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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4장의 주제 - 선택된 사랑만이, 그 안에만이 진리와 빛이 존재한다 !
*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면서 선택된 자에게만 성령을 주시고, 제한하시는가? - 그것은 구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구약의 흐름을 파악해 보자.
♣ 구약의 흐름에 대해서
* '구약이 도대체 어떠했기에, 오직 제한된 사랑만 이야기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기부터 말라기까지의 흐름을 알아보아야 한다.
* 왜 제한했을까? - 다 죄인 같으면 다 구원하지, 그것이 얼마나 사랑다운가? 이것이 불교적이다. 불교는 기독교 신자를 존중하지만, 참된 신자는 사마리아를 치고, 유대를 치듯이, 그래서 우리들은 불교 신자를 적그리스도로 보고서 치는 것이다.
* 적그리스도 - 하나의 '구원자' 행세를 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본다.
* 누가 더 대자대비한가? 예수보다 석가모니이다. 그러나 대자대비의 뿌리는 휴머니즘이다.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종교, 이 모든 것이 바로 가인의 사상이다. - 아차 !
☆ 가인의 사상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선택된 백성, 선민이라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유대인들이 핍박받은 이유는 자기들만이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편협 된 사고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그 편협 되고 아집의 완성, 편협중의 편협의 완성이, 오늘날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자가 없느니라 ! - 많고 많은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오직 예수를 믿는 우리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그 얼마나 편협 되고 옹졸한 사고방식인가? 다른 이름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라는 것을 우리가 감 잡을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창15장), 제 4대만에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 그 도구로 사용되고 말이다.
* 족속문제 - '10족속이냐, 9족속이냐, 7족속이냐 하는 논란이 많은데, 왜 그러한가?' 라고 하는 이유를 밝히는 논문이 나와야 한다. 이러한 족속의 변천과정을 놓치게 되면, 더 깊은 생수를 얻어야 될 양들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가?
◈ 출애굽기
* 국가 이스라엘 -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나타난다(3장, 6장). 그렇다면 '앞으로 나타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어떠한 국가이어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 이삭에게 나타난 하나님,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 정신의 소유자만 남게 되고, 나머지는 탈락되는 희한한 기능을 가진 국가라는 것이다.
* 세상국가와 이스라엘의 차이점 - 세상 국가는 자기 아버지가 시민권을 가지게 되면 자동으로 시민이 되는 혈통중심이 되는 국가인 반면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국가는 혈통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남은 자만 남게 되는 국가이다.
☆ 계속해서 추려내고 집어넣고 추려내는, 이것을 흔들어 버린다고 하는데, 흔들어 버리고 탈락시키고 남은 자만 건지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정신을 잊어버리면 다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버리고 버리면 누가 남겠는가? 그렇다. 아무도 남는 사람이 없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끝이고, 주제이다.
☆ 구약성경의 주제 - 아무도 남는 사람이 없다 !
* '남은 자, 남은 자' 라고 하지만, 그러나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남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오스카 쿨만). -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이 말씀의 뜻 - 기존의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 아니다.
(출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장자라
(출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 장자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이미 등장을 한다. - '에서이냐, 야곱이냐' 의 유산권(장자권, 축복권) 싸움이다.
* 장자 - 장자라는 개념을 육체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담아 내는 자가 누구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비추어 주고 나타내고 보여주는 사람을 가지고 장자, 혹은 아들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아들의 집단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다.
☆ 장자 모습 - 이스라엘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정신이 없는 사람은, "나가 주세요!"
* 생성되는 교회 - 교회는 항상 해체되고 다시 조립이 된다. 지금까지는 잘 믿다가 시큰둥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몸만 관심을 가진다.
* 나다나엘 - 참 이스라엘로서, 그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었다. 부교역자가 되어서 관심을 가질 것은 그 당회장 목사한테 욕 들어먹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나다나엘처럼 주님 보시기에 간사한 것이 없으면 된다.
☆ 모세의 착각
(출4:22-23)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서 기분 좋게 출발한다. 자기가 할 일은 돌아다니면서 장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길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다. 숲 속의 무장 강도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죽이려 하신다는 것이다. -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출4: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 모세의 착각이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면 그냥 혈통적으로 장자가 되는 줄로 착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착각을 깨부수시는 것이다. 그냥 혈통적으로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심고자 하심이다.
* 모세를 죽이려고 할 때 - 우리가 뒤의 성경구절을 모른다고 치고, 그러면 모세를 살리는 법은?
① 대한민국으로 빼돌린다.
② 칼 들고 하나님과 싸운다.
③ 기도하고 제사 드린다.
④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인다.
