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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안씨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 1377∼146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자료 안지(安止, 1377∼146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탐진(耽津: 康津).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 찬성 사종(士宗)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중시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權?)·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1455년(세조 즉위)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가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한 뒤 그를 불러 관작을 주니, 그때 그의 나이 80세가 넘었는데도 강건하므로 세조가 기뻐하여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그는 시를 지을 때 속된 말을 섞어서 빨리 잘 짓고, 짧은 서간에까지도 거의 시로 말뜻을 이끌어갔다. 그는 또 해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을 베꼈다. 뒤에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세조10년(1464) 4월 12일 영중추원사 봉조청 안지가 병으로 인해 체직을 청하나 윤허하다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 조선조 때에 전직 관원을 대우하기 위하여 정 3품의 벼슬아치가 사임한 뒤에 특별히 준 벼슬. 실무는 보지 않으며 다만 의식(儀式)이 있을 때만 관청에 나가 참여하며 종신토록 녹봉(祿俸)을 받음) 안지(安止)가 상서(上書)하기를, “신(臣)이 초야(草野)의 외로운 몸으로서 외람되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길[仕途]에 오른 다음, 4조(朝, 여기서는 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세조(世祖)의 4대(代)를 말함)를 섬겨 관직(官職)이 성(省)·부(府)의 자리에 이르렀으니, 그 은총(恩寵)과 영광(榮光)이 지극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죄과(罪科)가 있어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故鄕)에 돌아갔는데, 장차 거기에서 몸을 마칠까 하였더니, 전하(殿下)께서 즉위(卽位)하시던 초기에 신에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제수(除授)하였다가, 얼마 아니되어 직질(職秩)을 건너 뛰어 검교 찬성(檢校贊成)의 1품 관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노신(老臣)은 특별히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 감격이 골수(骨髓)에 맺혀서 기쁘고 황송스럽기가 끝이 없었습니다. 신사년(1461 세조 7년) 여름에 우거지(寓居地)에서 올라온 지 겨우 며칠만에 전하(殿下)께서 신을 불러서 보시고 고인(故人)이라고 일컬으시면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특별히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하시고, 또 어제(御製)의 서한(書翰)을 내려 주었습니다. 천일(天日)이 밝게 되돌아와서, 이어서 내의(內衣)를 내려 주시고, 계양군(桂陽君)에 명(命)하여 그것을 신의 몸에 입혀 주시고 일어나 춤을 추도록 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찬연(粲然)히 크게 웃으시고 인하여 심히 즐거워하다가 날이 저물어 잔치를 파(罷)하였습니다. 이 날의 은총(恩寵)과 영광(榮光)은 전(前)보다 더 빛나며 후(後)에도 없을 터인데, 하물며 꿈속에 천상(天上)에 올랐다가 깨어나 하토(下土)에 있는 듯하여 더욱 감격한 마음을 무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지난 가을에 특별히 신에게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검교 영중추원사(檢校領中樞院事)에 임명하고 10일 이내에 명하여 검교(檢校)의 두 글자를 떼어버리고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으로 고쳐서 제수(除授)하게 하고, 4품의 과록(科祿)을 받도록 하고 아울러 혜양(惠養)의 은혜를 내려 주시니, 그 영광과 