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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5 -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중에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를 침공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제 1권 에서 “지성에서는 그리스인 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 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 보다 못하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인 보다도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런
로마인 가운데 가히 군계일학 이라고 할만한 인물이 있으니 “율리우스 카이사르” 인가 합니다.
기원전 65년 35세의 카이사르는 안찰관에 선출된후 빚을 내어 아피아가도를 보수하고 자비로
640명의 검투사를 빌려 로마에서 화려한 검투사 시합을 주관했으며 최고 제사장에 당선된
후에 기원전 60년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수를 중재해 삼두정치(트리움 비라투스) 를
시작하고 다음해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당선됐고 기원전 58년에는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부임과 동시에 바로 갈리아 전쟁이 시작됐으니.... 스위스의 갈리아족 헬베티인들이 게르만족을 피해
갈리아로 민족이동을 하자 저지한 전쟁이 기원전 58년에 아라르 전투로 대승을 거두자, 갈리아인
들의 요청으로 게르만족의 침략을 저지한 비브라테 전투에 승리하고 이어 보주 전투이고 이후
벨가이인들과의 전쟁인 기원전 57년 악소나 전투, 사비스 전투 및 니아투아투키 공방전에서 승리합니다.
30만에 이른다는 벨가이인들을 무릎 꿇린후 갈리아전쟁 3년째인 기원전 56년에 옥토두루스 전투가 벌어
지고 이어 모르비앙 해전에서 승리한후 기원전 55년에는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침공하니 1차
브리타니아 원정이고 기원전 54년에 2차 브리타니아 원정이며 갈리아로 돌아온후 다시 전쟁이 이어집니다.
기원전 56년 로마에서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폭주가 심해졌는데 그는 로마 시민
에 대한 곡물 무상 배급을 실시했고, 폭력단을 조직해 원로원과 유력 정치가를 협박했으며 정치적
으로 반대하는 집회에 돌격하여 훼방을 놓는등 난동을 벌이자.... 원로원 측도 호민관 밀로를
움직여 같은 폭력단을 조직해 대응하니 로마 시내에선 양대 폭력단의 패싸움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클로디우스와 밀로는 고소를 남발했는데 원로원 의원들 중 옵티마테스파는 클로디우스의 전횡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슬쩍 클로디우스에 의해 추방당한 키케로를 불러들이려고 했고,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복귀를 지지함으로써 정계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니..... 키케로의 귀국은 쉽게 가결됩니다.
그뒤 원로원 의원들은 키케로 문제에 협조한 폼페이우스에게 감사의 뜻과 동시에 그에게
곡물배급을 담당하는 임무를 수여했는데, 이는 지중해 해군을 거느리는 권한을 갖게
한 것이었으며, 또한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해 카이사르와 떼어놓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갈리아전쟁 3년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을 평정한뒤 북이탈리아로 귀국하면서 군단장
갈바에게 12군단을 주어 알프스 산맥과 프랑스 국경 사이 부족을 평정할 것을 명령했는데,
상인들은 지날 때마다 높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으니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배하에 넣어
로마인들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함과 동시에..... 통행세를 새로운 수입원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갈바는 로마군의 명성을 바탕으로 별다른 저항없이 부족들을 복종시켰지만 로마군이 겨울 숙영에
들어가자 갈리아인들은 30,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조직해 로마군을 공격했는데, 갈바에겐
1개 군단만이 있었으므로 갈리아의 대군을 상대로 고전하며 6시간에 걸쳐 버티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로마군 숙영지가 함락 직전에 이르자 갈바는 군단병 전원과 함께 숙영지에서 나와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니 갈리아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는데, 간신히
갈리아족을 물리친 갈바는 숙영지를 불태우고 속주로 철수한지라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알프스 지역을 로마의 통치하에 넣는 시도는 좌절되었으니 옥토두루스 전투입니다.
그해 봄, 여름 내내 갈리아는 조용했고 전례없던 대규모의 감사제를 열었던 원로원과
시민의 (Senatus Populusque Romanus 즉, SPQR) 생각대로
갈리아는 평정된 듯 보였는데.... 하지만 그해 겨울에 접어들자 갑자기 일이 터집니다.
