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 한때는 꿈과 이상에 대한 정열과 희망을 품었던 사람. 그러나 지금은 현실과 아버지로서의 의무감에 짓눌려 사고 능력을 상실한 무성격자
처 : 인물 설정의 의도로 볼 때, 교수와 똑같은 부류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교수와 자식 사이의 줄을 잇고 있는 매개자로서, 현실에 대한 인식 상태도 교수와 자식들 사이의 중간자적 위치이다.
장남·장녀 : 이들은 두 인물로 설정되어 있으나, 실은 하나와 같다. 육체적으로는 건강하나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욕구에 가득 찬 인물로 현대인의 현실에 대한 욕망을 나타내고 있다.
감독관·천사 : 이들은 관념적인 인물로 감독관은 현실의 압력을, 천사는 꿈과 이상을 상징한다.
막(幕)이 오르기 전, 요란스러운 통속(通俗) 음악이 들린다. 음악이 차차 요란해질 무렵,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전면(막 앞) 중앙에 서 있는 장녀를 포착한다. 꽉 몸에 낀 화려한 색의 블라우스와 캐프리 팬티를 입고 있다.
무지무지한 젖통이와 뒤로 사정없이 바그라진 엉덩이에, 관중들은 첫 장면에 위압을 느낀다. 입이 보통 여자의 서너 배는 된다. 빨간 칠을 한 아가리가 전 안면의 삼분의 이는 차지한다. 스포트라이프에 번쩍이는 귀고리, 목걸이, 손목걸이가 관중들 눈에 거슬린다. 나이는 스물 셋쯤, 이야기하는 동안 끊임없이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음악이 멎는다.
장녀 : (멋들어지게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바쁘신데 이렇게 많이 모여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제 소개를 먼저 할까요? 여러분들은 저한테 소개할 필요가 없어요.
아까 여러분들이 이 극장(혹은 이 학교, 혹은 이 집) 문을 들어오실 때 저는 옆에서 자세히 여러분들을 보았어요. 죄다 연령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여기 오시기 전에 잡수신 저녁 식사의 찬거리도 다르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을 잘 알아요. 그런데 모든 것이 제각기 다른 여러분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니 누가 누군지 분간을 할 수가 있어야죠. 모두 똑같이 보이는 걸요.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저에겐 여러분들이 한 사람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것은 다름 아니라, 근심, 걱정이 가득 찬 여러분들에게 우리 집 구경을 좀 시켜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집은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집 첫딸입니다. 장녀란 말입니다.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곧 소개하겠습니다만, 말이 자꾸 많아져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자가 아닙니다. 말이 짧아지면 무엇으로 제가 여자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어요. 저의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에요. 아버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인데, 안 나가는 학교가 없어요. 이름이 나면 저절로 여기저기서 찾는 법인가 보죠? 그 동안 책을 열두 권이나 냈으니 말은 다 했지요. 물론 그 열두 권이 전부 번역 작품입니다만, 열두 권에는 틀림없지요. 아버지의 명성과 돈벌이가 이런데다, 저는 또 이렇게 현대적인 신여성이니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저의 남동생도 매 마찬가집니다. 건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때, 서서히 막이 오른다.)
그럼, 저의 집으로 안내하겠어요.
(장녀, 무대 좌측(左側)으로 걸어간다.)