은총이 분수에 넘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부끄럽게도 보답(報答)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성산(聖算, 임금의 목숨)이 만수 무강(萬壽無彊)하시기를 축원(祝願)할 뿐이요, 어찌 이런 생각을 버릴 때가 있겠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사람들도 오히려 종남산(終南山,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진(秦)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임금을 기린 시(詩)임)을 생각한 자가 있었는데, 하물며 노신(老臣)은 성상(聖上)의 은혜와 지우(知遇)를 지나치게 입어서 항상 화산(華山)의 아래에 있으면서 금궐(金闕) 가운데를 출입(出入)하고 천안(天顔)을 가까이에서 받들면서 여러 번 은총의 대우를 받았으니, 어찌 연곡하(輦?下, 임금이 타는 수레 밑)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정(情)이야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나이가 80세를 넘었고, 또 지난 겨울에 처음으로 바람을 맞아 풍질(風疾)이 발작하여 병세가 나았다가 더하였다가 무상(無常)하더니, 지난 달에 더욱 악화되어 베개에 엎드려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환궁(還宮)하던 날을 당하여 봉영(奉迎)할 수가 없어서 길 왼쪽에서 창연(愴然)히 취화(翠華, 임금 행렬의 깃발)를 바라보고 한갓 스스로 머리를 들고 첨망(瞻望)하였을 뿐입니다. 신의 천식(喘息)도 아침 저녁으로 견디기 어려우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餘生)을 마치기를 원(願)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께서 신의 직책(職責)을 면(免)하게 하여 고향에 돌아가도록 내쫓아 본디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의 노병(老病)이 날로 위독(危篤)하고 다리와 무릎이 절름거리고 약(弱)하여서 전라도(全羅道)의 본가(本家)까지도 말을 타고서 돌아갈 수가 없을 듯합니다. 사사로이 스스로 통념(痛念)하건대, 노중(路中)에 들것[?床]을 걸머 메고 갈 사람 약간 명과 초료(草料)·죽반(粥飯)을 지급(支給)하라는 문자(文字, 공문서)를 담당 관원에게 명하여 주시고, 이어서 복호(復戶)하여 주신다면 다행하겠습니다. 이것이 또 노신(老臣)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전율(戰慄)을 이기지 못하고 부복(俯伏)하여 대죄(待罪)할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안지가 또 상서(上書)하여 외손(外孫) 등에게 벼슬을 주도록 청(請)하니, 명하여 이조(吏曹)에 회부하였다. 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안지의 거처(居處)에 연달아 식물(食物)을 보내 주라.” 하였다. 그 때 안지의 나이가 이미 80여 세였다. 처음에 임금이 즉위(卽位)하자, 안지가 와서 뵈었는데, 임금이 옛친구로서 그를 대우하니, 안지가 창(唱)하기를, “살아서 성주(聖主)를 만나니 오히려 늦은 것을 혐의스러워 하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 친구를 서로 만나는 데는 시작과 끝이 없다네.” 하고, 시신(侍臣)들에게 명(命)하여 이를 잇달아 창(唱)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임금의 은총과 지우(知遇)가 남보다 달라서 몇 년이 안되어 관직이 극품(極品)에 이르렀다. 이 때에 이르러 사직(辭職)하고, 또 진정(陳情)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몇 가지 일을 청(請)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안지의 집이 본래 빈한(貧寒)하여 그가 고향에 돌아갈 적에 행장(行裝)이 몇 바리[?]의 짐에 차지도 아니하였고 풍모(風貌)가 중인(中人)에 지나지 않았는데, 눈썹이 기다랗고 머리가 하얗게 희었다. 광화문(光化門)을 지날 때 들것[?床]에서 내려서 궁궐(宮闕)을 향하여 배사(拜謝)하고 통곡(痛哭)하다가 가니,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안지가 일찍이 권제(權?)와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하는 데 부실(不實)하여 벼슬이 떨어지고 호남(湖南) 지방을 널리 유람(遊覽)하였는데, 사람들이 혹은 그를 비난하고 비웃었으나 언짢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시(詩)를 잘 지어 간고(艱苦)한 일을 각박하게 처리하지 않고 여유 있는 태도를 취하고 스스로 고은(皐隱)이라 호(號)하였다.