* ④ 번이 정답인데,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 할례 - 십보라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할례를 받아서 앞으로 될 장자에 대한 장자 된 이스라엘의 모습과 할례 언약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혈통적으로 태어났다고 모두가 다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천상의 존재(하나님의 모습)라는 관점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출4:25,26)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 법인체 - 족장시대는 항상 단수로 상속자를 언급하지만, 즉 12명이 되어도 단 하나이다. 그러나 국가가 되면 국가는 단수 복수 따지지 않는다. 국가가 되면 개인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안고 이스라엘 전체가 장자다운지를 묻는다.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인간으로 본다. 이것을 가지고 법인체라고 한다. 국가 전체를 하나의 개인으로 보아서 언제든지 사정보지 않고 잘라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탈락된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국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할례의 중요성 - 할례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요단강 건넌 후에도 제일 먼저 한 일이 할례이다.
* 이것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현재성이다. 즉, 지금 네가 정복할 땅은 너희들의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말씀, 즉 아브라함은 4대만에 돌아와서 10 족속을 멸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하나님 말씀 성취차원의 도구로만 사용될 뿐이라는 것이다.
* 여호수아 - 이러한 [붙이시매 전쟁] 만 알면 되는데, 즉, 군대장관이 와서 다 알아서 이기도록 하는데, 이것을 모르기에 여호수아는 당한다.
* 골방에 들어가는 기도 - 골방을 만들어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깨고, 금식을 하면서 금식을 깨버리고, 구제하면서도 구제라는 것을 깨버리라는 것이다. 즉, 이런 구제와 금식과 기도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복음을 담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 왜 피가 발생되어야만 하는가?
* 다시 말해서, 십보라가 모세를 할례 남편이 아니라, 피 남편이라 한 이유는?
* 피 - 피라는 것은 이 세상과 결별하는 것, 즉 애굽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에서는 할례가 필요 없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땅이기에 아브라함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땅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애굽에 왜 내려갔는가? 왜 내려가느냐 하면은 애굽에 내려가야 피라는 것이 발생한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어린양의 피로서 나오고, 여기서 모세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낼 때에 피 남편으로 나오는 것이다. - 십보라만큼만!
* 우리는 생각하기를 선택했으면 그냥 낚시하듯이 올리면 되는데, 왜 피를 발생시키는가? -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주님께서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죽으셨다. 중간에 피가 개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곱게 포장해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다. - 왔느냐? : 예, 왔습니다. - 그냥 죽이시고 건지시는 것이다.
☆ 피 남편 - 결국 피 남편의 경험이 없으면 장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출1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나는 자유다' 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보고 자유를 준 적이 없다. 내 마음대로 '내 자유다' 라는 것이 없다. '너는 이제부터 내 것이야' 라는 것이다. 장자는 결국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장자가 바뀐다. 왜 바뀌는 것일까?
* 노래방에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는 찬송을 불러야 한다. 이 말은 그 분위기를 깨라는 의미가 아니고, 십자가가 없는 현장에서 십자가를 보여주라는 것이다. - 이 모습을 보여주는 자가 바로 장자가 되는 것이다.
* 이처럼 세상에서 탈출해야 될 사람의 모습은 바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는 모습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십자가가 아니라, 돈 궤짝을 사랑하는 가룟유다를 다 만들어 놓았다. 무거운 돈 궤짝, 돈 축복, 건강 축복, 자녀축복, 이런 축복을 짊어지는 한국교회는 헬스클럽이고, 조폐공사이다.
* 그러면, 이런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왜 생기는가? 그들이 왜 이단인가 하면, 구약성경의 약속 부분에 이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속에 돈, 건강, 물질의 축복부분이 구약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부흥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 약속은 오직 십자가 지신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그것뿐이다.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없다 !
*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 - 사도바울이 재림을, 하늘 나라를 몰랐던가? 부활을 몰랐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고린도전서 1장, 2장에서 자기는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 모든 성경이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가 중심이기에 그렇다.
* '천당에 가기 전까지는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장자가 아니다. 그 사람은 지금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 출애굽기를 보면서, 항상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누가 실패했던가?' 하는 것이다. 실패한 모세가 나의 대변자가 된다. 나의 실패를 미리 앞당겨서 실패한 사람들이 성경의 등장 인물들이다. 실패한 인생과 그것을 극복한 주님의 크신 사랑, 이것이 언약의 양면성이다.
*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성공담이라는 것이 없다. 부흥사의 간증을 성경으로 취급을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모든 성공의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실패했는데, 예수 믿고 난 이후에 내가 사업에 성공했다. - 이러한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예수 믿기 전의 성공의 개념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통하는 개념이지만, 예수 믿고 난 뒤 그 이후의 성공개념은 다른 관점에서의 성공의 개념이다.
