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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basketball, 籠球]
정의
한 팀 5명이 공을 바스켓에 던져 넣어 많이 넣은 수로 승패를 겨루는 경기.
내용
각각 5명으로 구성되는 두 팀이 한 개의 공을 서로 차지하여 지상으로부터 3.05m에 장치된 바스켓에 공을 던져 넣어 득점으로 승패를 겨룬다. 농구는 속도감과 긴장감이 있는 실내스포츠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경기방식은 전후반 20분씩 경기를 하며 전후반 사이에 10분 동안 휴식시간을 가진다. 경기장은 사이드라인이 24∼28m, 앤드라인이 13∼15m이며, 경기의 시작은 주장의 토스로서 자기 팀의 바스켓을 정한 뒤, 양 팀이 자기 위치에 서서 주심의 점프볼 토스(jump ball toss)로 시작된다. 경기규칙은 공을 손으로 다루어야 하고 공을 가지고 걸어서는 안 되며, 몸을 부딪치지 않도록 원칙을 정해놓고 있다. 경기는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득점을 하는 팀이 승자가 되는 것인데, 득점은 필드 스로(field throw)에 의하여 바스켓에 볼이 들어가면 2점, 3점라인 밖에서 바스켓에 볼을 넣으면 3점, 그리고 파울에 의한 프리 스로에 의하여 바스켓에 들어가면 1점을 얻는다. 또, 공격측 선수가 상대방의 프리드로 라인 안에서 3초 이상 머물렀을 때 바이올레이션(violation)으로 인정, 상대편에게 볼을 준다. 심판은 주심 1명과 부심 1명으로 구성된다. 경기기술은 캐칭(catching)·패싱(passing)·드리블(dribble)·슈팅(shooting)으로 나뉜다.
농구는 189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 있는 YMCA학교의 네이스미스(Naismith,J.A.)에 의하여 창안되었는데, 그는 미식축구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즐기되 실내의 제한점을 고려한 13개 조항의 기본규칙을 기초로 하였다. 농구경기는 비가 올 때나 추운 겨울에도 체육관 안에서 경기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많은 호응을 받아 전 미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YMCA가 농구보급에 커다란 구실을 담당하였다.
최초의 농구팀은 1892년 조직된 미국 YMCA학교팀이며, 그 뒤 육군팀과의 대전을 시작으로 제네바(Geneva)·아이오와(Iowa)·미네소타(Minnesota)·예일(Yale)·트리니티(Trinity) 등의 대학 간의 경기를 통하여 발전하였으며, 1904년에 열린 제3회 세인트루이스올림픽대회에서 미국선수들이 농구경기를 시범종목으로 소개함으로써, 미주·유럽·라틴아메리카에 널리 보급되었다.1932년에 열린 제10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 때 세계농구연(Fe'de'ration Internationale de Basketball Amateur, FIBA)이 창설됨과 더불어 통일된 경기규칙이 제정되었으며, 1936년에 열린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때부터 올림픽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76년에 열린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대회에서는 여자종목이 추가되었다. 1999년 현재 세계농구연맹에는 208여 개 국가가 가맹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농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7년 한성기독청년회 초대 총무였던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Gillet, P.)에 의해서이며, 1916년 미국인 반하트(Barnhart)가 기독청년회 간사로 취임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지도와 보급이 시작되었다. 1920년 3월에는 재경 서양인팀과 기독청년회팀 간의 시합이 있었는데, 그 뒤 각급 학교에서 농구부를 창설하였고 전조선농구대회를 통하여 발전이 계속되었다.
1925년에는 서양인 여자들과 이화학당 여학생들의 농구경기가 열려 우리 나라 여자농구경기의 시초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일본 와세다대학팀을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초청하여 경기를 가짐으로써 첫 국제경기의 길을 열었다. 1936년에는 전일본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연희전문학교 농구팀이 우승을 거두었으며,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일본 대표선수로 장이진(張利鎭)·이성구(李性求)·염은현(廉殷鉉) 등 세 선수가 선발되었다. 1945년 12월 17일 대한농구협회가 조직되고, 1947년 국제농구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으며,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 최초로 출전하여 28개국 중 8위의 성적을 거두어 한국농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뒤 올림픽경기대회와 아시아경기대회 등에 계속 출전하는 동안 한국농구는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67년 4월 15일부터 체코 프라하에서 거행된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대표팀은 처녀출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준우승을 차지하여 한국농구를 세계에 빛냈다. 또한 같은 해 8월 27일부터 일본 동경에서 유니버시아드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우리 나라는 여자팀이 우승, 남자팀이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969년과 1972년 사이의 4년간은 아시아 정상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으며, 1973년 8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리 나라 여자팀은 동메달을 차지하였다. 1979년 4월에는 한국농구 80년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제8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1982년 일본동경요요기[代代木] 국립체육관에서 폐막된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에서는 일본을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제9회 아시안게임에서 남자농구가 중공을 누르고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며, 1984년 4월 19일에 개최된 제8회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남자가 우승, 여자가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서는 여자농구가 올림픽 참가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986년 10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녀 모두 준우승을 하였다.
