근조’ 리본을 달았습니다. 내일은 고(故) 김상진 선수의 작고 10주기라 더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순간, 개나리처럼 얼굴이 노래진다.
김상진. 기억의 서랍 안에 넣어뒀던 이름이다. 아기 호랑이. 이제는 타이거즈 팬북에서나 만날 수 있는 얼굴이다. 한국시리즈 최연소 투수. 지금은 슬픈 전설이 돼버린 그다.
“벌써 10년이나 됐군요. 아….” 외마디 탄성과 함께 조용히 눈을 감는다. 해태도, 붉은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의 유니폼도, 김상진도,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지만, 기억 속에서 그것들은 어제 일로 부활한다.
야구가 삶의 지푸라기였던 가난한 소년
6월 10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KIA와 히어로즈전에서 KIA 선수들이 왼팔 소매에 김상진을 추모하는 검은 리본을 달았다
1988년 광주. 온 나라가 서울올림픽으로 들떠 있을 때, 서림초등학교 김영기 야구부 감독은 선수충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해 야구부 지원자가 ‘확’ 줄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김 감독은 타교에서 쓸 만한 인재를 스카우트하기로 마음먹고, 당시 야구부가 없던 용봉초교에서 선수모집을 시행했다. 그때 눈에 띈 소년 둘이 있었다.
“네 이름이 뭐냐?” 김 감독이 제법 체구가 좋은 소년에게 물었다.
“저는 나종용이고, 얘는 김상진인데요.” 소년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김 감독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곧바로 두 소년에게 “야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체격 조건이나 눈빛을 볼 때 소년들은 분명히 훌륭한 야구선수로 성장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소년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특히나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김상진은 김 감독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발끝으로 땅에다 원을 그릴 뿐이었다.
“야구만 잘해도 명문대에 갈 수 있단다. 졸업한 다음 프로에 가면 큰돈도 벌 수 있고 말이야.” 소년들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도 그럴 게 가난이라면 도시락 반찬인 김치만큼이나 지긋지긋한 소년들이었다. 그러나 역시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데.
“선동열처럼 야구 잘하는 선수들이 얼마나 버는지 알아? 1억이야. 1억. 그 돈이면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는 건 일도 아니란다.”
가난했던 소년 김상진. 그는 슬픈 가족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김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종용과 김상진은 동시에 손을 들며 “야구 할게요”라고 외쳤다. 그토록 머뭇했던 아이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움직인 건 뭘까. ‘선동열’과 ‘1억 원’이란 단어일까. 아니다. ‘호강’이다.
“저나 (김)상진이나 집이 무척 어려웠다. 특히나 당시 신안동에 살던 상진이는 방 하나짜리 집에서 살았다. ‘운동 열심히 해서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자’는 일념으로 5학년 2학기 때 상진이와 함께 야구부가 있는 서림초교로 전학을 갔다.” 김상진의 소꿉친구 나종용(32)씨의 기억이다.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자’는 일념으로 야구를 시작한 김상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중도에 야구를 포기할 처지가 된다.
“목재공장에 다니시던 상진이 어머님이 힘들게 아들 뒷바라지를 하셨다. 상진이 아버님은 그게 좀 못마땅하셨던 것 같다. 상진이한테 ‘돈 많이 드는 야구는 뭐 하려 하느냐’면서 꾸중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가 야구소년 김상진에겐 가혹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하루는 김상진이 저금통을 들고 집을 뛰쳐나가는 일이 있었다고.
“상진이가 저금통을 흔들면서 그랬다. ‘이 돈으로 혼자 야구를 하겠다’고”
내성적인 성격과 아버지의 반대가 더해져 김상진은 늘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는 소심한 선수가 됐다. 당연한 이유로 출중한 재능에 비해 실력은 제자리였다. 강의원 광주 진흥중 감독(현 진흥고 야구부장)은 “당시 서림초교에서 9번을 치던 상진이 별명이 ‘할아버지’였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라,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할아버지처럼 느리고 흐느적거린다고 붙은 별명이다. 얘가 보면 늘 기운이 없었다. 한번은 ‘야구는 재밌게 해야 한다. 그렇게 맥없이 야구하면 되느냐’고 야단을 쳤더니 상진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그러더라. ‘감독님. 야구 재밌어서 하는 사람 몇 명이나 되겠어요?’”