☆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보여주는 거지 나사로처럼, 하늘나라를 보여 주는 그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성공개념으로 또다시 이 세상의 성공개념에 적용시킬 수가 없고, 오히려 실패개념으로 적용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를 믿기 전에 사업에 실패했다가 예수 믿고 난 이후에 성공했다는, 그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성공 개념을 뒤집어 놓는 예수를 지금 안 믿었기에,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적용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안 믿으니까, 맨 똑 같은 기준으로 자기 인생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대학에 4번이나 떨어졌다. 그런데 그 학생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더니 대학에 합격을 했다. 그래서 성공했다고 간증하게 되면, 그 학생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고 마귀를 만난 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친구 중에서도 다정한 친구이다. - 마귀는 모나미 !
*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고난받는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의 입장에서 고난은 바로 성공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을 실패로 간주하고, '그리 마옵소서' 라고 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하셨다.
*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과 사탄의 일을 일치시켰는데, 사탄과 인간은 한 통속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흡한, 그리고 한 통속으로 공중권세를 잡은 자가 바로 사탄인 것이다.
(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 마귀는 어쨌든 이 세상에서 성공을 해보자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성공을(마4장) 해보자는 것이 마귀의 취지다. 그런데 이것을 현재 그대로 포장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 한국교회는 바로 절간이다.
* 인간의 본능 -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 교인들이 주일날에 교회 문닫을 때는 그 보다 더 큰 이익이 올 것을 기대하고서 온다는 것이다. 원래 안식일에 쉬는 것은 세상을 포기하고 이제 그만 죽자는 것이 안식일인데, 오늘날은 그것이 아니고 어쨌든 가게문을 닫고 당신한테 가서 예배 참석했으니 복 달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마귀의 모습이다. 문닫았으니 그만큼 그 정성을 보아서 복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타협했다는 증거이다.
* 합동측 - 선배를 섬길래, 안 섬길래 ! - 이것만을 본다. 한통속으로 있는 무당세계 같이 합류를 할래, 안 할래,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 목사는 주의 사자이고 장로는 목사 밑에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곳에 이상한 전도사 한 사람 와서, '칼빈이 말하기를, 성경에는 교회는 계급이 없다고 했습니다' 라고 진리를 전해 버리면 자기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에 그렇다. 그 사람이 미워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공부했다고 날 흔들어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항변을 하는 것이다.
* 눈만 뜨면 자기자리가 흔들리지나 않을까 하고, 깜짝 깜짝 놀래지, 진리가 무엇인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장로가 다른 교회자리를 알아보라고 하지 않는가 하고 놀랜다. - 심장이 약하면 구심이 처방약 !
* 설교 한마디 한마디가 이 교회 오래 유지하기 위한 처방으로 나아간다. 얼마나 거짓목사, 삯군목사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지 모른다. 마귀는 너무나 지혜로워서, 누가 자기편인지 예수편인지 너무나 잘 안다. 자기편이 아니면 얼마나 핍박을 가하는지 모른다.
* 회개하는 목사 되고, 목사 믿지 말고, 예수 믿자! -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목사를 미워하자는 것이 아니고 살리자는 취지인데,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살길이라 생각한다.
* 누군가 묻기를, '바쳐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맞습니까?' 라고 질문해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만 받지 돈을 받지 않습니다" 라고 진리대로 이야기하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은 돈을 받는 것이 아니고 몸을 받는다고 했다. 진리대로 목회 하면, 그러나 그 사람은 안 온다.
* 목회성공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 그것은 ①성경을 덮어버리고, ②얼굴에 철판을 깔고, ③적당히 반말을 해버리면 된다. 인간들은 때리면 메조키스트처럼 얻어 맞아가면서 "아멘" 이라고 한다. 목회하기 얼마나 쉬운가? 그것이 고린도후서에 그대로 나온다.
(고후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사로잡고 뺨을 치는, 이것을 당연한 지사로 여기는 한국교회 교인들, 한결같이 다 사탄의 통속이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너무나 밀착취재를 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을 수는 없지만, 늘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주여, 나는 나쁜 놈입니다 ! - 이것을 간직하고 주의 피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자이다 !
* 목사는 주의 피가 나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나는 나쁜 놈이라고 말해도, 그대로 이야기하는 목사를 진짜 성도는 존경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출애굽기 - 이와 같이 '섬기는 자가 큰 자' 라는 정신으로 계속 이어진다.