1997년에 개최된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중국을 물리치고 우승하였으나 1998년 12월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제13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녀팀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팀이 결승전에서 중국을 제치고 우승하였다.
참고문헌
『농구』(정성태, 동양문화사, 1982)
『농구』(문교부, 서울신문사, 1975)
『대한농구협회자료』(대한농구협회, 1948)
Coach’s Complete Guide to Winning Basketball(La Grand Parker Publishing Company Inc., 1966)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배구[volleyball, 排球]
두 팀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이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쳐서 상대편 코트 안에 떨어지게 하는 경기.
내용
기술이 간단하고 신체적 접촉 없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어 여가운동으로서도 적합하다.
한 팀이 6명으로 구성된 국제식과 9명으로 구성된 극동식의 두 가지 방식이 있으며, 1966년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 이후부터 공식경기에서는 6인제만 실시하고 있다. 코트 넓이는 남녀 다같이 18×9m로 되어 있으며, 코트 주위 7m 이내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코트에 그려진 모든 선의 폭은 5㎝로 되어 있고, 네트의 높이는 남자 일반의 경우 2.43m, 여자 일반의 경우 2.24m, 남자 고등부 2.35m, 여자 고등부 2.15m, 남자 중등부 2.20m, 여자 중등부 2.05m가 유지되어야 한다사용되는 공은 둘레는 65~67㎝, 무게 260~280g이며, 실내에서는 밝은 색깔의 공이어야 한다. 경기자의 복장은 각 팀이 동일한 색깔이어야 하고, 뒷굽이 없는 가벼운 신발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배구의 기술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버가 공을 상대방 코트에 넣는 서브, 상대편 공을 받는 리시브, 자기편에게 단순히 공을 보내는 패스, 자기편에게 넘겨주어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여주는 토스, 토스된 공을 상대편 코트에 때려 넣는 스파이크, 상대편 공격을 전위선에서 저지하는 블로킹의 기술을 들 수 있다. 배구 경기를 할 때 심판은 경기 시작 5분 전에 각 팀 주장을 불러 토스를 시켜 서브권과 코트를 선택하도록 하고 선수를 정렬시켜 3분의 공식연습시간을 준 뒤 경기를 개시한다. 경기방법은 상대편이 서브한 공을 땅에 닿지 않도록 해서 세 번만에 공을 다시 네트 위로 넘겨 상대편을 공격하게 된다. 서브권을 가지고 있는 팀의 서브가 성공하거나 공격이 성공하면 1점 득점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서브권을 상대편에게 넘겨준다. 경기 중 1점 득점이 되거나 상대편에게 서브권이 넘어가게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볼이 자기 코트 안의 땅에 닿았을 때, ② 한 팀이 계속해서 4회 이상 공을 다루었을 때, ③ 공을 손으로 잡았을 때, ④ 허리선 아래에서 공을 다루었을 때, ⑤ 선수가 서브 진행중 자기 위치에 있지 않았을 때, ⑥ 경기 진행중 네트를 만졌을 때, ⑦ 선수가 중앙선을 넘었을 때, ⑧ 네트 위로 손이 넘어갔을 때, ⑨ 백(back) 위치의 선수가 공격권에서 공격에 가담하였을 때, ⑩ 볼이 사이드마커 밖을 통과하였을 때, ⑪ 볼이 코트 밖의 물체나 땅에 닿았을 때 등이다. 경기는 최소 2점을 앞선 상태에서 먼저 25점을 획득한 팀이 승리한다. 만약 24-24로 동점을 이룬 경우, 경기는 2점 리드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된다. 경기는 5세트 경기와 3세트 경기가 있으나 중요한 경기나 국제경기에서는 5세트 경기를 실시하게 되고, 5세트 경기에서는 먼저 3세트를 이긴 팀이 승자가 된다. 세트가 2-2로 동점인 경우, 최종 5세트는 최소 2점을 앞선 상태에서 15점제로 경기를 하게 된다. 배구는 1895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홀리요크(Holyoke)시의 기독교청년회(YMCA) 체육지도자인 모건(Morgan, W. G.)에 의하여 최초로 고안되었다. 그는 농구가 고령의 직장 근로자들에게 적절하지 못하여 그들에게 알맞은 운동을 모색하던 중, 테니스와 핸드볼에서 힌트를 얻어 실내에 6피트 6인치 높이의 테니스 네트를 설치하고 적당한 크기의 볼을 사용한 것이 최초의 배구경기였다.
