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평양의 한 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 사진에 담아 온 것으로 해남의 '자화상'에 비해 얼굴 살이나 짙은 수염 등 훨씬 젊은 시기의 초상화로 추측되나 진위여부에 관심이 끌리고 있다.
공재 윤두서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동양 최고의 화가로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친구였던 심득경이 죽은지 석달 후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를 본 가족들이 심득경이 살아 돌아왔다며 통곡했는데 그림솜씨를 미뤄 집작할 수 있다.
윤두서는 무슨 그림이 되었든지 그리기 전에 그 대상을 상당한 시간에 걸쳐 들여다보고 또 보고 하여 머릿속에 완전히 익힌 뒤에 비로소 붓을 들었다고 하며 그런 사유로 그의 그림에서 극 사실에 가까운 사실적 경향은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공재의 자화상은 안면에 붓질이 많이 물리는 곳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감을 느끼게 하는데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해석되고 선량한 외모와 그의 도도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사색하는 선비가 자신의 모습을 떼어놓고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가 극한 인생을 성찰하는 철학적인 짙은 훈기마저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자화상에서 수염 털끝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세묘는 사실을 초월하는 동양철학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삽입시켰으며 얼굴 이외의 다른 신체는 모두를 생략함으로써 자화상의 상징성을 극대화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체 미술계에서도 공재의 이 자화상에 대해 "치밀하고 정교한 완성품으로 손색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해남군과 해남윤씨 종가에서는 지난해 9월 윤선도유물전시관의 정식 개관에 맞춰 자화상 진품을 전시했다.
윤두서의 다른 그림들