* 문제는 과연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을 환대하였었는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히브리인들은 자기 편한 것만을 생각하지 하나님의 뜻에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출5:19)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출5: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출5: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 여호와까지 들먹여가면서 항변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여호와는 애굽적 여호와이다. 이들이 결국 출애굽기 32장에서 금송아지 만들게 된다. 이 금송아지는 애굽에서 통하는 신이고, 이 애굽적 신은 자기에게 복을 주는 신이다.
* 출애굽기 15장에서, 그들이 찬양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미리암도 같이 찬양하는데, 이와 같은 찬양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구원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15: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 그들이 인도함을 받은 것은 바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다. 그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따라왔지 자기들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출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출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14: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 ! - 이것은 낮에는 덥지 않도록 밤에는 춥지 않도록, 그렇게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는 차원보다는, 출애굽 당시를 반복하는, 즉 항상 홍해사건 당시를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홍해사건의 반복 !!
* 처음 그들이 유월절의 심판 밤을 통과하고 애굽에서 빠져 나왔을 때, 낮에는 구름 기둥,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고 따라 왔을 때, 홍해가 그들의 앞에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한없이 튀어 나왔다.
☆ 하나님이 인도하는 데로 따라 왔는데, 왜 물이 없는가?
(출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 이때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잠재운 것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함으로 진행해 나간다. 이것은 늘 홍해 사건을 반복하는 것으로, 그 표가 바로 불기둥 구름 기둥이었다. 이 사건이 늘 재현되는데, 문제는 그들이 옆길로 가거나 이탈하였기에 물이 없는 장소로 간 것이 아니라, '마라' 라는 곳은 제대로 인도함을 받은 곳에서 물이 없어 원망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 성경 읽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하고, 제대로 예배에 참석하면 복을 주겠지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엉뚱했다. 이들은 늘 생각하기를 애굽에서 살아가는 삶보다는 더 편한 삶을 기대하면서 따라 나왔다. 편한 삶을 생각하면서 따라 왔다는 것이다.
* 대학부에서 보칼그룹 활동을 하고, 율동하고, 찬양을 한다고 신앙을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취미생활이고 오락에 불과하다. - 교회는 오락실 - 뿅! 뿅! 뿅!
*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갔는데도, 계속 원망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장소로 인도하는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가 보다 편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더 잘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체가 바로 애굽적 사고방식이다' 라는 사실이다.
* 모이기를 힘쓰라(히10:25) - 자기 편하기 위해 모이면 그곳이 바로 애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으로 아니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 이 일을 어찌할꼬 !
☆ 이 애굽적 사고방식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 치료 !
(출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 애굽에게 내렸던 그 질병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떻게 되는가? ① 유보한 것이다. ② 없애 버렸다.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보를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10번을 시험하고 원망을 할 때까지 유보를 했다는 것이다.
(민14:22)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민14:23)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 애굽에서 바로가 열 번이나 시험하고 패망했듯이, 이스라엘 역시 열 번 시험하고 광야에서 다 죽는다. 애굽은 초반에 끝나고 이스라엘은 후반에 끝장난다. 인간이 안 되는 것은 항상 버린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만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생각만 하신다는 것이다.
* 즉, 하나님은 '자기의 모습이 지상에 어떻게 남겨 지는가?' 그것만을 생각하시는데,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대로 '어쨌든 내가 애굽에 살던 그 시절보다는 더 나아야 되지 않겠는가?' 라는 자꾸 좋은 땅만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 행복하고 아름답고 편하고 쾌적한 환경만 기대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탈락을 시켜 주어야 된다. 그래서 교회가 그 역할을 해 주어야 된다. 기도해야 한다.
☆ 기도에 대해서
*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의 사고방식이 너무나 개판인데, 저 사람에게 벌을 좀 내려 주셔서, 저 사람의 사고방식 좀 고쳐 주십시오. - 이런 기도가 야고보서의 엘리야 기도편에 나온다. -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래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 엘리야 기도의 핵심 ! -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진행되는 것이(신28장) 하나님의 뜻으로 보았기 때문에, 현 이스라엘이 약속을 그렇게 무시하고 있음에 대해서 통분해 한다. -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약속대로 비오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
*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들어냄으로, '진짜 하나님을 보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비가 오지 않다가 나중에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 다 죽이고, 새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 다시 기도한즉 비가 주룩 주룩 내리게 된다. - 개판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는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고방식, 이것이 얼마나 은혜를 모독하는가?
* 노아언약을 무시하는 이 세대 ! - 기도는 내 마음대로, 응답은 하나님 마음대로 !
☆ 하나님께서 이러한 백성들을 어떻게 치료하시는가?