이렇게 창안된 배구는 1896년 스프링필드(Springfield)체육대학에서 기독교청년회 체육부 이사회가 개최되었을 때 소개되어 많은 전문체육지도자들로부터 찬사와 호평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름을 ‘미노네트(minonette)’라고 불렀으나, 그 뒤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할스테드(Halstead, A. T.)가 볼을 발리(volley)하는 경기라는 뜻인 ‘발리볼’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1897년 피셔바사가 규칙을 정하고 1922년 기독교청년연맹 선수권대회가 공인되면서 1928년에 전미국배구연맹이 결성되어 미국에 배구가 보급되었다.
1946년에 국제배구연맹(IVBF)이 탄생되고 194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뒤 배구가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되기는 1964년 동경올림픽경기대회 때부터이다. 우리나라에 배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15년 성서공회의 미국인 선교사 베이커가 입수한 규칙서를 이원용(李源容)이 번역해서 동료들과 함께 코트를 만들어 12인제 배구를 한 것이 시초이다. 1916년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팀과 세브란스병원직원팀과의 경기가 세브란스병원 마당에서 최초의 공식시합으로서 거행되었다. 같은 해 3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반하트(Banhart)가 회원들에게 배구를 정식으로 지도하였으며, 1917년 3월 30일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체육관에서 정식으로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는 기독청년회원과 서양인이 대결하였는데 기독청년회원이 3:0으로 이겼다. 그 뒤 1925년 10월 1일 조선신문사 주최 제1회 전조선배구대회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공인경기로 처음 행하여졌다. 같은 해 5월에는 조선신문사에서 당시 일본배구계의 권위자인 미키(三枝祐龍)를 초청하여 배구경기에 대한 강습회를 개최함으로써 배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우리나라 배구의 기술발전을 위하여 조선중앙가톨릭청년회에서 일본기독교청년회 체육부 간사이며 극동올림픽위원인 브라운(Brown)을 초청, 강습회를 개최함으로써 기술향상과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뒤 점차 배구가 발전, 보급되어 1927년 제3회 조선신궁경기대회 때에는 남자배구가, 1931년 제7회 조선신궁경기대회에서는 여자배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11월 20일에는 조선배구협회가 발족되어 배구의 기술보급과 향상에 많은 공헌을 함에 따라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또한 광복과 더불어 부활된 전국체육대회(광복경축종합체육대회) 때부터 배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54년에는 우리나라 대표팀이 홍콩배구협회의 초청으로 원정경기를 가져 7전 3승 4패의 전적을 올림으로써 해외원정경기의 활로를 트게 하였다. 또한 1955년에는 제1회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2위를 하였으며, 1958년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6인제에 출전하여 남녀 모두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59년에는 국제배구연맹의 공식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국제경기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우리의 실력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1962년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6인제 경기에서 준우승을 하였으며, 1969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청소년배구대회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의 일본을 물리치고 남녀 모두 우승을 차지하였다. 올림픽의 전적을 보면, 1964년 동경대회에는 부진하였으나 1968년 멕시코대회에서는 여자 4위, 남자 7위의 전적으로 기반을 구축하였고,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여자팀이 동메달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또, 197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팀은 우승, 여자팀은 준우승을 함으로써 일본과 자웅을 겨루고 있다. 최근까지도 우리나라의 배구는 국제적으로 실력을 과시하여,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팀 2위, 여자팀 3위를 하였으며, 1996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 2위, 여자 2위를 하였고,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2위를 하였다.
