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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미 식품 스크랩 김규흔(金圭欣·53) - 藥果에 미쳐 `한과 名人` 2009.9.26.조선
연초록 추천 0 조회 137 09.09.27 08: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을 믿습니다"

藥果에 미쳐 '한과 名人'이 된 김규흔

"최고 기술 알고 싶어 배달부로 위장침입…
수분의 양 따라 과자 맛 달라져… 별것 아닌 기술도 배울 때는 까다로워"

'약과광인(藥果狂人)'이 서울 중부시장을 배회했다. 30년 전 일이다. 덩치 큰 사내는 하루종일 읊조렸다. '약과! 약과!…'. 삼성약과의 점유율이 70%가 넘던 시절, 그 맛의 비밀을 그는 알고 싶어했다.

구파발 삼성약과 공장 주변에 그가 나타났다. 그는 밤마다 담벼락을 돌았다. 마침내 기름 배달부로 위장해 공장에 들어왔지만 얼마 안 돼 붙잡혔다. 거한(巨漢)의 얼굴을 알아본 직원들이 혀를 차며 풀어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을 김규흔(金圭欣·53)은 믿는다.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데 옆에 누가 있었는 줄 아세요? 삼성약과 기술자였어요. 정성이 통한 겁니다. 비법을 알아냈어요."

경기도 포천 신궁(新宮)한과에 들어서자 한과 명인(名人)이 나타났다. 손이 두툼했다.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될 만큼 넓고 컸다. 손을 맞잡자 그가 말했다. "이런 손으로 어떻게 한과 만드느냐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투박한 손이 파란만장한 삶과 닮았다. 기술을 배웠던 처가(妻家)에서 독립했다. 빚더미 속에서 세 차례나 공장을 옮겼다. 화재(火災)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도 봤다. IMF 외환위기도 헤쳐
나왔다.

한과명인 김규흔이 발효된 찹쌀을 살펴보고 있다. 이 시루를 들어나르느라 여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한(韓)'자 붙는 게 구박받는 세상이다. 양과(洋菓) 화과(和菓)에 밀려 명절 때나 찾아입는 한복 같은 신세가 된 지 오래다. 맛, 영양, 모양은 멀쩡한데 오로지 변한 야박한 사람들의 입맛 속에서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우울한 삶의 여로(旅路)였지만 명인은 쾌활했다. 작년 4월 문을 연 한과박물관 '한가원(韓佳園)'이 옛것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명성산 바람이 차가웠던 수요일 오후 그와 마주했다.

크림빵

경북 영덕, 해안가에서 50m 떨어진 곳에서 그는 태어났다. 4남2녀의 둘째는 어렸을 적부터 죽도록 일만 했다.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파도가 세면 어망(漁網)을 손질해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밭을 일궜다.

일하고 일해도 옥수수 죽 끓여먹기 일쑤였다. 그는 "일만 시킨 아버지가 너무 야속했다"고 했다. 공부는 뒷전, 유일한 취미였던 기타 줄 잡을 생각밖에 없었다. 공납금 내지 않고 반항하던 사이 고교 시절이 끝나갔다.

어느 날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아들은…"하는 주변의 수군거림도 듣기 싫었다. 먼 친척이 산다는 말만 믿고 무작정 상경(上京)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불효자'라고 손가락질했다. 1973년 초다.

평화시장 '시다'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소문난 자린고비였다. 월급 2000원을 받으면 200원만 쓰고 모조리 통장에 넣었다. 속옷 한 벌, 양말 한 켤레, 영화 한 편 보면 한 달이 지나갔다.

2년 후 그는 서울 월곡동에 있는 동진약품으로 옮겼다. 자전거로 약 배달하는 일이었다. 동진약품의 대박상품이 '알카오라'라는 약이었다. 물에 타 마시면 술이 깨는 약인데 정작 본인은 효험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거기서도 그는 월급 3500원 가운데 500원만 쓰고 통장에 쌓아갔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크림빵을 달랑 한 개만 사 재래식 변기에 앉아 숨어 먹는 신세였다. 메는 목을 눈물로 축였다.

―왜 빵을 한 개만 샀습니까.

"(얼굴이 벌게지며) 남들이 나눠 먹자고 할까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두 개 살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빨리 돈 모아 성공하자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났지요.

