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차씨 족보의 탐진안씨 안우(安祐) - 안정(安定) - 안지(安止) 출처 : 탐진안씨 안전(安壂, 미상~1747)의 묘표(墓表) 탐진안씨 물재(勿齋) 안의(安義, 1529~1596)의 행장(行狀) 1829년 간행된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유고(頤齋遺藁)』 15권에 1777년에 작성된 탐진안씨 안전(安壂,미상~1747)의 묘표(墓表)와 『이재유고(頤齋遺藁)』 17권에 올려져 있는 탐진안씨 물재(勿齋) 안의(安義,1529~1596)의 행장(行狀)을 종합해서 탐진안씨 세계도를 꾸며보면, 祐 - 顯 - 允基 - 士宗 - 止로 계보가 연결되고 있다.
祐 | 顯 | 允基 | 士宗 | 起 | 孟毅 | 仲毅 | 季毅 | 綰 | 良彦 | 義 | 斯(?) | 偟 | 振榮 | 壂 | 止 | 출처 : 연안차씨종친회 중앙본부 역대 인물소개 연안차씨 19世 차종로(車宗老) 호(號) 월파옹(月波翁)이며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지방어사(知防禦使) 정사품(正四品)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아름답고 학문(學文)이 뛰어나며 조년(早年)에 지방어(知防禦) 직무소(職務所)의 일을 진력(盡力)하더니 문덕 권신(權臣)과 간신(奸臣)들의 그릇된 것을 보고 벼슬을 벌이고 산야(山野)로 둔적(遁迹)하여 자신(自身)의 뜻한 바를 밝히고 인덕(仁德) 쌓으며 처사(處士)로 은거(隱居)하며 여생(餘生)을 명철(明哲)하게 보신(保身)하였다. 공(公)은 후손(後孫)들이 월파공파(月波公派)의 파조(派祖)로 받들고 있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생일남(生一男) 차숭부(車崇頫), 배부인(配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 부(父)는 김제안(金齊顔)이며 생일남(生一男) 차숭질(車崇質), 생일녀(生一女) 서랑(婿郞)은 성주인(星州人) 찬성(贊成) 도길부(都吉敷)이며 그의 부(父)는 대광보국(大匡輔國) 문하시중(門下侍中) 칠곡부원군(七谷府院君) 도홍정(都洪正)이며, 배부인(配夫人) 능성구씨(綾城具氏) 부(父)는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구의(具禕) · 조부(祖父)는 판서(判書) 구영검(具榮儉) · 증조(曾祖)는 판사(判事)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이며, 생사남(生四男), 차원부(車原頫) · 차원명(車原命) · 차견질(車堅質) · 차견명(車堅命), 생일녀(生一女) 서랑(婿郞)은 탐진인(耽津人) 안정(安定)이며 그의 부(父)는 평장사(平章事) 안우(安祐)이며 그의 아들은 안지(安止)이다. 월파옹(月波翁)의 생서자일남(生庶子一男) 차원석(車原碩)·생서녀일녀(生庶女一女)의 부랑(夫郞)안동인(安東人) 권중화(權仲和)며 부(父)는 정승(政丞) 권한공(權漢功)이며 아들은 권방위(權邦緯)이다. 공(公)의 묘역(墓域)은 양주(楊州) 봉황산(鳳凰山) 곤좌(坤坐)인데 1972년 임자(壬子) 2월말(末)일에 평택시(平澤市) 장안동(長安洞) 월운산(月雲山) 자좌원(子坐原)에 이장면례(移葬緬禮)를 하였다. 본문 중에서 가계도를 정리해보면 차종로(車宗老)의 가계도 配 파평윤씨(坡平尹氏) : 生一男 (子) 차숭부(車崇頫) 配 안동김씨(安東金氏) 父 김제안(金齊顔) : 生一男一女 (子) 차숭질(車崇質) (女) 성주인(星州人) 도길부(都吉敷) 父 도홍정(都洪正) 配 능성구씨(綾城具氏) 父 구의(具禕) 祖父 구영검(具榮儉) 曾祖 구예(具藝) : 生四男一女 (子) 차원부(車原頫) (子) 차원명(車原命) (子) 차견질(車堅質) (庶女) 조영규(趙英珪) (子) 차견명(車堅命) (女) 탐진인(耽津人) 안정(安定) 父 안우(安祐) (子) 안지(安止) 側室 : 生庶子一男庶女一女 (庶子) 차원석(車原碩) (女) 함부림(咸傅霖) (庶女) 안동인(安東人) 권중화(權仲和) 父 권한공(權漢功) (子) 권방위(權邦緯) 고려의 명문가였던 연안차씨는 조선이 개국되면서 멸문지화를 입게된다. 개국 공신들에 의해서... 출처 : 주간동아 [‘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⑦|연안 차씨와 차원부] 고려 신하 고집하다 ‘멸문의 禍’ 왕자의 난 직후 이방원 세력에게 70여명 몰살 … 단종 때 ‘설원기’ 통해 명예회복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경기 평택시 장안동의 연안차씨 선조를 모신 의덕사. |
고려가 망하면서 가장 피해를 본 집안은 개성 왕씨들이지만, 이 못지않게 멸문에 이른 집안이 연안(延安) 차씨(車氏)이다. “산악과 같은 그 분함은 천 년이 지나간들 가시겠는가? 하해와 같은 그 원한은 만 년이 된들 끝나겠는가?” 연안 차씨, 차원부(車原頫)의 죽음을 놓고 박팽년이 훗날 묘사한 글이다. 차원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재(吉再)는 책상을 끌어내고 등불을 던지며 통곡했고, 조운흘(趙云仡, 검교정당문학 역임)은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통곡했다. 이방간(李芳幹, 태종 이방원의 형)은 타고 갔던 소를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이양중(李養中, 병조정랑 역임)은 술독을 깨뜨리며 슬퍼했다. 차원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마중 나온 70여명의 집안사람들과 함께 몰살됐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 곧바로 벼슬을 올려주는 왕의 교지(敎旨)가 그의 아들 차안경(車安卿)에게 내려졌는데 안경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다시 교지가 차원부의 아내 평산 신씨에게 내려졌지만 신씨 또한 이를 거절하자, 이번엔 신씨를 죽여버렸다. 손자 차상도(車尙道)는 경상도 순흥으로 몸을 숨겨 고용살이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고, 그 증손자들은 전라도 순천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한순간에 연안 차씨 집안은 멸문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의덕사에는 101인의 차씨 선조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중 99인이 고려시대까지의 인물이다. | 차원부는 조선 왕조 창건에 동참하지 않았다. 고려 말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황해도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岩洞)에 은거하면서, 암반 위에 매화를 심고 연못에 국화를 심으며 지냈다. 