대학도 사치였던 고교 유망주
서림초교를 졸업한 김상진은 1989년 광주 진흥중학교로 진학했다. 강의원 진흥중 감독이 스카우트했다. 강 감독이 진흥고 감독으로 부임하며 김상진도 자연스럽게 진흥고 유니폼을 입었다. 강 감독은 이후 진흥고 감독을 맡으며 김상진과 6년간 사제지간으로 지냈다.
“그즈음 있는 집 아이들은 대개 광주 충장중이나 무등중으로 진학했다. 진흥중 야구부는 반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았다. 상진이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찌나 가난한지 회비를 거르게 일쑤였다. 용돈도 없어서 감독인 내가 손에 쥐여줄 정도였다.”
고교시절 김상진은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먹었다. 친구들의 기억에 김상진은 “씹지 않고 라면을 그대로 삼키는 이”였다. 그래서 위암이 생겼다고 믿는 친구들이 많다
강 부장은 당시 또래보다 키가 컸던 김상진을 투수로 키웠다. 선동열(삼성), 이순철(MBC ESPN 해설위원), 송유석(전 해태), 임창용(야쿠르트 스왈로스) 등 쟁쟁한 선수들을 지도한 베테랑 감독의 감(感)으로는 보통 이상의 투수로 성장할 게 자명했다. 실제로 김상진은 중학교 때부터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우리가 중 3때 서울 신일고가 진흥고랑 연습경기를 치르려고 광주로 내려왔다. 그때 신일고는 강혁이란 고교 최고 타자가 버틴 최강팀이었다. 그런데 진흥고 선발로 누가 나갔는지 아나? 상진이다. 상진이.”
김상진과 진흥중·고 6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나종용 씨가 말한 바로는 당시 경기에서 신일고 타자들이 헛스윙을 연발했단다. 김상진이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에야 강팀다운 면모를 보였다는데.
“진흥고에 진학해서도 상진이의 투구는 변함없었다. ‘초고교급 투수’로 불릴 만큼 잘 던졌다. 남들은 ‘타고났다’고 했지만 실은 반대였다. 지금 생각해도 상진이는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뛰었다.”
김상진을 기억하는 야구인들은 하나같이 “하체가 단단했던 선수였다”고 입을 모은다. 어느 야구인은 “박찬호의 허벅지와 치수가 비슷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강 감독님이 상진이한테는 타격, 수비훈련을 시키지 않으셨다. 대신 하루 2, 3시간씩 러닝을 하도록 했다. 그때 상진이가 주로 뛴 코스가 진흥고 뒷산이었던 운암산이었다. 아마 중·고 6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암산을 뛰어다녔을 거다. 당연히 하체가 발달할 수밖에. 참, 그때 누가 알았겠나. 상진이가 나중에 거기서 쉬게 될지….”
김상진은 일요일에도 운동장에 나와 친구들과 러닝을 했다. 그게 그에겐 휴식이었다. 단단한 하체는 결국, 구속 증가와 컨트롤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강 감독은 김상진이 고교 때부터 “컴퓨터 제구를 선보였다”고 강조했다. “아마추어 감독 30년 동안 상진이처럼 원하는 코스에 자유자재로 던지는 투수는 처음 봤다”는 게 강 감독의 솔직한 평가다.
강 감독뿐만이 아니다. 1996년 김상진을 해태로 스카우트했던 김경훈 전 KIA 스카우트 팀장은 “진흥고 시절부터 어떤 악조건에서 마운드에 올려도 컨트롤이 흔들리지 않는 투수가 김상진이었다”며 “전 빙그레 투수 이상군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제구가 뛰어났다”고 회상했다.
