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믿음} 이창모 <김병훈 교수의 능동 순종 신학에 대한 기포털(정윤석) 기사에 대한 소감>
https://archive.ph/KgUx9
위 링크 글에서 “까지” 뜻을 모르는 바보 Wolf창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바울은 빌 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에서도 죄인들의 구원이 예수님의 단 하나의 순종,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았음을 더욱 분명히, 아예 노골적으로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문해력이 낮은 서철원파 목사들, Wolf이철, Wolf진남, Wolf만옥, Wolf대운ㅡ수원 경성교회 김대운 목사ㅡ, Wolf창모를 보노라면, 떠오르는 바보가 있다. 대략 10 년 전 2011년 2월, {뉴스앤조이}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증거한 위 빌립보서 말씀에 적힌 “비워”를 내세워 “신성을 비운 이 땅 위 예수님은 오직 사람이셨다.”며 ‘이 땅 위 예수님 신성’을 부정하는 [예수님은 신인(God-Man)인가? (완결편)]를 올렸던 바보, 이단 박창진이다.
자, ‘영원하신 성삼위 성자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으로서 겸손, 성육신의 순종을 시작으로 십자가 순종까지 드러난 겸손’을 증거한 빌립보서 2장 5절~8절을 독해해 보자. 그 겸손은 ‘십자가에서 죽는 순종’ 행위 단 하나만을 뜻하는가? 바꿔 말하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행위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겸손)”에 속한 행위가 아닌가?
내 질문이 어려운가?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바른 믿음}에 수많은 개혁신학자들을 이단시하는 쓰레기 글들을 올린 Wolf이철을 시작으로,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Wolf진남과 Wolf만옥이 {바른 믿음}에 이단몰이 쓰레기 글들을 올림으로써 Wolf이철 뒤를 잇고, 서철원파 목사들 가운데 그래도 좀 더 바보스럽게 보이지 않았던 Wolf창모까지 그들 뒤를 이어 {바른 믿음}에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단몰이 쓰레기 글들을 올리고 있다. 곧 그 쓰레기 글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 링크 글이다.
위 문장에서 ‘{바른 믿음}에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수많은 개혁신학자들을 이단몰이하는 쓰레기 글들’을 올린 Wolf는 모두 몇 명인가? ‘① Wolf이철, ②Wolf진남, ③ Wolf만옥, ④ Wolf창모’, 모두 ‘네 명’이다. 그러나 “까지”를 독해하지 못하는 바보 Wolf창모는 ‘한 명’으로 답하고 있다. 알량한 성경 원어 실력을 내세워 스승 서철원 목사님을 욕보이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은 위 링크 기사에서 옮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정윤석 기자에 의하면 김 교수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2권 16장 5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종이 전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졌다고 봤으며,”라고 했다. 강의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김 교수는 칼빈도 기독교 강요(2권 16장 5절)에서 “능동 순종”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취지로 강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 교수가 제시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2권 16장 5절~7절의 제목으로 제시한 “The effects of the obedience and death of Christ, 5-7”(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의 효과, 5-7)을 보면, 칼빈도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구별하여 나눈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김 교수는 이를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 제시했겠지만, 그러나 칼빈의 “The effects of the obedience and death of Christ”에는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의 의미는 전혀 없다. 오히려 칼빈은 십자가의 죽으심의 순종과 다른 순종이 주는 효과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둘을 구별했을 뿐이다.
칼빈은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기독교강요 2권 16장 5절을 시작할 때, “Christ has redeemed us through his obedience, which he practiced throughout his life”(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는 평생 동안 그의 순종을 실행하셨다)라고 말하고 난 뒤에, 곧 이어 본 설명에서 “he accomplished this by the whole course of his obedience.”(그는 그의 순종의 전 과정에 의해 이를 성취하셨다)라는 말로, “그의 순종”이 “십자가의 죽으심”임을 말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칼빈은 뒤이어서 “그가 그의 순종의 전 과정에 의해 성취한 “이를(this)”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롬 5 :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느니라)을 제시한다. 칼빈은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에 롬 5:19에서 바울이 단수로 표기한 “한 사람의 순종”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칼빈이 “he accomplished this by the whole course of his obedience.”(그는 그의 순종의 전 과정에 의해 이를 성취했다)의 근거 본문으로 제시한 롬 5:19을 염두에 두면, 예수님이 자신의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 성취하신 “이를(this)”이 “십자가의 죽으심의 순종”이었음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윗글은 문해력이 뒤떨어지는 나머지 거짓의 아비 사탄처럼 간교한 말장난을 친 글이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5항> 1문단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 원광연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622쪽에서 옮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어떻게 해서 죄를 제거하셨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분리된 상태를 없애셨으며, 또한 의를 얻으셔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해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한 우리 일반적인 답변은 곧, 그분 복종의 전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이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증언으로 증명된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또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 그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 ··· 려 하심이라.”(갈 4:4~5) 그리해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시에도 자신이 아버지 명령을 순종으로 시행함으로써 의의 한 부분을 이뤘다고 단언하셨다. (마 3:15) 요컨대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부터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 성취하신 “이를(this)”이 “십자가의 죽으심의 순종”이었음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칼빈 선생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의義’를 “요컨대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부터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며 ‘그리스도께서 전체全體 생애에서 이루신 의義,’로, ‘종의 형체를 취하신 비하를 시작으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비하까지’로 넓게 말씀하시는데, “십자가 죽으심의 순종”으로 좁게 말하는 독해, 참으로 경이로운 독해력이다. 경이롭기는 하지만, “순종의 전 과정”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에서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독해다.
≪칼빈은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에 롬 5:19에서 바울이 단수로 표기한 “한 사람의 순종”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음은 ‘존 칼빈 {로마서 주석}’ <로마서 5장 19절 주석>에서 옮기는 글이다. ‘존 칼빈 {로마서 주석}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13)’ 171쪽에서 옮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됐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흡족하시게 해드림으로써 우리를 위한 의를 확보하신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의의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사도는 이 의를 “순종하심”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의가 어떤 종류의 의인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율법 일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인이 넘어지면, 그에게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의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석에서 칼빈 선생님께서는 ‘부분 순종’이 아닌 ‘전체 순종’을 말씀하신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아 무덤에 묻히신 뒤 율법의 축복인 칭의를 받아 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순종, 행위의 공로(義)는 ‘율법의 저주를 받았던 십자가 순종’이라는 일부만으로 제한되는가? 아니면, ‘성육신을 시작으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이라는 전체를 뜻하는가?
빌립보서 2장 8절에 적힌 “까지”를 독해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문해력으로 {바른 믿음}에 글들을 올려 봐야 그 글들은 쓰레기 글들일 뿐이니, 바보 Wolf창진과 똑같은 바보 Wolf창모는 자중하기를 바란다. 이단몰이 붓을 꺾기 바란다.
…(글이 길면 가독성이 떨어지므로 다음에)…
덧말: 성경원어에 까막눈인 나는 빌립보서 2장 8절 우리말 번역은 오역인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