그래서 두문동 72현에 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계보다 열다섯 살 연상으로, 이성계가 자문을 청하는 가까운 사이였다. 공신 책봉 거부한 채 평산에 은거 요동 정벌을 나선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평산으로 찾아가 차원부의 조언을 구했다. 차원부는 이때 “속국이 중국을 범함이 첫 번째 가하지 못함이요, 제후가 천자를 범함이 두 번째 가하지 못함이라”는 사대주의 관점을 제시해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의 명분을 주었다. 하지만 차원부는 고려의 신하로 남기를 고집했다. 조선이 창건된 뒤에 이성계가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려 하자 “비록 다섯 말의 식초를 마실지언정 공신녹권에 참여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조선 후기에 전남 순천에서 판각된 ‘설원기’ 목판본(왼쪽 사진). 운암공 차원부의 묘소에서 옛일을 얘기하고 있는 종친회 사무총장 차기탁 씨. | 1398년 왕자의 난이 나던 해였다. 태조 이성계가 차원부의 흙집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서, 석 달 동안 하루에 다섯 번씩 평산으로 칙서(勅書)를 보내 차원부를 불렀다. 차원부는 옛정을 생각해 궁궐에서 보낸 말을 돌려보낸 뒤 평복을 입고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궐에 머물면서 왕위 계승 문제로 고뇌하던 태조에게 해답 하나를 제시했다. “시대가 태평할 때는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하고, 시대가 어지러울 때는 공로가 있는 자를 우선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하여 이방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하고서 차원부는 궁궐을 떠났다. 궁궐을 떠난 직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차원부는 송원과 마원 땅 부근에 이르렀을 때 살해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이방원의 오판과 하륜(河崙)의 음모가 있었다고 사가(史家)들은 평하고 있다. 먼저 태조에게 건넨 차원부의 견해가 와전됐다. 차원부는 정몽주(鄭夢周)의 외종(外從) 형제이고, 이방과(李芳果·정종) 원비(元妃)의 증조부 항렬이니 장차 이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살해 명단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한다. 차원부가 평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차씨 문중의 족보를 작성했다. 이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와 문화 류씨의 ‘가정보’보다 앞선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로, 판각되어 해주 신광사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이 족보가 문제였다. 족보에는 차씨 문중과 혼맥을 형성한 집안의 서얼(庶孼)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빼도 박지도 못할 족보 안에는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하륜의 혼사 비밀도 담겨 있었다. 설원기에선 차원부 희생 책임 하륜에게 돌려 차원부 사후에 내려진 교지. |
정도전은 차씨 집안의 사위인 우연(禹淵)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고, 조영규는 차운혁(車云革·차원부의 조카)의 이복 누이의 남편이고, 함부림은 차원부의 이복 남동생의 사위이고, 하륜은 차씨 집안 사위인 강승유(姜承裕)의 첩의 딸의 아들이었다. 이런 사연을 차원부는 집안 족보에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여기에 악감정을 품은 하륜이 왕자의 난을 빌미로 차원부의 일족을 살해하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된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버렸다는 것이다. 차원부의 죽음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차원부를 궁궐로 불러들인 태조 이성계였다. 그래서 이방원 세력은 급히 차원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 했고, 세종과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러서야 그 한 맺힌 사연을 기록한 ‘설원기(雪記)’를 펴내게 됐다. ‘설원기’는 왕명을 받들어 박팽년이 짓고, 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石亨) 등이 주석을 달았으며, 당대에 내로라하는 관료와 선비 48명이 지은 칠언절구 72수의 추모시가 첨부됐다.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대적인 추모 사업이 진행됐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차원부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려는 데만 있지 않았다. “골육상쟁을 벌이고 왕좌에 오른 이방원에게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간악한 하륜에게 있다. 서얼 출신인 하륜의 꾐에 넘어가 이방원은 상황을 오판했다. 서얼(하륜)이 감히 적자(차원부)를 넘보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애초에 서자들은 가만히 있어야 했다. 서자였던 이방석(李芳碩)이 왕위를 이으려 했던 것도 잘못이다. 그래서 이복 동생 방석을 죽인 방원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권력을 탐한 하륜 같은 서자들의 교활한 음모가 잘못이다. 차원부는 억울하다”는 논리가 관철된 것이 ‘설원기’다. 고로 차원부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태종 이방원의 정당성을 부여한 책이다. 