『국역 조선왕조실록』세조10년(1464) 8월 4일「안지(安止)의 졸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使) 안지(安止)가 졸(卒)하였다. 안지의 자(字)는 자행(子行)이고, 전라도(全羅道) 탐진(耽津) 사람이다. 문과(文科)에 제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고, 이조 참판(吏曹參判)·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겼다. 《고려사(高麗史)》사건으로 고신(告身)을 수탈(收奪)당하였다가 경태(景泰) 6년(1455)에 소환(召還)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으로 되었다. 남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졸(卒)하니, 시호(諡號)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는데, 글을 널리 많이 본 것은 문(文)이라하고, 온유(溫柔) 강직(剛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은 ‘정(靖)’이라 한다. 안지는 충후(忠厚)하고 문장을 읽어서 잘 짓고 해서(楷書)에 능하였는데, 무릇 시(詩)를 지을 때 이어(俚語)를 섞어서 붓을 잡으면 이루어졌고, 편간 척독(片簡尺牘)에 모두 시(詩)로써 뜻을 나타냈다. 마음가짐이 유연(悠然)하여 세정(世情)에 얽매이지 않았고, 집이 매우 가난하고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스스로 ‘고은(皐隱)’이라 불렀다. 임금이 즉위하여 불러서 벼슬을 주었는데, 그때 안지의 나이가 80세였으나, 기력(氣力)이 강건(强健)하니, 임금이 기뻐서 시(詩)를 지어서 내려 주었다. 안지가 평생 남의 선(善)한 것을 칭찬하고, 오로지 이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안지는 본래 아들이 없었는데, 80세 이후에 첩(妾)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어서 시부(詩賦)의 절구(絶句)에다 절사(絶嗣)를 잇게 할 뜻을 보이었으므로, 안지가 졸(卒)하자 제주관(題主官, 신주(神主)에 글을 쓰는 관리) 유문통(柳文通)이 장차 봉사자(奉祀子)로 쓰려 하니, 적출(嫡出)의 사위 황맹수(黃孟粹)가 그 아이는 장인[婦翁]의 소출(所出)이 아니라고 하여 가로막았다. 안지의 시(詩)를 외우는 자가 있어서 황맹수의 말이 막히니, 유문통이 마침내 이를 썼다.
조선 전기의 문신 조신(曺伸)이 지은 『소문쇄록(謏聞瑣錄)』 중에서
文靖公安止。號皐隱。爲集賢殿大提學。時方文士趨附安平大君。獨不能致公。屢折簡邀請。或書屛簇以寄之。則曰。大君簡何可遙答。當親謝謁云。而竟不至。一日諸文士有製述。爭其高下曰。此老當知之。爲質之。公故以高者爲下。下者爲高。諸士大夫笑曰。此老衰耗喪心不足較。遂絶延請。光廟卽位甚重之。以閔粹史事。公爲提調不免論。貶于全羅道本貫康津縣。下諭監司。每進膳封必賜。公受答以啓。如是優遊數年。一日朝參。上至御座。而申文忠公叔舟韓忠誠明澮諸公不及班。乃進謝曰。適有故友。自遠方至。共訪款懷。不覺晩到。死罪。上問曰遠方之友誰也。對曰安止。上喜曰。吾亦欲見。火急召來。當爲此人設宴。卽令進?呈。終日歡洽。命陞秩崇政。
(번역문)
○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의 호는 고은(皐隱)인데 집현전 대제학으로 있을 때, 당대의 문사들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따랐으나, 공만은 추종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청하기도 하고, 혹은 병풍ㆍ족자에 글씨를 써서 보내면 공은 말하기를, “대군의 편지를 어찌 멀리 앉아서 답하리오. 마땅히 몸소 가서 뵈오리다.” 하고는, 마침내 가지 않았다. 하루는 안평대군 처소에서 여러 문사가 글짓기를 하여 그 고하를 다툴 때에 말하기를, “그 늙은이가 잘 알 것이다. 그에게 물어보자.” 하였던 바, 공은 일부러 글이 잘된 것을 못 되었다 하고, 못 된 것을 잘 되었다고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웃으면서, “이 늙은이가 나이가 많아서 정신이 없으니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하고는, 드디어 청하기를 그만두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공을 매우 중히 여겼지만 민수(閔粹)의 사옥(史獄) 때 공이 제조였기 때문에 논죄를 면하지 못하여 그의 본관인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에 좌천되었다. 세조가 감사에게 글을 내리기를, “매양 음식물을 위에 진상할 때에, 반드시 그에게 주고 공의 답례하는 글을 받아서 아뢰라.” 하여, 이렇게 수년 동안 편히 잘 있었다. 어느 날 조회 때에 임금(성종)이 어좌에 납시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와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 등이 늦게 와서 조반(朝班)에 미처 참예하지 못하고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를, “마침 옛벗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늦게 되는 줄 몰랐사오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먼 데 친구라는 것이 누구인가.” 하므로, 안지(安止)라고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기뻐 말하기를, “나 역시 그를 보고 싶으니 급히 불러오라.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리라.” 하고, 곧 음식을 많이 차리고 종일토록 즐기고는 명하여 숭정(崇政)에 승진시켰다.