1995년 무등기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에 뽑힌 김상진
고교시절 김상진은 전국대회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팀 전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1995년 무등기대회 결승에서 경북고를 5대 1로 누르고 우승기를 흔든 게 고교시절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하지만 ‘컴퓨터 제구’ 김상진에 대한 평은 무척 좋았다. 야구 명문대에서 서로 스카우트하겠다고 나섰다. 그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학교가 연세대였다.
1995년 2월 연세대 김충남 감독은 순전히 김상진을 스카우트할 요량으로 광주로 전지훈련을 왔다. 김 감독은 평소 절친했던 강 감독에게 “김상진을 달라”고 통사정했다. 강 감독 역시 “나중에 지도자가 돼도 대졸 선수 출신이 유리하고, 프로지명권이 유효하니 4년 뒤 해태에 입단해도 늦지 않는다”며 “내 자식 같으면 연대로 보낼 것”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이때만 해도 김상진의 연대행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김상진 자신이 연대행을 간절히 원했다.
“당시 고졸 프로선수가 별로 없었다. 상진이 진흥고 3년 선배인 (이)대진이 정도나 될까. 상진이가 대학진학을 원해 연대행을 주선해주려고 했다.” 강 감독의 말이다.
“상진이가 대학진학을 원했다는 건 사실이다. 야구와 집밖에 모르던 상진이는 새로운 생활을 경험하길 원했다. 연대에 다니던 진흥고 선배들도 상진이가 자기네 학교로 올지 알고 있었다.” 나 씨의 기억이다.
여기다 해태의 다소 미온적인 태도도 김상진의 연대행을 부채질했다. ‘짠돌이 구단’으로 유명했던 해태는 김상진의 환심을 사려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거액의 계약금은 고사하고 주변에서 “해태가 김상진에게 최대 5천만 원을 제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초고교급 투수’ 소릴 듣던 김상진이 프로보다 대학행을 선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그러나 강 감독은 김 감독과의 대화 끝에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래도 어차피 상진이는 해태에 가게 될 거다. 설령 해태에서 5천만 원을 제시해도.”
이유가 있었다. 강 감독의 말이다.
“당시 (상진이) 아버님이 무척 고령이셨다. 하루는 날 찾아와 ‘올해 내 나이가 72살인데 지금 상진이가 대학에 가면 해태 옷 입은 걸 언제 또 보겠느냐’며 프로행을 강력하게 요구하셨다. 어쩌겠나. 아버님이 원하는데. 물론 이때도 설득하면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상진이네 가정형편이 아주 좋지 않았다.”
김상진은 내성적이지만 정이 많은 이였다. 사진은 조카와 즐거운 한때
결국, 김상진은 대학행에서 프로로 진로를 수정했다.
“‘상진이 해태 보냈다’고 연대 김충남 감독한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대학 감독에게 밉보여 좋은 고교감독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상진이를 위해선 그게 최선이었다.” 강 감독은 지금도 김상진을 연대로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
“프로행을 확정하고 상진이의 낙담은 말도 못하게 컸다. ‘내가 연대에 갔으면 친구들 3명은 데려갈 수 있었는데…’하면서 동기들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하지만, 어머님이 팔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목재공장에 다니시던 때라 상진이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 씨는 지금도 가난 때문에 꿈에 그리던 대학을 포기했던 친구의 슬픈 뒷모습이 기억난다.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에 빛나는 아기 호랑이
1995년 11월 김상진은 해태와 계약금 1억 원, 연봉 2천만 원에 입단계약을 맺었다. 당시 해태에 ‘1억 원’은 2, 3억 원 가치의 거액이었다. 하지만, 이해 해태는 휘문고 포수 황성기와 충암고 내야수 장성호에게도 1억 원씩 안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 황성기를 제외하고 김상진과 장성호는 머지않아 해태의 주력선수가 됐다.
고졸 신인 김상진은 팀에서 ‘리틀 이대진’으로 불렸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대진의 진흥고 3년 후배인데다 성격까지 비슷했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다하며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는 게 영락없는 대진이였다.” 장판기 KIA 매니저의 회고다.
