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간(李偘)
[본관] 전주(全州)
[생졸년] 1640년(인조18)~1699년(숙종25) / 향년 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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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낭원군 묘갈명(朗原君墓碣銘)
선조의 별자(別子) 인흥군(仁興君) 휘(諱) 영(瑛)은 시호가 정효(靖孝)이며 두 아들을 두었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휘는 간(偘), 자는 화숙(和叔), 자호는 최락당(最樂堂)이다. 숭정 경진년(庚辰年,1640, 인조 18) 태어나 갑오년(甲午年,1654, 효종 5) 낭원 정(朗原正)에 제수되고, 십 년도 되지 않아 도정(都正)을 거쳐 군(君)이 되었다.
숙종 기미년(己未年,1679, 숙종 5) 왕실의 계보를 수집하여 올리니 성상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특별히 중의대부(中義大夫)로 가자하였다. 공은 이어서 열성(列聖)의 휘호(徽號) 중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도록 청하였다. 얼마 후 세 품계를 뛰어넘어 정사(正使)에 충원되어 연경에 갔고, 훗날 또 다시 갔다.
무진년(戊辰年,1688), 장렬대비(莊烈大妃)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누차 승진하여 품계가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이르고, 별직(別職)으로 도총부의 부총관과 도총관, 사옹원과 종부시의 제조를 지냈다. 성상께서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사하여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고, 또 건원릉(健元陵)의 비각을 중건하며 또 창빈묘(昌嬪墓)에 비석을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공이 건의한 것이었다.
무인년(戊寅年,1698), 장릉(莊陵)의 복위 이야기가 나온 것도 공이 시작한 것이었다. 공이 예전에 대군(大君)으로 추봉(追封)하도록 청한 적이 있었는데, 논의가 분명하고 공정하여 식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과거 공이 열두 살에 부친을 잃었을 때 거상을 잘 한다고 알려졌는데, 송 부인(宋夫人)의 상을 당하자 슬픔이 지나쳐 병이 되었다.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의관에게 보게 하시고 또 생강과 계피를 먹으라고 강권하였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받았으나 그래도 차마 명을 받들지 못하고 삼년상을 마쳤다. 성상께서는 공이 종친의 원로라 하여 비할 데 없이 총애하였다. 한번은 대궐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공이 몹시 취하자 어린 환관에게 부축하여 나가게 했다. 또 공의 초상을 가져다 보고 이르시기를, “몹시 비슷하다.” 하였으니 남다른 은혜였다.
기묘년(己卯年,1699), 공이 병에 걸리자 무당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상소를 올려 아홉 조목을 아뢰었는데 가장 먼저 검소함을 숭상하라고 권면하였다. 또 아들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9월 4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하면서 다시 용안을 우러러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성상께서 애도하며 상례를 돕고 부의를 내렸는데 일반적인 전례를 뛰어넘었다.
송 부인은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의 현손으로 부친은 첨정 송희업(宋煕業)이다. 공의 배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나이 34세 되던 정사년(丁巳年,1677)에 돌아가셨다. 현명하고 유순하여 부인의 도를 깊이 터득하였다.
7남을 두었으니 장남 전평군(全坪君) 곽(漷)은 출계하여 백부 낭선공(朗善公 이우(李俁))의 후사가 되었고, 나머지 아들은 전성군(全城君) 혼(混), 전계군(全溪君) 보(溥), 전산군(全山君) 심(深), 전천군(全川君) 척(滌), 전안군(全安君) 황(潢)이며 5남은 요절하였다. 청림수(淸林守) 담(潭)과 청양정(淸陽正) 용(溶)은 측실 소생이다.
전성군의 아들은 익녕군(益寧君) 제(梯), 익양군(益陽君) 단(檀)이며 딸들은 좌랑 오수엽(吳遂燁)과 봉사 김낙증(金樂曾)에게 시집갔다. 전계군의 아들은 낙산도정(洛山都正) 경(㯳), 낙풍군(洛豐君) 무(楙)이며, 딸은 사인(士人) 김엽(金燁)에게 시집갔다.
전산군의 아들은 밀양군(密陽君) 완(梡), 달성도정(達城都正) 강(棡), 장계군(長溪君) 병(棅)이며, 진사 김우개(金宇槩), 사인 권응형(權應衡), 진사 한사직(韓師直), 사인 윤득명(尹得命), 윤재형(尹在衡)은 사위이다. 전천군은 익양군을 후사로 삼았다.