참고문헌
『파워배구』(채홍원, 형설출판사, 1982)
『배구』(서울대학교체육연구소, 삼화출판사, 1981)
『체육실기지도서』(이긍세 외, 동화출판사, 1979)
「배구」(이긍세,『스포츠씨리즈』5, 동양문화사, 1982)
「배구」(서울신문사 출판국, 『문교부체육교육자료총서』26, 1975)
Volleyball(Shondell, D. S. and Mananamas, J. L. M., New Jersey, Prentice·Hall, Inc.)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야구[野球, baseball]
야구의 영어 명칭은 1루, 2루, 3루, 홈에 4개의 베이스를 사용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들 야(野)’ 자에 ‘공 구(球)’ 자를 쓰므로, 야구라는 말에는 넓은 들판에서 공을 가지고 하는 게임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야구의 기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크리켓(cricket)이 라운더즈(rounders)가 되고 그것이 발달해 베이스볼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배트와 작은 공을 사용하는 놀이가 성행했다. 이를테면 포코너즈(four corners)라든가 피더(feeder), 라운더즈 등인데 그것을 영국 이민자들이 미국에 전해 널리 퍼뜨렸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 이전에는 동부 해안 지방에서 주로 행해지다가, 19세기 중엽 무렵 미국 각지에 보급되어 발달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경기 방식은 간단했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가 친 다음 베이스로 달려갔고, 수비수 역시 공을 잡자마자 베이스를 향해 달렸다. 수비수가 먼저 베이스에 도달하면 아웃, 타자가 빨리 베이스에 다다르면 세이프가 되는 식이었다. 당시에는 선수 수도 일정하지 않았고, 베이스의 위치도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베이스는 단순히 말뚝을 박거나 구멍을 파서 지정했다. 그 뒤 1830년에는 보스턴에서 라운더즈를 모방한 타운볼(town ball)이라는 경기가 시작되었다. 3년 후인 1833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또 비슷한 시기 뉴욕에서도 저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의 타운볼이 성행했고 그것이 발전하여 비로소 베이스볼이 되었다고 한다. 야구의 기원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설은 군인이었던 애브너 더블데이라는 사람이 1839년 미국 뉴욕에서 최초로 야구를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그 설에 따르면 1·2루 사이와 2·3루 사이에 2명씩 수비수를 두며, 11명이 한 팀이 되어 경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곧 적지 않은 반론에 부딪혔다.
어떤 사람들은 더블데이가 단지 라운더즈를 응용했을 뿐이라며 비웃었고, 1750년 이전에 이미 베이스볼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영국에 있었다는 기록도 발견됐다. 더욱이 1789년에 출판된 한 그림책에도 베이스볼이란 제목의 글이 삽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더블데이가 스스로 야구를 창안했다는 설은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어쨌거나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야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1841년경 베이스가 고정되었고, 1845년에는 니커보커즈라는 최초의 야구팀이 조직되었으며 경기장도 현재와 같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6년에는 한 팀을 9명으로 구성하는 규칙이 제정되었고, 니커보커즈 팀과 거기서 분리되어 나간 뉴욕나인 팀 사이에 최초의 공식 야구 경기가 펼쳐졌다.
그 후 1857년 헨리 카드웍이 규칙을 대폭 개정해 양 팀의 공격과 수비를 9회로 한정하는 룰이 만들어졌다. 또한 1867년 월리엄 커밍즈가 커브를 고안하는 등 투수의 투구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타자들이 단 1점도 뽑지 못하는 셧아웃(shutout) 게임도 심심찮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투수에게 갖가지 제한이 가해지게 됐는데, 베이스온볼스(base on balls) 규칙이 제정된 것도 그 한 예이다. 1869년에는 마침내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라는 최초의 프로 야구 팀이 창단되었다. 그리고 1875년 신시내티·세인트루이스·루이스빌 등에서 잇따라 프로 야구 팀이 생겨나 내셔널리그(national league)가 탄생했다. 프로 야구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초기부터 뜨거웠다. 그러자 1882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새로운 리그가 만들어졌고, 1901년 아메리칸리그(american league)로 발전했다.
그때부터 미국 프로야구는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라는 양대 리그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와 함께 야구 규칙과 경기 기술도 다양한 변화를 선보여 희생번트(sacrifice bunt), 히트앤드런(hit and run) 등이 등장했고 좀더 효율적인 베이스러닝(base running)이 강조되었다. 미국 프로야구는 1920년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팀을 옮긴 베이브 루스가 54개의 홈런을 날린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어설픈 구식 야구 시대가 가고, 공격과 수비 양면에 걸쳐 더욱 세련된 기술의 현대 야구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비단 프로야구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아마추어 야구의 수준도 부쩍 높아지면서 관중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바야흐로 야구의 황금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우리나라에 야구가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1905년이었다. 당시 선교사로 온 미국인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시초였다. 그 뒤 우리나라 야구는 꾸준히 발전해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3월 27일 지금은 사라진 서울동대문야구장에서 역사적인 첫 경기가 열렸는데, 엠비씨(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대결에서 이종도 선수가 연장 10회에 끝내기 만루홈런을 친 엠비씨 청룡이 승리했다. 2014년 현재 한국 프로야구 구단은 ‘두산 베어스’, ‘엘지(LG) 트윈스’, ‘넥센 히어로즈’, ‘에스케이(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기아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엔씨(NC) 다이노스', 'kt 위즈' 10개 팀이다. 1986년 ‘한화 이글스’(당시는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고, 1991년에 지금은 없어진 ‘쌍방울 레이더스’가 참여하면서 8개 구단 체제가 확립됐다. 그 후 몇몇 구단의 팀 명칭이 바뀌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현재는 10개 구단 체제가 운영되고 있다.