이것이 응접실입니다. 務台(무태) 右側(우측) 후면에 쏘파가 있다 관객석 가까운 곳에 책상과 의자 하나가 前面(전면)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책상 위에는 原稿紙(원고지)가 그득히 쌓여 있다 쏘파는 흔히 볼 수 있는 型(형)이지만 씌운카바의 무늬는 原稿紙(원고지)의 칸 그대로다 무대 右側(우측)에 보이는 壁(벽)의 일부분과 후면에 서 있는 긴 壁(벽)의 모습도 흡사 原稿紙(원고지)를 곧추세운 것 같다 벽의 무늬들도 原稿紙(원고지)의 칸 그대로 後面壁 右端(후면벽 우단)에 바깥하고 통하는 도어 가 있다 동물원의 코끼리 우리 같은 鐵窓(철창)을 방불케 하는 도어 刑務所(형무소)의 철문 같다고 함이 좋을지도 모른다 후면 벽에 큼직한 窓(창)이 뚫려 있다 쏘파 앞에는 新聞紙(신문지)가 몇장 흩어져 있다 右側(우측) 무대 중간쯤에 푸렛이 중앙을 향해 四十五度(45도) 각도로 위치해있다 푸렛트홈 후면에도 역시 벽이 있지만 이 벽은 화려한 색갈로 칠이 되어 있다 이 푸렛트홈은 長女(장녀) 및 長男(장남)의 방이다 한구석에 역시 고운 색깔의 쏘파가 있어 이 위에 미끈하게 생긴 長男(장남)이 길게 누워 있다 이방에는 래듸오 蓄音器(축음기)를 비롯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치품이 여기저기에 늘어져 잇다 큼직한 罫鍾時計(괘종시계)도 하나 전체적으로 小王國(소왕국) 같은 인상을 준다 右側(우측)에 비해 左側(좌측) 푸렛트홈의 방이 굉장히 밝다 관객들은 右側(우측) 방과 左側(좌측) 방 사이에 벽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右側(우측) 방 즉 응접실 쏘파 뒤에 굶은 줄이 칭칭 감긴 막대기가 하나 서 있다
(장녀, 좌측으로 사라진다.)
(長男(장남)이 일어선다 그러고는 관중에게 이야기한다)
장남 : 전 이 집 장남입니다. 이 쪽 높은 방은 저하고 누이가 함께 생활하는 곳입니다. 아버지를 소개하기 전에,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을 말씀드리겠어요.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밥 세 끼도 제대로 못 먹이고, 학비도 제대로 못 주는 부모들이, 아들 딸이 결혼할 때가 되면 아주 귀찮게 간섭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집이 비교적 행복한 것도 우리 부모님의 열렬한 책임감 때문입니다. (자기 팔뚝 시계를 보며) 지금이 저녁 일곱 시 반이니, 아마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겁니다. 아버지는 늘 쾌활한 얼굴에다 발걸음은 참새처럼 가볍지요.
(졸음이 오는 지루한 음악과 더불어 철문(鐵門) 도어가 무겁게 열리며 교수 등장. 아래위 양복이 원고지를 덧붙여 만든 것처럼 이것도 원고지 칸투성이다. 손에는 큼직한 낡은 가방을 들고 있다. 허리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는데, 허리를 돌고 남은 줄이 마루에 줄줄 끌려 다닌다. 쇠사슬이 도어 밖까지 나가 있어 끝이 없다. 도어를 닫고 소파에 힘들게 앉는다. 여전히 쇠사슬을 끌고다니면서, 가방은 자기 옆에 놓고 처음으로 전면을 바라본다. 중년에 퍽 마른 얼굴,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고, 찌푸린 얼굴은 돌 모양 변화가 없다. 잠시 후, 피곤하다는 듯이 두 손을 옆으로 뻗치면서 크게 기지개를 한다. '아아' 하고 토하는 큰 하품은 무엇에 두드려 맞아 죽은 비명같이 들려, 오히려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장녀가 플랫폼에 나타난다.)
장녀 : 저의 아버지랍니다. 밖에서 돌아오시면 늘 이렇게 달콤한 하품을 하신답니다.
(교수는 머리를 기대고 잠을 자고 있다. 코를 고는데, 흡사 고양이 우는 소리다.)
인제 어머님이 돌아오세요. 어머님은 늘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세요.
(적당한 곳에서 처가 나타난다. 과거에는 살도 쪘지만, 현재는 몸이 거의 헝클어져 있다. 퇴색한 옷을 입고 있다. 소리를 안 내고 들어와, 잠자는 교수의 주머니를 샅샅이 턴다. 돈을 한 주먹 쥐고, 이어 교수의 가방을 턴다. 돈 부스러기를 몇 장 찾아 내고 그 액수가 적음에 실망을 한다. 잠시 후, 교수를 흔들어 깨운다.)