연안 차씨 집안은 개성 왕씨 집안과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더더욱 조선시대 내내 몸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현재 집성촌을 이룬 곳을 보아도 깊은 산골이나 바닷가가 많다. 그리고 하륜의 묘에는 비석을 세우기만 하면 망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근동에 사는 차씨들이 망가뜨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원부의 무덤은 서울 망우리에 있다가 1972년에 평택시 장안동으로 옮겨졌다. 이장을 할 때 보니 시신을 어찌나 깊이 묻었던지, 흙을 두레박으로 퍼내야 할 정도였다. 죽어서도 안심하지 못해 깊이 묻혀야 했던 차원부의 삶을 들여다보면 조선 초기의 권력 지도가 보인다. 출처 : 주간한국 족보가 부른 참화 정도전·하륜 서얼 드러날까 '연안 차씨 멸문' 족보에 정도전, 하륜 서얼 가록한 '연안 차씨'멸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신흥 명문가가 생기는가 하면 멸문의 화를 입은 집안도 있다. 개성 왕씨를 비롯해 이 집안과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연안 차씨(延安 車氏)가 대표적이다. 연안 차씨 차원부(車原頫)는 고려 말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친 성리학의 대가로 요동정벌을 떠나는 이성계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자 중국 정벌의 부당함을 언급해 위화도 회군의 명분을 주었고 조선이 창건된 뒤에는 태조의 공신 책봉을 거절하고 은둔한 인물이다. 차원부는 '왕자의 난'(1398년) 때 피살되고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주살되고 차원부가 은둔하면서 만든 연안 차씨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지는 등 멸문의 화를 입는데 사가(史家)들은 이방원의 오판과 하륜(河崙)의 음모가 부른 참화라고 해석한다. 그런 배경에는 연안 차씨 족보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연안 차씨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와 문화 류씨의 '가정보'보다 앞선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로 평가받는데 족보에는 차씨 문중과 혼맥을 형성한 다른 집안의 서얼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그리고 태종 이방원의 집권을 도운 하륜(河崙)이 모두 서얼 출신이다. 정도전(鄭道傳)은 차 씨 집안의 사위인 우연(禹淵)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고, 조영규(趙英珪)는 차운혁(車云革, 차원부의 조카)의 이복누이의 남편이고, 함부림(咸傅霖)은 차원부의 이복남동생의 사위이고, 하륜(河崙)은 차씨 집안 사위인 강승유(姜承裕)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었다. 연안 차씨 종친회 차기탁 부회장은 "우리 족보에 악감정을 품은 하륜 등이 왕자의 난을 빌미로 차원부 할아버지의 일족을 살해하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된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연안 차씨 족보에는 정도전, 하륜, 조영규, 함부림 등 4인이 원흉으로 기술돼 있다. 차원부의 죽음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태조 이성계였고 이방원 세력은 급히 차원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 했다. 세종과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러서야 그 한 맺힌 사연을 기록한 '설원기(雪寃記)'를 펴내게 됐다. 출처 : 정복규의 성씨칼럼 연안차씨(延安車氏) 연안차씨는 고려 때 대성(大姓)이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 초기의 권신이었던 정도전, 하륜 등은 외가쪽으로 차씨 집안의 서녀 출신에 연결된다. 때문에 자신들의 혈통상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간의대부를 지낸 차원부를 비롯한 차씨 일족을 제거하게 된다. 고려 공민왕 때 좌승상을 지낸 차포온의 서녀가 하륜의 외할머니가 된다. 그리고 차포온의 4촌 동생 차공윤의 딸이 우씨 집에 시집갔는데 그 서외손이 정도전이다. 조선 개국공신인 함부림, 조영규도 차씨 가의 서외손이다. 이 같은 내용은 모두 차씨 가의 보첩인 "차류보판(車柳譜板)"에 실려 있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자료 차원부(車原頫, 1320∼미상) 여말 선초의 학자·화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의 아들이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인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고려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수습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을 사퇴한 뒤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출병을 반대하였다. 뒤에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퇴하고, 이어 정언·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그들의 원한을 받아오던 중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숙적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당시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에 뛰어났다.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 차원부(車原頫, 1320년~1399년?) 고려시대의 문신, 유학자이자 화가이다. 월파(月波) 차종로(車宗老)의 셋째 아들로 고려에 충성하던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이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서 정몽주 등과 나란히 명성을 떨쳤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가 하륜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자는 사평(思平)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시호는 문절(文節). 