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참음의 발효
제가 공부하는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적 활동들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내용에서 어떤 규칙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찾아내어 체계적 이론으로 구성된 여러 현상들을 시대의 변화과정 속에서도 계속 유효한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은 수많은 이론들이 있고, 그 이론을 증명 혹은 수정하면서, 인간의 경제활동의 본질을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과거에는 단순한 몇 가지 기준과 고려를 통해 경제생활을 관찰했다면, 다양한 분야의 학문의 도움으로 보다 정밀하고 구체적인 증명을 시도하죠. 그래서 심리학이나 사회학, 정치학, 통계학, 심지어 최근에는 생물학이나 의학의(신경외과, 정신과 등) 도움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경제학이 어려운 것은 경제학자들의 생각들이 너무 번번히 수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편적 이해', '증명 가능한 법칙'들이 전제가 되는 과학의 이름을 붙인 학문들은 대부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왔으나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해내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면 '번개'와 같은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노여움이라고 확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서 이 노여움들을 이해할 수없는 경우가 많았죠. 악당들이 벼락에 맞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선량한 사람도 벼락에 맞아 죽거든요. 고민하던 사람들은 결국 '아마 벼락의 희생자가 겉으로는 선량해보였지만, 무언가 벌을 받을 만한 일을 은밀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을 찾아와 조언했던 분들과 같이....
그러나 이것은 과학의 발전으로 단순하고도 우연한 자연현상일 뿐임을 알게되었죠. 이처럼 새로운 발견으로 새로운 지식과 이해를 갖게된 현상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들을 우리 힘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여전히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사실 중 하나가 1세기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에 관용적 태도를 보이며 실제로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하는 시기 사이에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가 성장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수없이 많은 연구자들이 역시 그들의 숫자 만큼이나 다양하고 심지어 상반된 주장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역시,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검증이 시도되고, 고고학과 생물학 등 자연과학의 방법론까지 동원됩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와 결론은 여전히 명쾌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주장들을 읽으며 개연성 있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그 주장들을 소개하는 데 만족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러던 중 엘런 크라이더의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라는 책을 발견하고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소개를 받은 책이 아니고 우연히 서점(중랑몰)의 서가를 뒤지다가 발견했는데, 이 책은 로마제국 안에 뿌리를 내린 초기 기독교의 성장 비밀을 조금 색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엘렌 크라이더는 몇 가지 통찰력있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인내', '발효' '아비투스', '습관적이나 정형화되가던 교리교육과 예배' 등입니다.
저는 이 초기 교회의 성장 비밀들이.. 어쩌면 하나의 큰 개념 속에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그 큰 개념을 크라이더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이 '발효(Gärungsprozess)'라고 설명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고민을 해봅니다. 발효란 사전적 의미로는 '미생물이나 균류가 유기물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 대사과정' 즉 어떤 물질이 화학적 변화를 통해 완전히 다른 물질로 변화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과정에는 다양한 조건과 이 조건들의 습관적 반복, 그리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크라이더는 당시 기독교가 성장을 위한 어떠한 노력(전도나 선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폐쇄적이었기에 소위 여러 과학적 방법들이 증명한 성장의 요인이 없이, 그저 수적으로나 영향력에서 미미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바로 '발효'라는 거죠. 이들은 교리교육이나 예배, 성찬과 같은 정형화와 반복적인 행위로 습관을 만들어 냈고, 온갖 사회적 압력과 비방, 박해를 견뎌냈으며, 그런 과정에서 강력한 에너지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발효된 듯 완전히 새로운(변화된) 에너지 그 자체였다는 거죠.
인간의 수고와 상상력으로 그 현상들을 확인하는 소위 과학적 방법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정도이며(그것조차 불완전하지만), 인내의 과정을 거친 발효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개입한 '창조'이며, 은혜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인간 영역의 너머에 있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아직 더 고민을 해보아겠습니다만, 오히려 지금 저에게는 더 선명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이 아니라 지역개발을 위한 연구차 여러 차례, 바울사도께서 세운 초대교회의 흔적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유적들을 간직한 현장들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고 은혜로운 역사적 현장들이 현재 얼마나 다른 용도로 상업적으로 활용되고 있는지에 크게 놀라곤 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그 뜨겁고, 열정적인 장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던 장소들의 오늘의 모습은 '폐허'이고 '실패'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한 흔적들이 문화의 가장 저급한 찌꺼기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지만, 기독교는 복음은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한 에너지로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곡물이 발효되면 알코올이나 유기산과 같은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물질을 만들어 내지만, 그 곡물은 찌꺼기로 남아 있듯이 말이죠.
엘렌 크라이더의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는 인간의 한계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큰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발효'라는 개념 앞에서 "네가 눈 곳간에 들어와봤는냐, 우박창고를 아느냐...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욥기38)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창조주 우리주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에 정신을 못차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