이대진은 진흥고 1학년 재학 중 당시 진흥중 1학년이던 김상진을 처음 봤다. 하지만, 3년 터울이라 살갑게 지낼 사이는 아니었다. 되레 김상진에겐 한없이 어려운 선배였다. 이는 프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진이와 (임)창용이 때문에 선배들한테 혼이 많이 났다. 그땐 해태 이미지가 원체 강했던 때라 상대팀이 우리 유니폼만 보고도 기가 죽게 마련이었다. 선배들은 항상 후배들에게 강인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상진이와 창용이에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럴 때마다 내가 ‘아마추어 때 마음가짐으로 하면 안 된다’면서 상진와 (임)창용이를 혼내곤 했다.” 이대진의 추억이다.
김상진은 1996년 4월 14일 광주 쌍방울전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7회 팀이 2대 3으로 지는 7회에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결과는 3이닝 동안 5실점. 김상진의 친구 나종용 씨는 이때를 잘 기억한다.
“정규시즌이 시작되고 얼마 있다가 상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김응용 감독님이 나더러 내일 선발 나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는데 도무지 긴장돼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래 내일 친구가 선발로 등판하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선발은 고사하고 구원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상진이가 그러더라. ‘감독님이 내가 매일 긴장하고 있으니까 이 녀석이 얼마나 긴장하는지 시험해보려고 그런 말을 했다’고. 4월 14일 데뷔전에서도 5실점 할 때까지 그냥 놔둔 것도 ‘프로의 쓴맛을 일찌감치 맛보는 게 좋다’는 감독님의 의중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때 상진이가 ‘프로란 곳이 다 그래’ 하면서 멋쩍게 웃던 게 기억난다.”
진흥고 출신의 해태 4인. 사진 좌로부터 이대진, 김상진, 박진철, 임창용
데뷔 첫해 김상진은 29경기에 출전해 123⅔을 던지며 9승 5패 평균자책 4.29를 기록했다. 규정 투구횟수에 불과 2⅓이 부족했을 뿐 이강철, 이대진, 조계현 등 쟁쟁한 선참들과 견줘 전혀 모자람이 없는 투구였다. 그해 해태는 통산 8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컵은 안는 데 성공했다.
김상진의 절정기는 다음해인 1997시즌이었다. 이해 김상진은 30경기에 출전해 9승 10패 1세이브 평균자책 3.60으로 알토란같은 성적을 냈다.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은 더 컸다. 지금도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포효하던 김상진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으리라.
10월 25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LG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김상진은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2차전 때 3회 1사 1루 상황에서 강판한 바 있는 김상진에겐 더없이 좋은 설욕의 무대였다. 시리즈 전적 3승 1패의 해태가 이 경기에서 이긴다면 통산 9번째 한국시리즈 제패가 이뤄질 터.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LG가 아니었다. 막상 뚜껑을 열자.
해태의 승리였다. 김상진은 1회 서용빈에게 우전 적시타로 1점을 내줬을 뿐 4회 이후로는 18명의 타자를 범퇴시키는 완벽한 투구를 선보이며 한국시리즈 사상 최연소 완투승(만 20살)의 대기록을 세웠다.
당시 김상진과 함께 해태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에이스 이대진은 “직구와 슬라이더 위주의 단조로운 구종이었지만, 몸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와 던지는 투구자세 때문에 공 끝이 무척 좋았다. 한창 몸이 붙을 때라 2, 3년 정도 지나면 구속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어디 이대진만 그랬겠는가. 당시 야구전문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대진, 김상진 원투펀치가 타이거즈의 10년을 이끌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해태의 ‘V10’는 문제도 아니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과연 그해 타이거즈의 우승이 마지막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삶의 마운드에 찾아온 가장 강력한 타자, 암
김준재 KIA 트레이너는 1998년 10월 9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해태 트레이너였던 그는 다음날 예정된 김상진의 MRI 촬영을 준비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해 상진이가 6승 11패 평균자책 3.87로 다소 부진했다. 2년 연속 9승을 따내던 친구라 10승이 기대됐지만, 오히려 성적이 떨어졌다. 목 통증으로 투구균형을 무너진 탓이 컸다. 시즌 중 수차례 목 통증을 호소했기 때문에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정규시즌을 끝내고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 10월 9일 MRI 촬영을 예약했는데, 그날 저녁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김 트레이너에게 전화를 건 이는 김상진의 친구였다. “안녕하세요”란 안부인사도 없이 김상진의 친구는 다급한 목소리로 “상진이가 밥을 먹다가 피를 토했다”며 “지금 전남대 병원 응급실로 갔다”고 안절부절못했다.