* 출애굽기 4장을 보면, 모세가 히브리인들에게 보여주는 이적이 있다. 출애굽기 4장의 세 가지 이적은 애굽사람에게 보여주는 이적이 아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이적은 심판하는 이적이지만, 여기 이 세 가지 이적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는 참여시키는 이적이다.
* 원래 두 가지 이적을 제시했는데, 세 가지가 된 것은, 이 두 가지 이적을 해도 그들이 믿지를 않거든 이것 첨가하라는 차원에서 세 가지가 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하신 이적들은?
ⓛ 첫 번째 이적 -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됨
* 여기서 뱀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그 뱀이고, 원수의 대적이고 원수의 성문을 여는 것이다(리브가 시집갈 때). 이러한 해석이 알레고리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원수와 연관시켜서 보는 것이다. 오직 싸울 대상은 원수라는 것이다.
* 뱀의 머리를 치는 것(창3:15)은 여자의 후손(예수님)의 몫이고, 모세는 그 결과로 주어진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이다. 모세는 여호와 전쟁의 부산물을 얻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 그것이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그대로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뒤에 바닷가에서 애굽 병사의 물건들(탈취물)을 서로 나눈다(출15:9). 그러면서 찬양하기를, '오직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출15:3).
☆ 오직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다 !
* 전리품 - 애굽과 싸운 여호와 전쟁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 여호와 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전리품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며,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 이 애굽을 시편에서는 뱀, 리워야단이라고 한다.
* 주(主) 개념 - 여호와는 용사로서 그 전쟁의 주(主)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 전리품으로서, 오직 하나님 때문에 그분에게 덩달아 속하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② 두 번째 이적 -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내어보니 문둥병이 걸렸고, 다시 하니 원래 모습으로 됨
* 모세가 품속에 자기 손을 넣어 보니 문둥병이 걸렸다. 여기서 품속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라는데, 자기 백성들이 문둥이가 될 정도로 엉망이라는 것이다. 다시 손을 넣으니 회복이 되었는데, 이는 뱀을 공격하고 치는 결과로 인해, 즉 하나님께서 치료하셔서 회복시키시는 모습이다.
☆ 그러므로 출애굽기 15장에서 치료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백성들과 꼭 같은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말을 자꾸만 반복을 하는 이유는? 그들에 의해서 이 세상이 심판을 받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넘어가고... (아이구! 아까워라. 와, 그냥 넘어가노 !)
◈ 여호수아
* 유다지파의 갈렙 - 출애굽했던 백성들은 다 실패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다지파인 갈렙이 등장하는데, 이 갈렙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요셉지파인 여호수아가 부각된다. 여호수아가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실상은 갈렙 때문에 이기는 것이다.
* 신발을 벗음 -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신발을 벗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때 당시의 풍습대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라는 의미이다. 즉, 모세가 알아서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두다 하신다' 라는 것이다. 이때 모세 옆에 서있는 형 아론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 시내산의 모세와 산밑의 금송아지 -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그 밑에서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그러면 이 금송아지와 대비되는 개념은 무엇인가? 금송아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러면 이 금송아지 자리에, 다른 무엇이 들어가야 진짜 하나님이신가? - 돌판, 즉 말씀이다.
* 증거궤 - 그런데 이 돌판이 깨어진다. 이 깨어진 돌판을 대신해서 다시 만들어진 돌판이 들어가는데, 그 다시 만든 돌판을 증거궤 - 인간들이 이렇게 나를 배반했다는 증거 - 라고 한다.
* 증거궤 내용물(3개) - 맛나(불평의 죄, 와! 짜장면 안주노!), 아론의 싹 난 지팡이(아론의 제사직을 백성들이 불평), 그리고 돌판(하나님을 배반)이다.
☆ 증거궤의 내용물 - ① 만나, ② 아론의 싹 난 지팡이, ③ 돌판
* 시은좌 - 이 세 가지의 증거물을 넣어놓고 매년 7월 10일(대속죄일)에 피를 뿌리는데, 피가 뿌려지는 그 뚜껑을 시은좌(은혜가 내려앉는 자리, 뚜껑)라고 한다. 다른 말로 속죄소(죄 용서함을 받는 장소)라고 한다. 즉, 너희들의 죄가 심히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늘로서 내려오는 제물로 말미암아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용서로 말미암아 백성들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할 때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가 담겨있는 법궤(하나님 계심)를 중심으로 대열을 짜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광야에서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민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민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 발람이 저주를 못하고 축복 한 이유는? -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 - 원래 홍해를 건널 때는 애굽이 적이고 이스라엘이 아군이었는데, 요단강 건널 때는 이스라엘이 적군이고 법궤가 아군이다. 그러므로 이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홍해사건의 반복으로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용서만이 옛날 홍해를 건너오게 했다 !
