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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 안본지 꽤 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일보는 ...지난 연말의 충격으로 오마이 한겨레 프레시안 인터넷 신문도 꺼리다가 결국 아무 신문도 안읽는 사람 저 ㅜ.ㅜ.. 오늘 진주할아버지 제사 음식 만들다가 전기후라이펜 아래 깔린 김인식 감독에 관한 기사 읽으면서...예전에 이런 기사 읽고 흥분하던 감흥이 올랐습니다. 김인식감독 멋지네요. 그의 나이 59세. 제가 옛날에 좋아하던 엠비씨청룡선수는 아닌가봐요.
----아무튼 찾아봤습니다.조선일보에서 ^^ ------
그는 항상 여유가 넘친다. 느긋한 말투에 표정도 여유만만이다. “날 봐. 햇볕도 안 쬐었는데 이렇게 얼굴이 다 탔잖아.” “내 약이 다 떨어졌어. 콩 말이야. 식초에 절인 검은 콩.” 최고의 스타들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야구월드컵’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일본과 멕시코에 이어, 14일 미국까지 세계 강호들을 줄줄이 격파한 수장(首長)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하다.
김인식(金寅植·59·한화 이글스·사진) 감독. 그는 아직도 오른쪽 다리를 전다. 2년 전 겨울 갑작스레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 달 이상 병원 신세를 졌던 후유증이다. 경기 중에도 힘든 표정이 역력하지만 겉으로는 건강 문제에서도 긍정적으로 말한다. “아니, 나처럼 빨리 회복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 정도도 감지덕지지.” 이번 대회에서 연승을 거듭하면서 출장(?) 기간이 길어지자 “빨리 집에 가야지”라면서도 “소속팀 한화에서 연락이 안 온다. 날 잊어버렸나 봐”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는 국내 야구 지도자 중 최고의 덕장(德將)으로 꼽힌다. OB 감독 취임 첫해인 1995년과 2001년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고, 2002년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따냈다. 그때마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믿음의 야구’였다. 선수들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그 선수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지도 방식으로 선수들의 숨어 있는 능력까지 이끌어낸다.
또 2004년 한화 감독으로 취임한 후에는 다른 팀에서 버려진 선수들을 불러 모아 재기시키는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름하여 ‘재활 공장장’. 조성민을 비롯해 지연규, 김인철 등이 좋은 예다. 그래도 그의 말은 언제나 비슷하다. “아, 지들이 열심히 한 거지. 내가 뭐 한 게 있어?”
이번 국가대표 야구 드림팀을 맡은 건 순전히 사명감 때문이다. 몸이 완전하지 않아 고사했지만 다른 팀 감독들이 모두 그를 추천했다. 일단 감독을 맡자 그는 김재박(현대 감독), 선동열(삼성 감독) 등 쟁쟁한 스타 출신 지도자들을 코치로 쓰면서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만들어냈다.
김재박 코치와 선동열 코치는 언제나 김인식 감독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그러고는 선수단 일정이나 투수 기용 문제 등 주요 사안들을 세세히 상의하고 지시를 받는다. 선동열 코치는 “언제나 특별하게 나서지 않으시면서도 정확하게 경기의 맥을 짚어 내신다. 투수 교체 문제뿐 아니라 수비 위치 이동까지 그냥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과거 해태 시절의 스승을 높이 평가했다.
(15일자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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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감독 어록
어눌한듯 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사람이 김인식 감독이다. 할 말 하는 정도가 아니라 때론 '촌철살인'도 심심찮다. 양보다 질을 앞세우는 김인식 감독이 이번 WBC에서도 주옥같은 어록을 만들어냈다.
▶"몰라, 전혀 모르겠어."
1라운드를 3전승으로 통과한 직후 2라운드에선 어떤 식으로 전력을 운용할 것인가를 묻자 뜻밖에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감독 실수하는 거 아냐?"
김감독은 "빅리그 팀과의 두차례 연습경기가 부담을 준다"고 했는데 일본은 오히려 연습경기를 1차례 추가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녀석이 어찌나 공갈을 세게 치는지 이렇게 두꺼운 점퍼까지 입었잖아."
'애리조나는 밤이 되면 엄청나게 춥다'는 박찬호의 말에 훈련 첫날 완전무장을 하고 나와서.
▶"한자로 김,인,식이라고 써줬어. 그게 제일 낫겠더라고."
한 미국팬으로부터 사인 요청을 받고 한글과 영어 중 고민하다가 결국 한자로 이름을 써줬다며. 한자를 일종의 '그림'으로 인식하는 서양인의 특성상 한자 사인을 더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단다.
▶"그 양반은 맨날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그 말 밖에 안해."