[경기 방식]야구는 9명씩 구성된 2개 팀이 교대로 공격과 수비를 하면서 경기를 진행한다. 공격 팀이 상대 투수가 던지는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들고 1·2·3루 베이스를 거쳐 홈플레이트를 밟으면 1점을 얻는다. 진루를 하는 방법은 안타뿐만 아니라 베이스온볼스나 히트바이피치드볼(hit by pitched ball)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또 홈런(home run)을 치면 타자와 함께 베이스에 나가 있는 모든 주자들이 한꺼번에 홈플레이트를 밟아 득점을 올리게 된다. 공격 방법 중에는 도루도 있다. 주자가 수비를 하는 팀의 허점을 이용해 다음 베이스로 진루하는 것을 말한다. 도루는 타격이나 베이스온볼스, 히트바이피치드볼, 수비 팀의 실책 등과 상관없이 자신의 힘으로 진루할 경우에만 인정된다.
영어로는 스틸(steal)이라고 하므로 2명의 주자가 동시에 도루를 하면 ‘더블스틸’, 홈플레이트로 도루를 하면 ‘홈스틸’이라고 한다. 공격 팀은 1번부터 9번까지 미리 타격 순서를 정한다. 이 순서는 경기 중에 바꿀 수 없다. 타격 순서 가운데 홈런 등 장타력이 뛰어난 타자들은 주로 3~5번으로 기용된다. 그들을 특별히 클린업트리(cleanup trio)라고 일컫는다. 클린업트리오는 팀 동료들이 안타 등으로 베이스에 나갔을 때 큰 타구를 날려 득점을 올리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특히 4번 타자는 팀을 대표하는 강타자인 경우가 많다. 수비를 하는 팀은 9명의 선수가 각 베이스를 비롯해 미리 정해진 위치에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한다. 그 포지션은 투수·포수·1루수·2루수·3루수·유격수·좌익수·중견수·우익수이다. 그 가운데 투수는 야구 경기에서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다. 투수가 공을 잘 던지면 상대 팀 공격이 시작부터 완벽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투수는 공을 던지는 폼에 따라 오버핸드스로(overhand throw) 투수·언더핸드스로(underhand throw) 투수·사이드암스로(sidearm throw) 투수로 구분할 수 있다. 오버핸드스로 투수는 팔을 머리 뒤쪽으로 넘겨 머리 위로 휘두르며 던지는 식의 투구 방법을 이용한다. 언더핸드스로 투수는 팔을 허리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듯이 투구한다. 일명 ‘잠수함 투수’라고 불린다. 사이드암스로 투수는 오버핸드스로와 언더핸드스로의 중간쯤 되는 폼으로 팔을 어깨 높이로 해서 던진다. 오버핸드스로보다 팔이 약간 내려온 형태로 공을 던지는 투수도 있는데, 그런 유형은 스리쿼터스로(threequarter throw)라고 한다. 공격 팀은 3명의 선수가 아웃되면 수비 팀과 공·수를 교대하게 된다.
이렇게 한 차례씩 진행되는 공격과 수비를 1단위로 해, 이것을 회 또는 이닝(inning)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야구 경기는 9회까지 공방을 벌여 승패를 가른다. 야구 경기의 볼카운트는 스트라이크(strike)와 볼(ball)로 구분된다. 타자는 3번째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으면 아웃이 선언되고, 4번째 볼 판정을 받으면 베이스온볼스가 돼 1루로 걸어 나간다. 스트라이크의 경우 경기장 밖으로 공이 날아가는 파울볼도 투 스트라이크까지는 스트라이크 볼카운트로 기록된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아무리 많은 파울볼을 쳐도 볼카운트에 기록되지 않는다. 파울볼 때문에 최종적으로 스트라이크아웃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야구 경기의 심판은 4명이다. 홈플레이트 뒤에서 볼카운트를 판정하는 1명의 주심과 1·2·3루 각 베이스 근처에서 경기에 대한 판정을 내리는 3명의 부심으로 이루어진다. 야간 경기의 경우에는 라이트 및 레프트 선상에 선심을 각각 1명씩 배치해 판정의 정확도를 높이는 경우도 있다.