장녀 : 제 말이 맞았지요? (플랫폼 방 불이 서서히 꺼진다.)
처 : 여보, 여기서 그냥 주무시면 어떡해요, 옷도 안 갈아입으시고.
교수 : 깜빡 잠이 들었군.(교수 일어선다.)
처 : 어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처는 교수 허리에 친친 감긴 철쇄를 풀어 헤치고, 소파 뒤에 긴 막대기에 감겨 있는 또 하나의 굵은 줄을 풀어 교수 허리에 다시 감아 준다.)
처 : 옷을 갈아입으시니 한결 시원하지 않아요?
교수 : 난 잘 모르겠어.
처 : 김 씨 만나 봤어요?
교수 : 아니, 원체 바뻐서.
처 : 그렇지만 김 씨 만나는 일이 제일 바쁘지 않아요? 내일까지 내야 하는데 전 어떡해요?
교수 : 내일 만나, 내일 만나.
처 : 내일 누구가 누구를 만난단 말이요?
교수 : 내가 그 이 씨를 만난다니까.
처 : 이 씨는 또 누구요?
교수 : 당신이 만나라는 출판사 주인 말이야.
처 : 그 주인이 왜 이 씨예요? 김씨지.
교수 : 그래, 김씨랬어.
처 : 이름도 못 외고 어떻게 해요?
교수 : (화를 내며) 김 씨면 어떻고 이 씨면 어때? 박 씨면 또 어때? 아닌게 아니라 누가 누군지 분간을 못 하겠어. 누굴 만난다고 찾아가다가 보면 영 딴 사람한테 가게 된단 말이야. (잠시 사이) 거 애들보고 음악이나 한 곡 틀라고 하시오.
처 : (순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옆방을 향하여) 얘들아. (잠시 후) 얘들아.(대답이 없다. 여전히 부드럽게) 얘들아.
장남 : (처의 소리와는 정반대로 호령이나 하듯이) 왜 그래요?
처 : 가벼운 음악이나 한 곡 틀어라. 아버지가 피곤하시단다.
장남 : 알겠어요! (옆방에서 축음기 소리가 난다. 시끄럽고 귀가 아픈 곡이면 어떤 음악이건 상관없다. 판이 고장이 난 듯, 똑같은 곡이 되풀이된다. 처는 무표정한 얼굴. 교수는 시끄럽다는 듯이 손으로 귀를 막는다. 참다못해 교수는 손을 흔들며 중지하라는 시늉을 한다. 음악이 멎으며 옆방이 밝아진다. 소파에 앉아 무엇을 처먹고 있는 장남과, 아무렇게나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장녀가 보인다.)
교수 : 저런 시끄러운 음악을 무엇 때문에 틀까?
처 : 왜 시끄러워요?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곡인데.
교수 : 좋건 나쁘건 간에 왜 똑같은 곡을 되풀이하느냐 말이오?
처 : 당신이 음악을 몰라 그래요. 애들은 좋다고 하던데.
교수 : 그 곡 이름이 뭐지?
처 : "찬란한 인생"이라나요.
교수 : 찬란한 인생이라. 찬란한 인생이 자꾸 되풀이된다는 말이군.
처 : 그런가 부죠. (교수가 소파 앞에 굴러 있는 신문지를 집어 본다.)
교수 : (신문을 혼자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의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엔 두 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 참, 지프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지프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내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책이 착취사(搾取社)에서 다시 나왔어. 이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가 신문지를 한 장 다시 접는다. 날짜를 보더니)
처 : 당신두 참, 그건 옛날 신문이에요. 오늘 것은 여기 있는데.
교수 : (보던 신문 날짜를 읽고) 오라, 삼 년 전 신문을 읽고 있었군. 오늘 신문 이리 주시오. (오늘 신문을 받아 가지고 다시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에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에는 두 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 참, 지프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지프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내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책이 악마사(惡魔社)에서 다시 나왔어. 이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 : 참, 세상도 무척 변했군요. 삼 년 전만 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당신 피곤하시죠?