조신(曺伸, ?~?) 본관 창녕(昌寧). 자 숙분(叔奮). 호 적암(適庵).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 지었으며, 어학에도 능해 1479년(성종 10) 통신사(通信使)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문명(文名)을 날렸다. 왕이 친히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 글이 아주 뛰어나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선(特選)되었다. 역관(譯官)으로 명나라에 7회, 일본에 3회 왕래하였다.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수십 편의 시를 지어 수창(酬唱)하여 이름을 날렸다. 중종의 명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고, 만년에는 금산(金山)에 은거하며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저서에 《적암시고(適庵詩稿)》 《소문쇄록(謏聞瑣錄)》 《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제10권 皐隱安先生。官雖高而心愈下。家在仁王洞。茅舍蕭條。而山水淸奇。每以諷詠爲娛。雖朋友尺牘之間。皆用詩句。其祭先祖考。必齋沐致誠。未嘗少懈。雖至屢空晏如也。官至一品。年八十。以老退于鄕曲。就闕下四拜大哭而出。行者聞之。無不悲嘆。
(번역문)
고은(皐隱) 안지(安止) 선생은 벼슬은 비록 높았으나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집이 인왕동(仁王洞)에 있어 초가집이 쓸쓸했으나 산수가 맑고 기이하여 항상 시가(詩歌) 읊조림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비록 친구와의 편지를 쓸 때에도 모두 시구(詩句)를 사용하였다. 선조께 제사지낼 때에도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비록 식량이 자주 떨어져도 마음이 편하고 침착하였다.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80이 되어 늙어서 시골에 물러갈 적에 대궐에 나아가 네 번 절하고 크게 곡하고 떠나니, 지나가는 사람이 듣고 비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1984년 태학사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국조문과방목을 영인본으로 간행한『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2권 p.124에 탐진안씨 안지(安止,1377∼1464)의 문과방목 기록이 남아있다.
생원 안지(安止) 領樞典文衡文靖有文名卒于金堤村庄被論不入文衡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문형(文衡,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문명(文名)이 있었고, 김제(金堤, 전라북도 김제)의 시골집에서 졸했다. 피론(被論)을 당해 문형안에 입록되지는 못했다.
安平慶邀不往 作簡不答 文士制述取考必倒其高下 文士笑其哀 安平亦不●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불러도 가질 않고, 편지를 해도 답장이 없었다.....
부조증의 기록은 없고, 처부는 송충손(宋忠孫)이라 기록되어있다. 호는 고은(皐隱)이고 강진인(康津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간행자 및 간행년 미상(조선후기 혹은 일제초기로 추정)의 목판본에 탐진안씨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 1377∼1464)의『고은선생문집(皐隱先生文集)』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고은안선생유고 해제
『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는 안지(安止 ; 1394~1474)의 시문집이다. 안지의 본관은 탐진(耽津:康津),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이다.
이 책은 1772년(영조 48)에 후손 炳喜가 간행하고, 傍後孫 晩坤이 1912년에 중간하였다. 3권 1책이며, 목활자본이다.