"월곡동에 자취할 때 집주인이 화장품 행상(行商)이었어요. 당시는 화장품을 지금의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처럼 끌고 다니며 팔았지요. 그분이 소개해줬습니다."

―부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습니까?

"몸이 작아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그만 약과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무슨 소립니까, 그게.

"처가 쪽 고향이 경북 안동입니다. 월곡동에서 삼흥제과라는 한과 공장을 했어요. 아내가 저를 만나러 나올 때마다 신문지에 약과 몇 개씩을 몰래 싸왔어요. 그게 그렇게 맛있었습니다. 약과 때문에 한 번 볼 걸 두 번 보게 되고, 그러다 정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가난한 젊은이에게 약과까지 가져다준 이유가 뭘까요.

"제가 참 아끼며 살았어요. 평화시장에서부터 제약회사까지 일하며 모은 돈이 몇십만원이 됐어요. 그때 빨리 내 집을 마련하자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서울 올라와서 처음으로요."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께 나중에 줄 논 두 마지기를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형도 반대하고 마을 사람들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엉뚱한 소리 한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런 생각 해서 기특하다'고."

―그 돈으로 집을 샀습니까.

"아버지가 보태 준 돈과 제가 모은 돈으로 월곡동에 집을 샀습니다. 모자라는 돈은 방을 전세 줘 충당했어요."

―집을 사니 신세가 달라지던가요.

"당시로선 대단했지요. 동네에서 '총각이 집도 있고 키도 늘씬하다(176㎝, 89㎏)'고 했으니까요."

―군대는?

"그러는 사이 영장이 나왔어요. 약혼식이나 하고 군에 가라고 했는데…, 그때 큰아들이 생겼습니다."

―노랑이에 속도위반까지, 별명이 뭡니까.

"독일 병정(兵丁)이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목표가 생기면 물불을 안 가렸어요. 집도, 일도 그렇게 했습니다."

가을 단풍을 연상시키는 알록달록한 색의 한과들. 가장 슬픈 인생이 가장 기쁜 맛을 낸다. 김규흔의 두툼한 손이 빚어낸 한과의 예술이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약과

삼흥제과를 맡고 있던 처남이 입대했다. 그는 처가의 권유로 공장을 대신 맡게 됐다. 약과를 먹을 줄만 알았지 한과에 대해서는 무지(無知)했던 그다. 어느 분야나 그렇듯 기술자들은 남에게 기술 가르쳐주길 꺼렸다.

"기술자들이 제가 보는 앞에서는 밀가루를 한꺼번에 넣지 않고 나눠 넣는 겁니다. 소다도 기름도. 합해보니 밀가루는 20㎏이었어요. 기술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보면 별거 아닌데 배울 때는 까다롭지요."

그가 한과에 입문하던 1979년, 중부시장은 한과의 메카였다. 모든 한과가 새벽에 이곳에 집중된 뒤 방방곡곡으로 배달됐다. 시장의 최강자(最强者)가 삼성약과였다. 김규흔의 목표는 그걸 뛰어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맛이었기에.

"아삭아삭하고 모양도 좋고, 여름에는 엿도 흘러내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패배의식이라고나 할까, 한동안 그런 생각이 들다 나중에는 자나깨나 그 생각만 하게 됐지요."

―진짜 공장에 잠입했습니까? 지금으로 치면 산업스파인데.

"기름 배달부처럼 차리고 들어갔는데 한 직원이 저를 알아본 거예요. '당신이 왜 여기 들어왔느냐'고요. 혼나고 쫓겨났지요."

―대폿집에서 만난 그 기술자가 그냥 기술을 가르쳐주던가요.

"한참 술을 마시는 데 옆에서 삼성약과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사람들이 자기네 사장 험담을 하고 있었어요. '천운이다' 싶었습니다. 슬쩍 접근해서 인사를 했지요. 초면부터 어떻게 기술을 물어보겠어요. 안면 트고 몇 번을 더 술대접한 뒤에 들었지요."

―비법이 뭐던가요.

"기름 조금 더 넣고, 반죽할 때 물 좀 더 넣는 정도였어요. 과자는 수분(水分)의 양에 따라 맛이 확 달라집니다. 그걸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시장을 제패했나요.