동국여지지도
<산수도(山水圖)> 세로 43cm, 가로34.8cm

<수하노승도(樹下老僧圖)> 세로 18.8cm, 가로 56.6cm

<노승도(老僧圖)> 세로 57.5cm, 가로 36.9cm

<심득경초상(沈得經肖像)> 세로 159cm, 가로 88cm

윤두서작 <마상처사도>
비단에 채색 98.2*57.7cm 국립중앙박물관

해남윤씨가전고화첩 (海南尹氏家傳古畵帖)-보물 481호

해남윤씨가전고화첩 (海南尹氏家傳古畵帖)-보물 481호

해남윤씨가전고화첩 (海南尹氏家傳古畵帖)-보물 481호
희룡행우도

정물도

군마도

경답목우도

군마도

강안모루

의암관월도

수하한일도

나물 캐는 여인

짚신 짜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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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당했던 윤두서의, 미인도
미인도(美人圖·117×49cm). 화면을 가득 채운 요염스런 여인이 살포시 비껴 틀어 서 있는 모습으로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한지에 그린 수묵 담채화이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은행 알 같은 두 눈, 앵두처럼 빨갛고 작은 입술, 동그스레한 가련한 얼굴, 배추 포기처럼 부풀은 치마, 모두가 고혹적이면서도 결코 천박스럽지 않다. 두 손은 들어 치렁치렁한 머리를 떠받치듯 매만지는 맵시가 마치 가슴에 불타오르는 열정을 살며시 내비치는 듯 하다. 또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간결한 선과 정확하고도 사실적인 조형에서 조선 여인의 단아한 기품이 그대로 전해진다.
윤두서는 호가 공재(恭齋)로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이다. 정약용의 외증조, 윤선도의 증손으로 태어나 정선[謙齋]·심사정[玄齋]과 함께 삼재(三齋)의 한 명으로 불린다.쟁이 심화되자 벼슬길은 포기한 채 학문과 서화를 즐기며 일생을 보내다 해남 연동(蓮洞)에서 숨을 거두었다.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고, 특히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로 '자화상(윤영선 소장)'같은 뛰어난 명화를 남겼다. 자화상은 전통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상반신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 파격적인 충격을 던져 주는데, 수염의 섬세함이 매우 돋보이는 걸작이다.
당대의 문인이었던 기생
1994년 봄, 이 그림은 미국 아써앰서클러갤러리(Arthur M.Sackler Gallery)에서 열린 『18세기 한국미술-우아함과 소박의 미』에 출품되어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 나타나는 미인, 즉 기생은 대부분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교태(嬌態)스럽지가 않다. 조선 시대 기생들은 용모도 뛰어나지만 사대부와 문장가를 상대하면서 음률과 시문에도 밝았다. 특히 한시나 시조도 잘 지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류 시인으로 대접받는다. 조선의 3대 시기(詩妓)는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성천(成川)의 김부용(金芙蓉), 그리고 부안(扶安)의 이매창(李梅窓)이다. 모두 시 잘 짓고 가무에 능한 당대의 문인이었으며 또 음악가며 춤꾼이었다.
'조선의 기녀'를 연구한 이탈리아 출신의 빈센차 두르소(함부르크 대학 한국학강사)는 한국 기생에 대한 독특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조선 시대의 기녀는 몸을 파는 창기(娼妓)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기녀는 유교 사회의 필요에 따른 사회제도의 일환으로, 그 역할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이 있었습니다.'
즉, 창기는 변방에 있는 군졸을 접대하는 여자이고, 여기(女妓)는 사졸을 위해 바느질을 해 주고, 관청에 등록된 관기(官妓)는 관리의 수청을 들던 여자들이다. 또 음악과 문장에 능해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여악(女樂)도 있었다.
땡중과 장물아비
1990년 1월의 조간신문에, '국내 최고의 미인도 일본으로 반출 기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바로 이 미인도를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던 일당들이 붙잡혀 쇠고랑을 찬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전남 해남에 있는 윤두서 일가의 기념관에서 미인도를 훔쳐낸 자는 서산 출신의 땡중인 임모(任某)라는 자였다. 문화재가 돈이 된다고 하자, 그는 큰 물건을 찾아서 기념관 안으로 잠입했다. 보통의 기념관은 복제품이 전시되지만 그곳만은 진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기념관 안에는 명문가의 유품과 눈이 번쩍 뜨이는 문화재가 즐비했다. 그는 족자에서 미인도 부분만 예리하게 오려 가지고는 도망쳤다. 이 미인도는 신윤복의 미인도(간송 미술관 소장)와 쌍벽을 이루는 그림이다. 다음 날, 기념관의 문을 연 후손은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며 신고를 했다. 곧 경찰과 검찰이 투입되고, 혹시나 해외로 빼돌릴 것이 염려되어 문화재 당국은 항만과 공항까지 검문 검색을 강화했다.
그림을 둘둘 말아 서울로 올라온 임모는 즉시 한국고미술협회 회장으로 있던 공창화랑 대표 공창호(孔昌鎬)를 찾아갔다. 공창호는 번듯이 도둑질한 장물인 줄도 알면서도 1천 3백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그림을 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 장물인 줄 모를 이가 없는데, 일확천금만을 노리고 구입한 것이다.
신문에서는 연일 국보급 문화재의 도난과 해외 반출을 염려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자 공창호로서도 이 그림을 국내에 팔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골동상과 짜고 이 그림을 일본으로 밀반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일본 내에서 한국의 고미술품은 가장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보증수표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반출하면 거금을 손에 잡기는 여반장이다.
공창호와 그 일당은 무사히 미인도를 일본으로 반출하여 하야시라는 일본인에게 넘겼다. 그후 임모가 경찰에 붙잡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공창호에게도 수배령을 내렸다.
경찰의 수사망이 사방에서 좁혀 오자 공창호는 긴급히 일본의 하야시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이 잘못되어 구속 직전에 있으니, 그림을 되돌려 달라는 것이다. 국제적 망신을 두려워한 하야시는 눈물을 머금고 그림을 한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경찰에 붙잡힌 공창호는 경찰에서 가증스런 거짓말까지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동생이 일본에서 그림을 표구하기 위해 가져갔는데, 지금 부산에 보관 중이다."
고미술협회장까지 지낸 사람이 도난당한 국보급 문화재를 밀반출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미인도는 다시 소장자에게 돌아갔지만 그 이후에 이 그림의 진품을 감상하기는 어려워졌다. 또 다시 있을 지 모르는 도난에 대비하기 위해 영인본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많은 사람들이 진품을 감상하고 즐길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작 가 : 송수거사 제 작 연 대 : 19세기초반 소 장 처 : 온양민속박물관 재 료 : 종이ㆍ채색 크기 : 종이에 채색, 121.5×65.5㎝

조상들의 미인 관점?.....미인도
소 장 처 : 해남 녹우당 재 료 : 종이 크 기 : 채색 .117.0×49.0㎝
이 작품은 199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한국미술 전시회에 전시되면서 새롭게 표구되었다. 무겁게 느껴지는 가체머리를 양손으로 들어올려 양쪽 겨드랑이 쪽이 훤히 보이고 12폭이 됨직한 넓은 치마 속에서 앞으로 쏠리는 발걸음이 느껴진다.
이 미인도는 윤두서 집안에 소장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윤두서, 윤덕희, 윤용 3대 화가 중 어느한 사람의 작품으로 막연하게 추정되기도 하나, 화풍이나 복식으로 보아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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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두서의 자화상을
-역사스페셜-과 -명작스캔들- 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어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귀한 자료들 인데.. 수고 많으셨읍니다.^^
대단한 안목과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계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