* 그래서 먼저 할례를 행하고, 1년에 유월절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유월절, 두 번째는 맥추절, 세 번째는 수장절이라 한다.
* ① 유월절 - 어린양을 감사함.
* ② 맥추절 - 어린양 덕분에 이삭을 공짜로 펴게 되었다.
* ③ 수장절 - 어린양 덕분에 이삭을 공짜로 추수하게 되었다.
☆ 계속해서 이스라엘 됨이란,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긴다' 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선택사상).
(출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그러므로 이 일방적인 용서로 인한 사랑의 선택이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있는 처소가 될 수 있다면, 그 성령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은 자기가 택한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이후에만, 진정한 보혜사가 되는 것이다.
* 보혜사 - 어린양을, 어린양의 흘린 피를 담아낼 수 있는, 용서를 담아낼 수 있는, 그러한 진리의 영이 되어야만, 그것이 보혜사가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이것이 너와 함께 할 수가 있는 거처가 마련이 되는 것이다. 함께 할 수 있는 아파트(?)가 마련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구약에서 법궤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그 용서가 함께 있기에, 패역을 보시지 않고 죄악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용서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구약의 오순절과 신약의 오순절 성령강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말씀성취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40일이 의 있지, 49일은 의미가 없다. 부활 후 40일 동안 함께 하심에 의미가 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온 것은 그 때 모든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로서 오순절이다.
* 추수감사절 - 청교도들이 인디언을 학대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맥추절과 아무 상관이 없다.
* 하나님과 인간 -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화염검으로 막아 놓았는데 어찌 갈 수가 있으며 거처를 함께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함께 하실 수가 없었는데, 오직 하나님의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뱀을 치고 난 뒤에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뱀을 치고 난 뒤에는 함께 해도 괜찮은 처소가 마련이 되는 것이다.
☆ 다 이루었다 ! -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사랑과 자비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것은, 용서하는 근거를 확고히 마련하는데 완전하게 성공을 했다는 의미이다. 처소가 마련이 되어도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법궤이다.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롬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인간의 상식인, 열심히 기도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이것을 뛰어넘어서, 이사야의 종말론적인 현상(들어도 보아도 알지 못함)으로 모든 것을 순종치 아니하심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나올 생각하지 말고 내가 긍휼로 불러 내 줄 때까지 기다려 라는 것이다. - 이것이 모세언약의 완성(출33:19)!!
(출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의 특징 - 버림받은 자가 오히려 버린 자를 구원한다. 이러한 정신이 있어야 하늘나라가 되기 때문에, 그런 하늘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도 긍휼로서 충만해야 되고, 교회도 그러한 정신이 충만해야 하는 것이다.
* 교회 -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들의 모임 !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만 있어야 된다. 긍휼로만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런 정신이 없으면 교회에서 나가야 된다. 모두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정신이 없다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영을 보내었다. 이 십자가의 영(성령)을 보내사, 그래서 터트려서 다시 긍휼로 되살린다. 이것이 바로 긍휼로 거처를 함께 하시는 것이다.
☆ 여호수아 - 여호수아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아론의 레위지파가 실패를 하는 차원에서 요셉지파였다. 그래서 요셉지파 이후에 등장하는 새로운 실세가 바로 유다지파이다. - 이것을 사사기가 보여준다.
◈ 사사기
(삿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삿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 유다 - 요셉이 훌륭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러면 유다는 무엇을 했다고 창세기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가? - 자기 자식을 볼모로! (요셉에게 갈 때)
* 창세기를 보다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계속 되다가 갑자기 엉뚱한 사건이 하나 개입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다말 사건이다. - 급브레이크 !!
* 다말 사건(창38장) : 유다가 자기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 그 탓을 며느리 다말에게 돌려서 그녀를 버린다. 여기서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를 구원하는, 야곱언약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버림받았던 다말이 버린 유다가문을 살린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의 아기를 낳는다. 그러나 이것도 모르고 시아버지인 유다는 다말을 죽이려고 하지만, 나중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그때 유다가 자기 며느리를 보고, "너는 나보다 의롭다" 라고 한다. - 다말의 희생을 통해 유다가 철이 듬 !
* 여기서 의(義)라고 하는 것은 착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장차 올 희생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유다는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애굽에 갈 때에도 감히 자기의 아들을 볼모로 내어놓는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유다지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는 것이다.
☆ 다말, 창녀(娼女)가 아니라 성녀(聖女)이다 !
