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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마을은 충남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당진군청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12km 면사무소에서도 1km 떨어진 한 중산간 마을로서 동북쪽으로 펼쳐진 남양만을 끼고 있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해발 75m의 방착산이 자리하고 있어 남북으로 두 개의 동리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구수는 농가 95호 비농가 14호 총 109세대이며 인구는 남자 326명 여자 328명이 살고 있으며 경지면적은 밭 34.7ha, 논 50.4ha이어서 호당 경지면적은 0.8ha로서 비교적 영세한 마을입니다.
저희 마을은 75년도에 자립마을로 승격하였으며 75년도에 호당 평균소득이 78만원이었던 것이 금년에 2,213천원으로 급격한 성장을 보였으며 대망의 80년대에는 호당소득 300만원을 목표로 활기차게 전진하는 희망에 찬 마을입니다.
<전 재산을 풍랑 속에 잃고 방황 시작>
그러나 75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저희 마을은 낙후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역사적 민족적 대 운동인 새마을운동 조차도 아예 외면해 버린 낙후 된 마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난에 찌들고 감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이 마을이 갑자기 새마을의 봉화를 울리어 불과 2년 사이에 활기에 찬 희망의 마을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숨은 동기와 눈물겨운 노력과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저는 18세 때에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전전하며 객지생활을 하던 끝에 바다의 무궁무진한 수산자원을 찾아 바다의 왕이 되어 보겠다고 가산을 모두 팔아 어선을 건조하여 해상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행운이 없었던지 불행의 파도는 쉴새 없이 몰아 닥치어 3척의 어선을 풍랑 속에 빼앗기는 사고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저희 가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러 저는 도저히 헤어날 수도 가정을 일으킬 요기조차 상실한 체 실의에 잠긴 체 방황하다가 생각 끝에 고향에 돌아와 인생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을 결심하고 농사꾼의 자손으로서 농사일을 천직으로 삼아 흙에서 살 것을 결심했습니다.
때는 1974년 추운 겨울, 남은 재산이라곤 황무지와 같이 버려진 산 5천여평 뿐 나의 운명이 오직 여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꽁꽁 얼어 붙은 산 흙을 한 삽 한 삽 파서 하나의 농장으로 일구어 갈 때 어려움은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잘 극복하고 이겨냈던 것입니다.
남들이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저는 농사에 대한 책자를 펼쳐놓고 영농에 대한 상식을 익혔고 남들은 쉬고 있을 때 부지런히 피와 땀을 흘리며 농사일에 총력을 다했습니다. 개간해 놓은 5천여평에 경제성이 높고 판매 가격이 안정성이 있는 잎담배와 고추를 심어 찌는듯한 삼복 더위에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가꿔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1년간의 수확은 대단했습니다.
<황무지 돌산 5천평에 운명 걸고>
잎담배 4천6백kg을 생산하여 3백만원과 고추에서 1백만원 총 4백만원의 소득을 올려 어엿한 중농이상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으며 아주 절망적이었고 파탄지경이었던 저희 가정을 다시 일으켰으며 이렇게 1년간의 영농의 경험으로 ‘하면 된다’는 진리를 배웠으며 우리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개척하는데 노력만 한다면 누구든 절망이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잘 살아보겠다고 온갖 노력들을 하고 있는 때에 저희 마을주민들은 대부분이 둘만 모이면 남의 중상과 모략 험담이나 늘어 놓고 술과 도박으로 일을 삼으며 이것이 인생의 낙으로 삼는 폐습만으로 꽉 막혔던 주민들의 나태의 구렁텅이에서 저는 주민들을 구출할 것을 결심하고 이때부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사랑방으로 새끼 꼴 짚을 물에 축이어 들고 다니며 새끼를 꼬면서 영농에 대한 교육과 새마을사업에 대한 필요성, 그리고 주민들의 정신 개조에 온갖 노력을 다하여 깨우치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1년만에 중농의 대열에>