“감이 이상했다. 그래 전남대 병원으로 바로 쫓아갔다.” 김 트레이너가 도착했을 때 김상진은 두통을 호소할 뿐 별다른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감이 맞았다.
정밀검사 결과 3번 목뼈 척추에 종양이 발견됐다. 김상진은 일주일 뒤 3번 목뼈 주위에 있는 종양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병원측은 약물치료와 휴식을 통해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며 김상진을 안심시켰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목뼈 척추에 난 종양의 발원지가 위임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위암이 척추까지 전이된 셈이었다.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통보한 병명은 말기 위암이었다.”
해맑고 순수한 청년 김상진
당시 해태는 1년에 한 번씩 선수들에게 건강진단을 받도록 했다. 건강진단 프로그램 가운데 위 내시경도 포함됐었기에 김상진이 말기 위암이란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해태 프런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건강진단을 제대로 했으면 위암을 찾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이었다.
김 트레이너는 김상진의 말기 위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탄식했다. “상진이가 시즌 중 소화가 안 된다고 해 몇 번 병원에 데려갔다. 하지만, 그때마다 별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진작 위암인지 알았다면 조기에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건강진단과 병원 진찰에서도 김상진의 위암이 발견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 트레이너는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통상적으로 위 내시경으로 위암 대부분을 발견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상진이는 위벽에 악성종양이 생긴 상태라, 위 내시경을 통해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상진의 말기 위암 소식을 믿을 수 없었던 가족은 서울 중앙대 용산병원과 서울 중앙병원서 연이어 재검사했다. 결과는 역시 위암 말기. 그러나 이때까지 김상진은 자신이 말기 위암인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목뼈 수술 뒤 몸이 좋지 않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중앙대 용산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진이는 자신의 처지를 몰랐다. 식성도 여전히 좋았다. 가끔 바람 쐬러 용산시장에 같이 가면 ‘형님. 저 순대 먹고 싶습니다’하면서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었다.” 김 트레이너는 지금도 맛있게 순대를 먹던 김상진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팀 선참이었던 홍현우도 애잔한 추억이 있다. “얘기(김상진) 병문안을 갔을 때 빵을 사갔다. 말기 위암이라고 들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앉은 자리에서 빵을 다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얘기야. 체하겄다. 좀 천천히 먹어라’하고 말하면서도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중앙대 용산병원에 있을 때까지 김상진의 말기 위암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기자들도 사실은 알았지만, 보도를 자제했다. 그렇다고 위험한 순간이 없던 건 아니다. 김 트레이너의 말을 들어보자.
“상진이 어머님이 병원에만 오시면 그렇게 슬프게 우셨다. 더 오래 계시면 상진이가 사실을 알게 될까 봐 가능한 어머님이 병원에 오시지 않도록 했다.”
11월 28일 2차 항암제 투입을 위해 서울 중앙병원으로 올라오기 전 김 트레이너와 가족은 김상진에게 위암 사실을 알렸다. 본인의 투병 의지가 치료에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해태도 김상진을 내년 재계약 대상자로 남겨둬 투병의지를 북돋았다.
말기 위암을 알기 전까지 김상진은 먹성이 좋은 일반 환자였다
“11월 중순 들어 상진이가 조금씩 눈치를 채는 듯싶었다. 하지만, 반신반의했던 모양이다. 막상 ‘암이다.’ 이야기하니까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어리벙벙해했다. 나중에 저도 확인했는지 자신이 말기 암이란 사실을 정확히 안 다음 날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했다.” 김 트레이너는 며칠씩 밥을 굶는 김상진을 보며 심장이 녹는 듯했다.