김감독과 일본의 오 사다하루 감독이 미국-멕시코전 나란히 앉아서 봤다. 이때 오감독은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라고 말했고, 김감독은 "나이스 투 미트 유(Nice to meet you)"라고 화답했다.
▶"소식 없어. 연락 끊긴지 좀 됐어. 아무래도 나를 잊었나 봐."
샌디에이고와의 연습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지도하던 김감독은 한화 코칭스태프와 자주 연락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횡포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본보기로 삼을 필요도 있어."
일본-미국전 판정번복을 보고 한마디. 국내 야구에서도 희생플라이 때 3루주자의 리터치를 정확히 안 보는 경향이 있다며.
▶"일본은 지금 전력같은 대표팀을 서너개는 더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한개쯤 더 만들 수 있다"
16일 2라운드 최종전서 일본을 꺾은 뒤 공식인터뷰에서 한 말. "단기전에서 몇번 이겼다고 수준이 오르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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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감독 에피소드'… 생뚱맞은 부탁도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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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9월27일. 당시는 프로야구 인천 경기가 문학구장이 아닌 도화구장에서 열릴 때였다. OB와 태평양의 시즌 마지막 경기. OB가 이기면 LG에 0.5게임차로 앞서 사상 최대 접전끝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지을 수 있는 날이었다.
OB 김인식 감독 주변에 몰려든 취재진 중 모스포츠지의 K기자가 생뚱맞은 부탁을 했다. "경기 끝나고 기자실에 인터뷰하러 들어올 때 있잖아요, '흥분한 표정으로 누구 담배 가진거 없어?'하고 좀 물어봐주세요. 사실은 마감 때문에 기사를 미리 써놓고 나왔는데 앞부분이 그렇게 시작하거든요…."
김감독은 그저 묵묵부답, 옆에 있던 기자들도 그냥 웃고 넘어갔다.
마침내 OB가 3대2로 태평양을 따돌리고 1위가 확정된 뒤 기자실. 인터뷰를 위해 문을 열고 들어선 김감독이 상기된 얼굴로 "누구 담배 가진거 없어?"하고 준비된 '대사'를 그대로 읊어주는게 아닌가.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97년 7월 어느 일요일엔 이런 일도 있었다. 부산 사직구장의 롯데-OB전. 일요일 오후 2시 경기라 취재진은 저녁 7시30분 서울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았다. 공항이 워낙 멀고 교통정체도 심해 경기가 길어지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 당시 최선참이었던 기자가 슬쩍 농을 던졌다. "비행기 놓치지 않게 투수 좀 적게 바꿔 주세요."
그래 놓고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김감독은 실제로 투수를 단 세명만 내고 2시간30분만에 승리했다. 며칠후 다시 만난 김감독이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날 비행기 잘 타고 갔지?".
◆ 민창기 기자: 감독님은 코미디언
그의 옆에 있다보면 틀림없이 아이스크림이 떨어진다. 그 나이(1947년생)에 그 이상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대한민국 할아버지가 있을까. 홍조띤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초등학생 모습이다.
덕아웃이나 감독실 주변을 배회하고 있으면 꼭 불러 다정하게 아이스크림을 집어 준다. 메뉴는 늘 똑같다. 메론맛이 나는 특정사 제품이다. 그의 뜻을 무시하고 다른 제품을 사왔다가는 곧장 반품이다.
분문율은 하나 더 있다.
함부로 냉장고를 넘봤다간 큰 일(?)난다. 김감독이 두산 사령탑으로 있던 어느날 잠실구장 덕아웃 냉장고를 열어본 적이 있다. 딱 하나 남은 아이스크림을 무심코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곧장 김감독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날 매니저는 구장 주변을 샅샅이 뒤져 메론맛 아이스크림을 다시 사다와야 했다.
지난 2004년 겨울 김감독은 한 선수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왔다.
경기도 분당 집에 올라오자 마자 곧장 병원으로 향했고 바로 입원 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날 밤 기자는 병문안을 갔다온 뒤 '김감독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기사를 썼다.
그런데 며칠후 병원을 다시 찾은 기자에게 김감독은 초강력 항의를 했다. 중풍을 연상시키는 '뇌졸중'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일이 너무 커졌다는 볼멘소리였다.
평소 코믹한 말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김감독. 실제로 코미디언 배일집와도 절친한 친구 사이다.
◆ 정현석 기자: 의리의 사나이 김인식
지난해 초여름이었다.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퇴근 후 당산역 근처의 한 지하 호프집을 찾았다. 야구인 생활을 정리한 분이 막 오픈한 가게였다. 오후 8시쯤.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사복 차림의 김인식 한화 감독이었다. 인천에서 열릴 SK전이 취소되자 지인들을 이끌고 찾아온 것. 눈코뜰새 없던 시즌 중임에도 '거기 한번 가야하는데…'를 늘 읊조리던 그였다.
