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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金正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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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2011년 8월 24일, 러시아 방문
당시) | |
출생 | 1941년 2월
16일 소비에트 연방 뱌츠코예 |
사망 | 2011년 12월 17일
(70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사인 | 급성 심근경색[1] |
거주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
별칭 | 아명(兒名)은 김정일(金正一) 소련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졸업 |
직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조선로동당 총비서 |
배우자 | 성혜림, 김영숙, 고영희, 김옥 |
자녀 |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김설송, 김춘송, 김여정 |
부모 | 김일성(부), 김정숙(모) |
친척 | 남동생 김만일, 여동생 김경희, 이복동생 김평일, 김영일, 김현, 이복 여동생 김경숙, 김경진 |
서명 |
김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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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 |
태어난 곳 |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 |
죽은 곳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복무 |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1991년 12월 24일 ~ 2011년12월 17일 |
최종 계급 | 원수 대원수(사후 추서) |
근무 | 조선인민군 |
지휘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
김정일[2](金正日,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17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독재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재자, 주석 김일성과 독립운동가 겸공산주의자 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었다.
였으나중국인민지원군의 항미 원조로 귀환했
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
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
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
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3]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었다.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왕정과 같이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세습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
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
원장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
정일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로
의에서 영원한 당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2012
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
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42년 2월 16일 량강도 삼지연군의 백두산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고 하나, 1941년 2월 16일 소비에트 연방 하바롭스크 지방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 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마을인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러시아어: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한 기록이 남아 있어 한·미·일·중 등의 학계에서는 이 때 소련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 쪽에서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김일성의 출생년도 1912년과 30년 주기로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4]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어 이름 유리의 애칭인 유라라는 이름으
로 불렸고, 1945년 8·15광복 이후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들어온
후로도 한동안김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러시아식 이름을 버리고 김정일(金正一[5])이라
하였고, 한자 이름을 正日로 개명하였다. 북한 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처음부터 김정일이라는 이름으
로 불렸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정일(正日)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김정숙(金正淑)의 '정'(正)과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의 '일'(日)을 합친 이름이다. 조부 김형직이나 조모 강반석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사망했으나, 증조부김보현과 증조모 리보익은 그가 10대일 때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광복으로 귀국한 후, 김정일은 북한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
을 보냈으나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6][7] 이후 김정일은 어
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자랐다.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
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후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8]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 김정숙
에게 ‘항일의 여성혁명
가 백두 여장군’이라
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6]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6]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6]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
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8] 1953년 2월 10
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9] 남한 정보
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
다.[8]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
며[9]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9]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9]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10].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8]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9]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
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
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
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
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
기도 했다 한다.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3년에 김일성종
합대학에서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
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11] 하였다고[출처 필요]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 및 공산주
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
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과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
였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 밑에
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
었다. 그 뒤1973년 9월까지 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으로 승진하였다.[11] 이 무렵부터 김일성의 잠재적 후계자로 여겨졌던 숙부 김영주와 이복 형제로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평일 등과 갈등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1980년대 중반에 숙부 김영주와 이복 동생 김평일을 제치고 후계자지위를 확정짓는다. 그리고 1994년 집권 이후 이들은 사실상 정계에서 축출되어,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떠돌게 되었으며, 계모 김성애 역시 정치적으로 숙청하였다.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
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
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으로 선출되었다.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
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
을 벌여 근로자의 노동 능률을 높이는 데 노력했으며,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
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12]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
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으로 선출되었고,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
에 선출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9기, 제10기, 제11기 대의원에 연임되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13]
이후 조선로동당 조직담당 비서,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 1991년 12
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는다. 그 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
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
였다. 1993년 4월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겸임조항을 정령에서 삭제하면서 국
방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되었다.군권과 함께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한 김정일은 이어 조선로동당의 당권도 장악하였다.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실각시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된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주석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넣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14] 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2001년에는 김일성 주석과 주석궁 안마사의 사생아인 김현을 전격 처형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유훈통치기간을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
다. 한편,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는 안을 발표한 뒤, 사실상 국가주석
직을 폐지하였다. 이후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에서 맡게 하되, 국방과
군권만을 자신이 장악하도록 이원제 정부를 불법적으로 계획, 구성하였다. 1998년까지 국
가원수의 대리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통치한 뒤 통수권은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회로 넘겼다. 그러나 권한이양 후에도 그는 실권자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15]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
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
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이 부분은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
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
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
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
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
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
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
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
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
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
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
문하지 않았다.
2000년 이후 그는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미국의 카터, 클린턴 등의 전직
대통령 역시 수시로 평양을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 외
교활동의 목적으로 그는 자원 지원을 주로 중점적으로 하였다.
북한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공산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약 6년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한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기에 굶어 죽었다.[16][17] 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상당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18]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
혁은 실패했다.[19]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20]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 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21]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21] 우렝이양식장[21] 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21]'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21]
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최대 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김정일 건강설이 증폭되었다.[22][23][24] 그러다가 김정일의 동정이 묘연해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건강 이상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김정일은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25][26] 그리고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김정일이 입원했다는 것을 전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이라고 말했다.[27]
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8]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이 예상보다 악화되었고, 실각 및 사망을 전제로 대책을 세우는 것을 착수했다고 보도했다.[29][30] 2009년 3월 19일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 김 위원장은 배가 쏙 들어가고 매우 야윈 모습으로 나와서 건강 이상설에 힘을 실었다.[31]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다.[32][33]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을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34], 시신은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었다.[35]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직할시에서 영결식이 시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고 김정일 장군의 노래도 작곡되었다.[36] 일각에서는 김정일의 사망 장소가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사실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37]
2012년 2월 16일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에 추서되었다.