"맛에서 별 차이가 없어졌지만 그것만으론 안됩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 했잖아요. 힘을 좀 쓰거든요. 시장에 배달나갈 때마다 남들을 도왔습니다. 짐 싣고 내리는 게 단순노동이지만 힘이 들잖아요. 별것 아니지만 인심을 얻었습니다. 신뢰라는 게 참 중요합니다."

―그 뒤 독립했지요.

"처남이 제대하고 나온 뒤입니다. 월계동에 10평짜리 공장을 세 얻었어요. 직원 한 명과 제 아내하고 셋이서 시작했지만 자신은 있었어요. 상인들이 '이제 독립하라'고 격려도 해줬고 '자네 것 팔아주겠다'고도 했습니다."

―신궁(新宮)이란 상호는 어떻게 지은 겁니까.

"제가 천자문을 읽었는데 성공한 회사들 상호를 보니 전부 궁(宮)이나 왕(王)자가 들어 있었어요. 궁전, 궁실, 왕궁, 왕실처럼요."

―독립한 후 진짜 상인들이 약속을 지키던가요?

"그렇게 먹여살릴 것처럼 하던 상인들이 뒤도 안 돌아보는 겁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한과점들은 몇천 박스씩 거래를 했습니다. 작은 업체 물건 취급하다가는 큰 업체 눈 밖에 나잖아요."
 
 
 "원가 0.99원짜리가 300원에 팔려… 한과 개발,
 
업 살리는 길"

가장 비싸게 만든 한과는 기업이 선물용으로 주문한 한 세트에 300만원 짜리
신제품 150여종 만들어… 너도나도 금세 모방해 계속 새 아이디어 내놔야

―어떻게 했습니까.

"중부시장에 나가서 지나가는 노인에게 100원을 쥐여주고 사정했어요. 저쪽 도매점에 가서 '신궁한과가 맛있다는데 없느냐'고 물어달라고요. 그래야 도매상에서 '어? 신궁한과도 찾는 사람 있네' 하고 생각할 것 아니겠어요. 저는 모른 척하고 얼마 뒤 가게에 들러 '제 한과 팔립니까?' 하면서 체크했지요."

―머리가 좋군요.

"월계동, 이문동, 장위동, 석관동을 돌며 구멍가게에는 몇박스씩 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돈은 나중에 팔리면 달라고. 열흘에 한 번씩 그렇게 돌면서 수금을 했습니다. 저 책장에 들어있는 지갑과 계산기가 그때 쓰던 물건들입니다. 여기 이 돈 보이죠? 이게 그때 번 돈입니다. 그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김규흔의 집무실에는 각종 상장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어려웠던 시절 돈을 수금할 때 썼던 작은 가방과 삐삐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역전

악전고투하던 그에게 1984년 대운(大運)이 찾아왔다. 한과시장의 대목인 그 해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수해(水害)가 난 것이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모조리 휩쓸려가자 공급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한 달 이상 비가 퍼부으면서 남들이 100포씩 살 때 한 달에 밀가루 한두포로 만들어내던 신궁한과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악전고투하면서도 신제품을 하나둘씩 개발해놓았던 김규흔의 전략이 덩달아 빛을 봤다.

―무슨 신제품이었습니까.

"처음에는 모양을 달리 만들어봤어요. 보통 국화 모양인데 저는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를 넣었고 틀도 사각형 일색에서 마름모나 원형(圓形)을 과감하게 쓴 거지요."

―해외수출도 그때부터 한 거지요.

"몇년 후 86서울아시안게임 때 한과류 협력업체로 지정됐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 주문이 들어왔어요."

―월계동 공장을 그때 의정부로 옮긴 거지요.

"수요에 비해 생산시설이 부족했어요. 그동안 번 돈으로 집을 한 채 더 마련했었는데 그걸 팔고 의정부에 70평짜리 공장을 마련했습니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겠습니다.

"그때도 돈이 부족했어요. 한과 만드는 사람에게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리도 없고. 그때 은인이 나타났어요. 원자재 공급하는 분이었는데 시장에서 아주 노랑이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돈 아깝다고 아들 딸 학교도 제대로 안 보낸 분이었는데."

―노랑이가 노랑이에게 돈을 빌려준 이유는 뭡니까.