한쪽 구석 자리를 잡은 그는 메뉴판을 집어든채 한참을 고민했다. 이어 던진 말. "뭐, 이래. 좀 비싼 술 없어?". 젊은이들이 주고객인 호프집. 고급 양주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종업원을 불러 모 양주를 밖에서 사다줄 것을 부탁했다. "입이 고급이라 싸구려 양주는 못 마신다"는 그럴듯한 구실.
하지만 실제 김감독은 소주를 가장 좋아하는 대표적 서민파다. 지인의 첫 사업이 자리잡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생각에서 억지로 짜낸 고육책이었던 셈. 결국 이날 김감독의 테이블 술값은 가게 오픈 이후 최고액인 80만원이 나왔다.
야구계를 떠난 사람은 금새 잊고 마는게 인지상정이자 이해관계의 법칙. 하지만 김감독은 전혀 다르다. 인연을 중시하는 그는 전현직 야구인 챙기기에 공인 1인자다. 특히 아무리 바빠도 경조사만큼은 빼놓지 않고 챙긴다.
어떤 상황에도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후배를 내치는 법이 없다. 몸살로 열이 펄펄 올라 몸져 누웠던 자리를 박차고 밤 12시에 걸려온 술취한 후배의 목소리를 따라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은 일도 있다. 의리파 김인식 감독 주위엔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 김태엽 기자: 알고보면 멋쟁이
WBC 대표팀이 아시아 예선을 준비하던 지난달 27일. 일본 후쿠오카 간노스구장에서 대표팀 청백전이 열렸다. 이날은 후쿠오카의 늦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 김감독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십여명의 취재진 중 기자를 주목했다. "으음…옷을 아~주 좋은 거 입었구만. 아는 사람만 알 수 있어." 무슨 비밀을 알아차린 양 은근한 미소의 김감독.
기자가 입고 있던 재킷은 큰 맘 먹고 장만한 소위 명품 재킷이었지만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 지인들로부터 '길거리표 재킷'로 놀림받아 속상해 하던 차였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은 아무도 몰라주던 재킷을 대번에 알아봐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어디 한번 살짝 뒤집어봐. 봐! 맞잖아. 나도 저거 있어!"
기자들은 김감독이 평소 이웃집 아저씨같은 수수한 모습이지만 사실은 옷이나 액세서리가 예사롭지 않은 '명품족'이란 말을 새삼 실감했다.
풍류를 아는 것도 지인들이 김감독을 멋쟁이로 꼽는 요소. 김감독은 춤과 노래로 스트레스를 날리는 낭만파적 기질을 갖고 있다. 애창곡도 많고 좌중을 휘어잡는 입십도 대단하지만 이중 70년대 중반 전세계를 강타한 디스코, 허슬은 김감독이 내세우는 비장의 개인기. 김감독은 술자리에서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허슬은 사람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춤을 추는 게 특징. 바쁘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김감독 때문에 '춤꽝'인 사람들은 괴롭다. "다들 뭐해! 이리와서 같이 추자고! 얼른 나와!"
◆ 손재언 기자: 숨기고 싶은 약점
60년대 운전면허를 딴 그가 30년만에 면허증을 불사른 이유는? 지난 90년 쌍방울 창단시절로 되돌아 간다. 창단 후 첫 원정길에서 구단버스가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것이 발단이었다. 생사를 가르는 대형사고.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탈 것에 대한 공포를 처음 느꼈다. 그리고 몇년 후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전주 개인숙소로 마련한 아파트에서 한밤중에 후진 주차를 하다가 실수로 아파트 경비실로 돌진한 것. 다행히 경비실에 사람이 없어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경비실이 폭싹 무너져 절반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날 김 감독은 30년간 애지중지하던 면허증을 불살라버리고 만다.
악몽이 잊혀질 쯤 또 하나의 결정타를 맞는다. 2001년 2월 두산 화와이캠프. 최고급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혼자서 30분간 갇히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폐쇄공포증을 경험한 김감독. 그때 시절을 회상하면 아직도 식은 땀이 흐른다. "갑자기 흔들리더니 움직이질 않는거야, 야~ 평생 그때 만큼 겁을 먹은 적은 없을꺼야." 당시 현장에서 '김감독 구출작전'에 나섰던 두산관계자들도 "그때 김감독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증언했을 정도.
이때부터 김감독은 혼자 차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법이 없다. 차를 몰 때는 항상 유지훤 수석코치가 운전석에서 보좌하고, 엘리베이터는 반드시 2인 이상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좋은 차도 많은 요즘 다시 차를 몰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는 "요즘 운전면허 시험보니까 고시더라고"라며 슬쩍 피해갔다.
첫댓글 꽃물들다님~~고맙습니다..._()()()_
오랫만에 기분좋은 지면을 읽게해준 꽃물님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