좌승상을 지낸 차포온의 손자이자 지방어사사를 지낸 월파(月波) 차종로(車宗老)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인 차원조는 그의 형제였고, 뒷날 개국공신 함부림의 장인이 된 차원석은 그의 아버지 차종로의 서자였다. 한편 조영규의 첩은 그의 형제 차견질의 서녀였다. 당대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성리학의 대가였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고려 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고,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한 뒤 여러 개국공신의 인척으로 그역시 태조에 의해 개국공신녹권에 책봉되고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공신녹권과 벼슬 등을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뒤 고려에 충성하여 두문동(杜門洞)에 72현이 숨어 살 때 이때 그의 일가는 두문동에 은거하였는데 1392년 하륜(河崙) 등에 의해 가족까지 모두 살해되었다. 그림은 매화에 뛰어났다. 숭정대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 전남 순천(順天)의 운암사(雲巖寺)에 배향되었다. 중종때 문절의 시호가 내려졌다. 1392년 하륜은 자객을 보내 차원부와 그의 일종 70여명을 살해한 뒤 해주에도 사람을 보내 보관 중이던 족보 목판본을 불태웠다 한다. 김제안(金齊顔, 미상∼136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현(仲顯). 김방경(金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김구용(金九容)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1364년(공민왕 13)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한휘(韓暉)와 이구수(李龜壽)가 변공(邊功)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발탁되어 기밀을 마음대로 하고 총행이 지나치므로 고신(告身: 辭令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이 참소하여 하옥되려다가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 등이 간관을 하옥하면 훗날 모든 허물이 왕에게 돌아갈 것이며, 고신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 것이 없다고 만류하여 모면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강제로 고신에 서명하게 한 뒤 파면하였다. 공민왕이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를 하고자 하여, 1366년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녹생(田祿生)을 사신으로 보낼 때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였다. 연경에 이르렀을 때 하남왕과의 수교를 싫어한 원나라의 태자가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전녹생을 되돌려보낸 후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고 있다가 틈을 보아 홀로 하남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 공으로 하남왕의 상주에 의하여 중서병부낭중(中書兵部郞中)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어 하남왕의 보빙사(報聘使) 곽영석(郭永錫)과 함께 돌아오자 공민왕은 그 노고를 치하하여 대언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신돈(辛旽)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반대한 까닭에 내서사인이 되었고, 이어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도길부(都吉敷, 미상∼1388)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성산군(星山君) 도유덕(都有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판관을 지낸 도효안(都孝安), 아버지는 부원군 도홍정(都洪正)이며, 찬성사를 지낸 도응(都膺)의 아버지이다. 1380년(우왕 6) 왜구가 경산부(京山府)에 침입하여왔을 때 원수가 되어 양광·전라·양광도도순문사(全羅楊廣道都巡問使)·경상도 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였던 이성계(李成桂)의 지휘를 받아 이를 토벌하였다. 1382년 한양천도 때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였는데 지나는 곳마다 온갖 패행을 일삼았다 한다. 그러나 권신 이인임의 인척인 까닭으로 중용되어 대언(代言)이 되었으며, 이듬해 제조정방(提調政房)이 되었다. 1384년 우왕이 총애하던 봉가이(鳳加伊)를 간통하였다는 참소로 인하여 서북면도체찰사로 좌천되었다. 1388년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으나 이인임·임견미 일파의 숙청 때 함께 죽음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당하였다. 구영검(具榮儉, 미상∼1356)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초명은 정(貞). 면천(沔川) 출신. 여러 벼슬을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며, 1354년(공민왕 3) 면천군(沔川君)에 봉해졌다. 처음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안규(安珪)의 딸과 혼인하였고, 다시 김자장(金子章)의 딸과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었으나, 뒤에 재신(宰臣) 조석견(趙碩堅)의 미망인 장씨(張氏)와 다시 혼인하였다. 