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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정부'가 '발해국 성터와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리겠다는 계획을 2025년 7월 공식 문건으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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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에는 135만 2500위안, 우리 돈 약 2억7000만 원 규모의 등재 전략계획 사업을 시작했고, 수행은 중앙정부 산하 '중국문화유산연구원'이 맡았다. 이 자료는 10월 8일 국정감사에서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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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 청장은 중국의 등재 추진 동향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옌볜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이 만든 20부작 숏폼 드라마 '발해 대흠무'도 이달 말 공개 예정인데, 중국 매체는 작품 속 발해를 '중화민족 다원일체'의 '지방 민족 정권'으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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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산은 아직 중국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2026년 10월 현재 중국 잠정목록 60건 가운데 발해 관련 유산은 없고, 본신청에 앞서 잠정목록을 거쳐야 하는 절차를 생각하면 시간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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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쑤저우에서 개최된 '세계유산위원회'가 중국의 고구려 유적과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을 함께 등재하자, 중국 관영 통신은 곧바로 고구려를 동북 소수민족의 지방 정권이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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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연구원' 원장 심백강은 '동북공정'이 형식상 끝났을 뿐 실제로는 진행 중이라고 경고해 왔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2022년 '중화문명 기원 탐구 사업'의 심화를 주문한 일을 그 공정이 문화 영역으로 번진 신호로 읽었다. 올해 지린성의 움직임은 그 경고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주장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펴더라도 사실관계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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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사에서 모셨던(당시 나는 형사팀에서 법률사무를 보고 있었다)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 관장은 검사 시절인 1978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부근에서 와당 파편 몇 점을 수습한 일로 기와 수집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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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검장으로 일하던 2002년 12월에는 25년 넘게 모은 기와와 전돌 1,87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 안에 발해 기와도 들어 있었다. 기증관은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다. 발해의 와당과 유물이 고구려의 것을 얼마나 닮았는지 나는 그곳에서 눈으로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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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3년 인터뷰에서 발해 와당이 중국보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우리 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러 발해 와당이 같은 양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읽어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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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발해 수막새를 분석한 연구는 '심엽형 복판연화문', 곧 심장 모양 겹꽃잎 연꽃무늬를 발해 수막새의 대표 형식으로 꼽았다. 그 연구는 발해 수막새가 고구려 수막새 문화를 이어받고,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보편 문화와 통일신라의 요소를 받아들여 만들어졌다고 정리했다. 바탕은 고구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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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발해 기와 전반을 살핀 연구는 일부 암키와에 고구려 평기와의 전형적인 시문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보고했다. 출토 수량과 종류로 따지면 발해 기와가 고구려 기와를 넘어선다는 평가도 같은 연구에 담겼다. 학계의 분석도 유창종 관장의 안목과 같은 결론에 닿았고, 그가 연해주 출토 와당에서 통일신라의 영향을 읽어 낸 것도 이 결론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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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말갈인을 다스린 나라였다. 이 설명의 출발점은 일본 사서 '유취국사'의 한 대목이다. '유취국사'는 헤이안 시대 학자 관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892년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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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 머물던 일본 학승 영충의 전언을 바탕으로 했다는 그 대목은 발해의 촌락이 모두 말갈 부락이고 '土人'(토인)이 적다고 적었다. 근대 일본 동양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발해 왕실과 상층을 고구려인이 조직했다고 주장한 뒤, 토인을 고구려인으로 읽는 해석이 교과서까지 내려왔다. '이원적 주민구성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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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목은 첫 문장에서 발해를 '高麗之故地'(고려지고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라 규정했다. 주현이 없다는 서술과 달리 송나라 때 엮은 당나라 정사 '신당서'는 발해가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고 기록했다. 특정 시기의 견문을 200년 넘게 존속한 왕조 전체의 구조로 확대 해석한 학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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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발해전은 696년 거란의 반란을 틈타 걸걸중상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옮겨 갔다고 적었다. 아들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고구려와 말갈의 병력으로 당군을 물리치고 698년 나라를 세웠다. 건국 주체부터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의 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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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의 출신을 앞서 편찬된 '구당서'는 '고려 별종'으로, '신당서'는 고구려에 붙어 살던 속말말갈로 적었다. 말갈 안에서도 오래 고구려 체제에 있던 속말부•백산부와 뒤에 복속된 흑수부는 처지가 달랐으니, 말갈 전체를 피지배층 한 무리로 놓는 설명은 사료와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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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무왕이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는 발해가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복고려지구거 유부여지유속),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되찾고 부여의 풍속을 지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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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문왕 대흠무는 일본에 보낸 표문에서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적었고, 일본 조정도 발해 사신을 '고려' 사신으로 부르곤 했다. 발해가 스스로 밝힌 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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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라는 국호는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데서 나왔지만, 발해는 일본을 향해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다. 발해 왕들은 '인안', '대흥', '건흥' 같은 독자 연호를 썼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은 아버지 문왕을 '황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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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나라 안에서 황제를 칭한 '외왕내제' 체제는 '지방 민족 정권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망한 뒤 934년 세자를 자칭한 대광현이 무리 수만을 이끌고 오자, 고려 태조 왕건은 그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내리고 왕실 족보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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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우리 역사로 처음 체계화한 이는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 유득공이다. 그는 1784년 '발해고'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고려불수발해사 지고려지부진야.)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겠다는 뜻이다. 그는 남쪽의 김씨와 북쪽의 대씨를 아울러 '남북국'이라 불렀다. 고려가 발해사를 썼더라면 여진과 거란에게 발해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할 명분이 있었으리라는 탄식도 같은 서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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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이 문헌으로 되찾은 발해를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들은 발로 되찾았다. 뒷날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은 1911년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해 '대종교'인 윤세복이 운영하던 '동창학교'에 머물며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금 태조를 다룬 '몽배금태조'를 차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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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신채호는 1914년 윤세복의 초청으로 환인에 한 해 동안 머물며 고적을 답사하고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다. 그는 고구려의 옛 도읍 집안현을 둘러본 감회를 '조선상고사'에 이렇게 적었다.