장녀 : (옆방에서 화장을 하며, 장남에게) 얘, 시계가 좀 늦은데 일어선 김에 밥이나 좀 줘라.(장남, 시계에 밥을 준다.)
처 : 여기 좀 계세요. 저 밥을 좀 지을게요.
교수 : 괜찮어, 밥 먹었어.
처 : 어디서요?
교수 : 여기서 먹었던가? 아니야, 거리서 먹었던 것 같기도 하구.
처 : 언제요?
교수 : 오늘 아침에도 먹었구. 점심두……. 글세…… 그러나 보니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분간을 못 하겠군.
처 : 지금 하시는 번역은 언제 끝나요?
교수 : 지금 하는 번역이 몇 가지나 있지?
처 : 그러니까 밤낮 원고료를 짤리우지요. '자존심의 문제', '예술에 있어서의 창조성', '검둥이와 미녀', '어떤 여자의 고백', ……이렇게 넷뿐인가요?
교수 : 그렇겠지. 아이 피곤해.
처 : 어떤 것이건 빨리 끝내야지, 어떻게 해요. 집도 수리해야겠구, 축음기도 사야겠구, 또 이 달에 아버지 생일도 있잖아요.
교수 : 밤낮 생일을 치르고 있으니 어떻게 된 거요? 어제도 아버지 생일 잔치를 했는데.
처 : 당신두 참! 어제 당신 아버지가 생신이었어요. 이번엔 우리 아버지 생일이구.
교수 : 그저께도 누구 아버지 생일이라구 해서 돈 만 환을 내지 않았소?
처 : 그건 대식이 동생 사촌의 며느리뻘 되는 여자의 아버지 생일이래서 그랬지우.
교수 : 그 바로 전날에도 누구 아버지 생일이라고 해서 돈을 냈는데.
처 : 그건 순자 언니 조카뻘 되는 며느리 시누이의 아버지…….
교수 : 됐어, 됐어.(크게 하품을 하며) 아이 피곤해.
(이 때, 밖에서 시계가 여덟 시를 친다. 교수는 깜짝 놀라 일어선다.)
여덟 시야! 여덟 시! 늦겠군.
처 : 어디 가세요?
교수 : 어디 가긴 어디 가. 나 가는 데 모르시오? 옷 갈아입어야지.
(전번 모양 철쇄를 졸라맨다. 이어, 도어 쪽으로 가서 철문 같은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다시 들어온다.)
처 : 왜 또 돌아오세요? 나가시기가 바쁘게.
교수 : 여덟 시를 치기에 아침 여덟 신 줄 알았지. 대학에 강의하러 나간다고 나섰더니 밖이 캄캄하지 않어. 생각해 보니 밤 여덟 시군. (소파에 누우면서) 오늘 밤은 좀 푹 쉬어야겠군.
처 : 공부는 안 하세요?
교수 : 공부?
처 : 아, 번역 말이에요.
교수 : 좀 쉬어야겠어.
처 : 그럼 좀 쉬시다 일어나세요 전 옆방에 갔다 오겠어요 참 당신두 옷좀 갈아입으세요
(전번 모양 鐵鎖(철쇄)를 바꾸어 맨다 이어 退場(퇴장))
교수 : 아이 피곤해
이때 고요한 음악이 들린다 눈을 감고 자는 교수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돈다 잠시 후 응접실 불이 서서히 꺼지고 푸렛트홈 방이 다시 나타난다 쏘파에 자리잡고 있는 장남 장녀
장녀 : (처에게 命令調(명령조)로) 양말 하이힐!
장남 : (처에게 명령조로) 잠바 마후라!
처는 말이 떨어질 때마다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떡이며 순응한다
장녀 : 용돈 교과서 과자!
장남 : 떡국 만두국 설렁탕!
장녀 : 영화값 연극값 다방값!
장남 : 교제비 차비 동창회비!
長男(장남) 長女(장녀) 같이 손을 내밀면서
장녀 : 돈!