1354년 원나라의 장사성(張士誠)이 고우성(高郵城)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원나라의 요청으로 유탁(柳濯)·인당(印當) 등과 함께 원병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며, 이듬해 돌아와 부인 장씨의 추문을 듣고 절연함으로써 원한을 사게 되었다. 1356년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할 때 그 잔당을 체포하지 않았다는 원호(元顥)의 무고로 한가귀(韓可貴)와 함께 투옥되고, 이어 장씨의 외삼촌인 판사 김성(金成)의 농간으로 참살되었으며 가산도 적몰당하였다. 뒤늦게 왕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효수된 뒤이므로 시신을 거두게 하고 재산도 돌려주었다. 구예(具藝, 생몰미상) 본관은 능성(陵城). 부인은 아주신씨(鵝洲申氏)이다. 능성구씨(陵城具氏) 14세조이며, 고려 때 명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의사(判典儀事)를 지냈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의하면, 고려 충선왕은 무김치 먹기를 좋아하였는데 구예(具藝)는 음식을 대할 때 “무김치로 말미암아 임금을 생각하고 그리워 하였다” 한다. 박팽년(朴彭年)이 그의 충효를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면천(沔川)의 땅을 하사받아 면천부원군(沔川府院君)에 임명되었다. 신암사는 구예가 별세하자 아주신씨 부인이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지은 암자라 한다.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 그의 묘가 있다. 권중화(權仲和, 1322∼1408)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의료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권한공(權漢功)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다. 1377년(우왕 3)에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는데, 문하에서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 문하찬성사·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1393년(태조 2)에 삼사좌복야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 새 도읍지 한양의 종묘·사직·궁전·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편, 의약에 정통하여 조선초에 고려말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하다 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다시 《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을 편집하였으며, 1399년(정종 1)에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 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사(故事)를 비롯하여 의약·지리·복서(卜筮)에 통달하고, 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권한공(權漢功, ?∼1349)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일재(一齋). 첨의평리(僉議評理) 책(頙)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1294년(충렬왕 20)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되고 원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다. 뒤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있으면서 총애를 받았다. 충선왕이 집권하게 되자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충선왕이 귀국하자 측근에서 수시로 인견하고, 1309년(충선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 1310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1311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밀직사(密直使), 1312년 첨의평리를 역임하였다. 오랫동안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부정을 행하여 이사온(李思溫)·김심(金深) 등의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왕의 비호로 곧 석방되고 오히려 이사온 등이 유배당했다. 충선왕이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남으로 강절(江浙)에 유행(遊行)해서 보타산(寶陀山)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수행하였다. 충숙왕초에 삼사사를 거쳐 찬성사에 전임, 1314년(충숙왕 1) 권부(權溥)·이진(李瑱) 등과 함께 성균관에 모여 강남에서 새로 구입한 서적들을 고열(考閱)하였다. 당시 퇴위하여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던 충선왕이 국내정치에 간섭하였는데, 이광봉(李光逢) 등과 연경(燕京)에 호종(扈從)하면서 권세를 부렸기 때문에 충숙왕과 틈이 생겼다. 충선왕이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으로 귀양가자, 순군(巡軍)에 갇혔다가 1321년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풀려나와 그 보복으로 1322년에 충숙왕을 폐하고 심왕(瀋王) 고(暠)를 세우려고 획책했으나 원나라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1324년 예천군(醴泉君)으로 봉해졌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재상·국로들이 모여 왕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청할 것을 의론하였는데 이를 반대하였다. 관직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원나라의 명을 받아 태자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었다. 시호는 문탄(文坦)이다. 저서로 《일재집》이 있다. 