대서양 지역에는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7군단과 머물고 있었는데 크라수스는 겨울 숙영을
위한 식량 확보를 위해 장교들을 주변 부족에 파견하니, 부족들은
이 장교들을 억류한뒤 카이사르가 복종의 대가로 거둔 볼모들과 맞교환 하자고 요구합니다.
카이사르는 루카 회담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능했으니 장교들에게
해군 편성을 지시하며 사태를 지켜봤는데, 전함은 갈리아 땅에서 대서양으로 흐르는
루아르강에서 건조되었고 그후 이 함대로 대서양 연안 부족들과 해전을 치를 생각이었습니다.
루카 회담을 마무리한 카이사르는 7개 군단을 이끌고 대서양 연안을 향해 행군해 갈리아로
진입한후 라비에누스에게 기병을 주어 전해에 평정한 벨가이인들의 영토로
보냈고, 크라수스에겐 12개 대대(1군단 = 10개 대대) 를 주어 갈리아 서남쪽으로 보냅니다.
사비누스에겐 3개 군단을 이끌고 노르망디로 가서 부족들을 복속시키도록 했고, 브루투스
에게는 로마군 함대의 지휘권을 주어 대서양의 반란 주동 민족인 베네티족을
공격하도록 했으며..... 카이사르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베네티족의 영토로 침입합니다.
베네티족은 카이사르군이 이르는 곳마다 철수한뒤 섬으로 이주하여 지구전으로 나가기로
했으니, 카이사르는 제해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는데......
브루투스가 해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각각 200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전투를 개시합니다.
이 싸움에서 갈리아(켈트)인들의 배가 더 크고 높이가 높아 로마군이 밀리자 브루투스
는 갈고리를 던져 적의 돛을 찢어버려 기동력을 무력화시켰는데.....
이는 노를 젓는 방식의 항해를 하지 않는 갈리아인 함대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습니다.
지중해식 전선의 경우, 돛을 찢는다 해도 노가 있으므로 기동력이 무력화되지 않았으나 갈리아인
들의 배에는 노가 없었으니..... 베네티족 함대에 로마군의 배가 에워싸 하나하나
점령해 나가는 방식으로 갈리아의 해군을 격파하자 베네티족은 항복했으니 모르비앙 해전 입니다
카이사르는 항복했다 반기를 든 죄를 물어 베네티족 장로 전원을 처형하고, 모든 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렸으며
그뒤 사비누스와 크라수스에게서 승전보가 전해지니 사비누스는 허약함을 가장한뒤 방심한 적을
급습하여 승리했고, 크라수스는 회전을 벌여 적을 격파한뒤 농성하는 적을 추격해 다시 격파해 승리를 거둡니다.
카이사르는 모리니족과 메나피족을 토벌하러 나섰는데 플랑드르 지역에 사는 부족이었으니 로마군이
이르자 숲으로 숨어버렸고, 벌채를 하면서 진격했으나 더 깊숙히 숨어버렸기 때문에.... 중단
하고 퇴각했으며 겨울이 되자 카이사르는 병력을 사방에 보내 숙영하게 하고 이탈리아로 되돌아 옵니다.
갈리아전쟁 3년깨인 기원전 56년 로마에서는 제1차 삼두정치의 결속력이 약해졌는데 크라수스
에겐 정치력이 없는데다가 폼페이우스가 권력에 흥미를 보이지 않아 옵티마테스 일파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이었으니....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를 루카에 초대해 회담을 열어 결속력을 다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로 합의합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음해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했고, 그 다음해에는 히스파니아와 시리아
총독이 되기로 했으며, 카이사르는 임기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각 10개 군단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을 갖기로 했는데 이때 원로원 600명 중에 200명이 루카 시에 왔으니 루카 회담 입니다.
