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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김홍도_ '송하맹호도'
드라마 첫 회에서 유배를 당한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다가 호랑이에게 쫓겨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준 그림이다. 조선시대 호랑이 그림으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설정된 이 그림은 비단 위에 그려져 있다. 정면을 향한 호랑이의 머리와 육중하면서도 유연한 자세에서 백수의 제왕인 호랑이의 위엄이 잘 드러난다.
○김홍도_ '군선도'
단원이 31세인 1776년,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 속에선 정조가 청나라에 바칠 조공품으로 등장한다. 도화서의 화원들이 그린 그림에 정조가 못 마땅해 할 때, 김홍도와 신윤복이 힘을 합쳐 완성한 대작이다. '군선도'를 계기로 정조는 정치적으로 김홍도와 신윤복의 실력을 다시 한 번 신뢰하게 된다. 그림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서왕모의 반도회에 초대를 받고 약수의 물 위를 건너가고 있다.
○신윤복_ '미인도'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신윤복의 대표작인 이 그림은 조선시대 여인 초상화의 으뜸으로 평가된다. 이번 간송미술관 전시에서 백미로 꼽히는 신윤복의 화첩 '혜원전신첩' 30폭 속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 작품이다. 드라마 초반에 김홍도가 이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짧게 비춰졌다. 물론 결말을 위한 중요한 복선이다.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선시대의 미인상은 오늘날의 미인상과는 많이 다르죠?
얼굴에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와있고섬세하게 그려져있는데 단조로운 그림이지만 노리개를 만지는 손이며,살짝 고개를 숙인 얼굴이며, 여성스러워 보이는 한복의 매무새까지, 신윤복의 뛰어난 묘사력을 대표해주는 작품이 될만합니다. 신윤복의 연인이였던 기생을 그렸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신윤복_ '단오풍정'
8일 방송된 '바람의 화원' 5회에서 신윤복은 기생 정향(문채원)을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다. 여장 차림으로 정향과 함께 밖으로 나가 여자들이 멱 감고, 그네 타는 모습을 포착했다. 이 그림 속의 한 여인이 신윤복 자신이었을 것이란 가정이 있고 보면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림 속에선 여자들이 옷을 벗고 있는 에로틱한 분위기와 남자들이 이를 엿보는 해학적 정서가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미인도'와 함께 신윤복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그림의 비밀은 무엇일까.
○신윤복_ '기다림'
드라마 속에서 신윤복을 위기에 빠지게 하는 그림이다. 신윤복은 도화서 외유사생을 나갔다가 사가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고, 이 때문에 그림 속 주인공이었던 정순왕후의 분노를 산다. 버들가지에 물이 차오르는 봄날 곱게 차려 입고 정인을 그다리는 여인의 애잔한 모습이 두고 두고 뇌리에 남게 하는 명작이다. 물론 실제 그림엔 목의 점이 없다.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그림
계변가화 _ 신윤복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그 옆을 지나는 젊은 사내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청루소일 _ 신윤복
방 안에 여유로운 양반이 앉아있고
마루에는 생황을 든 여인이 있으며
전모를 쓴 기생이 마당을 들어서고 있는
적막한 오후 한 때의 기방 풍경을 그렸습니다
유곽쟁웅 _ 신윤복
기방 문 앞에서 대판 벌어진 싸움 모습입니다.
장죽을 문 기생은 구경을 하고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이 싸움을 말리고 있습니다.
야금모행 _ 신윤복
늦은 겨울 밤 기생이 동침을 원하는
양반을 따라 어디론가 가는 모습.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다 그렇고 그랬나보다.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이
양반과 기생의 성매매를 중개하고 있습니다.
연소답청 _ 신윤복
'연소답청'이란 젊은 선비들이
푸른 새싹을 밟는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의 양반들의
유한놀이 문화인 들놀이를 말합니다.
젊고 늙은 양반들이
종과 기생을 앞세워
풍취 좋은 산천을 찾아 즐기고
돌아오는 모습을 섬세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상춘야흥 _ 신윤복
진달래 꽃이 피기 시작한 어느 봄날,
양반가의 후원에서 벌어진
연회의 흥취를 그렸습니다.
음악에 흠뻑 취한 주빈의 표정이
이 날의 연회가 아주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정변야화 _ 신윤복
어스름 봄밤에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을 그린것으로
물을 길러 온 두 여인이 춘홍이 오른 듯
보름달 아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돌담 뒤에서 음흉한 양반이
두 여인을 몰래 훔쳐보고 있습니다.
삼추가연 _ 신윤복
어린 기생의 '머리를 얹어주는'
초야권을 사고 파는 장면.
뚜쟁이라 할 수 있는 늙은 할미가
기생과 초야권을 사는 사내의
중간에서 중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부탐춘 _ 신윤복
이부는 과부를 뜻하니 소복을 입은 여인이
마당에서 짝짓기 하는 개와 참새를 보고 웃음을 머금고
몸종이 나무라듯 그 허벅지를 꼬집는 장면입니다.
