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임정 시절부터 극우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다.
백범일지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레닌의 방귀구멍을 꿀물핥듯하는 자들!".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당시 사회주의 계열을 빙 돌려서 깐 부분도 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대단히 긍정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셉 매카시(매카시즘의 선구자)의 등장 이전까지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가는 드물었다. 이승만마저도 취임연설에서는 "평화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다면, 공산주의자의 참여를 받아줄 수 있다"고 연설했던 일이 있다. 물론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 전복과 혁명만이 자본주의 체계를 무너뜨릴수 있다고 칼 마르크스가 자기 책에 써놨으므로 폭력혁명 노선을 부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는 하다.
애초에 김구는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소련의 국제공산당에 의지하려드는 것이 친일파와 다름 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공산당 활동을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해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공산당=매국노라고 간주했다.
또한 해방 이후, 소수의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정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비해 당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세력들은 임시정부 봉대를 반대하자 김구는 사회주의 세력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세력과 합작해 사회주의 세력을 배척하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김구가 내세운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국내 좌익계열은 이러한 주장에 크게 반발했다.
좌익계열은 사실상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데다가 그나마 한것도 지하활동으로 구분되는 경우라 임시정부의 활동앞에선 자연스레 위축 될수 없었다.
단, 지나치게 정통성을 내세우는 김구에 대해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김구를 아주 제대로 깠다.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을 직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민국의 부활, 민국 30년을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3.1운동을 통해 전국(한반도) 인민의 합의를 거친 정부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이뭐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