[경기장]야구 경기장은 홈플레이트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고, 내야와 외야로 구분된다. 내야는 4개의 베이스를 꼭짓점으로 한 다이아몬드 형태이며, 외야는 내야를 벗어난 지점부터 펜스가 둘러쳐진 곳까지 포함된다. 야구장을 만들 때는 먼저 홈플레이트의 위치를 정한다. 그리고 그 지점부터 38.79m의 거리를 재서 2루 베이스를 설치한다. 그 다음 홈플레이트와 2루 베이스를 기점으로 각각 27.43m가 교차하는 지점을 확인한다. 홈베이스에서 봤을 때 그 오른쪽이 1루이며, 왼쪽이 3루가 된다. 결국 홈베이스와 2루 베이스 사이를 제외한 각 베이스의 거리는 모두 27.43m인 것이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밟는 투수판과 포수가 공을 받는 위치인 홈플레이트의 거리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그 거리는 18.44m. 베이스는 주자가 득점하기 위해 신체의 일부로 반드시 접촉해야 하는 4개의 지점을 말한다. 그 모양을 살펴보면 1·2·3루 베이스는 정사각형 형태의 직육면체이다. 한 변의 길이는 38.1cm이고, 두께는 7.6~12.7cm이다. 그와 달리 홈플레이트는 오각형이다. 투수 방향 한 변의 길이가 43.2cm이며 좌우 타석 쪽 양변의 길이는 21.6cm, 그리고 포수 쪽 삼각형 모양의 돌출된 두 변은 각각 30.5cm이다. 대형 야구장의 경우 관중석은 내야석과 외야석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내야 관중석에 더 많은 좌석이 설치되며, 소규모 구장은 외야에 관중석이 없는 곳도 있다. 대부분의 야구장에서 1루 쪽에는 홈팀 팬들이, 3루 쪽에는 원정 팀 팬들이 앉아 응원을 펼친다. 흔히 야구의 꽃은 홈런이라고 한다. 한 방의 홈런으로 경기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홈런이 되려면 타자가 친 공이 외야를 지나 펜스를 넘어가야 한다. 야구장마다 홈플레이트에서 펜스까지 거리는 일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잠실야구장과 문학야구장의 경우 가장 먼 중앙 펜스 거리는 125미터이다. 그와 달리 대구야구장과 무등야구장은 120미터이다. 대전에 있는 한밭야구장은 중앙 펜스 거리가 114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레프트와 라이트 쪽 펜스 거리는 중앙 펜스보다 보통 20m 이상 짧다. 야구장에 깔린 잔디는 천연 잔디와 인공 잔디로 구분할 수 있다. 천연 잔디는 말 그대로 자연에서 나고 자라는 살아 있는 잔디이다. 그에 비해 인공 잔디는 합성섬유로 만든다. 관리가 쉽고 사계절 초록 빛깔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선수들이 부상을 당할 위험이 높다.
[경기 용구]야구공은 코르크(cork)나 고무 등의 재료로 만든 작은 심에 실을 감은 뒤, 말가죽이나 쇠가죽 두 쪽으로 감싸서 단단하게 만든다. 둘레는 22.9~23.5cm, 무게는 141.7~148.8g이다. 두 쪽의 가죽을 묶는 실밥 수는 108개. 실밥은 야구공의 속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실밥이 없으면 정면의 공기 저항은 줄어들지만 측면과 후면의 저항이 늘어나 구속이 떨어진다. 배트는 아마추어와 프로에서 사용하는 것이 다르다. 아마추어 야구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을, 프로 야구에서는 나무로 만든 것을 쓴다. 나무 배트는 주로 물푸레나무나 단풍나무로 만들며, 반드시 한 종류만 사용해야 한다. 굵기는 가장 굵은 부분의 지름이 7.3cm, 길이는 106.8cm 이하여야 한다. 무게에 대한 제한은 없다. 글러브는 야구 선수들이 착용하는 가죽 장갑을 일컫는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그물 모양으로 막혀 있어 공을 잡기 편리하다. 글러브는 선수들의 포지션마다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이를테면 포수 글러브는 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공이 잘 빠져나가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 또한 내야수의 글러브가 외야수 것보다 조금 작은 편이며 무게도 가볍다.