권수에 세계도 1편, 권 1과 권2에 시 10수, 발 2편, 묘지명 1편, 묘갈문 1편, 전(箋) 2편, 권3은 부록으로 시 2편, 습유(拾遺) 1편, 「조곡서원창건기(早谷書院創建記)」 및 봉안문 각 1편, 「충현사제액후소지(忠顯祠題額後小識)」, 신도비문, 행장, 실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품격이 고절(高絶)하며 기상이 청일(淸逸)하다. 그 가운데 「제압구정(題狎鷗亭)」과 「문주팔경도영(雯州八景圖詠)」이 대표작이다. 발 가운데 「권매헌선생집발(權梅軒先生集跋)」은 스승인 권우(權遇)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그 출간경위와 스승의 행적 및 교육하는 방법 등을 설명한 것이다. 전 중 「용비어천가전」은 『용비어천가』의 초안 125장을 필사하여 올리면서 쓴 것이다. 이 밖에 변계량(卞季良)의 문집을 간행할 때 그 소감을 밝힌 「변춘정계량집발(卞春亭季良集跋)」과 병조판서 정연(鄭淵)의 묘지명, 예조판서 이이기(李二錡)의 묘갈문 등이 있다.
안지는 조선이 나라의 기틀을 다져가는 초창기에 『용비어천가』를 짓고, 시의 품격이 뛰어났으며 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로서 그의 문집은 나라가 차츰 자리가 잡혀가던 당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안지는 찬성 사종(士宗)의 아들이다. 1414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중시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 공조참판으로 권제(權口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 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1455년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에 복관이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한 뒤 그를 불러 관작을 주니, 그때 그의 나이 80세가 넘었는데도 강건하므로 세조가 기뻐하여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그는 시를 지은 때 속된 말을 섞어서 빨리 잘 짓고, 짧은 서간에까지도 거의 시로 말뜻을 이끌어갔다. 그는 또 해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베꼈다. 뒤에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912년에 간행(重刊)된 탐진안씨 안지(安止 ; 1394~1474)의 시문집『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에 실려 있는 1906년 유도헌(柳道獻, 1835~1909)이 지은「안지(安止)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안원린(安元璘) - 안우(安祐) - 안현(安顯) - 안윤기(安允基) - 안사종(安士宗) - 안지(安止)로 가계가 이어짐을 밝히고 있다.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集賢殿藝文舘大提學檢校左賛成謚文靖皐隱安先生神道碑