홍현우가 다시 병실을 찾았을 때 그렇게 먹성 좋던 후배는 오간 데 없었다.
“몸이 비쩍 말라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건강했던 얘기가 어디 갔는지.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 호랑이’ 김상진의 좌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현실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투병에 임했다. 마음을 고쳐먹은 까닭일까. 1999년 봄이 되자 김상진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중앙병원 주변에 오피스텔을 얻은 김상진은 2주일에 한 번씩 항암치료를 받았고, 숙소 근처의 한약방에서 벌침을 맞았다. 상태는 몰라보게 호전됐다. 자신을 병문안 온 이들 앞에서도 절대 암환자 티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가. 병문안 오는 이들도 그를 암환자 취급하지 않았다. 이때 김상진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다.
“반드시 그라운드로 돌아가겠습니다. 기대해주십시오.”
김상진의 죽마고우 나종용 씨는 당시 군 복무 중이었다. 휴가에 맞춰 병문안 차 병원을 찾았다.
“상진이가 ‘뭐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친구야, 피자랑 콜라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내 손을 잡고 피자가게로 갔다. 거기서 둘이서 맛있게 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녀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돌아가니까 상진이 누님이 ‘찬 거 먹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하시면서 몹시 걱정하셨다. 자기 딴엔 그래도 친구 앞이라고 의연해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휴우-. 상진이는 그런 녀석이었다.”
나 씨는 그날 김상진의 오피스텔에서 밤늦도록 대화를 나눴다.
“상진이가 병 나으면 ‘엄마랑 시골에서 상추나 키우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내가 ‘무슨 소리냐. 빨리 완쾌해서 마운드에 올라가야지’하면서 등을 두들겨줬다. 그때 상진이가 혼잣말처럼 그랬다. ‘친구야, 나야…그럼 좋지. 그런데…그게 될까.’”
22살 청년 김상진의 슬픈 기억과 사랑
호전될 것 같던 김상진의 병세는 1999년 봄부터 급격히 악화했다. 3월 초 통원치료를 해오다가 갑자기 각혈과 하혈로 응급실로 실려와 4시간의 큰 수술을 받고 4월부터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졌다.
누구보다 앞장서 김상진의 투병을 도왔던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하루는 김상진이 “형님, 바람…좀…쐬고 싶어요”라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어디 가고 싶니?” 김 트레이너가 물었다.
“63…63빌딩에…가고…싶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상진이 대답했다.
김상진을 휠체어에 태우고 김 트레이너는 63빌딩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김상진이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김 트레이너가 “상진아, 어디 보고 싶은 데라도 있니?”하고 물었을 때 김상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잠실야구장”이라고 답했다.
김 트레이너가 잠실구장이 보이는 쪽으로 휠체어를 놓자 김상진은 한동안 전망대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 갓 뽑아낸 밀크커피처럼 따뜻한 봄볕이 김상진의 이마를 내리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상진이 항균용 마스크를 입에서 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저기가…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제가…제가 완투승을 거둔 곳이 맞지요?”
김 트레이너는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잠실구장을 바라보는 김상진의 뒷모습을 보며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김 트레이너와 김상진의 마지막 외출은 그렇게 노을에 물든 단풍처럼 슬프게 흘러갔다.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팀을 이끈 뒤 우승메달을 목에 건 김상진
김상진의 외출은 한 번 더 있었다. 장소는 고향 광주. 그러나 야구장은 아니었다. 김상진이 찾아간 곳은 광주구장 옆 작은 카페였다.
김 트레이너는 김상진이 한창 건강할 때 “형님 500CC 맥주 한 잔만 사주세요”하고 매달린 통에 함께 술을 마신 기억이 있다. 그때 김상진은 친형 같던 김 트레이너에게 자신의 여자 친구를 소개했다.
“예쁘고 참한 친구였다. 어찌나 둘이 잘 어울리던지,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다 환해질 정도였다.”
힘들고 고달픈 투병생활 동안 김상진의 유일한 낙은 여자친구와의 휴대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 교환이었다. 그러나 투병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여자친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남자친구에 대한 변심이었을까. 아니다.