전안군은 동양군(東陽君) 당(㭻)을 계자(繼子)로 삼았고, 딸은 진사 박봉한(朴鳳漢)의 아내가 되었다. 전평군도 후사가 없어 밀양군을 후사로 삼았으며, 두 사위는 부사 신의집(申義集)과 감역 홍구행(洪九行)이다. 해창수(海昌守) 기(檱)와 영천수(靈川守) 야(壄)는 청림수와 청양정의 계자이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몹시 돈독하였다. 대부인을 병간호할 적에는 옷의 띠를 풀지 않았으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바쳤다. 상을 치를 적에는 한결같이《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으며, 또 손수〈제의(祭儀)〉를 써서 자손에게 남겼다.
저택이 지나치게 사치하다는 이유로 고쳐서 줄였으며, 하루종일 단정히 앉아 사람들이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소박한 옷을 입고, 손님을 만나지 않았으며 당시의 정사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주위에 그림과 책을 두고 담박하게 지조를 지키니, 만난 사람들은 그가 귀공자인 줄도 몰랐다.
만년에 복록이 융성하였으나 그럴수록 더욱 겸손하고 신중하였다. 자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지위가 높아도 회초리를 치니, 집안이 조정처럼 엄숙하였다. 전서(篆書)에 가장 뛰어나 한 시대 공사(公私)의 편액(扁額)을 모두 맡아 썼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누차 풍악산에 들어가 돌아오는 것도 잊고 소요하였다.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아래 빼어난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대나무 가마를 타고 홀로 가니 운치가 시원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그대로 집 뒤에 장사 지내고 부인을 부장하였다. 예전에 우암 송 선생이 정효공을 두고 ‘성품이 지극하고 행실이 순수하여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다.’라고 하였다.
또 〈정우당기(淨友堂記)〉에서 공의 형제가 화락하다고 찬미하였으니, 이는〈인지(麟趾)〉의 교화에 근본을 둔 것이었다. 이를 보면 공의 효도하고 우애하는 덕이 멀리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익녕군의 아들 명환(明煥)이 와서 명(銘)을 청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보통 사람의 기습은 / 凡人習氣
거처와 봉양에 따라 바뀌기 쉽네 / 居養易遷
아름다운 여색, 좋은 수레와 말이 / 聲色輿馬
어찌 본성으로 좋아하는 것이겠는가 / 夫豈性然
공은 이와 달랐으니 / 公則異是
귀공자이면서 한미한 선비 같았네 / 貴介寒士
집에서는 그림과 글 / 入則圖書
밖에서는 산수를 즐겼네 / 出則山水
그러나 더 훌륭한 점 있으니 / 然且有大
효성과 우애였다네 / 惟孝與友
눈물 흘리며 손가락의 피를 내니 / 涕泣血指
하늘이 도와 모친이 장수했네 / 天右壽母
대로(大老 송시열)가 글을 지었으니 / 大老作文
그 꽃이 활짝 피었네 / 鄂韡其華
지위는 높아도 마음은 겸손하니 / 位崇心卑
참으로 아름다운 복이 내렸네 / 降福孔嘉
《시경》에 번성함을 노래했으니 / 詩歌振振
반드시 문왕에 근본을 두었네 / 必本文王
아, 목릉(穆陵 선조)이여 / 於戲穆陵
남기신 은택이 원대하도다 / 遺澤弘長
천보산 언덕에 / 天寶之崗
손자가 비석을 세웠으니 / 孝孫樹碑
먼 훗날까지 / 有來千秋
영원히 공경하라 / 其永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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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낭원군 묘갈 :
이 글은 이간(李偘)의 묘갈명이다. 이간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최락당(最樂堂)이다. 1640년(인조 18) 태어
나 1699년(숙종 25)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정우당기(淨友堂記) :
《송자대전(宋子大全)》권144에 실려 있는〈정우정기〉를 말한다. 정우정은 낭원군 이영의 정자로, 송시열은 그가 아우 낭선군 이
우와 함께 정자 근처에서 우애하며 산다고 하였다. 1684년(숙종 10) 지은 글이다.
[주03] 인지(麟趾)의 교화 :
〈인지〉는《시경》주남(周南)의 편명으로, 문왕 부부의 교화가 자손에게 미친 것을 찬미한 시다. 여기서는 선대 국왕들의 교화를
말한다.
[주04] 거처와 …… 쉽네 :
《맹자》〈진심 상(盡心上)〉의 “거처가 기운을 옮기고 봉양이 몸을 바꾼다.[居移氣, 養移體.]”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05] 그 …… 피었네 :
형제의 우애를 노래한《시경》〈상체(常棣)〉의 “아가위나무의 꽃이여, 꽃이 활짝 피었네.[常棣之華, 鄂不韡韡.]”라는 구절을 인
용한 것이다.
[주06] 시경에 번성함을 노래했으니 :
주나라 왕실 자손의 번성함을 노래한《시경》〈종사(螽斯)〉의 “너의 자손이 번성함이 마땅하도다.[宜爾子孫, 振振兮]”라는 구절
을 인용한 것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