"저를 꾸준히 지켜봤다면서 먼저 찾아왔어요. '김 사장, 공장 지을 돈이 부족하다면서…'하고요. 그냥 빌려준 건 아니었어요. 공장을 5대5로 나눠 등기하고 몇년 후 제가 성공하면 그때 시세로 팔고 반대로 제가 실패하면 그때 시세로 본인이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세들어 살다 어쨌든 본인 소유의 공장을 갖게 돼 뿌듯했겠습니다.

"개업식 날 전부 울었어요. 동서들도 처형들도. 그때부터 약과뿐 아니라 유과를 비롯해 40가지가 넘는 한과를 만들게 됐습니다."

―빚을 얼마 만에 다 갚았습니까.

"2년 반쯤 후에요. 그때는 정말 잠을 안 잤어요. 반바지만 입고 하루종일 일했어요. 저는 화장실에서도 바지를 내리면 곧바로 일을 봐요.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용변 보면서 꾸벅꾸벅 조는 게 전부였어요. 정말 독주할 때였는데 다시 위기가 왔어요."

―뭔가요.

"몇년도인지 기억하기도 싫어요. 지금의 포천공장으로 확장했을 때 직원 실수로 창고에 있던 잣이며 호두며 모든 재료가 타버렸어요. 집에서 승용차로 막 달려오는데 멀리에서부터 불길이 보였어요. 6억원 이상의 손실을 봤어요. 엄청나게 타격을 입었어요."

―미칠 지경이었겠군요.

"사람이 미친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어요. 잿더미가 된 창고를 맨손으로 다 뒤졌어요. 몇 가마니라도 건져 보려고."

―그 뒤 또 IMF를 맞았죠.

"화재에 비하면 IMF는 별것 아니었어요. 저는 당시 직원을 한명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주문이 없으면 주 3일제, 4일제 하면서 버텼어요. 2년 후 정상화됐을 때 그동안 올려주지 못했던 임금도 인상시켜주고 보너스도 줬습니다."

재도약

김규흔은 1994년 6월 시카고식품박람회를 잊지 못한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거치면서 늘어난 수출물량의 정체를 확인한 것이다. "외국인들도 한과를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현장의 저희 회사 부스는 텅 비어있었어요."

사흘째 되는 날부터 그는 시카고의 식품점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한과는 찾을 데가 없고 초콜릿만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의 한과는 향수(鄕愁)를 잊지 못하는 교포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한과는 발효식품입니다. 건강에 좋지요. 재료도 저는 모두 순국산만 씁니다. 원가가 양과나 화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외면받으니 참담했습니다. 문 부장, 혹시 쌀 한 가마에 쌀이 몇 톨 들었는지 아세요?"

―?

"40만톨 들었습니다. 그럼 유과 하나에 쌀 몇톨이 들어가는지는 압니까?"

―….

"22톨 들어갑니다. 원가가 0.99원입니다. 그게 나중에 개당 200~300원씩에 팔리는 거예요. 얼마나 부가가치가 높습니까. 한과 개발은 우리 농업을 살리는 지름길입니다."

―진짜 우리 농산물만 씁니까? 모두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알고보면 중국산 저가품들이 많아서.

"제가 그러니 돈을 못 벌지요. 일례로 저는 찹쌀을 전남 보성에서 무농약으로 해달라고 해요. 농민들이 가끔 말로만 무농약이라고 하고 농약을 뿌리는 경우도 있어요. 저희 직원이 불시에 그곳을 방문해 체크합니다. 깨도 잣도, 호두도 전부 국산입니다."

―시카고에 다녀온 뒤 개발한 게 초콜릿 한괍니까.

"지금으로 치면 퓨전 한과를 만든 거지요. 특허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유과는 먹을 때 가루가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개발한 게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쏙쏙이 유과'예요."

―초콜릿 한과가 나중에 특허소송에 휘말렸죠.

"10년 넘게 특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회사에서 시비를 걸어왔어요. 그게 무슨 특허냐고."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미칠 노릇이었죠. 처음에는 소송을 할까 생각도 했는데 이겨봤자 남는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시중에 제 제품을 모방한 초콜릿 한과가 여러 종이었거든요. 변호사 비용에 시간까지,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제품 개발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과의 약점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아요. 시중의 다른 과자들보다 비싼데 그건 재료값이라고 인정해드리고, 오래 두면 눅눅해지지 않나요?