장남 : 돈!
장녀 : 자식에 대한 책임
장남 : 자식에 대한 책임
푸렛트홈 방의 불이 꺼지며 다시 응접실이 밝아진다 쏘파에 누워 鐵鎖(철쇄)마저 어느 사이에 풀어 헤치고 행복하게 잠자는 교수가 보인다 시계가 아홉 시를 친다 시간이 한시간 경과하였음을 표시한다 이때 창문을 열고 監督官(감독관)이 방안을 들여다본다 얼굴이 흉측하게 생긴데다 아래위를 까만 옷으로 차리고 있어 지옥의 獄吏(옥리)를 방불케한다 긴 회초리를 든 손을 방안에 밀어 넣더니 잠자는 敎授(교수)를 회초리로 때린다 교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감독관 : 원고! 원고!
교수 : (일어나며) 네 곧 됩니다 또 독촉이군
감독관 : (책상쪽을 가리키며) 원고!
敎授(교수) 쏘파 한구석에 굴러 있던 가방을 집어 갖고서 황급히 책상에 가 앉는다 가방에서 원고(原稿)를 끄집어 내고 책을 펼친다
감독관 : 원고! 원고!
이윽고 교수는 번역을 시작한다 감독관이 창문을 닫고 사라진다 妻(처)가 들어온다 큰 자루를 손에 들고 있다
처 : 어머니! 그렇게 벌거벗고 계시면 어떡해요 (막대기에 감긴 鐵鎖(철쇄)를 줄줄 끌어다 敎授(교수) 허리에 감아 준다) 감기에 걸리면 큰일나요 (교수는 말 없이 번역을 한다 妻(처)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 교수 옆에 앉더니 큰 자루를 벌리고 교수를 주시한다) 빨리! 빨리! (교수가 말 없이 원고지 한장을 쭉 찍어 처에게 넘겨준다 妻(처)는 빼앗듯이 원고지를 가로채더니 자루 안에 쓸어 넣는다 그리고 ) 삼백환! (재빠르게 다음 페이지의 번역을 끝낸 敎授(교수)가 다시 한 장을 찍어 妻(처)에게 넘긴다 妻(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육백환! (이어) 구백환! (푸렛트홈 방이 다시 밝아진다 달콤한 音樂(음악)과 더불어 長男(장남) 長女(장녀)가 또 무엇을 처먹으면서 거울 앞에 가더니 얼굴의 여드름을 깐다 옆방에서는 여전히 敎授(교수)와 妻(처)가 결사적으로 일을 한다 妻(처)의 요란스러운 셈 소리가 三千圓(삼천원)을 훨씬 넘었다 監督官(감독관)이 다시 창가를 지나가며 기웃거리고 사라진다 일하던 敎授(교수)가 갑자기 붓을 놓고 쓰던 원고지를 보더니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처 : 왜 그러세요?
교수 : 참 신기한 일이야
처 : 삼천환을 겨우 넘었을 뿐인데 무엇이 신기해요
교수 : 이 원고지 말이요 다 이백 자(二百字)칸이 있는데 이 종이만은 백 구십 자( 百九0字)칸 밖에 안 들었어 열자 모자라 어째서 그럴까? 원고지가 한결 크고 시원해 보이는군 탁 트이는 것 같아 이상한데 이상해 (敎授(교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前面(전면)을 바라다본다 이때 무대 전체가 어두워지고 스포트라이트가 敎授(교수)만을 포착한다 잠시 모든 것이 조용해지며 과거를 상기시키는 감상적인 音樂(음악)이 고요히 흘러나온다 교수 전면에 또 하나의 스폿트 라이트가 투사되며 천사가 역시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춤을 추면서 들어온다 敎授(교수)는 천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교수 : (한참 있다) 오라 생각이 나는 것 같아 그래 바로 그거야
천사 : 나를 완전히 잊을 줄 알았어요
교수 : (일어서며) 분명 그래 아직 잊지를 않았어 나의 희망 나의 정열의 옛 모습이야
천사 : 쥐꼬리만한 기억력이 아직 남아 있군요
교수 : 언제 어떻게 돼서 당신과 헤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도 불타는 듯한 정열이 있었어요 그래요 생각이 납니다 밤을 새워가며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진리를 위해 온 생애를 바치겠노라고 떠들던 그때------- 아 꿈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당신은 왜 나를 버렸어요.