갈리아 전쟁 4년째는 평온해진 듯 보였고 카이사르에게 복종하고 있는 듯 는데.... 이때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 중에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이 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공하려고 했으니 이들은 메나피족을 격파하고 강을 건너는데 성공합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갈리아인들에게 기병을 제공받은 뒤
이동하자 놀란 게르만족은 카이사르의 신속한 기동에 강화를 요청하니.....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이 타지역에 약탈을 보낸 기병대의 귀환을 위한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 의심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즉각적인 전투를 원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명분없이 공격할수는 없었고, 따라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기병 부대를 적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기동하게 했으니..... 이에
게르만족의 몇몇 부대가 로마군을 공격하여 전사자가 발생하자 카이사르는 전투를 결심합니다.
다음날 카이사르는 게르만 사절을 구금한뒤 급습하니 완벽한 기습이라 참패한 게르만족은
흩어졌는 데..... 카이사르의 석연찮은 사절 구금과 기습에 대해 원로원에서도
논란이 생겼으니, 제1차 삼두정에 대해 부정적인 옵티마테스의
일원인 소 카토는 카이사르를 규탄한뒤 그를 게르만인들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74명의 기병의 죽음으로 인해 교섭은 끝났으며, 따라서
카이사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반박했는데.... 결국엔 폼페이우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죄를 묻지 않기로 결론이 납니다.
카이사르는 가대한 부교를 만들어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영토에 침입하고자 했으니, 게르만족에게
자신이 격파한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의 일부가 라인강을 건너 다른 게르만족의 신세를 지는
것을 핑계삼아 그들을 로마측에게 인도하라고 요구하니.... 게르만족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수에비족에게 억눌려 살던 우비족은 좋은 기회라고 보고, 카이사르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니 카이사르는 다리를 놓았고 10일 만에 군단과 함께 라인 강을 건너자.....
수에비족은 로마군과 싸우는 대신 재산과 인구를 숲속 깊은 곳으로 이주시키고
로마군을 숲속으로 끌어들여 싸우기로 하니 우비족에게 협조를 약속받고 갈리아로 되돌아 옵니다.
갈리아전쟁 4년차에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영토 침입이 전과로 이어지지 않자 카이사르는 영국인
브리타니아 침략을 구상했는데..... 브리타니아 원정 이유는 브리타니아가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라는 점에서 라인강 도하를 능가하는 선전효과가 있으리라 판단한듯 합니다?
2차 십자군때 프랑스왕은 이슬람에 함락당한 에데사나 아니면 예루살렘 왕국을 위협하는 알레포를 공격해야
함에도, 이미 기독교 나라들과 연합군이 된 같은편(?)인 다마스커스를 공격했는데.... 이는 다마스커스
가 오래전 부터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니 승리할 경우 업적을 칭송받기 쉬웠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브리타니아를 침공한 이유에 대해 카이사르는.... “ 본껴적인 침공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지만 섬에 상륙만 해놓고 주민의 성향이나 지형이나
기항지등 갈리안이들 조차 잘 모르는 사실을 조사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카이사르는 상인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했지만 상품이 있고 이윤만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상인들 조차
브리타니아에 대관서는 남쪽 해안인 콴티움(킨트) 지방 밖에 몰랐으니 섬의 크기나 주민의 성향,
인구 숫자, 전술과 통치방식이며 큰 선박이 접안할수 있는 항구 위치도 몰랐으니 직접 가 보아야 하겠다는?
카이사르는 정찰을 통해 도버 해협이 건너기에 적합한 지형임을 파악하고는 해안가에
있는 모리니족의 영토를 거점으로 삼고는, 화물선을 모아 2개 군단과
함께 출항했으니 브리타니아(영국)에 도착한 날은 기원전 55년 8월 26일 이었습니다.
브리타니아 민족들은 로마군 함대가 보이는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상륙을 저지하고자 했으니 카이사르는
소수의 병력을 보내 브리타니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뒤 본대를 작은 배에 나눠 태운뒤 잇따라
상륙시키자 브리타니아군은 패배하여 달아났고.....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볼모를 요구해 약속을 받아냅니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되돌아가려고 배를 항구에 정박시켰는데, 조수의 차이
를 정확하게 계산하지 못해 늘어난 바닷물로 많은 배가 난파되었으니 궁지에 몰린 로마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를 수리했지만 이걸 알고 브리타니아군이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결정 합니다.