"저도 그 문제로 고민했어요. 그러다 상추를 이용해 오랫동안 보존하는 방법을 고안했어요. 상추를 사다가 여러 종류의 비닐에 넣어두면 시간에 따라 차이가 확연해져요."

―산소 투과율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음식 유통기한은 산소투과율에 좌우되는 겁니다. 질 좋은 비닐로 진공포장하면 몇 개월도 보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전에 쓰던 저가 비닐을 모두 폐기했지요."

―지금까지 만든 신제품이 모두 몇 종입니까.

"150종입니다. 모자이크 깨강정, 금귤정과, 녹차약과, 인삼유과, 단호박 약과, 백련초 현미강정 같은 것들입니다. 한과시장은 누가 신제품을 개발하면 금세 모방해요. 그러니 계속 새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합니다."

외길

김규흔은 '어릴 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는다. 지금처럼 어린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머지않아 한과시장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사재(私財) 30억원을 털어 포천에 한과박물관을 세웠다.

이곳에서 어린이부터 주부까지 한과를 직접 만들고 맛도 본다. 그는 땅을 내놓는 대신 자신의 신궁한과뿐 아니라 경기도 한과업체들도 입주하게 했다. 보성녹차, 제주감귤 같은 식(食)문화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한과의 역사가 꽤 깊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수로왕조 편에 처음으로 '과(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과일이 아니라 한과를 뜻하는 겁니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는 왕비 폐백용으로 쌀, 꿀, 기름으로 한과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지요. 유밀과(油蜜菓)는 고려 때 등장하고요,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어요."

―그랬던 한과가 왜 쇠퇴했나요.

"일제가 '센베이'를 들여오면서 한과를 밀어냈고 6·25 때 밀가루 문화가 유입된 탓도 있습니다. 천황(天皇)이냐 일왕(日王)이냐를 놓고 흥분하다가 밤에는 이자카야 가서 사케 마시는 사람들 많죠? 그럴 시간 있으면 한과를 아껴주길 바랍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한과는 가격이 비싸죠. 가장 비싼 건 얼마나 합니까.

"300만원짜리 한과 세트를 만들어 본 적이 있어요. 기업의 주문을 받았는데 어느 나라의 최고지도자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한과가 진짜 발효음식입니까?

"어허~, 제 말을 안 믿으시네. 한과는 찹쌀을 씻어 상온에서 7~10일 동안 발효시킵니다. 그 뒤 반죽을 하고 치댄 다음에 섭씨 100도 불리고 160도로 튀겨내는 겁니다. 유과는 다 발효되는 겁니다. 발효가 안 되면 뻥튀기처럼 돼버려요."

―그런데 공장이 왜 이리 서울에서 멉니까, 말만 포천이지 강원도 철원 근처네요.

"제가 원래 광릉수목원 근처에 땅을 봐뒀어요. 계약을 하려는 찰나에 시골에서 연락이 왔어요. 어머니 꿈에, '제가 돈을 가져가는데 웬 할머니가 길을 막더라'는 겁니다."

―섬뜩했겠네요.

"섬뜩했지요. 꿈도 꿈이었지만 원자재 배달하는 회사에서도 '그 쪽은 겨울에 눈이 오면 다니기 힘들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공장 부지를 두 번째 와보고 그냥 계약했어요."

―그래서 돈이 잘 벌리던가요.

"따져보면 손해를 많이 봤어요. 당시 20만원 하던 그쪽 땅이 지금은 모텔에 음식점이 들어서서 300만원씩 하거든요. 이 땅은 당시 20만원에서 지금은 30만~40만원 정도해요."

―그럴 때는 열받습니까.

"가끔 아쉬울 때도 있지만 하늘이 저보고 한과박물관을 지으라고 그렇게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땅으로 돈 벌었으면 또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자제들도 한과를 합니까.

"아들은 호주 유학을 다녀와서 지금 한과를 배우고 있습니다. 딸은 이화여대 식품영양대학원에 다녀요. 졸업하면 한과 쪽에서 일하겠답니다."

―꿈이 뭡니까.

"한과 마이스터 대학을 설립하는 겁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죠."

 

지난 16일 경기도 포천 한과문화박물관 한가원에서 한과 명장 김규혼 관장을 만났다. 김 관장이 한과 만드는 법을 배우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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