이때부터 주민들은 나태의 구렁에서 서서히 빠져나기 시작하면서 몇몇 분의 권유로 저는 새마을지도자가 된 것이며 새마을지도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찾아가가 호호 방문하면서 새마을사업에 앞장설 것을 다졌지만, 이에 호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을 하면서 우선환경개선 사업을 하려면 주민들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단합은 물론 사업의 효과가 매우 부진할 것을 염려하여 저는 주민들의 개인적 간접적으로 직접 이득과 연결 되는 사업을 우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우선 농경지에 지력을 증진 시킴으로써 소득이 증대 되며 협동단결로 주민들에 직접 이득이 되는 사업이며 우선 돈이 들지 않고 노력으로만 하면 되기 때문에 객토사업을 실시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주민 계도 위해 객토사업 착수>
처음에는 이 사업도 주민들은 나서지 않아 나는 헌신하는 지도자 봉사자로 마을을 개척하겠다는 신념을 몸소 실천으로 주민들에게 깨우쳐 스스로 참여토록 하기 위하여 아내와 저희 집 꼬마들까지도 인솔하여 몇몇 나온 주민들과 약 1주일간을 철야 작업함으로써 그때서야 주민들은 염치가 없는지 한두 명씩 참여하기 시작하여 15일 후에는 호수에 비해 200%가 넘는 많은 주민들이 참여 하여 연인원 6,823명을 투입하여 30정보의 면적에 객토사업을 완료함으로써 과연 뭉친 힘이란 천지를 흔들 수 있으리만치 크다는 것과 ‘하면 된다’는 진리를 매웠으며 이렇게 하여 주민단합 즉 협동 단결하는데 성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온 주민이 ‘하면 된다’는 진리 터득>
다음으로 산을 자르고 산 넘어 저수지에서 500m 의 거리에 건답으로 하늘만 쳐다보는12정보에 용수할 수 있는 용수로를 시설함으로써 가뭄을 막는 유일한 수도작을 만들어 좀으로 주민들에게 과연 새마을사업은 잘살기 운동이라는 교훈을 불어 넣어주었으며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정부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준다는 뜻을 알려주기 위하여 정부로부터 300만 원의 소 하천공사를 위한 자금을 지원받아 이 사업에 연세민에게 취로를 시킴으로써 환경개선사업비의 일부를 충당시켜 줌으로써 서로 다투어 지붕 개량 192동을 완료하고 개량해 놓은 지붕 위에는 아름답게 도색도 말끔히 해놓았으며 담장개량 및 주거권사업을 촉진 시키기 위하여 마을청년회를 조직하여 블록기계를 새로 구입하여 공장을 운영함으로써 시중에서 42원하는 블록을 생산실비인 18원씩으로 주민들에게 공급함으로써 가속적으로 환경개선 사업을 말끔히 단장해 놓는데 성공했습니다.
<한 번 붙은 열기 가속적인 발전>
그러나 마을회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계획하였으나 마을기금이라곤 한 푼 없는 저희 마을에서 크나큰 장벽이 아닐 수 없었지만 우선 회관대지부터 해결하기 위하여 지주한테서 대지를 희사 받으려고 10여 차례나 권유해봤지만 막무가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저는 자비로 사서 부락에 희사할 것을 결심 백방으로 채무를 얻으려 애를 썼지만 겨우 10만 원을 채용하여 밤 늦게야 집에 돌아온 저의 표정을 살핀 아내는 장롱 속에서 아이들 학비에 보태 쓰려고 품팔이와 바다에서 고생을 하여 모은 피땀 어린 비상금을 저의 손에 꼭 쥐어주며 회관대지 사는데 보태어 써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옹졸한 줄만 알았던 아내의 기특한 마음에 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도 흘렸으며 이에 저는 커다란 힘을 입어 더욱더 용기를 내어 어떠한 고난도 역경도 이겨가며 목적을 기필코 달성할 것을 다졌답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저는 지주한테 달려가 그렇게도 원하던 회관대지 100명을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렇게도 구두쇠와 같았던 지주도 아내의 갸륵한 마음에 머리를 숙이어 땅값을 환원해주면서 눈물로써 잘못 생각했노라 기꺼이 희사하겠다고 하여 회관대지를 희사 받았으며 메말랐던 인심에 훈훈한 온정을 맛보며 전체 마을 주민들도 모두들 농로 개설하는데 소요 되는 수천 평의 용지를 희사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구두쇠 주민도 갸륵한 정성엔 고개 속여>
그러나 용지와 대지만으로 회관이 건립되고 농로가 개설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을 회관건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저는 석문지구 대단위 개간지에서 무연고분묘 115기를 이장하는데 공사를 도급 받아 이장을 한 공사비 60만 원을 회관기금으로 보태었으며 바다에 나가 공동작업으로 20일간 노력의 대가로 120만원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역경에서 허덕이는 사실을 보고만 있던 더구나 새마을사업을 그렇게도 반대와 방해만을 일삼던 대농의 그분들이 이제서야 깨달았는지 서로 앞을 다투어 회관기금에 보태어 써달라고 기증을 한 것이 100여만 원으로 건평 50평 2층 슬라브로 마을의 대표적인 건물이요 마을의 시장이요 사령탑이 될 수 있는 아담한 마을회관을 건립하년데 성공했습니다.