“상진이가 여자 친구에게 짜증을 많이 냈다. ‘왜 찾아오느냐’고. ‘찾아와서 뭐하느냐’고.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고. 여자친구도 상진이 병세가 악화할까 봐 애써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김상진은 여자 친구를 눈에서 보내는 대신 가슴에서 키웠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찾은 광주구장 옆 작은 카페가 바로 여자 친구와 자주 가던 카페였던 것이다. 카페에서 김상진은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이고 카페 밖을 바라봤다고 한다. 간간이 여자들이 지나칠 때마다 바이올린 현처럼 가늘게 눈을 떨면서.
천상비애(天上飛愛), 김상진
1999년 6월 9일 제대를 눈앞에 둔 나종용 씨가 김상진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지막 휴가 때 갑자기 일이 생겨 친구를 찾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상진이 어머님이 그러셨다. 상진이가 ‘엄마, 종용이가 휴가 나올 때 들렀다 간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와’ 하면서 날 기다렸다고 말이다.”
그러나 김상진 휴대전화의 전원은 꺼진 상태였다. 급한 마음에 나 씨가 김상진의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취했다. 역시 불통이었다.
“밤늦게 상진이 여자친구와 전화 연결이 됐는데, 다급한 목소리로 ‘상진이 오빠가 위독해 서울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통화를 했을 때.”
6월 10일. 잠에서 깨어난 김준재 트레이너는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김 트레이너는 마침 LG와의 원정 3연전에 맞춰 선수단과 함께 서울에 머물던 참이었다.
“이틀 전 그렇지 않아도 상진이를 보러 강남성모병원에 다녀왔다. 위기를 잘 극복하려니 했는데, 10일 아침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상진이가”
6월 11일 어깨 검진 차 미국을 방문한 이대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출국 때 아끼는 후배 김상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기 암인지 알면서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던 순진한 후배다. 노력하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원체 강한 후배였기에 고통을 잘 이겨내리라 생각했다. 미국에 도착해 한국에 전화했는데 상진이가 갑자기 상태가 악화해 그만”
같은 날 강의원 광주 진흥고 야구부장은 지인으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따라 전해지는 소식은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상진이가 말기 암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온몸을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투병 중 ‘팍팍’ 머릴 밀고 학교에 찾아왔을 때도 ‘넌 이겨낼 수 있다’며 격려했지만, 이렇게 순하디순한 녀석에게 그런 병이 생겼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날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상진이가, 우리 상진이가 눈을 감았다고 했다. 어린놈이 먹고살겠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그걸…왜 이해를 못 해주고…데려가는지…그…어린놈이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김상진의 영정 사진. 죽음을 예상하지 않은 까닭에 따로 영정 사진을 찍지 않았다
전화를 받고 가장 먼저 뛰어간 이는 김 트레이너였다. 병원 냉동실에 안치된 김상진의 시신을 보며 김 트레이너는 말을 잃었다. 그때 김상진의 누나가 차갑게 굳은 동생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상진아, 네가 좋아하는 형님 오셨다. 어서 일어나서 인사해야지. 상진아, 어서….”
순간 김 트레이너는 그 자리에서 고장 난 수도꼭지 마냥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김상진의 나이 향년 22세였다.
하늘나라에서 ‘V10’를 지켜보는 영원한 아기 호랑이
미혼이었던 김상진은 곧바로 화장됐다. 화장된 유골은 그가 중고등학교 시절 하루가 멀다고 뛰어다니던 진흥고 뒷산 운암산에 뿌려졌다. 학교 측의 반대로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산을 돌아 아무도 모르게 화장 유골을 뿌려야 했다.
2002년 김상진은 법당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친구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처음엔 김상진의 여자 친구가 신부로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미래를 걱정한 친구들의 만류로 무산됐다고 한다.
나종용 씨는 3년 전 김상진의 어머니를 만났다. “상진이 어머님이 ‘우리 애기 화장시키지 말고 묻을걸’ 하시면서 계속 같은 말만 하셨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여쭤봤더니 ‘그럼 우리 애기가 무덤에서 환생할 것만 같다’면서 우셨다.”