곡물 조달을 위해 나갔던 7군단이 공격을 받자 카이사르는 합류하여 적을 격파하니 브리타니아군이
카이사르의 본영을 공격했고, 로마군은 또다시 이를 격파했으니 두번의 승리로 브리타니아와
강화를 맺은 카이사르는 수리가 완료된 배를 타고 갈리아로 귀환했으니 1차 브리타니아 원정 입니다.
브리타니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모리니족의 반란에 직면했으니 로마군이 상륙하자 공격했고
카이사르는 기병 전부를 보내 구원했으며... 라비에누스에게 전 군단을 주어
모리니족을 토벌케 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사비누스와 코타를 보내 모리니족
북쪽에 메나피족을 토벌하게 한후 부대를 벨가이인의 영토에 남기고 북이탈리아로 돌아옵니다.
카이사르는 정복에 나설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갈리아 전쟁 도중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라인강
너머 게르마니아로의 진군과 도버 해협 너머의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했는데..... 이는
게르마니아 및 브리타니아와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배후지 갈리아의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무엇보다도 로마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선전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폰토스나 시리아 정복은 군사적 위업이었으나 로마인들이 잘 아는 지중해 문명세계에서 벌어진
것인데 비해 로마인들에게 끝을 알수없는 검은 숲과 야만인들의 땅 게르마니아, 풍문으로나 존재를 알던
세상 끝 오지인 브리타니아에 로마군이 발을 들여놓은 일은 달 착륙 수준의 문화 충격이자 대사건 이었습니다.
수도 로마 집정관은 카이사르의 동맹자들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으니, 브리타니아 원정을 전해들은
원로원은 실익이 크지 않았음에도 20일 동안 감사제를 결의했는데, 폼페이우스의 동방정복을
기념하는 12일 동안의 전례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로마 사회에 준 충격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군사행동은 카이사르가 권한 밖의 일을 한 것으로, 원로원파(옵티마테스)들 중에는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니... 또 기존 로마의 1인자로 공인되던 폼페이우스의 입지를
카이사르가 크게 위협하게 된 사건으로도 인식되었고 이후 양측의 결별과 대립에 영향을 줍니다.
또한 그 해의 집정관이었던 크라수스는 겨울이 되자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병력을
편성하기 시작했으니.... 그의 차남인 젊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보낸
2,000명의 최정예 갈리아 기병과 함께 귀국하여 아버지인 크라수스에게 합류합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여름이 되자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했으니,
이것은 카이사르가 전해의 브리타니아 침공 성과가 불충분하다고
느꼈고 브리타니아에서 두 부족을 제외하고는 볼모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번엔 기병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갈리아의 귀족들도 모두 데려
가기로 했는데, 특히 신분이 높은 이들은 기병 지휘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러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대해 둠노릭스가 강하게 반발합니다.
둠노릭스가 소속된 하이두이족은 갈리아에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부족으로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패권을 차지하자 그들은 갈리아 전체 맹주로서 입지를 가지게 되었지만, 실상은 카이사르가
하이두이족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사실상 로마의 패권하에 갈리아를 편입시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내정 간섭은 별로 없었고 부족들의 자율을 배려하는 편이었으므로, 세콰니족을
내세워 갈리아 전체 패권을 가졌던 게르만인(수에비족) 보다는 반발이 적었으니 따라서
하이두이 부족 내에서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족장 디비키아쿠스의 정치적인 입지는 튼튼했습니다.
친형 디비키아쿠스의 족장직에 도전하는 둠노릭스는 불만이 많았고, 카이사르의 꾸준한 정치적 공작은
둠노릭스로 하여금 세력을 키우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그는 카이사르에 의해 브리타니아로
가게 되자 승선의 혼란을 틈타 탈영하니..... 카이사르는 곧바로 기병들을 보내 그를 추격하여 죽입니다.
