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을 믿습니다" 藥果에 미쳐 '한과 名人'이 된 김규흔 "최고 기술 알고 싶어 배달부로 위장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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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나라
■역전
악전고투하던 그에게 1984년 대운(大運)이 찾아왔다. 한과시장의 대목인 그 해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수해(水害)가 난 것이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모조리 휩쓸려가자 공급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한 달 이상 비가 퍼부으면서 남들이 100포씩 살 때 한 달에 밀가루 한두포로 만들어내던 신궁한과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악전고투하면서도 신제품을 하나둘씩 개발해놓았던 김규흔의 전략이 덩달아 빛을 봤다.
―무슨 신제품이었습니까.
"처음에는 모양을 달리 만들어봤어요. 보통 국화 모양인데 저는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를 넣었고 틀도 사각형 일색에서 마름모나 원형(圓形)을 과감하게 쓴 거지요."
―해외수출도 그때부터 한 거지요.
"몇년 후 86서울아시안게임 때 한과류 협력업체로 지정됐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 주문이 들어왔어요."
―월계동 공장을 그때 의정부로 옮긴 거지요.
"수요에 비해 생산시설이 부족했어요. 그동안 번 돈으로 집을 한 채 더 마련했었는데 그걸 팔고 의정부에 70평짜리 공장을 마련했습니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겠습니다.
"그때도 돈이 부족했어요. 한과 만드는 사람에게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리도 없고. 그때 은인이 나타났어요. 원자재 공급하는 분이었는데 시장에서 아주 노랑이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돈 아깝다고 아들 딸 학교도 제대로 안 보낸 분이었는데."
―노랑이가 노랑이에게 돈을 빌려준 이유는 뭡니까.
"저를 꾸준히 지켜봤다면서 먼저 찾아왔어요. '김 사장, 공장 지을 돈이 부족하다면서…'하고요. 그냥 빌려준 건 아니었어요. 공장을 5대5로 나눠 등기하고 몇년 후 제가 성공하면 그때 시세로 팔고 반대로 제가 실패하면 그때 시세로 본인이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세들어 살다 어쨌든 본인 소유의 공장을 갖게 돼 뿌듯했겠습니다.
"개업식 날 전부 울었어요. 동서들도 처형들도. 그때부터 약과뿐 아니라 유과를 비롯해 40가지가 넘는 한과를 만들게 됐습니다."
―빚을 얼마 만에 다 갚았습니까.
"2년 반쯤 후에요. 그때는 정말 잠을 안 잤어요. 반바지만 입고 하루종일 일했어요. 저는 화장실에서도 바지를 내리면 곧바로 일을 봐요.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용변 보면서 꾸벅꾸벅 조는 게 전부였어요. 정말 독주할 때였는데 다시 위기가 왔어요."
―뭔가요.
"몇년도인지 기억하기도 싫어요. 지금의 포천공장으로 확장했을 때 직원 실수로 창고에 있던 잣이며 호두며 모든 재료가 타버렸어요. 집에서 승용차로 막 달려오는데 멀리에서부터 불길이 보였어요. 6억원 이상의 손실을 봤어요. 엄청나게 타격을 입었어요."
―미칠 지경이었겠군요.
"사람이 미친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어요. 잿더미가 된 창고를 맨손으로 다 뒤졌어요. 몇 가마니라도 건져 보려고."
―그 뒤 또 IMF를 맞았죠.
"화재에 비하면 IMF는 별것 아니었어요. 저는 당시 직원을 한명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주문이 없으면 주 3일제, 4일제 하면서 버텼어요. 2년 후 정상화됐을 때 그동안 올려주지 못했던 임금도 인상시켜주고 보너스도 줬습니다."
■재도약
김규흔은 1994년 6월 시카고식품박람회를 잊지 못한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거치면서 늘어난 수출물량의 정체를 확인한 것이다. "외국인들도 한과를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현장의 저희 회사 부스는 텅 비어있었어요."
사흘째 되는 날부터 그는 시카고의 식품점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한과는 찾을 데가 없고 초콜릿만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의 한과는 향수(鄕愁)를 잊지 못하는 교포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한과는 발효식품입니다. 건강에 좋지요. 재료도 저는 모두 순국산만 씁니다. 원가가 양과나 화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외면받으니 참담했습니다. 문 부장, 혹시 쌀 한 가마에 쌀이 몇 톨 들었는지 아세요?"
―?
"40만톨 들었습니다. 그럼 유과 하나에 쌀 몇톨이 들어가는지는 압니까?"
―….
"22톨 들어갑니다. 원가가 0.99원입니다. 그게 나중에 개당 200~300원씩에 팔리는 거예요. 얼마나 부가가치가 높습니까. 한과 개발은 우리 농업을 살리는 지름길입니다."
―진짜 우리 농산물만 씁니까? 모두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알고보면 중국산 저가품들이 많아서.
"제가 그러니 돈을 못 벌지요. 일례로 저는 찹쌀을 전남 보성에서 무농약으로 해달라고 해요. 농민들이 가끔 말로만 무농약이라고 하고 농약을 뿌리는 경우도 있어요. 저희 직원이 불시에 그곳을 방문해 체크합니다. 깨도 잣도, 호두도 전부 국산입니다."
