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게를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 왔다. 가끔 마당을 가로 질러 가는 놈들이 몇 있었지만 이 고양이는 좀 달랐다. 다른 길냥이들은 곁을 주지 않지만 이 놈은 먼저 아내에게 다가와 몸을 문지르더라는 것이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목줄이 있는 걸로 봐 누군가가 키우다가 버린 유기묘 같았다. 배고픈 모양이로군, 생각하면서 우리는 고양이에게 우유 한 접시를 주었다. 고양이는 처음에 눈치를 좀 보는 것 같더니 이윽고 한 접시를 말끔하게 비워냈다. 목줄이 목을 조이는 것 같아 가위로 제거해 주었다. 털이 길어서 그렇게 보였지 다행히 살이 패인 곳은 없었다.
고양이는 떠나지 않고 탁자 밑에 자리를 잡고 엎드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속으로 고양이를 키워볼 궁리를 하면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몇년 동안 키우던 개가 죽어서 항상 허전해 하던 터였다. 만약 키우기로 한다면 우리로서는 첫 고양이인 셈이다. 당장 고양이를 부르려니 이름이 필요했다. 나는 눈처럼 희니 스노우라고 부르자고 했고 아내는 행운처럼 우연히 찾아왔으니 럭키라고 부르자고 했다. 우리는 논란 끝에 결국 그 당시 핫한 이름이었던 영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영미, 영미, 우리는 그 고양이를 연신 부르면서도 걱정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버렸을까? 병들거나 너무 늙은 건 아닐까? 털이 긴 걸로 보아 버린지 꽤 오래된 고양이임이 틀림없어. 피부병이나 기생충은 없을까? 그런 우리의 염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양이는 아내를 졸졸 따라다녔다. 고양이를 마당에서만 키우기로 했기 때문에 방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고양이를 막았다. 마당에 꼼짝않고 엎드려 있던 고양이는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참새를 쫓아 돌담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모습이 보기와는 달리 날렵하고 민첩했다.
아내가 고양이 사진을 몇 컷 찍어서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동물을 끔찍히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였다. 딸은 족보가 있는 페르시안 고양이 같다고 응답했다. 그 사이 고양이는 유유히 마실을 나갔다. 느티나무 밑에서 한참을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다. 딸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고양이 사진을 살펴보니 턱 주변에 사자처럼 길게 뻗은 갈기와 약간 위로 찢어진 눈이 새삼 기품있게 보였다.
가게문을 닫을 때까지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돌아오면 키우고 아니면 말자고 말했다. 고양이 털깎기와 집까지 걱정하던 아내는 못내 아쉬운지 느티나무 아래까지 가서 온 동네를 굽어보며 고양이를 찾았다.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함께 굽어보니 마을에 한 그루뿐인 벚꽃이 고샅 사이에 환하게 피어 있었다.
고양이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았고 벚꽃은 그새 곧 져 버렸다. 우리는 그 후로도 한 나절 잠깐 다녀간 고양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 고양이는 식구처럼 살았던 짱아를 생각나게 했고 그 짱아를 몹시 사랑했던 우리 아이들의 어렸을 적 모습도 생각나게 했고 젊은 시절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어떤 여인도 생각나게 했다. 모두가 어느 봄날 하루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