'집안현을 한 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
그는 왕릉 위에 올라 기와 조각을 살피고, 무덤의 크기를 걸음으로 재며 고구려의 규모를 몸으로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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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논설주필을 지낸 산운 장도빈은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신한촌에서 신채호와 다시 만났고, 연해주의 고구려•발해 유적을 답사했다. 병을 얻어 귀국한 뒤 펴낸 '국사'에서 그는 삼국 가운데 고구려를 중심에 두고,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국과 북국으로 나란히 서술했다. 유득공이 세운 남북국의 틀은 그렇게 근대 역사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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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27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고적 답사로 역사 연구를 이어 갔고, 일제 말 조선총독부가 끈질기게 권한 '중추원' 참의 자리를 거부하고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해방 뒤 그는 단국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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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는 '대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총전교 윤세복이 그를 수도와 교역자 양성을 맡은 교단 기구 '삼일원'의 원주로 임명했다. 그 임명장의 사본이 '대종교' 총본사에 있고, 원본은 장도빈의 아들인 장치순 전 중앙대 교수가 열람하게 해 주었다. 한가운데에 '三一園主를 任함'(삼일원주를 임함)이라는 큰 글씨가 있다. 이름 앞에는 산운과 함께 그가 쓰던 호 '대덕'이 붙어 있고, 날짜는 '대종교'가 쓰는 연호로 '개천 4411년 10월 18일'이라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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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에서 4천 년 민족사를 부여족이 성하고 쇠한 역사로 서술하며, 단군의 정통이 부여를 거쳐 고구려로 이어졌다고 썼다. 그 서술은 단군에서 발해의 멸망까지를 한 흐름으로 다뤘다. 고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 발해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이 '부여정통론'을 민족사학은 민족사의 한 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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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은 '신단민사'와 '배달족역사'에서 단군조선과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계보를 세우고 발해•요•금•청까지 '배달족'의 나라로 넣었으며, 고려와 요•금, 조선과 청을 '남북조'로 서술했다. 그는 1917년 '대종교'의 거점을 만주 화룡현으로 옮겼다. 1934년 '대종교' 총본사는 발해의 옛 도읍터인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천전' 건립을 서두르던 1942년 11월 19일, 윤세복을 비롯한 간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그 가운데 10명이 고문과 옥고 끝에 숨졌다. '임오교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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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인 위당 정인보는 1935년 1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단군에서 삼국시대까지를 다룬 이 글은 신문이 정간된 1936년 8월에 멈췄고, 해방 뒤 '조선사연구' 상하 두 권으로 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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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종교인으로 언론계에 몸담은 민세 안재홍은 고대사 논문을 모아 '조선상고사감'을 펴냈는데, 신채호와 정인보의 발상에서 출발해 연구를 한층 깊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인보는 한학을 익혔고, 안재홍은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앞서 본 장도빈은 한성사범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마쳤다. 세 사람 모두 근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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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대에서 사학을 전공한 이병도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일했고, 해방 뒤에는 서울대 사학과 창설에 참여해 문교부 장관과 학술원 회장까지 지냈다. '친일인명사전'에도 그의 이름이 올랐다. 안재홍이 손진태, 이인영과 함께 이끈 '신민족주의사학'은 민족주의의 관념성에 기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정인보는 7월 31일, 안재홍은 9월 21일 북으로 끌려갔다. 손진태와 이인영도 납북되면서 그 학맥은 남쪽에서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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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발해사 박사 1호'가 나온 해는 1991년으로, 유득공이 '발해고'를 쓰고 207년이 지난 뒤였다. 발해사는 그만큼 늦게 자란 분야다. 