我國家休明之運。肇於獻英之世。啓萬億年無强之業。時則有若文靖公皐隱安先生。羽翼朝端。黼黻王猷。大鳴國家之盛。猗歟休哉。謹按公諱止。字一之。號皐隱。耽津人。文成公。其逺祖也。世稱儒宗。中世有諱元璘。始封耽津君。男諱祐。以定難功。襲封鰲城君。當恭愍朝。紅巾之賊。乘輿播越。京城淪没。公爲都元帥。與金得培李芳實。撃賊屢捿。及其奏捷。未達行在。而爲賊臣金鏞所害。圃隱鄭先生。爲文以祭之。至我文宗大王。命立崇義殿於麻田郡。祭麗太祖。而卜智謙以下諸名臣。列次配享。公與金得培李芳實。皆與焉。事載國乘。曾祖諱顯。贈輔國。祖諱允基。贈右議政。皇考諱士宗。兵曺判書。居金㔭。公太宗朝。中司馬。十四年甲午。文科親試一等。十六年丙申。重試。拜監察。世宗朝。歴集賢殿藝文舘大提學。世子左副賔客。兼政堂文學。檢校。䝺成。文宗端宗兩朝。加階。至輔國。領中樞府集賢殿事。知春秋舘成均舘事。公生而奇偉。見許於名賢。長以好學。受業於梅軒權公遇之門。文學贍富。歴事四朝。位望隆洽。成宗甲午。終于金堤村庄。謚文靖。墓在平皐寒節山禮判公墓下。有表大石。配礪山宋氏。貞敬夫人。與公同窆。嗚呼。公以太平宰輔。克享遐年。事功彪怲。世宗乙丑。承命。與權踶鄭麟趾䓁。撰穆翼度桓。以至太祖太宗。積累開剙之蹟。賜名龍飛御天歌。又命崔恒。朴彭年。姜希顔。申叔舟。李賢老。成三問。李塏。辛永孫等。注觧共十卷。爲集賢殿大提學。時。文士趍附安平大君。公獨不能致。安平屢折簡要見。或書屏簇。以寄之。則曰大君簡。何可遙答。當親謝謁。而竟不見。一日諸文士。有製述爭其高下。曰此老當知之。爲徃質之。公故以高者爲下。下者爲高。諸文士。笑曰此老衰耗喪神。不足較。遂絶延請。盖不欲爲衒能也。光廟卽位。以閔粹史事。公爲提調。不免論貶于本貫康津縣。上下諭監司。每膳封餘必賜。公如是優閒者。十數年。掌文衡。館閣文字。皆出於公手。一時交逰。皆推公爲第一。所著文稿。奚啻汗牛充棟。而兵燹之餘。存者無幾。只斷爛數幅而己。男健。官都事。孫男受命。官昌寧縣監。曾孫仁碩。官慶山縣令。以下不錄。今其十五世孫弼坤。冑孫鍾璨甫。袖家蔵小錄。示不侫。責以顯刻。屢辤不獲。玆略首末。盖聞碑者悲也。悲先德之無徴。克擧是役。尤可書也。公之墓地。在湖南金堤郡。而子孫嵗一澆奠。今於龜蚨之屹。固當表䢖於墓下。而諸雲仍。皆在慈仁地。今成一大村。村後有早谷祠。而今見掇仍其地。搆數間屋宇。享以四仲月。其爲寓慕興感。其義一也。羹墻於是。寐於是。亦可以想像而興起也夫。 柔兆(丙)敦牂(午)[1906]暮春。前都事。豊山。柳道獻。謹撰。
류도헌(柳道獻, 1835~1909)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현민(賢民), 호는 전원(田園). 아버지는 류진익(柳進翼)이고, 둘째아버지인 류진한(柳進翰)에게 입양되어 대를 이었다.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이다.류도헌(柳道獻, 1835~1909)은 류주목(柳疇睦)의 문인으로, 안동 하회마을에 거주하였다. 과거에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실패한 후 출사(出仕)의 뜻을 끊고 산림에 은거하면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탐독하고 성심수양(誠心修養)에 힘썼다. 한시동(韓始東)·이준구(李濬九)·이태중(李泰重)·김상흠(金相欽)·이만창(李晩昌)·이염재(李念在) 등과 도의(道義)로써 서로 교류하였다. 1893년(고종 30)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전원집(田園集)』 8권 4책이 전한다.