그 이유는 내야수가 날렵하게 공을 잡아 재빨리 던져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포수와 1루수가 사용하는 글러브는 특별히 미트(mitt)라고 부른다. 야구 선수는 타석에 들어설 때 반드시 헬멧을 써야 한다. 그 중에서도 포수는 흔히 마스크라고 불리는 특수 제작된 방호용 헬멧을 착용하도록 되어 있다. 더불어 타자들이 쓰는 야구 헬멧에는 한쪽에 귀 덮개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마이너리그나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규정에 따라 양쪽 모두 귀 덮개가 있는 헬멧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 팀의 감독과 코치, 선수들은 똑같은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는다. 주요 구기 종목 가운데 감독과 코치까지 선수들과 함께 유니폼을 입는 경우는 야구밖에 없다. 프로야구는 한 팀이라도 홈 경기와 원정 경기의 유니폼이 서로 다르다. 홈 경기에는 주로 흰색 계열의 단순한 디자인이고, 원정 경기에는 화려한 색상의 유니폼을 입는다. 그 밖에 포수의 가슴에 대는 보호 용구인 프로텍터, 포수의 정강이에 대서 무릎 이하 부분을 보호하는 레그가드 등의 용구도 있다.
야구 경기
야구장
▲다이아몬드 구획선
야구야구는 투수가 던진 공을 타자가 쳐서 베이스로 살아나가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구기 종목으로 체육의 기본 기술이 골고루 필요한 인기 스포츠이다.
출처: 스포츠 백과(체육학대사전)
축구[蹴球]
정의
11명이 한 팀이 되어 발로 공을 차서 몰고들어가 상대편 골문에 넣음으로써 승패를 겨루는 경기.
내용
발을 주로 사용하며 스피드가 있고, 각종 기술의 순간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는 남성적인 운동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한 팀이 11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팀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매우 중요시된다. 90∼120m의 터치라인, 45∼90m의 골라인으로 된 직사각형 경기장 내에서 이루어지며, 경기시간은 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으로 총 90분이고, 15분간의 하프타임이 있다. 공은 둥근 가죽제품으로 되어 있으며, 바깥둘레 68∼71㎝, 무게 369∼453g이다. 가죽 색깔은 흰색 또는 흰색과 검은색을 섞어서 꿰맨 두 가지가 공인되어 있다. 경기는 공을 가지고 두 팀이 중앙선의 센터 서클 중앙에서 앞으로 킥오프(kick-off)하면서 시작하여, 킥 · 드리블 또는 헤딩으로 패스, 상대편 골에 슛을 하여 성공하면 1점을 얻는다. 또한,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 고의로 반칙을 당하였을 때, 페널티킥마크에서 공을 차서 직접 골에 들어가면 득점이 된다. 심판은 주심 1명, 선심 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심은 경기의 진행과 각종 결정을, 선심은 볼이 경기장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볼이 어느편의 것인지를 알려주는 일을 한다. 축구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기원전 6, 7세기 경 고대 그리스에서 행하여지던 하패스(Harpaston)이라는 게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경기가 로마에 전하여져 무사들의 훈련이나 군대스포츠로 발전하다가 로마인들이 영국을 침략하였을 때 영국에 소개되었다.
그 뒤 11세기 덴마크가 영국을 점령하였다가 물러간 뒤 그들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덴마크인의 두개골을 발굴, 하패스톤 경기를 함으로써 마음껏 울분을 풀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에 퍼졌고, 근대축구경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다. 영국에서의 초기 축구는 선수의 수도 제한이 없었고, 골도 1마일 가량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간 제한도 없었다. 특히, 사순절 전의 화요일은 평민 모두가 참가하는 축구의 날이 되어 군중이 직접 축구를 하거나 관람자로서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규칙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때인데다가 참가자 수가 너무 많고 승패에 집착하여 경기가 거칠고 싸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위기간(1314∼1581) 동안에는 법으로 금지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와 금지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평민들에 의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뒤 청교도 시대의 종말과 함께 운동이 부활되자 축구경기는 대단한 환영을 받으면서 재개되었다. 영국의 각 학교는 제한된 운동장 공간에 맞추기 위하여 변형 응용시켰으며, 이러한 추세는 고등학교로부터 옥스포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뻗어나갔다. 1862년 드링(Thring,J.C.)은 최초의 경기규칙을 작성하였는데, 선수의 수는 10명으로 되어 있었다. 1863년 많은 팀의 대표들이 런던에 모여서 영국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를 결성하고 드링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이 규칙을 받아들인 팀들은 어소시에이션풋볼(Association Football)팀이라 부르다가 그 뒤에 미식축구(American football)와 구별하기 위하여 축구(soccer)라고 고쳐불렀다. 이 때문에 경기의 이름이 풋볼에서부터 어소시에이션풋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경기는 영국으로부터 유럽의 다른 나라로 퍼져갔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확산되었다. 1904년 이전에 이미 전세계에는 각 국가별로 40개의 축구협회가 창립되었다. 1904년에 국제축구연맹(FIFA)이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되어 경기규칙을 단일화시킴으로써 어느 나라에서나 모두 단일화된 경기규칙 아래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1908년에 개최된 제4회 런던올림픽대회 때부터 축구가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 국제축구연맹의 가맹국은 점차 늘어나서 축구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97년 말 현재 FIFA가맹국은 198개국이다. 