<2개 동리 잇는 농로 7000m 개설에 성공>
이어 곧바로 마을 중앙에 길게 뻗은 방착산을 뚫어 2개 동리로 형성 된 것을 한 마을로 연결하는 농로 7,000m를 개설하는 구간에는 1,700m의 방파제. 매년 해일 피해로 농경지 20정보의 논에서 20여 톤의 쌀을 파도가 앗아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방파제 공사를 하는 데는 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두 번 세 번 파도에 씻기어가 막으면 무너지고 또 막으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이러한 어려움도 새마을의 의지로 온 주민의 피와 땀으로 쌓고 다졌으며 농로 위에는 견고하고 탄탄한 자갈을 깔아 이 지역 취약지역의 작전도로로 큰 구실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새마을의 의지 앞에는 순탄하지 않은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저와 저희 마을 주민들은 ‘하면 된다’하는 신념으로 이를 이기고 복구해냈습니다. 이와 같이 62일 동안의 농로개설에서 얻은 이 값진 교훈은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으며 우리는 환경사업만 끝을 맺은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소득사업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엄청난 시련 불구하고 무한한 가능성 얻어>
논에는 수확량이 많은 통일계통의 신품종을 단지화 하는 한편 확대 재배했으며 밭에는 수익이 높은 경제작물로 잎담배와 마늘 등을 확대 재배하고 농경지를 확대하기 위하여 정부로부터 보조 또는 융자하여 32정보의 야산을 개발하여 주곡은 물론 고추 또는 산성 토에는 마늘 재배가 불가능하다고 심지 않고 있지만 저희 마을에서는 산성 토에도 마늘 재배를 할 수 있는 기비를 개발함으로써 77년도에 마늘만으로 순수익 3,800만원의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비료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해변 마을에서는 갯벌과 잔디풀 왕겨 및 소똥 등을 배합하여 1년간 썩혀 밑거름으로 시비하면 갯벌에는 염분기가 있어 가뭄도 잘 견딜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일명 고자리라고 하는 병해충도 발생치 않아 마늘이 잘 되는 토질이 별도로 없다는 것을 시험재배에서 성공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새마을의 효과는 대단히 크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고 있으며 주인들의 나태와 게으름으로 가난에 쪼들렸던 저희 마을은 이제 어느 마을 못지 않은 호당 평균소득 2,213천원이라는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어 승자 마을을 이룩한 것입니다.
<드디어 호당 2백20만원의 승자 마을로>
또한 저희 마을에서는 공동경영사업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활기차게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우선 야산 개발한 개간지를 독지가로부터 10정보를 임대하여 1년간 우량품종인 콩(광교)을 심어 정성 들여 가꾸어 혹심했던 가뭄과 밭 흙 한 줌과 소재 한 줌씩을 콩 한 포기에 넣고 심어 가꾸는 것이 과연 흙에서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1년의 수확은 정말 상상외로 컸습니다. 82가마니의 큰 수확을 거둠으로써 120만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75년 10월에 앞바다에 석화양식 5정보를 투석 식으로 양식하여 작년 가을에 80만원의 이익을 올렸으며 야산 6,000평을 76년도에 사들여 공동농장을 조성하여 77년도에 밭찰벼 12가마니와 콩 8가마니를 생산함으로써 50만원의 공동소득을 올렸으며 건강망 시설을 3,000m 시설하여 77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에 2,173천원의 순소득을 올렸으며 금년도에 건강망으로만도 1,500만원의 공동소득은 무난할 것으로 내다봅니다.
<육지농사 성공하여 인젠 바다로 진출>
또한 마을에서 야산 7정보를 임대하여 초지를 조성하여 76년부터 3년간 무상으로 임대 한우 18두를 입식 하여 77년말에 팔아 413백만원의 소득을 올리어 복차 사업으로 28두 한우를 구입하여 영세민에게 분양해 줌으로써 주민들은 새마을사업에 대한 참뜻과 보람을 느끼고 있으며 공동 종돈장을 30평 건립하여 77년 8월 10일에 40두의 새끼 돼지를 입식 시켜 연말에 시장에 팔았습니다.
여기에서도 두당 32천원의 순수익을 올림으로써 총 128만원의 순이익을 올렸으며 여기에서 얻은 순이익으로 새끼 돼지 51두를 사서 25두를 마을 주민들에게 분양 입식 해 주어 점차 재래 종돈을 우량품종으로 바꾸어 시중에서 요구하는 것으로 상품화하여 축산사업에도 가일층 증대시킴으로써 앞으로 더욱 저희 마을에서는 축산 소득이 증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축산에도 우량종 보급으로 높은 소득>
이 밖에도 부녀회에서는 구판장 운영에서 120만원 상당의 부녀기금이 조성 되어 알차게 늘어 가고 있으며 마을금고 역시 109호 공히 출자하여 76년 9월 15일에 창설하여 현재 320만원의 거금이 싼 이자로 마을 주민들에게 영농자금으로 대출 되고 있어 일거양득의 이익사업을 펴 나가고 있으며 이래서 저희 마을에서는 75년도까지의 낙후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공동기금만으로도 현재 850만원이 조성 되어 계속 늘리기 위하여 복차 사업에 투자하여 대망의 80년대에는 호당 평균소득 300만원 돌파는 물론 공동기금 5,000만원을 목표하고 있으며 계속 전진 또 전진하여 이상농촌을 이룩하여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물려주는 그 날을 위하여 총화단결로 매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