천사 : 당신이 나를 떠났지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어요 나한테 되돌아오기는 늦었어요
교수 : 내 꿈을 도로 찾아 주십시오 생각할 힘을 주시오 요지음은 통 사고(思考)를 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 : 이 함정에서 뛰어 나가고 싶습니다 (天使(천사)가 서서히 사라진다) 가지 마시오! 내 희망 내 정열을 어떻게 되는 거요! 꿈을 주십시오! 내 꿈! 내 꿈! 꿈을 잃은 교수는 맥없이 전면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어둠 속에서 창을 여는 소리가 나며 감독관이 얼굴을 나타낸다
감독관 : (회초리를 흔들며) 원고! 원고는 언제 쓰는 거야!
이 소리에 교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비참한 표정으로 번역을 계속한다 이러는 사이에 舞臺(무대) 전체가 暗輾(암전)한다 잠시 후 새소리 닭 우는 소리와 더불어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푸렛트홈 방에서는 長男(장남)이 반 나체가 돼서 아령을 쥐고 운동을 하고 있다 長女(장녀)가 아침 신문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온다
장녀 : (관객들에게) 벌서 아침이 됐습니다 (자고 있는 교수를 가리킨다) 아버지는 연구하시다 가끔 그대로 책상에 서 주무신답니다 그야말로 학자지요 여러분은 아침에 어머니가 먼저 안나오시고 제가 이 방에 대신 왔다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실는지 몰르겠읍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이 아버지 원고를 가지고 출판사로 달려갔으니 이렇게 제가 대신 왔습니다 아시겠지요? 아버지가 밤늦도록 수고하시니 저도 아버지를 위해 한가지 좋은 일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아버지께 신문을 읽어 드립니다 (교수를 깨운다) 아버지 아버지 (敎授(교수) 눈을 비비며 머리를 든다) 아침 신문 왔어요 읽어 드리겠어요
교수 : (하품을 하고) 그래 읽어 다오
장녀 : (신문을 읽는다) 비가 많이 왔어요 강원도 쪽의 눈이 굉장한 모양이요 또 살인입니다 이번엔 두 살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요 참 찝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답니다 찝차는 도망가버리구 이것 봐요 아버지의 '개성을 잃은 노동자' 라는 번역책이 악마사에게 다시 나왔어요 이씨가 또 당선됐답니다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군요 끔찍도 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한데 또 매맞았대요
교수 : 하루밤 사이에 참 신기한 사건도 많아라 세상이 그렇게 변해서야 어디 살 수 있겠니 너 왼쪽 손에 들고 있는 종이는 뭐냐?
교수 : (신문을 보더니) 그렇군! 난 영어길래 곧 번역할려구 했지 (시계가 여덟 점을 친다 교수는 무엇에 놀란 듯 황급히 일어나 가방을 들고 쏘파 쪽으로 가 鐵鎖(철쇄)를 바꾸어 맨다) 벌서 여덟시야 빨리 가야지 빨리 가야지 이번엔 분명 아침 여덟시겠지 (무겁게 철문을 열고 퇴장하면서) 오늘이 무슨 요일(曜日)이더라?
장녀 : 모레가 일요일이구 내일이 국경일(國慶日)이니까-------- 오늘은 금요일이군요
교수 퇴장 長男(장남)과 長女(장녀)는 쏘파에 앉아 고약한 稅吏(세리)처럼 버티고 妻(처)의 귀가를 기다린다 이윽고 妻(처)가 철문을 열고 돌아온다 피곤에 못 이겨 허둥지둥하면서도 돈 보따리는 꼭 끼고 있다 현기증과 갈증이 심한 듯 쏘파 앞에 무릎을 떨어뜨리며 주저앉는다 장남과 장녀가 여전히 무표정인 얼굴로 손을 번쩍 내 민다 처는 보따리를 해치고 돈을 나누어준다 돈을 받자 두 자식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妻(처)가 마루에서 일어나 쏘파에 주저앉아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창문이 열리더니 다시 감독 관이 회초리로 妻(처)를 친다 妻(처)가 깜짝 일어난다
감독관 : 연탄 준비! 김장거리! 빨랫감!
