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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8일 (잠8 딤후4 거짓과 진리).hwp
2019년 9월 8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잠언 18:1-4
디모데 후서 4:1-5
거짓과 진리 사이에서
지난 6월 초에 독일의 루터교신학교가 소재한 바이에른 주의 노이엔데텔스아우(Neuendettelsaue)에서 유럽 대학교 교목협의회(Conference of European University Chaplains)가 열렸습니다. 그때에 올 해 94세인 노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 튀빙엔 대학교 명예교수가 <진리의 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가 연설 첫마디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탈-진리(post-truth)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거짓과 진실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1926년생인 그는 제 2차 대전 때에 독일군으로 참전 했다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945년까지 스코틀랜드 포로수용소에서 살았습니다. 19세의 나이에 말입니다. 포로수용소에서 회심한 그가 남긴 말이 이것입니다. “포로로 살며 영혼의 수렁에 빠져있던 나를 예수는 찾아주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왔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그 때에 그는 나에게로 왔다.”(몰트만 자서전) 어린 나이의 영혼을 깊은 수렁에 빠뜨린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고, 영혼마저 전쟁으로 피폐해져갈 때에 그를 꺼내준 것은 바로 <진리의 영>이신 주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짓과 진실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거짓의 영>이 오늘에도 활동하며 도처에 전쟁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이유가 슐레지엔의 글라이비츠(Gleiwitz)에 있는 독일 라디오 방송국을 폴란드가 공격했기 때문인데, 사실이 밝혀지고 보니, 이것은 나치 친위대인 SS 부대가 폴란드 군복을 입고 저지른 자작극이고, 거기서 사살당한 시체들은 강제수용소 죄수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쟁은 거짓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가 성립합니다. 전쟁이 거짓의 본체라면, 진리의 본체는 바로 <평화>입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이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거짓으로 대하면 서로 싸우게 되고, 사람을 진리로 대하면 서로 평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번이라도 남을 거짓으로 대한 것이 드러나면, 상대방은 다시는 그를 믿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짓으로 남을 대하게 되는 이유는 “그렇게 거짓으로 대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경우의 거짓도 있습니다. 유대인을 숨겨준 시민이 나치 친위에게는 유대인을 숨겨준 일이 없다고 거짓을 말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진실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고, 거짓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 줄 알면서도 유대인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한 이 사람은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붙잡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지키는 일은 그가 처한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정보의 호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공기관만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도 얼마든지 정보를 유포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짓뉴스가 만연합니다. 물론 과거에 정보를 통제하던 시대의 거짓뉴스는 확인하기 정말 어렵지만, 요즘에는 마음만 먹으면 이 뉴스가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이 난무하고 거짓과 거짓이 충돌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 이유에 대하여 잠언 성경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잠18:1) 이 말은 이익을 위하여 진리를 피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뉴스가 자기에게 이득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짓뉴스가 평소 자기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에, 자기의 논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판단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유포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견만을 내세운다.” 여기 명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明哲은 밝을 명, 밝을 철이라는 단어를 써서 “밝게 총명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말이 어울려 보이지만, 미련한 사람인 총명하지 못하다는 말이 되니 속 깊은 의미전달이 부족합니다. 명철이란 원래의 의미가 “내어다 봄”입니다. 똑똑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영어 성경이나 다른 성경들은 명철을 understanding(이해)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미련한 사람이란 다름 아닌 남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오직 자기 의견만 내세운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2절은 이런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 때문에 건전한 판단을 무시하는데, 이것은 미련한 짓이다. 남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의견만 내세우면 세상에 그 누구와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이해하는 눈과 귀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이들의 진심어린 판단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이로써 진리를 붙잡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는 가장 강한 거짓의 영은 바로 자신의 욕심이랍니다. 자신의 섣부른 판단이랍니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바울도 이런 상황을 예견하였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 대신에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딤후4:3-4)
바울은 자신이 살던 시대가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종말의식을 가진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디모데 3장에서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말하는데, 계시록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모질어지는지를 말합니다. 3장 2절부터 나오는데 내용이 너무 길어서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경건한 척하지만, 속사람을 보면 교만과 아집, 자기주장, 무절제, 난폭”하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는 전혀 이르지 못한다.”(7절)는 것입니다.