―시카고에 다녀온 뒤 개발한 게 초콜릿 한괍니까.
"지금으로 치면 퓨전 한과를 만든 거지요. 특허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유과는 먹을 때 가루가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개발한 게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쏙쏙이 유과'예요."
―초콜릿 한과가 나중에 특허소송에 휘말렸죠.
"10년 넘게 특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회사에서 시비를 걸어왔어요. 그게 무슨 특허냐고."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미칠 노릇이었죠. 처음에는 소송을 할까 생각도 했는데 이겨봤자 남는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시중에 제 제품을 모방한 초콜릿 한과가 여러 종이었거든요. 변호사 비용에 시간까지,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제품 개발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과의 약점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아요. 시중의 다른 과자들보다 비싼데 그건 재료값이라고 인정해드리고, 오래 두면 눅눅해지지 않나요?
"저도 그 문제로 고민했어요. 그러다 상추를 이용해 오랫동안 보존하는 방법을 고안했어요. 상추를 사다가 여러 종류의 비닐에 넣어두면 시간에 따라 차이가 확연해져요."
―산소 투과율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음식 유통기한은 산소투과율에 좌우되는 겁니다. 질 좋은 비닐로 진공포장하면 몇 개월도 보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전에 쓰던 저가 비닐을 모두 폐기했지요."
―지금까지 만든 신제품이 모두 몇 종입니까.
"150종입니다. 모자이크 깨강정, 금귤정과, 녹차약과, 인삼유과, 단호박 약과, 백련초 현미강정 같은 것들입니다. 한과시장은 누가 신제품을 개발하면 금세 모방해요. 그러니 계속 새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합니다."
■외길
김규흔은 '어릴 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는다. 지금처럼 어린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머지않아 한과시장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사재(私財) 30억원을 털어 포천에 한과박물관을 세웠다.
이곳에서 어린이부터 주부까지 한과를 직접 만들고 맛도 본다. 그는 땅을 내놓는 대신 자신의 신궁한과뿐 아니라 경기도 한과업체들도 입주하게 했다. 보성녹차, 제주감귤 같은 식(食)문화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한과의 역사가 꽤 깊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수로왕조 편에 처음으로 '과(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과일이 아니라 한과를 뜻하는 겁니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는 왕비 폐백용으로 쌀, 꿀, 기름으로 한과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지요. 유밀과(油蜜菓)는 고려 때 등장하고요,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어요."
―그랬던 한과가 왜 쇠퇴했나요.
"일제가 '센베이'를 들여오면서 한과를 밀어냈고 6·25 때 밀가루 문화가 유입된 탓도 있습니다. 천황(天皇)이냐 일왕(日王)이냐를 놓고 흥분하다가 밤에는 이자카야 가서 사케 마시는 사람들 많죠? 그럴 시간 있으면 한과를 아껴주길 바랍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한과는 가격이 비싸죠. 가장 비싼 건 얼마나 합니까.
"300만원짜리 한과 세트를 만들어 본 적이 있어요. 기업의 주문을 받았는데 어느 나라의 최고지도자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한과가 진짜 발효음식입니까?
"어허~, 제 말을 안 믿으시네. 한과는 찹쌀을 씻어 상온에서 7~10일 동안 발효시킵니다. 그 뒤 반죽을 하고 치댄 다음에 섭씨 100도 불리고 160도로 튀겨내는 겁니다. 유과는 다 발효되는 겁니다. 발효가 안 되면 뻥튀기처럼 돼버려요."
―그런데 공장이 왜 이리 서울에서 멉니까, 말만 포천이지 강원도 철원 근처네요.
"제가 원래 광릉수목원 근처에 땅을 봐뒀어요. 계약을 하려는 찰나에 시골에서 연락이 왔어요. 어머니 꿈에, '제가 돈을 가져가는데 웬 할머니가 길을 막더라'는 겁니다."
―섬뜩했겠네요.
"섬뜩했지요. 꿈도 꿈이었지만 원자재 배달하는 회사에서도 '그 쪽은 겨울에 눈이 오면 다니기 힘들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공장 부지를 두 번째 와보고 그냥 계약했어요."
―그래서 돈이 잘 벌리던가요.
"따져보면 손해를 많이 봤어요. 당시 20만원 하던 그쪽 땅이 지금은 모텔에 음식점이 들어서서 300만원씩 하거든요. 이 땅은 당시 20만원에서 지금은 30만~40만원 정도해요."
―그럴 때는 열받습니까.
"가끔 아쉬울 때도 있지만 하늘이 저보고 한과박물관을 지으라고 그렇게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땅으로 돈 벌었으면 또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자제들도 한과를 합니까.
"아들은 호주 유학을 다녀와서 지금 한과를 배우고 있습니다. 딸은 이화여대 식품영양대학원에 다녀요. 졸업하면 한과 쪽에서 일하겠답니다."
―꿈이 뭡니까.
"한과 마이스터 대학을 설립하는 겁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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