처 : 아이 또 독촉이군 (책상 쪽으로 가 천천히 흩어진 책이며 원고지를 정리한다)
갈래 : 희곡(단막극). 부조리극, 성격 비극
성격 : 반사실적. 서사적
배경 : 현대의 어느 중년 교수의 집.
특징 : 특별한 사건의 전개나 갈등, 위기가 없이 극중 상황만을 전개한 실험적 기법을 활용. 즉 무대 장치,분장, 소도구, 등장 인물의 대사와 행동 모두가 짙은 풍자와 반어 및 희극적 과장의 표현이 사용됨.
주제 :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린 비극적 현대인에 대한 풍자
출전 : <사상계>
이근삼(李根三) 극작가. 영문학자. 발랄한 희극 정신에 의한 풍자, 해학을 통하여 사회 및 문명 비판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사실주의 연극 탈피를 시도하였다. 작품으로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국물 있사옵니다" 등과 희곡집 <유랑 극단> 등이 있다.
이 작품은 어떤 배경이나 특수한 심리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매일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일상사 중의 한 토막을 다루어, 갈등을 느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갈등의 포기를 그리고 있다. 겉보기에는 근엄한 대학 교수와 그 가정의 이중성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소극(笑劇)의 형식으로 처리하여 현대인의 무의미한 일상성과 인간 소외의 문제를 아이러니컬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정한 사건의 전개나 갈등이 없이 하나의 상황을 희극적으로 과장하는 이 작품의 수법은 20세기의 새로운 연극인 부조리극의 대표적 형식이다. 부조리극에서는 전통극의 인과 관계에 의한 플롯을 거부하고 허구적 과장, 희극적 형상화 등의 수법을 통해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며, 극적 몰입을 거부한다.
이 작품에서 유사한 행위가 반복된다든가 무의미한 대사가 반복되는 것은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 무가치함을 반영한다. 또한, 거대한 조직 사회 속에서 개인의 위치가 축소되고, 인간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이근삼의 작품 세계
① 리얼리즘(realism) 극에 반발하여 부조리극(不條理劇)을 시도하였다.
② 작품에 비상식적인 인물이나 의식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소극적(消極的)인 요소를 동원하여 연극적 재미를 유발시켰다.
③ 현대인의 삶의 비극과 보순을 파악하려는 현실적 관심을 보였다.
"원고지"의 실험적 성격
이 작품의 인물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기계적인 순응만 보일 뿐,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가족들 사이의 진정한 의사 소통이나 연대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이처럼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망각한 채 기형화된 삶을 아무런 자각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소외된 삶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수법을 활용한 점이 사실주의 연극의 극작술(劇作術)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작중 인물이 직접 해설을 한다든가 무대 장치와 소도구들은 일부러 비현실적으로 과장한 것도 현대극의 실험적 수법을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실험극에서는 사실을 충실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주로 사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반(反)사실적이며, 반(反)표현적이어서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을 대변해 주는 현대 희곡의 한 특징이 된다.
부조리극의 성격
부조리(不條理)란 인생의 무의미·무목적·충동성 등을 총칭한 표현이다. 부조리 연극은 1950년대 등장한 것으로 현대인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고발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부조리 연극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삶의 자세만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부조리하더라도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성과 실존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意志)의 표현인 것이다.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는 이를 대표한다. 산의 정상에 바위를 올려놓으면 곧 굴러 떨어지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끌어올리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원고지"도 이런 긍정적인 삶의 의지를 가르치고 있다.
첫댓글 <원고지> 등재 고맙다. 되읽고 비교연구하면 재미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