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언덕이나 높다란 곳에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대(臺)’라 한다. 때로는 흙이나 돌로 돋우어 높인 자리다. 김해천문대 가까이 삼한시대부터 있어온 분산성이 있다. 김해를 가야의 옛 이름을 딴 ‘가락’이라고도 하지만 ‘분성’이라고 하는 것은 분산성에서 유래되었다. 분산성에서 을숙도 방향 굽어보기 좋은 자리가 ‘만장대’다. 그곳엔 다대포에서 시발하는 봉수경로가 지나는 봉수대가 있다.
같은 이름 만장대는 시루봉 아래 진해만을 굽어보는 자리에도 있다. 이런 대는 산천을 유람한 최치원과 인연이 많다. 그가 부산 바닷가에 일출 본 자리를 기념한 해운대가 있다. 양산 물금 오봉산에 올라 낙동강을 굽어 본 자리가 임경대다. 해인사 비로전 곁 그가 짚었던 지팡이가 자란다는 전나무 자리 학사대도 있다. 최치원이 마산을 지나다 합포만에 비친 달그림자 완상했던 자리가 월영대다.
경남대학 앞 오거리를 ‘댓거리’라 한다. 단순히 대학 앞이라는 거리가 아니고, 최치원이 갯가에서 물에 비친 달을 바라봤던 월영대가 근처에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근처는 달과 관련 있는 동네 월영동 완월동 반월동이 있다. 지금은 바다가 매립되어 옛날의 원형은 찾을 길 없다. 천 백 년 전 최치원이 물에 비친 달을 감상했던 바닷가는 메워져 상가가 들어서 사람들이 복작대는 저잣거리다.
나는 마산역에서 구복 가는 61번 버스를 기다리며 댓거리를 떠올렸다. 언젠가 경남대학 앞 육교를 돌아 월영대 비각에 가 본 적 있다. 비각은 현재 바닷가와 상당한 거리로 통영으로 넘나드는 길가 주택 골목에 있었다. 최치원은 가야산에 들어 신선이 되었다지만 중년엔 구름처럼 외롭게 떠다녔다. 그래서 호가 고운(孤雲)이고 해운(海雲)이다. 역 광장에 서성이며 최치원을 생각할 때 61번은 출발했다.
마산역에선 승객이 나 혼자였는데 댓거리 지날 무렵엔 더러 내리고 탔다. 차창 밖 마창대교 아래 바다를 매립하는 가포와 덕동 하수종말처리장이 나타났다. 수정 앞바다 역시 매립되어 공장이 들어설 모양이었다. 반동 삼거리 지나 구복이고 연육교를 건너자 저도 종점에 닿았다. 종점에 내린 사람 역시 나 혼자였다. 길가 횟집 할머니한테 용두산 등산길을 물었더니 문밖까지 나와 친절히 알려주었다.
윗마을 뒤로 난 오솔길 따라 올랐더니 야트막한 산이지만 주변을 두루 조망할 수 있었다. 쪽빛 다도해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간간이 바다 위 마산 명물 미더덕과 홍합을 양식하는 하얀 부표가 떠 있었다. 가까이 고성 당동 앞바다고 저 멀리 아스라이 통영과 이어진 거제대교가 보였다. 눈앞엔 칠천도고 그 뒤로 거제 본섬이 마주했다. 동으로는 불모산 송신탑과 진해 수치 stx조선소 크레인이 보였다.
바다를 조망하면서 가져간 도시락을 비우고 바위 절벽 아래 해안가로 내려가 보았다. 폐플라스틱과 낡은 어로장비 등 쓰레기가 있긴 해도 깨끗한 물에 바닷말이 둥실둥실 떠 다녔다. 낚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갯바위 어디쯤 포인트를 찾지 싶었다. 나는 가랑잎 쌓인 오솔길 따라 걸어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갯가엔 손님을 만나지 못한 여러 척 낚싯배가 묶여 있었다. 낚시터로 유명한 원전이 가까이 있다.
저도로 들어올 땐 시내버스 타고 연륙교를 건넜다만 나갈 때는 걸어서 나갔다. 일명 ‘콰이 강의 다리’라는 옛 다리는 새 다리 곁에 나란히 있었다. 새로 놓은 다리는 날렵한 갈매기 형상을 한 아치형이었다. 다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다도해 비경에 다시 한 번 눈이 홀렸다. 구복으로 나오면서 산모롱이 전망대에서 내가 올랐다 내려온 건너편 용두산과 저도연륙교를 바라보았다.
마을에서 가장 볕바른 남향 터는 구복초등학교 자리였다. 앞에 잔잔한 바다가 펼쳐지고 뒤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쳤다. 이 학교도 세월 따라 취학아동이 없어지자 학교는 오래 전 문을 닫았다. 지금은 민간인이 예술촌으로 꾸며놓았다. 시든 잔디 뜰을 지나 미술관에 들려더니 서예와 서각을 전시해 둘러보았다. 붓끝에서나 칼끝에서나 한 점 작품을 위해 작가는 혼을 불어넣었다. 인적 드문 바닷가에서. 09.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