카이사르는 5개 군단과 기병 부대 대부분을 800척의 배에 승선시키고 도버해협을 건너는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으니.... 규모가 너무 크자 브리타니아는 겁을 먹고 군대를 내보내지 않았으며, 카이사르
는 10개 대대와 300명의 기병을 남겨 배를 지키게 한 뒤 전군을 이끌고 적이 모인 곳으로 이동합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카이사르군과 정면으로 싸우기 보다 숲의 지형을 활용해 게릴라전으로 버티기로 했으니,
진격로에 요새를 구축해 진로를 방해한뒤 로마군이 행군 중일때 공격하거나 숙영지를 건설할때, 군량을
확보하거나 말을 먹이기 위해 초원에 기병을 풀어놓았을때 공격하는 식으로 맞서니 로마군은 싸울
때 마다 격퇴했으나 브리타니아인들은 가벼운 무장을 한 이점을 활용하여 재빨리 숲속으로 퇴각합니다.
브리타니아인은 로마군 기병에겐 전차를 내보내 상대케했고 기병이 군단병에게서 멀어지면 전차에서 내린
보병들로 기병들을 공격했으니..... 때문에 기병은 군단병에게서 멀리 떨어질수 없었고 브리타니아인
들은 충분한 수의 예비대를 후방에 두어 게릴라전에 지친 병사들과 교대하는 식으로 체력 저하를 막았습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군 총사령관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를 침입하니 카시벨라우누스는 강 건너에 부대
를 집결시켜 로마군 도하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로마군이 강을 건너 선봉부대를 패주시키자 군을
물리고 가축과 사람및 재산을 숲속 깊은 곳에 이주시킨후 로마군이 식량 확보를 위해 흩어지면 공격합니다.
카시벨라우누스의 게릴라 전술과 청야전술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 카이사르는 카시벨라우누스에게 왕이
살해된 바 있었던 브리타니아의 부족 토리노반테스족과 강화를 맺고 정보를 캐내 카시벨라우누스
가 가축과 사람을 모아놓은 장소를 파악한뒤 급습하니.... 카시벨라우누스 부족은 상당한 피해를 입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 본군을 공격하는 대신, 해안가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던 10개 대대의 로마군
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로마군의 수비는 튼튼했고 휘하의 병력이 간단히 격퇴당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항하니 카이사르의 2차 브리타니아 원정입니다.
로마 2천년 역사에 위대한 장군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는 7년간에 걸친 갈리아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를 로마령으로 만들었으며 “카이사르는 13군단을 이끌고
벨가이인들의 영토로 들어갔다”는 식의 3인칭으로 서술한 간결한 문체의 갈리아전쟁기를 남겼습니다.
자신은 “문장은 거기에 쓰인 언어의 선택으로 결정된다. 평소 쓰지않는 말이나 동료끼리만 통하는 표현은
배가 암초를 피하듯 삼가야 한다” 라고 말했는데.... 영국의 버나드 쇼는 “인간의 약점에 대해서는
그토록 깊이 통찰한 세익스피어였지만 카이사르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라 비평했습니다.
카이사르가 회계감사관으로 취임할때까지 부채는 1천 3백 탈란트로 11만명 병력을 1년동안
유지할수 있는 자금으로 로마 유력자들을 초대해 초호화판 잔치를 150번쯤 할수 있는
돈이라고 했는데.... 그는 해적에게 포로가 됐을 때 자기 몸값을 해적들이 생각한
10배로 불러서 놀란 해적들이 귀빈으로 대접했다니 그럼 빚도 투자로 생각했던 것일까요?
포로 주제에 해적들을 부하 부리듯 하면서 로마에 연락해 거금을 빚을 내서 가져오개 해서 풀려난 다음에는
선단을 조직해 해적 소굴을 급습해서 더 많은 돈을 약탈했다니..... 어쨌든 옷 잘 입는 멋쟁이 카이사르
의 독서량은 당대 문인들 중에 최고였다고 하니 사령관은 검술 실력이 아니라 지혜를 갖추어야 했나 봅니다?