해학적이면서도 여필종부를 강요하는 남존여비사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월하정인 _ 신윤복
달빛 아래에서 두 남녀가 안타까운 정을 나누는 장면을
숨막힐 듯 섬세한 필치로 묘사했습니다.
안타까운 두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전모를 쓴 여인 _
배경도 없는 단순한 화폭 위에
가늘고 뚜렷한 선묘로 그려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기방무사 (妓房無事) (1805) ]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아마도 방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구요 혜원의 춘화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답니다.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죠
단오 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놀던
조선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놀이의 이유는 악귀를 물리치고자 하는
액땜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소년들은 절간의 젊은 스님들 같은 데요
그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무녀신무(巫女神舞) (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무당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빌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혜원은 이렇게 흥미롭고
이색적인 생활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 즐겼지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녀, 무녀들입니다. 여기서도 기녀의 붉은 의상은
우리의 시선을 기녀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쌍검대무(雙劍對舞) (1805)
한 가운데서 긴칼을 들고 춤을 추는 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주변의 푸른빛들과는 대조적으로 무녀의 치마는 붉은 색이네요. 덕분에 시선이 무녀들에게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보니 얼마나 현란하게 춤을 추는 지 알 것 같아요. 연당의 여인 (1805)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 을 바라보며 여인의 모습을 시원하면서도 운치 있게 그려내었습니다 생황을 불려는 듯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담뱃대를 든 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은퇴한 기생인 퇴기인 듯 합니다. 순간의 모습을
잘 포착하여 깔끔하게 화면에 담아낸 혜원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월야밀회(月夜密會) (1805)
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 장 밑에서 한 쌍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있습니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관청의 무관인 듯 하고
그 남자의 여인은 기생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한 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인 듯 하구요. 담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월하정인(月下情人) (1805)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인 듯 잘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네요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고요.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 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왼쪽 담에는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라고 씌여 있습니다.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주변의
기와집과 마당 안의 매화도 보이는 것이 양반들을 상대하기에도 손색없는
꽤 반듯한 집 같아 보입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도 선비와양반들인 듯 하구요.
매우 일상적인 조선시대의
한 생활상입니다.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그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니다. 조선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풍경입니다.
화면 위쪽에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청금상련(聽琴賞蓮) (1805)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옛 선비들은 기생들과
즐기는 놀이도 양반들이 지녀야 할 풍류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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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쌍벽을 이루는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실제 삶은 어떠했을까?
사제지간이자 연인으로 그려지는 '바람의 화원'과 달리 실제 두 사람이 교류한
흔적은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모두 화원 가문 출신으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반면
신윤복은 당대 실력을 인정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역사적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단원 김홍도는 1745년 김해 김씨 김진창의 증손으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고,
일곱살에 도화서 김응환의 제자가 됐다. 김응환은 당시 유명한 문인 화가인 강세황에게
김홍도를 소개했으며, 도화서에 정식으로 들어간 김홍도는 1771년 왕세손인 이산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화원으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1776년 영조에 이어 이산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김홍도는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는 "그림과 관계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하게 하라"라고
할 정도로 김홍도를 총애했다. 김홍도는 성품 또한 '군선도'를 그린 것처럼 호방하고
신선과 같은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에 따르면 김홍도는 말년 너무 가난해 조석으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지만
시장에서 본 매화를 보고 사고 싶어 자기 그림을 3000냥에 팔아 2000냥으로 매화를 샀으며,
나머지 돈으로 지인을 초대해 술잔치를 벌였다.
김홍도는 김응환과 함께 1788년 금강산 산수화를,
1789년 일본 지도를 그려오라는 어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789년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홀로 대마도로 가서
일본의 지도를 모사해 돌아왔다. 1790년에는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사찰인
1795년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홍도는 소금 장수로 부를 축적한 거상 김현태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경제적 지원을 받아 활발히 그림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말년에 생활이 어려웠다.
1805년 병으로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윤복은 화원 가문인 신한평의 장남으로 1758년 태어났다. 도화서 화원으로 벼슬이 첨절제사에 이르렀으나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후에 쫓겨났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개인적인 생애와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무하다. 다만 권력과 조정의 그늘에서 벗어나 살았으며, 유고 사회로부터도 소외당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신윤복은 기생과 한량, 별감이나 포졸 등 하급 잡직 관료들의 모습을 그렸으며, 봉건 사회와의 갈등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고집했고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찬문(贊文)을 담아 감각적인 글솜씨도 발휘했다. '기방무사' '월하정인' '혜원전신도' 등이 대표작이며 그림 속에 자주 자신을 등장시켰다는 학설도 있다. 그림 인물 중, 주변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가 바로 신윤복 자신이며, 이는 장난기 섞인 에로티시즘이자 세상을 관조하는 풍자적인 의미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처네를 쓴 여인'이 1829년 그린 작품이라,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