김정일은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8][39]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추천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199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식량원조를 요청하면서 부각된 식량난[40] 과 경제난은 그의 집권 사상 최대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난은 1992년 이후 식량절약을 위해 '하루 두끼 먹기 운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중국인에 대한 비자 면제도 자신의 뜻대로 폐지하여 중국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이 있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41]
1980년대의 남포갑문 개발의 성공이 그의 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42]
스위스와 해외 은행에 비자금을 예치해두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지금 제제가 진행
되고 있다.
2004년 4월 22일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인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으로 150여명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폭발사건은 김 위원장의 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해 김정일 위원장의 암살기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2004년 4월 용천역에서 발생한 대형폭발사건은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였다고 인정했으며,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지난 2009년2월 26일 '현대그룹, 인내와 관용제안'이라는 제하의 비밀전문에서 2월 13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과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하종선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사장 등과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이야기를 17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 항목 가운데 '김정일과 인민군'이라는 항목에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은 "지난 2004년 김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열차폭발사건이후 인민군은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됐다"고 보고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열차 통과 30분 전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탑승한 열차의 통과시간이 전해짐으로써 거의 근접한 시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은 이사건이 자신에 대한 암살실패사건으로 믿고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휴대폰 도입이 특이할만큼 늦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또 "김 위원장이 암살과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43]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문학과 시, 영화,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불가사리"를 제작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정일은 몇 개의 곡도 작곡하였다. 1952년 8월에는 가요 <조국의 품> 을 작사, 작곡하였
다.[44]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을 비롯한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역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단군릉을 수시로 살펴보고, 단군릉의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기타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은 전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의 아내였으나 그와 이혼시켜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성혜림은 정식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슬하에 장남 김정남을 두었다.
1966년 혹은 1968년 아버지 김일성이 소개해준 조선로동당 간부의 딸인 김영숙과 정식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숙과의 관계는 소원하여 딸 김설송과 김춘송만 있을 뿐 별다른 관계는 없다.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고영희와의 사이에서는 김정철, 김정은 형제와 딸 김여정이 있다. 한때 고영희와 김정남 간의 갈등설이 돌았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 때 비서 출신인 첩 김옥이 그를 수행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으며, 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역시 확인된 것은 없다.
국제 사회에 김정일의 가족관계로써 알려진 것은 성혜림(1남, 김정남), 김영숙(2녀, 김설송, 김춘송), 고영희(2남 1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등이다. 대한민국의 일각에서는 그가 변태성욕자이며[45][46] 수시로 여러 여성들과 비정상적인 향락을 즐긴다는 보고도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04년에는 그의 통치방식과 사생활, 여성 편력 등을 소재로 한 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47]
그 밖에 그의 여인들 간의 권력암투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48] 2010년 8월 공식 후계자로 선언한 김정은은 고영희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일설에는 고영희가 아닌 김옥의 아들이라는 의혹[49] 도 제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김정일이 여러 여성들을 ‘내연의 처(concubine)’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권력남용이라고 보도했다. 타임은 “김 위원장의 축첩은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문제”라며 “심지어 남한에 특공대를 보내 유명 영화배우 등 여러 여성을 납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잡지는 또 “이 ‘친애하는 지도자’는 혼인을 거듭하며 자녀 5명을 뒀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9명의 사생아가 더 있다”고 보도했다.[50]
상당수의 여성들을 기쁨조로 두고 있으며 이들에게 안마를 받고 가무를 감상하며 이들을
갖고 이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출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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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직 金亨稷 1894 - 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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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반석 康盤石 1892 - 19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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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金正淑 1917 - 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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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金日成 1912 -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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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애 金聖愛 1928 - ? | 김영주 金英柱 192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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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림 成蕙琳 1937 -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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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金正日 1941 -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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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희 高英姬 1952 -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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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金敬姬 19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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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張成澤 1946 -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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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일 金平日 195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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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金正男 19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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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 金正哲 19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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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金正恩 19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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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설주 李雪主 19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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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金汝貞 198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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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솔 金- 19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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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애 金? 201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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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金日成 1912 -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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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金正淑 1917 - 19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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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천 洪一茜 19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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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림 成蕙琳 1937 -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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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 金英淑 19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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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金正日 1941 -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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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희 高英姬 1952 -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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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 金玉 196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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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金惠敬 19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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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金正男 19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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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송 金雪松 197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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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송 金春松 197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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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 金正哲 19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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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金正恩 19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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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金汝貞 198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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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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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김일성 |
1994년 7월 8일 ~ 2011년 12월 17일 | 후
임 김정은 |
전 임 김일성 |
제6·7·8·9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1993년 4월 ~ 2011년 12월 17일 |
후 임 (폐지) |
전 임 김일성 |
제3대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 1991년 12월 24일 - 2011년 12월 17일 |
후 임 김정은 |
전 임 (신설)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0년 5월 - 1993년 4월 |
후 임 오진우 |
[보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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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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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기] 조선로동당의 당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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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기] 김정일의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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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기] 조선인민군 원수급의 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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