줄리어스 카이사르가 수행한 갈리아 전쟁은 2편으로 나누어 기술할 예정인데 상 편은 기원전
58년에 아라르 전투, 비브라테 전투, 보주 전투이고 기원전 57년에는 악소나 전투,
사비스 전투, 아투아투키 공방전이며 기우너전 56년에는 옥토두루스 전투, 모르비앙
해전이고 기원전 55년에 1차 브리타니아 원정그리고 기원전 54년에 2차 브리타니아 원정입니다.
그리고 갈리아 전쟁 하편은 기원전 54년 ~ 기원전 53년에 일어난 암비오릭스의 반란과
기원전 52년의 아바리쿰 공방전, 게르고비아 공방전, 루테티아 전투, 빈게네
전투에 저 유명한 알레시아전투이며 최종적으로 기원전 51년의 옥셀로두눔
공방전을 끝으로 갈리아 부족들을 완전히 손에 넣으니 갈리아 전체가로마 영토가 됩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4년 겨울이 되자 사비누스,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마르쿠스 크라수스, 라비에누스,
파비우스, 로스키우스에게 군단을 쪼개어 배치했으니 군단장들은 1개 군단씩이나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3개 군단, 사비누스와 코타는 14군단과 다른 군단의 5개 대대를 맡겼으니 1.5군단인가 합니다.
트레베리족의 반 로마파 인두티오마루스가 에브로네스족장 암비오릭스를 선동해 로마인을 공격하게 했지만
격퇴당하자 암비오릭스는 사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부족민들이 벌인 사건이고,
갈리아인 전체가 공모했으며 게르만족의 대부대가 라인강을 건너 2일후 숙영지를 공격할 것이라 말하고
게르만족이 도착하기 전에 철수할 것을 권유하면서 로마군이 갈리아족의 영토를 이동할때 안전을 약속합니다.
사비누스의 숙영지는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군 철수를 주장했지만 부장인 코타
를 비롯한 백인대장들은 무장하고 공격까지 감행한 적의 조언을 듣고 행동하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로마군은 다음날 아침에 철군을 감행합니다.
사비누스는 암비오릭스 약속을 믿었으니 전투 대형을 갖추지 않고 퇴각하니 14군단은 긴 행렬을 이루었는데,
암비오릭스는 행렬을 급습했으니 사비누스는 당황했고 부장 코타는 짐을 버리고 원진을 짜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부대원들의 사기가 저하되니 원진의 경우, 적이 공격하지 않으면 싸울수 없는데, 갈리아인들은
원진을 에워싸기만 하다가 돌격을 감행한뒤 퇴각하며 로마군 원진이 흐트러지면 투창과 돌멩이를 던집니다.
전투는 하루종일 지속되면서 로마군의 수는 줄어들었으니.... 로마군의 전투력은 갈리아족을
앞섰고 1.5개 군단은 적은 수가 아니었으나 이러한 갈리아족의 전술에 로마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니 마침내 사비누스는 항복했지만 암비오릭스는 회담하러
온 사비누스와 장교들을 살해했고, 부장 코타는 로마군을 지휘했지만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코타가 죽자 절망에 빠진 로마인들은 그날밤 모두 자결했고 살아남은 극소수는 무장을 벗어던지고 숲속으로
들어가 길도 없는 곳을 헤치면서 간신히 라비에누스의 숙영지에 이르렀으니 9,000명에
달하는 로마 중보병이 전멸했는데 카이사르가 벌인 갈리아 전쟁 및 내전을 통틀어 가장 큰 손실이었습니다.
암비오릭스는 아투아투키족 영지와 네르비족의 영토로 가서 선동하자 갈리아인들은 호응했으니 네르비족은
휘하 10개 부족을 동원하여 숙영지 건설을 위한 벌채 중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군단을 공격하자
군단병들은 사력을 다해 맞섰지만 네르비족은 사기가 올랐으므로 거센 공격을 그날은 가까스로 버텨냅니다.