세상에만 거짓뉴스가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거짓뉴스가 난무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거짓뉴스는 그 역사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4:4)
꾸민 이야기가 언제나 더 우리 귀에 솔깃합니다. 더 그럴 듯하게 들린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꾸민 것도 사람이고, 꾸민 이야기를 듣는 것도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게 가끔 생각했는데,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 꼭 같은 말로 이야기를 꾸며오니 넘어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꾸민 이야기>들 가운데 아직도 계속되는 것은 인과응보와 지성감천입니다.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이 상벌을 주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온갖 정성을 다 드리면 하나님이 이에 감동해서 복을 준다는 내용은 성경과 역사를 볼 때에 보편적 논리성이 없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그 핵심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요구와 생각에 맞추어 하나님을 정의하면 안 되고,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께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종종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죄의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었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길에서 유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로 겁도 줍니다. “당신이 아직도 죄를 지으면, 아직 구원을 못 받은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들은 전혀 죄와 거리를 둔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으니 자기들 편에 오라고 유혹합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지금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기독교 역사와 신학을 단 한 줄도 공부하지 않고, 자기들 편한 대로 즉,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성서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심각한 거짓의 범죄를 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만일 이런 주장을 자기 자신의 삶에만 적용한다면, 자기 문제로 끝나니까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2000년 역사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다가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오랜 세월 역사와 신학 속에서 검증을 거친 믿음이나, 믿는 방식을 가진 상대방을 흔들어 대는 것은 <무례>을 범하는 죄를 또 짓는 일입니다. 마치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이라도 하듯이, 남의 신앙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집을 자기 마음대로 개축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으로 진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아닌 전쟁을 일으키는 행동입니다.
2000년 기독교 신학이 서로 논쟁하고 분열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전 세계의 기독교 신학은 핵심적인 면에서는 공통의 토대를 유지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교회가 서로 인정하는 신학과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숙지하고 있어야 꾸며낸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거짓뉴스이던지, 아니면 거짓 신앙이던지 이것을 구분해내는 기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째, 저 이야기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말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화합하게 하는 말인가? 판단해보라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신앙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거짓뉴스는 분열을 조장하고 나라를 파괴합니다.
둘째, 거짓과 진실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끌어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인가?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옳고 당신은 무조건 다 틀렸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말이라면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같은 예수를 믿는데, 그리고 오랜 기간 정통의 신앙을 가지고 왔는데, 나에게 잘못 믿고 있다고 들이대는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 그래도 혼란스러우면 성경에 나온 대로 명철을 추구해 보십시오. 건전한 판단을 들어보고 이해하는 힘을 키우시면 됩니다. 잠언은 슬기롭게도 매우 당연한 말을 우리에게 천연덕스럽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감동이 큽니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잠18:3) 생각해볼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해놓고도 멸시를 당하지 않을 줄 기대합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모욕당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자기를 변호하면서 잘못을 지적하는 상대방에게 화를 냅니다.
이해(understanding)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남을 이해하면 남도 나를 이해하는 그런 것입니다. 나도 남도 함께 소유할 수 있는 공통의 진리를 간직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도 그런 고민을 했었지만, 지금은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앙의 문제에 관하여 “아는 척하기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야하는데, “기도해봅시다”라거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 해결된다.”거나, “하나님의 뜻시 아니었다.”거나, 몇 마디 말과 몇 가지 자기 경험만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습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알면 알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기초도 없는 사람이 마치 모든 일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면 이것은 경계해야할 대상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듣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이해의 토대, 공통의 진리를 붙잡고 정신 차려 늘 묵상해야합니다.
교우 여러분, 거짓이 난무하여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이 시대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길은 진리를 품을 줄 아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순간 들으면 우리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그 말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의 욕심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앙의 여정에서 주님은 우리와 지금도 동행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남긴 가르침을 보면, 출중한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교만의 죄를 꾸짖었고, 스스로 낮추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신앙의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성경에 남겨주신 삶의 모습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자꾸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실천하기 힘든 것을 자꾸 말하는 이유는, 이것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해도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해 보려고 시도하고 노력하고, 안 되면 반성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주님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당신의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 가지고 오늘도 용기를 내어 희망을 가슴에 담고, 진리의 길을 찾아 떠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