*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다지파 같은 정신을 요구하시고, 복을 내리신다. 복을 내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신이 팽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노아언약의 정신 -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잠을 자는 실수를 하는데, 함은 이것을 놀리지만, 셈과 야벳은 아비의 하체를 덮어준다. 그래서 노아는 셈과 야벳은 축복을 하지만, 함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 이러한 덮어줌의 은혜가 실현되는 것이 노아언약의 참된 정신이다. 셈 같은 사고방식이 이 세상에 늘리 펴져야 된다는 것이다(축복). 그러나 가나안은 그 밑에 지배를 받아야 된다.
*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 이 말은 셈을 찬송하라는 것이 아니라, 셈에게 그러한 정신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이다.
* 노아언약 - 정결한 짐승을 잡았던 그 희생 때문에, 더러운 짐승이 산다. 그래서 노아 방주에는 깨끗한 짐승과 더러운 짐승 함께 들어간다. 노아와 같은 더러운 사람도 깨끗한 짐승의 희생으로 산다.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 - 나는 너에게는 일체 기대하지 않는다. 너는 날 때부터 아예 기대하지를 않는다. 10점, 20점, 절대 100점의 수준은 안 된다. 너에게 기대를 하지를 않는다.
* 저주는 소멸이고, 축복은 팽창의 의미이다. 보기에 좋지 않는 것(가나안의 수준)을 덮어주지 아니하고, 빈정거리는 것은, 노아언약과 상충되기에 이런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셈과 같은 사고방식은 은혜의 땅에 합당한 사고방식, 덮어주는 그 사고방식만이 진정한 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방주의 의미를 아는 사고방식이다. 방주자체가, '너는 나쁘고 나는 착하다' 라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 의(義)는 없다 !
* 여기서 '가나안이 노아와 동성연애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라는 등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성경해석은 의미가 없다. 언약을 안다고 한다면, 그러한 고고학적 작업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말씀을 왜곡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발굴 결과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말이다. 즉, 노아의 하체를 덮어주지 아니하는 가나안이 그것만으로 저주를 받는 충분한 잘못을 한 것이다.
♣ 인간에 있어서 종교와 예술
* 인간은 종교와 예술, 이런 것으로 자기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카오스와 문명과 같은 책을 보면, 모든 것이 인간의 성적 에너지로 말미암음을 지적한다(프로이드). 그리스 신화에 보면 영웅이 나오는데, 이 영웅은 반드시 고난을 거쳐서 영웅이 된다. "하면 된다" 는 것이다. 이 영웅은 단순히 힘이 세다 라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같은 차원이 아니다. 고난을 거쳐서 연단 중에 침착하고 예의바르고 고상한 처세술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영웅이다. 처세술의 대표적인 책인, 카네기 처세술도 그리스 신화에 다 들어 있다. 이러한 세상의 인간의 욕망과 움직임을 다 폭로한 책이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이라는 책이다.
* 예를 들어, 목회자가 되기 전에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신학교에 갔다. 그래서 훌륭한 목회자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는 영웅이다. 영웅은, 어떤 난관을 극복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신화다. 모든 문학의 원류가 그리스 신화이다(현대문학, 모스터모더니즘 등을 제외하고). 다 권선징악을 담고 있다. 모든 영화도 다 그렇다(예, 서편제, 신데렐라 등). 그러므로 날마다 의지의 한국인을 부르짖는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신화의 제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서평 : [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
* 인간은 신화 속에서 잉태된다. 신화 속에서 대화하고 그 신화의 그물에 얽힌 채 살아간다. 신화란, 사회 구성원이 입에서 내뱉은 실타래로 구조를 이룬다. 괴로움과 원한과 욕망과 야심의 실들이 한치의 양보 없이 서로들 속으로 파고든다. 원한 속에 동정심이 있는가 하면은, 애정 속에 경쟁이 들어있기도 하다. 바다 밑 해초 마냥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신화의 구조, 이것은 곧 인간들 무의식의 심연이라고 본 학자가 있으니, 뽈 디엘이다.