키케로의 로마군은 밤에 120개 망루를 짓고 울타리를 보강했으며 다음날 아침네르비족은 엄청난 기세로
공격했고 로마군은 부상자들까지 가세해 한편으로는 적과 싸우고 한편 수리하면서 버텨냈으며 다시
밤을 새우면서 망루와 성채 방어용 창을 배치하고 벽에 나뭇가지로 장애물을 삼는 공사를 진행 합니다.
로마군의 저항이 완강하자 네르비족은 회담을 청하면서 사비누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는데
즉, 전 갈리아가 봉기했으며, 게르만족이 대군을 이끌며 당도했고, 카이사르의
다른 군단도 습격받았음을 전하며 철수를 권하니 키케로는 비로소 14군단의 전멸을 알게 됩니다.
다시 숙영지를 공격한 네르비족은 로마인들에게서 배운대로 보루와 참호를 둘러싼 뒤 공성병기
까지 만들어 5일간에 걸쳐서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했고 로마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항했으며 네르비족이 철통같이 숙영지를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전령을 내보낼수도 없었습니다.
키케로 진영에 머물던 네르비족 출신 친 로마파 인물이 노예를 적군으로 위장시켜 편지를 보내니 카이사르는
오후 5시에 키케로의 군단이 네르비족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급보를 받자 바로 출발했고 3개 군단을
이끄는 마르쿠스 크라수스와 파비우스, 라비에누스에게 전령을 보내 가는 길목에서 합류하라 명령을 합니다.
아침 9시경 크라수스 3개 군단과 합류한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 1개 군단을 주어 보내고,
30km 를 행군한 뒤 파비우스의 군단과 합류했는데, 라비에누스는 갈리아인들이 접근해
숙영지에서 움직일수 없다기에...... 카이사르는 2개 군단만 이끌고 키케로의 숙영지로 갑니다.
카이사르 휘하엔 7,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네르비족은 60,000명의 병력이니 카이사르는 네르비족을
유인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인 것으로 위장해 진영을 작게 짓고, 그뒤 네르비족의기병과 싸워
거짓으로 퇴각했으며 겁을 먹고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루와 문을 봉쇄하고 혼란스럽게 작업을 합니다.
계략에 넘어간 네르비족은 전 병력을 이끌고 카이사르의 진영을 에워싸기 시작하니 카이사르
는 진영의 문을 위장해 풀로 덮었을 뿐인데도 문이 굳게 닫친 것으로 생각하고
진영에 바짝 접근하자 카이사르는 모든 병력으로 하여금 진영 밖으로 뛰쳐나가
적군을 항해 돌격하도록 하니..... 예기치 못한 기습에 허를 찔린 네르비족은 급격히 무너집니다.
카이사르는 하루종일 적군을 추격했고 네르비족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니, 네르비족
을 대파한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진영에 진입하니 병사들 중 부상을 입지 않은 자는
10명 중 1명에 지나지 않았다는데, 카이사르는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느라
면도를 못해 수염이 얼굴을 덮고, 씻지 못해 머리도 얼굴도 옷도 매우 꼬질꼬질 했다고 합니다.
전쟁터 에서도 항상 면도를 하고 깔끔을 떨며 멋부리기를 좋아했던 카이사르 였던지라 키케로의
군단병들은 넝마주이 꼬라지로 정신없이 나타난 카이사르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충성
을 다짐했다고 하며 네르비족 참패 소문은 합류하기로 했던 갈리아인들이 실망해 돌아갔습니다.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로 귀국하지 못하고 갈리아에서 겨울을 보내니 트레베리족의 인투티오마루스는
카이사르의 반격에 대비해 라인강 너머 게르만족을 설득했지만 실패후 갈리아인 병력을 모았고, 로마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정신에 불타는 이들이 집결하자 라비에누스의 숙영지를 급습하기로 합니다.