축구와 비슷한 운동은 서양이 먼저 스포츠로서 발전시켰을 뿐 우리나라 · 중국 · 일본 등에서도 축구운동경기는 옛날부터 행하여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축국(蹴鞠)’이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우리나라 축구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이 젊었을 때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는데,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자락을 잘못 밟아 옷고름이 떨어져나갔다고 하였고, 『구당서(舊唐書)』에도 고구려인들은 축국을 잘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축구와 같은 운동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고, 조선 초기까지 전하여 내려왔으나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에 그 빛을 잃게 되었다. 한편, 조선 말기에 서양식 근대축구와 공이 들어오면서 현재와 같은 축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882년(고종 19) 영국군함 플라잉호스(Flying Horse)가 입항시 군인들에 의하여 소개되었다고 하나 체계적인 교육과 보급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 외국어학교 교사인 마르텔(Martel)에 의하여 1904년 4월 관립외국어학교에서 체조 과목의 일부로 축구가 채택된 이후부터이다. 1906년 3월 11일에는 궁내부 예식원주사인 현양운(玄暘運) 등 30여 명이 모여 대한체육구락부를 조직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과 삼선평에서 최초의 축구경기를 가졌다. 당시의 축구경기는 선수 인원의 제한없이 양팀 수가 같으면 경기가 성립되었고, 골문도 너비와 높이에 일정한 규격 없이 골키퍼의 키를 표준삼아 적당히 정하였으며, 경기시간도 제한이 없어 어느 팀이건 지쳐 쓰러져 백기를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1921년 2월 11일부터 4일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26년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축구팀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등 축구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928년 1월에는 숭실학교가 전일본중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5월 20일 조선아식심판협회(朝鮮亞式審判協會)가 발족되어 축구 규칙을 중심으로 지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10월에는 경성과 평양의 경평대항전이 시작되었으며, 아식심판협회를 조선축구협회로 개편하고 일제 압박하에서도 축구보급에 노력하다가 1942년 해산당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며 일제의 강요로 해체되었던 조선축구협회를 재건하였고, 이듬해 6월 국제축구연맹에 정식 가입하였으며, 1948년 대한축구협회로 협회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였으며, 1954년 제5회 스위스월드컵에 아시아대표로 출전하였다. 또한, 1956년 9월에는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전승으로 우승, 한국 축구의 출범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를 제패하였다. 1960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우승함으로써 한국축구는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9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대회에 출전하여 체코에 6:0, 브라질에 4:0, 아랍공화국에 10:0 등으로 연속 대패하여 심한 진통을 겪었다. 그 뒤 연중무휴로 기술향상에 노력한 결과 1970년에 거행된 제14회 메르데카배쟁탈대회(8월), 제3회 킹스컵대회(11월),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모두 우승하여 3관왕이 되면서 세계 정상 도전에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1978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공동우승을 하였으며, 1983년 5월 멕시코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4강에 진입하는 급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1986년 월드컵축구대회에서는 아시아지역대표로 본선에 진출하였으며, 1986년 10월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2:0의 스코어로 쿠웨이트를 꺾고 단독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또한, 1986년 11월에 개최된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카타르를 꺾고 우승하였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월드컵까지 7회연속 월드컵축구대회에 아시아지역대표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이처럼 한국 축구는 현재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ㅜㅡ한편 1983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프로리그를 출범하여, 2013년 현재 K-리그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많은 우수한 선수가 유럽 각국과 일본 · 중국에 선수로 진출하여 활약하고 있으며,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선수들이 수입되어 K-리그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198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 축구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일본과 더불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한 바 있다. 서울을 비롯한 9개 도시에서 1개월여에 걸쳐 대회가 진행되었으며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은 4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참고문헌
『축구』(김의수, 동양문화사, 1982)
『축구의 이론과 실제』(이범제 외, 형설출판사, 1979)
『축구』(문교부, 서울신문사 출판국, 1975)
「축구경기규칙 및 자료」(대한축구협회, 199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2-16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