* 그리스 신화란, 단순히 야화 같은 흥미 본위의 전설들이 아니다. 그리스 당시에는 인간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이었고 삶의 룰이었다. 신화 하나 하나에 개인과 사회를 담고 있다. 신화의 혼란스러움은, 개인이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투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알 수 없는 혼란과 혼돈과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도 또한 인간사회이다. 이 알 수 없는 생존의 세계는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불가사의한 실체로 거론되게 된다. 누군가 배후에서 임의대로 휘젓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배후의 신화적 인물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안게 된다. 그래서 불가사이하고 임의적인 현상계를 일단 [드러낸 신비작용]으로 간주하고 이 신비로움을 인간들이 이해될 수 있는 상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신화이다. 그래서 신화는 두개의 대립된 세계가 하나 안에 응축되어 있다. 즉 세계의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지각 있는 인간들의 행위가 그것이다. 신비로움에 대처하고 때로는 대결해서 때로는 화친해서 어려운 난관을 극적으로 돌파해나가고 해결해 가는 영웅들의 이야기, 이것이 신화이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밤하늘의 유성들처럼 쉴새없이 날아 들어오는 사건, 사건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 영웅들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초자연적인 공격에 못지 않은 인간들의 용기와 과감성과 혜안과 통찰력은, 신화를 인생관으로 삼고 사는 독자들에게 의욕과 희망을 제공한다. 인간도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 뽈 디엘은 인간의 본질 속성에서 신성에 강조점을 두게 된다.
* 신화의 출현은,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듦으로서 최고 순수 세계의 일원으로 상승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인간 세상을 만들고 동시에 그 만들어진 세계를 파괴하고 심판하려 드는 신의 의지가 오히려 지상에 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신적 존재로 분발하도록 촉진하게 된다. 인간들의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 절대 진리로 작용하게 되어, 그 누구든지 심지어 신이라 할지라도 방해하게 되면 적이 되고 악이 된다. 인간 무의식 깊은 속에서 생수처럼 마를 날 없이 분출되는 욕망의 에너지는 상징의 분수가 되어 지상에서 만개 한다.
인간세계를 압도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태로서 인간 세계에 위협을 가하는 신에 활동에 대해서, 인간 본연의 삶의 의욕은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공포 속에서도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죽음의 발자국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기절해서는 안 된다. 기필코 죽음마저 통과해서 보다 성화 되고 승화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뭔가 반드시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대처하는 처세술이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영생의 보검이나 지혜를 알기만 한다면 …. 신화는 수많은 패배와 실패를 부끄러움 없이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실패의 반복 가운데서 성공의 씨앗은 안에서 서서히 배태하게 된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그 성공의 지혜가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를 보상해주고 결국에는 영광스러운 개선으로 마무리될 것이기에 희망을 잃고 살 수는 없다. 고난 가운데 영광이다. 좌절했기에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 일수가 있으나, 주로 교만한 마음, 성급성, 이기주의, 잔학성, 허영심 같은 것이다.
실패는 바로 이런 삐뚤어진 마음들을 교정하는 단계이다. 위대한 영웅으로서 가지지 말아야 될 것을 잘라 버리는 경험들이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 안에서 미화된다. 그래서 신화란, 결국 인간 신성화 시도의 증거물이다. 왜 이런 신화가 인류 역사에서 한시도 멈춘 적이 없는가? 그것은 욕망이라는 삶의 에너지가 밖에서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으로 해야 될 마땅한 윤리와 도덕의 임무는 사실상 보다 지상에서 오래 생존하기 위한 영웅적 자질로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신이 자신을 통제해서 심판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그런 작은 신으로 달라져서 심판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은 채 도도히 삶을 살고자 하자는 데 있다. 저자는, 신화 속에서 정신장애의 원형을 발견한다.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 의식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욕구와 야망의 화신이 되어 충동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은, 스스로 큰 충돌의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신경질, 신경쇠약, 정신병 이 세단 계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도 되지 못한 채 스스로 붕괴해 간다. 그리고 무너지는 자아를 신화 속에 상징으로 남긴다. 한편으로 신에게 대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아들이 되어 영혼만이라도 영웅으로 변신해 보려는 인간의 최후의 바램은, 심리적 투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되어 그 시절에 명명백백 드러나 있는 것이다.
*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무엇을 뜻하는가? 소위 신앙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저의는 무엇일까? 한국교회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오직 성경의 바탕 위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모토를 내세웠다. 하지만 성경을 대했던 수많은 신도들은 그 성경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현재 자기의 괴로운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탈피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지혜의 열매를 찾기를 원했다. 또 설교자들에게 그런 쪽으로 요구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설교 단에서 복음이 나오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자기들이 찾고자 했던 신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서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 쪽에서 행하신 희생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죄인이 지상에서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외면한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한풀이]이다. 못 배운 한, 없이 살아온 과거, 남보다 더 풍족하게 살고 보란 듯이 살고 싶은 욕망을 신께서 빈틈없이 해결해 주기를 고대하고 교회에 출석한다. 만약 그것만 보장해 준다면 민중들은 뭐라도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일날 예배에 참석할 용의가 있으며, 십일조를 낼 각오가 되어 있으며, 자기 교회를 키울 봉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자기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는 한국교회를 다음과 같이 불러야 마땅하다. -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신화의 제단]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