조영규(趙英珪, 미상∼1395)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 신창조씨(新昌趙氏)의 시조. 초명은 평(評). 조상의 가계가 불분명하고 자나 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반 평민출신으로 추측된다. 고려말의 명족의 하나인 연안차씨(延安車氏) 차견질(車堅質)의 첩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차견질의 형 차원부(車原頫)는 명유로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었으나, 1398년(태조 7)에 하륜(河崙)이 보낸 자객에게 타살되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차원부의 대고모의 외손자로서 그와 인척관계에 있다. 일찍이 이성계(李成桂)의 사병(私兵)으로서 천거로 벼슬에 올라, 1385년(우왕 11)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가 되어 함주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종군, 전공을 세웠다. 그뒤 여러 차례 왜구토벌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과 모의하여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이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예조전서에 올랐다가 1395년 병으로 죽었으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추증되었다. 그와 함께 개국공신대열에 오른 정도전·함부림(咸傅霖), 그리고 차씨일족을 타살한 하륜 역시 연안차씨의 외척 서얼족속인데, 그들의 혈통이 차씨와 유씨의 족보인 《차류보(車柳譜)》에 실려 있는 것에 분한을 품고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보관중인 보판(譜板)을 하륜이 불살라버렸다고 전해진다.
함부림(咸傅霖, 1360∼141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승진하여 정지(鄭地)·이림(李琳)·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우홍수(禹洪壽) 등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춘주지사(春州知事)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었다. 이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 그뒤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좌산기상시로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하여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도관찰출척사·예문관제학·동북면도순문사·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 등을 거쳐, 1404년(태종 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6년에 계림부윤·경상도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다음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였으며, 이치(吏治)에 능숙하여 관직을 맡을 때마다 칭송을 받았다. 1405년에는 앞서 1398년(태조 7)의 제1차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하였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출처 :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2007년 발간된 신동준의『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정도전」편에서 정도전의 모계는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 『고려사』에는 정도전의 정적들이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가풍이 부정하고 계통이 밝지 못하다.”며 그의 집안 배경을 들먹인 대목이 있다. 『태조실록』태조7년(1398) 8월 26일 2번째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세족 우현보(禹玄寶)의 일족에 김전(金戩)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어 자신의 종인 수이(樹伊)의 아내와 몰래 정을 통해 딸 하나를 낳았다. 뒤에 김전은 환속해 수이를 내쫓고 그의 처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는 그 딸을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인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 노비와 땅을 주었다. 우연은 딸을 하나 낳아 정운경(鄭云敬)에게 보냈다. 훗날 정운경은 벼슬이 형부상서에 올랐다. 정운경은 아들 세 명을 두었다. 정도전이 그 맏아들이다. 국역 태종실록 정도전의 졸기 원본 :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노비의 아내가 환속한 주인 김전(金戩)과 정을 통해 낳은 딸이 바로 정도전의 외할머니였던 것이다. 정도전의 외할아버지인 우연은 왜 이런 여인과 결혼한 것일까? 두문동 72현의 하나인 차원부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에 그 해답이 있다. 이에 따르면 정도전의 외할아버지인 우연은 차공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되어있다. 우연은 차공윤의 딸을 정처로 맞이한 뒤 정도전의 외할머니를 첩으로 거느린 것이다. 조선 개국을 반대했던 차원부는 정도전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까닭에 정도전의 외가에 관한 추문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당시에는 비록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엄격하지는 않았으나 신분의 청탁에 관한 사대부들의 차별 의식은 존재했다. 정도전은 비록 뛰어난 아버지를 두기는 했으나 토착 향리라는 보잘 것 없는 출신에 계통이 혼탁한 모계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