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서는 풍속
이 홍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누구나 느끼고 있겠지만,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줄 서는 것이 하나의 풍속으로 정착되어 가는 듯하다. 가장 쉬운 예로, 지하철에는 열차의 출입문이 와 닿는 자리 땅바닥에 줄 서는 곳이라 하여 발바닥 모양의 그림을 그려 놓고 있고, 지하철 타는 사람들은 타는 순서에 분쟁이 생길 성싶을 정도로 숫자가 많아지면 어느 새 그 표시된 곳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다. 이 경우의 순서는 예외없이 ‘선착순’이다. 물론, 이러한 광경은 지하철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우선권 분쟁의 소지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목격될 수 있고, 또 어느 경우에나 그 순서는 선착순의 원칙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야심있는 사회심리학자라면 그 변화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연구를 구상할 만하다. 아마 거기에는 ‘질서는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라는 식으로, 질서를 치안의 제1원리로 삼다시피 한 정부 당국의 노력이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외국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국민 중에서 서구 ‘선진국’의 줄 서는 풍속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하등의 확고한 원칙이 없이 우선권을 향하여 아귀다툼을 벌이는 무질서는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국민 대다수의 내적 각성도 한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 원인이야 어떻든지 간에, 오늘날 우리는 예컨대 지하철의 줄 서는 광경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런 눈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눈이 어떤 눈인가, 그것이 과연 ‘우리의’ 눈인가를 생각해 보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생각해 보라.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지하철의 줄 서는 풍속은, 아무리 그것이 서구 ‘선진국’을 본 딴 것이라 하더라도, 문명된 풍속이 아니라 가장 야만적인 풍속이요, 아름다운 광경이기는커녕 가장 추한 광경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서로 먼저 타려고 각축전을 벌이던 이삼십년 전의 세태에 비하여 그렇다는 것뿐이다.
가령 현재의 줄 서는 풍속을 머리 속으로 그려 보고 그것과 나란히 또 하나의 그림을 그려 보라. 이 그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만 가지고 보면 그 광경은 이삼십년 전의 무질서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 열차가 도착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출입문 쪽으로 모여 주위를 둘러 보면서 노약자나 몸이 불편한 사람과 같이 나보다 먼저 타야 할 사람이 없는가를 살핀다. 먼저 타야 할 사람은 먼저 온 사람이 아니라 먼저 탈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이 두 개의 그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 것인가를 판단하기에 어려움을 겪을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줄 서는 광경을 아름답게 보는 눈이 원래 우리의 눈이 아니라는 것도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孟子(맹자)의 四端(사단)에 나와 있는 ‘사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無辭讓之心 非人也)라는 말에 오랜 세월을 두고 젖어 온 눈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줄 서는 풍속은 ‘사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생겨난 풍속이며, 그런 풍속은 어떤 기준으로 따지더라도 야만적인 풍속이다.
가파른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가 잠깐 그 원래의 눈을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그 눈이 가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줄 서는 것을 아름답게 보는 사태는 그 이면에 삶의 모든 국면에서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요즘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는 후보자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낸다고 한다. 모르기는 해도, 이삼십년 전, 줄 서지 않고 각축전을 벌일 당시만 해도 선거에서 후보자가 자신에게 투표하는 사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사태를 문제로 삼고 의아해 하는 필자에게 많은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말했고, 대학 총장 선거나 대통령 선거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참으로 당연하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쪽으로 훨씬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얼마 전만 하더라도 명절 귀성 기차표를 사기가 어려울 때, 사람들은 그 전날 밤부터 기차 역에 돗자리를 깔고 밤새워 줄 서기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추하다 못해 눈물겨운 장면이다. 이런 경우에, 나보다 귀성 기차표를 더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와서 먼저 사가라고 하고 느지막이 혹시 남은 기차표가 있는가 하고 역으로 나올 수 있도록 세태가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과연 무리인가? 이것이야 무리라 하더라도, 이제 지하철 줄 서는 풍속은 거의 정착도 되었으니, 최소한 지하철 땅바닥의 발바닥 그림은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런 것을 처음 보는 외국 관광객에게 그것은 우리나라가 ‘질서’에 관한 한, 아직 유치원 수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이 글은 내 선생이신 이홍우 교수가 <교수 신문>에 쓴 칼럼이다. 지난 주에 실린 것 같다.
사고의 전환..미처 생각못한 것이네..줄을 선 다음에 노약자나 불편한 사람에게 먼저 양보하면 더 좋을것 같네만...형님먼저~ 아우먼저~하다 전차 떠나면 어카나~ㅎㅎ
줄 잘 긋고 줄 잘 서고 줄 잘 맞추고 줄 잘 치고...요렇게 일사불란하게 살아야 잘 산다고 누가 그랬을까? 사양이니 양보니 배려니 이딴거 하지 말라고 누가 그랬을까?? 오죽하면 땅바닥에 발바닥 딱 그려놓고 거기 서 있어 라고 누가 그랬을까?? 이 글을 대하니 얼굴이 화끈 거린다.. 모두 다 내가 한짓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