강의원 광주 진흥고 야구부장은 야구부 감독에서 손을 뗀 지 오래다. 이제는 제자들의 경기를 TV를 통해 보는 게 낙이다. 그럴 때면 김상진의 생각이 절로 난단다.
“요즘 (임)창용이가 좀 잘하나. 한 녀석은 저렇게 일본에서 승승장구하는데, 다른 한 녀석은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6월 10일 고 김상진의 10주기를 맞아 김준재 트레이너는 이대진과 전화통화를 했다. 두 사람은 김상진을 추억하며 이런저런 말을 나눴다.
“대진이가 ‘상진이가 살아있었으면 32살’이라고 했다. 순간 깜짝 놀랐다. 난 아직도 상진이를 22살로 생각했지 뭔가.”
2군에서 1군행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재활 중인 이대진은 김상진의 작고 뒤 후배의 등번호였던 11번을 달았다. “상진이가 너무 일찍 잊히는 게 싫어서”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등번호로 돌아가고 말았다.
“잘했으면 모르는데 상진이 등번호를 달면서 더 성적이 좋지 않았다. 상진이한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이대진은 만약 김상진이 살아있었으면 “워낙 착실하고 성실한 선수였기에 FA(자유계약선수)가 돼서 대박을 터트리지 않았겠느냐”며 “지금쯤 살아있으면 수많은 팬을 거느린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됐을 텐데…”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상진 팬클럽 ‘천상비애’ 회원들이 준비한 떡
김상진의 작고 10주기를 맞아 KIA 선수들은 예고한 데로 모두 왼쪽 팔에 ‘근조’라고 적힌 검은색 리본을 달았다. 그러나 10년이란 세월이 주는 무게감 때문인가. 김상진에 대한 추억은 희미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구단 프런트 몇 명과 이종범, 장성호, 김종국 등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상진을 아직도 추억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김상진의 팬클럽 ‘천상비애’ 회원들이었다. 이날 목동구장을 찾은 ‘천상비애’ 회원들은 KIA 선수단의 건투를 기원하며 떡을 돌렸다. 그리고 1루 응원석 상단에 ‘당신을 언제나 응원합니다’란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천상비애’의 운영자 김소정(25) 씨와 회원 김주웅(27)씨는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둔 뒤 포효하던 김상진을 보고 팬이 됐다. 그때의 인상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아직도 그의 팬임을 자랑스러워한다.
한때 1천200명에 육박하던 팬클럽은 이제 열 명 남짓 활동하는 소규모 친목모임이 됐다. 그러나 단 한 명이 남아 김상진을 추억하는 한 ‘하늘 위로 먼저 보낸 사랑’이라는 뜻의 ‘천상비애’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취재를 마칠 무렵. 김상진이 마지막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으며 투병생활을 했던 강남성모병원의 관계자를 만났다. 그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김상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유명 야구선수가 암 투병 중이었다. 병문안이 끊긴 밤이면 불 꺼진 병실에서 매일같이 비디오로 야구경기를 봤는데 늘 같은 경기였다. 하루는 그 경기가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이겼던 경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야구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그 팀 우승했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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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다가 울컥했네요..
그리고 그 5차전 영상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_)
첫댓글 아, 저렇게 잘 던졌던 우리 김상진 선수 ㅠㅠ 정말 다시 보고 싶습니다...
아 진짜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네요 ㅠㅠ 영원히 타이거즈의 아기호랑이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타이거즈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였는데... 고작 22살짜리 젊은 선수가 위암 말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가슴아팠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10번째 우승을 위해 12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네요. 하지만 이렇게 기억해주는 팬들이 있는 이상, 김상진 선수는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살아있을겁니다.
아, 눈물이 다나네요...홍현우 선수는 '애기'라고 불렀던건가요...뒷이야기들을 들으니 더욱 짠하네요, 고인에게 누가될진 모르겠지만. 영화화해도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그를 기억했으면 좋겠네요
감동적입니다, 눈물이 앞을..
아 김상진 보고 싶당
와 공 정말 좋네요~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