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3 장
이웃의 사랑에 대하여(2)
「이웃의 사랑보다 높은 것은 가장 멀리 떨어진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미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은 너무나 평범하다.
그러나 가장 멀리 있는 존재를 사랑하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 아직 화석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한 도전임이 분명하다.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등은 모두 죽은 화석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죽은 육체로 계속해서 호흡하고 살아간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숨을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인간의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은 대의大義와 유령에 대한 사랑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대의에 대한 사랑, 아득히 먼 꿈에 대한 사랑을 더 높다고 말한다.
오늘은 꿈이던 것, 그대 안에 오직 대의로만 남아있던 것이 내일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멈추지 말고 더 나은 대의, 더 높은 꿈을 품어야 한다.
훌륭한 몽상가가 되어라.
훌륭한 대의, 인기가 없는 대의, 대중들이 지지하지 않는 대의를 위해 싸우는 훌륭한 전사가 되어라.
대중은 스스로를 지지하며, 그들의 생활방식은 거의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다.
그대의 선조들은 같은 방식으로 살았고, 그 선조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살았다.
그들은 같은 것을 되풀이하며 반복한다.
낯선 것에 대해서 그들은 곧바로 적대적이 된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곧바로 인기가 없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인기가 없는 대의이자 머나먼 꿈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형제들이여, 그대의 뒤를 따라다니는 이 유령은 그대보다 더 아름답다.
그대는 왜 그것에게 자신의 살과 뼈를 주지 않는가?
그대는 그저 두려워서 이웃에게 달려갈 뿐이다.」
그대의 꿈에 살과 뼈를 주어라.
그대의 대의에 생명을 부여하라.
그러나 그대는 진정으로 인간다운 것, 거의 신성을 만나는 것이라고 불릴 만한 삶을 사는 것보다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대에게 군중의 안락함은 더 이상 없다.
군중은 더 이상 그대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홀로 서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을 준다.
에베레스트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은 고양된 것이고,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제품들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아무런 도전과 싸움, 투쟁과 시련이 없는 군중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양이 될 뿐 사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것이 수 천 년 동안 인간이 살아온 방식이며, 이제 그것은 습관이 되었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 칭찬을 하고자 할 때 증인을 불러들인다.
그대가 그 증인을 꿰어서 그대를 좋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 때, 그대는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
이 게임은 계속된다.
나는 그대를 칭찬하고 그대는 나를 칭찬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거래가 된다.
모두가 서로를 칭찬한다.
그들은 이것을 ‘사회화’라고 부른다.
그들은 로터리 클럽, 라이온스 클럽과 같은 온갖 클럽을 만들고 그 안에서 교류한다.
그런 클럽들은 양들의 클럽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도 서로를 본명으로 부를 용기가 없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칭찬한다.
모두가 그대를 아름답고, 친절하고, 지적이고, 자애롭고, 종교적이라고 말하며, 똑같은 칭찬이 자신들에게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이런 어리석음은 인류 전체에 만연해 있으며,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위선과 음모 속에서 움직인다.
홀로 주장을 펴려면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는 사회가 공존하기로 결정한 위선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군중의 일부분이 아니며, 나의 사람들이 군중의 일원이 아니라는 점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대가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해야 하더라도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더 기쁜 일이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노예로 사는 것보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사람은 자신을 찾고자 할 때,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 이웃에게 달려간다.」
홀로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이름, 직업, 장점, 학력, 아름다움, 능력, 존경심 모두를 잊어버린다.
이 모두는 그대를 둘러싼 가짜 명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이웃에게 가게 되면, 그는 그대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이웃은 그대를 칭찬하고 그대는 이웃을 칭찬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그대 자신과 그 사람 자신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그대가 근심과 걱정과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삶은 어둡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그대는 이웃에게 달려가서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고 잡담을 하면서 자신의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려 한다.
누구의 아내가 누구랑 도망을 갔고 누구의 남편이 누구의 아내를 쫓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들뿐이다.
걱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자 한다.
「이웃에 대한 잘못된 사랑이 그대의 고독을 감옥으로 만든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의 고독은 거의 감옥처럼 보이고,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아무 방향이나 달아나고 무엇을 하더라도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독은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보배이지만,
그대는 그것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그대는 자신을 사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해준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아이들 모두를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그 안에 오직 그대 자신만 제외되어 있다.
“너희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을 했던 예수의 이해력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과연 누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가?
“너희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적을 사랑하라.”
과연 누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가?
예수는 그 점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심리학자이다.
「나는 그대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가르친다.
벗이 그대에게 대지의 축제가 되고, 초인의 전조가 되기를 바란다.」
이웃은 우연한 것이다.
그 사람은 우연히 이웃이 되는 것이다.
벗은 의식적인 선택의 대상이다.
그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대가 선택한 것이다.
우정이 축제가 되고 우정 속에서 초인이 태어나도록 벗을 깊이 사랑하라.
《사랑은 황금을 정화하고 평범한 인간들을 정화하여 초인으로 만드는 불꽃이다.》
「나는 그대에게 벗과 그의 흘러넘치는 가슴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대가 흘러넘치는 가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그대가 그 사랑을 그대로 흡수하는 해면海線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라.」
차라투스트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대가 사랑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다가와 흘러넘칠 때, 그대가 그것을 흡수할 수 있는 해면, 즉 스펀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시오.’ 라며 대분분의 연인들이 사랑을 구걸하듯이 사랑을 구걸하는 그릇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구걸하는 거지가 되지 말고 흡수하는 스펀지가 되어라. 끝.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1
오쇼 강의/박형진 옮김. 젠토피아 출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