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교도소를 다녀와서
혼란스러웠다. 여주교도소에서 이근안 씨를 만나고 돌아와서 밤잠을 설쳤다. 그때 입술이 부르텄는데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사태를 악화시킨 건 장영달 의원이었다. 내가 다녀온 다음 날쯤인가 여주교도소로 이상락 전 의원을 면회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내가 이근안 씨를 면회한 얘기를 우연히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언론에 귀띔한 것이었다.
설 다음날, 방송 카메라 기자들이 집으로 밀고 들어왔다. 첫 번째 온 기자들은 성공적으로 방어해 돌려보냈지만, 그 다음에 들이닥친 기자들이 막무가내로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이근안 씨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비서실에서 주의하지 않고 일정을 짜는 바람에 일이 어긋나서 이근안 씨를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상락 전 의원을 설 전에 면회하자는 게 비서진의 생각이었다. 내 의견을 말할 사이도 없이 이의원을 비롯해 면회를 같이 할 사람들에게 이미 통지를 하고 약속을 해버리는 바람에 면회를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상락 전 의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민이 있었고, 면회를 가야할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학벌사회인 이 나라에서 가난해서 진학 못한 것도 억울한데 선거에서 좀 과장했다는 이유로 의원직도 뺏고 징역까지 선고한 가혹한 법원의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는 의미에서도 면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근안 씨가 이 전의원이 있는 여주교도소에 함께 있다는 얘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부담스러웠다. 비서관에게 안갈 수 없느냐고 묻고,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 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내키지 않았다. 내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서 망설였다. 면회를 가야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교도소 당국을 통해 이근안 씨의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다. 본인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다.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건장했지만 키가 나와 어슷비슷했다. 고문당하고 욕먹고 그리고 소리 지르던 그때 그곳에서와는 엄청나게 달리….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 악수를 했다. 두 손을 잡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눈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다. 지난 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솔직히 조금 아쉽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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