인투티오마루스는 숙영지를 포위한뒤 싸움을 걸었지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했던 것처럼 병력
이 겁먹은 것으로 위장하면서 도발에 응하지 않다가 갈리아인들이 방심하고 있음을 파악한
라비에누스는 기습적으로 기병을 출격시켜 인투티오마루스를 살해하니..... 트레베리족은 와해됩니다.
로마에서는 크라수스가 파르티아(페르시아) 원정을 떠났고 폼페이우스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
가 산욕열로 죽자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를 경계해 정략결혼이 깨진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했으며 그해
집정관 선거에서 원로원파가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하니 로마의 정국은 원로원파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폼페이우스에게 시집간지 5년,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 사이는 부러워할 정도로 좋았다는데 아이를 유산해
쇠약해진 몸으로 또 두번째 아이를 임신한게 몸을 견디지 못하게 했으며 아이도 곧 죽었는데 하지만
카이사르는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어 말하지 않는 성격이니 ‘갈리아 전쟁기’ 에서도 언급 조차 없습니다.
갈리아에 겨울을 숙영하던 카이사르는 6년째 해에 3개 군단을 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이기로 하니, 3개
군단중 하나는 폼페이우스에게 빌리기로 했는데 1군단(훗날 6군단) 이고 나머지는 14군단,
15군단이니 14군단의 경우 사비누스와 함께 전멸당한 군단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5개
대대를 새로 뽑아 보충했으니 카이사르는 그 해에 3.5군단을 증강해 10개 군단(6만명)을 거느립니다.
봄이 되자마자 카이사르는 4개 군단을 동원하여 키케로의 군단을 공격한 바 있었던 네르비족의 영토로
진격하니 예상보다 빠른 로마군의 공세에 네르비족은 격파되었고 약탈당한뒤, 전리품은
분배되었으니 네르비족에게서 볼모를 받은 카이사르는 군단기지로 돌아가 갈리아 회의를 소집합니다.
전 해에 반로마 반란의 주모자 트레베리족, 에브로네스족과 세노네스족, 카르누테스족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카이사르는 소집된 부족장들과 파리로 이동한뒤 연설후 세노네스족을 향해
진격하니 부족장 아코는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부족들에게서 기병을 소집한뒤 전해의
사비누스 군단을 전멸시킨 두 부족 트레베리족과 암비오릭스의 에브로네스족을 향해서 진격합니다.
카이사르는 병력을 양분해 2개 군단을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있던 라비에누스의 군단에게 보내고, 자신은
5개 군단과 에브로네스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메나피족을 향해 나아가자 메나피족은 또다시
숲속으로 이주하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그 전에 당도했고 물자를 약탈하니 메나피족은 강화를 맺습니다.
트레베리족은 라비에누스를 공격하려 했는데 카이사르의 2개 군단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하려고 했지만, 라비에누스가 겁먹은 것처럼 위장하자 마음을 바꿔
카이사르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라비에누스의 1개 군단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합니다.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있는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진입하여 군단을 휘하에 거둔뒤
트레베리족의 부족장으로 친 로마파 정치가를 임명하고는 갈리아인과 연락
하던 게르만족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또다시 라인 강을 건너기로 결정합니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놓아 도강을 시작하니 우비족은 사절을 보내 반란에 관여한 것은 수에비족이라
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을 사실이라고 판단했으며, 수에비족은 카이사르에 대해
이전에 썼던 전략을 다시 썼는데,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로마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쫓아 숲속 깊은 곳에 가는 것을 보급 문제로 꺼렸으므로 전해와
마찬가지로 군대를 물려 퇴각했으니 성과가 없어 보이는 것을
우려했던지... “갈리아 전기”에 갈리아인과 게르만인의 풍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사비누스의 14군단을 전멸시킨 암비오릭스의 부족 에브로네스족은 로마군을 피해 숨어다녔는데 그들의
숨긴 재산을 약탈하러 게르만족이 강을 건너오니 로마군과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후 카이사르는
부족회의를 열어 이전에 불참한뒤 항복한 세노네스족의 부족장 아코를 로마의 전통 방식으로 처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