소련, 중국과 국교가 없던 냉전기에 연해주와 만주의 발해 유적은 우리 학자들의 발이 닿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그 주인공 한규철은 중국에 갈 수 없던 시절 대만에 가서 발해사를 공부했다고 2006년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사실 발해사 해가지고 취직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동북아역사재단'도 '동북공정' 뒤 이 분야 연구자가 늘어난 듯 보이지만 신진연구자 수는 그리 늘지 않았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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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종 관장은 2016년 펴낸 '와당으로 본 한국고대사의 쟁점들'에서 금과 후금, 곧 청도 발해처럼 우리 역사로 다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근거는 원나라 때 엮은 금나라 정사 '금사'의 첫 권이다. '금사'는 금의 시조 함보가 '初從高麗來'(초종고려래), 곧 처음 고려에서 왔고 불교를 좋아한 형은 고려에 남았다고 적었다. 금의 황릉이 북송보다 고려 왕릉 양식에 가깝다는 연구도 나왔다. 그의 제안은 낯설지 않다. 박은식이 환인에서 '몽배금태조'를 쓰고 김교헌이 금과 청을 '배달족'의 나라로 넣은 지 10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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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금사' 첫 권은 '金之先 出靺鞨氏'(금지선 출말갈씨), 곧 금의 선조가 말갈에서 나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금 태조 아골타는 요와 싸우면서 발해인에게 여진과 발해가 본래 한 집안이라고 호소했다. 시조의 출신을 잣대로 삼으면 거꾸로 된 주장도 막기 어렵다. 18세기 후반 청 건륭제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는 발해의 계통과 강역을 만주의 원류 안에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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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이 '발해고'를 쓰던 무렵 청은 이미 발해를 자기 뿌리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혈통을 잣대로 쓰는 경쟁에는 끝이 없다. 발해에 대한 우리 주장의 근거는 지배층의 혈통에서 찾기 어렵고, 발해가 스스로 '고려국왕'이라 적은 국서에서 찾을 수 있다. 금과 청에 같은 잣대를 댄다면 그들이 고구려나 고려를 잇는다고 밝힌 기록부터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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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동북아역사재단'의 학술지 '동북아역사논총'은 '한중 사료의 비교와 발해상'을 특집으로 꾸려, 금대 자료 속 발해인의 이미지와 '만주원류고'의 발해 인식을 다룬 논문을 실었다. 유창종 관장이 바란 '금•후금고'와 방향은 다르지만, 금과 청의 기록에서 발해의 흔적을 좇는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은 재단 사업의 첫머리에 동북아시아의 역사정립을 위한 조사•연구를 두었다. 그가 요청한 연구도 그 범위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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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현재 영토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운다. 1271년부터 1368년까지의 원나라와 1644년 베이징 입성부터 1912년까지의 청나라만 합쳐도 비한족 왕조가 중원을 360년 넘게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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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을 잣대로 삼으면 지금의 국경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이 기준을 따르면 평양에 도읍한 시기의 고구려와 연해주의 발해 유적은 중국사 밖에 남고, 이 틈을 메우려 '동북공정'은 '과거의 영토'라는 기준을 덧붙였다. 필요에 따라 바뀌는 잣대는 기준이라 부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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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적은 중국과 러시아, 북한에 나뉘어 있다. 연구 경로도 여럿이어야 한다. 1990년 한러 수교 뒤 우리 연구기관들은 발해 염주의 치소로 비정되는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발굴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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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특별법'은 국가가 세계유산 관련 국제기구, 국제 전문가단체, 다른 국가와 협력관계를 증진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두었다. 같은 법은 '국가유산청' 청장이 북한의 세계유산 등재를 지원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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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 등재 때 남쪽 정부와 학계가 이를 뒷받침한 전례도 있다. 중국 정부가 잠정목록에 올리기 전인 지금, 세계유산 등재 요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 서술이 굳기에 앞서 사료 근거를 국제 학계에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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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중국 '문물출판사'가 낸 용두산 고분군 발굴보고서에는 허룽에서 나온 3대 문왕과 9대 간왕의 황후 묘지가 실렸고, 간왕 황후의 묘지는 '발해국'이라는 국명으로 시작한다. 같은 허룽 땅 청호촌에는 발해를 '배달족'의 역사로 써 넣은 김교헌이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 '북로군정서'를 이끈 서일과 함께 잠들어 있다. '삼종사'로 불리는 이들의 유해조차 해방 81년이 지나도록 고국으로 모셔 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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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댈 것은 사료다. 그 가운데 하나를 중국 고고학자들이 직접 땅에서 꺼내 책으로 펴냈다. 간왕 황후의 묘지석에 새겨진 '皇后'(황후), 곧 황제의 짝을 가리키는 글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