1912년에 간행(重刊)된 탐진안씨 안지(安止 ; 1394~1474)의 시문집『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에 실려 있는「안지(安止)의 행장(行狀)」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國家英陵之際。治教休明。文獻大備。時則文靖公皐隱先生。遭遇昌辰。大振儒鐸。蔚然爲百世儒宗。於乎偉矣。公諱止。字一之。皐隱其號也。安氏之先。出自順興。高麗文成公諱裕。其肇祖也。中世有諱元璘。受封耽津。子孫仍貫焉。是生諱祐。討賊有勳。襲封鰲城。當恭愍之際。紅巾孔熾。京城䧟没。公爲都元帥。與金得培。討賊累捷。而捷報未達行在。爲賊臣金鏞所害。圃隱先生。爲文以祭之。曾祖曰顯。贈輔國。祖曰允基。贈右議政。考曰士宗。兵曺判書。居金堤。太宗朝。公陞司馬。甲午。文科親試一䓁。丙申。重試。拜監察。世宗朝。歴選集賢殿藝文舘大提學。世子左副賔客。兼政堂文學。檢校。賛成。至文宗端宗兩朝。加階。至輔國。中樞府集賢殿事。知春秋舘成均舘事。公儀狀奇偉。一時英賢皆以國器稱賞。及長。受學于梅軒權公遇之門。朝益暮習。文學蔚然。歴事四朝。位望幷峙。一時朝野之人。莫不想望其風采矣。嘗與權踶鄭麟趾䓁。承命。撰穆翼度桓四祖及太祖太宗積累開剙之蹟。爲龍飛御天歌。宣掦聖德。炳若丹靑。雖伊謨說訓。何以過焉。時。安平大君。招集文士。士爭趍附。而公獨不徃。大君累書請邀。或書屏簇而寄之。公日大君之書。何敢㘴答。當躬謝。竟不見。其操執。有如此。久掌文衡。凣館閣文字。皆出於公手。一時交逰。推公爲苐一。一日諸文士。以製述。爭高下。來質之。公乃以高者爲下。下者爲高。盖不欲爲衒能也。諸文士。笑日此老神精耄遁。不足較也。光廟御極。以閔粹史事。論貶于康津。成宗甲午。考終于金堤村庄。自上賜謚文靖。墓在平皐寒節山禮判公墓下。有表石。配貞敬夫人礪山宋氏。與公同窆。男健。都事。孫男受命。昌寧縣監。曾孫仁碩。慶山縣令。其後嗣子孫。多在慈仁縣。今成一大村。盖其遺風逺韻。百世而不斬也。嗚呼。桑海翻㥘灰㐲。當日文獻蕩然。而杞宋則今以晚生謏識。欲溯尋於曠世之下。叙次其萬一。亦難矣。公之後孫應坤。跋渉數百里來。懇甚至。其追慕之情。令人艶服。姑以史乘所載。略叙其槩。以俟慱雅之君子云爾。
1571년 간행된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양곡집(陽谷集)』12권에 순흥안씨(1파) 안순필(安舜弼, 1477~1514)의 묘비명(墓碑銘)이 있는데, 평양조씨(平壤趙氏) 문중의 조득인(趙得仁)과 영중추 대제학(領中樞大提學) 안지(安止)의 사위로 문천군수(文川郡守) 조강문(趙康門)이라는 기록이 있다.
配趙氏。亦平壤望族。視公秩。贈貞敬夫人。高麗時。有中樞院副使趙瑩。娶侍中李文幹女。生都僉議司事平壤伯仁規。娶司宰卿趙溫呂女。生宣授懷遠大將軍高麗國副元帥,檢校贊成瑞。娶僉議中贊韓康女。生密直提學千祀。娶興寧君金子昌女。生工部典書文信。娶左諫議大夫金漢龍女。生生員瑨。娶判校李贇女。生工曹佐郞乘。娶都摠制,大提學卞季良女。生僉知中樞院事得仁。登文科。娶領中樞大提學安止女。生文川郡守康門。卽夫人之考也。娶判司宰監事禹元老女。以成化甲午十二月二日。生夫人。
고려 때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조영(趙瑩) - 평양백(平壤伯) 조인규(趙仁規) - 조서(趙瑞) - 조천사(趙千祀) - 조문신(趙文信) - 조진(趙瑨) - 공조좌랑(工曹佐郞) 조승(趙乘)은 도총제 대제학(都摠制大提學) 변계량(卞季良)의 따님과 혼인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조득인(趙得仁)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영중추 대제학(領中樞大提學) 안지(安止)의 따님과 혼인하여 문천군수(文川郡守) 조강문(趙康門)을 낳았다.
贈領議政安公墓碑銘 幷序 a_023_480a
左議政安公。自述其先考?行狀。因伯氏按節而南也。徵銘於某曰。吾考?歿已久矣。墓道之石。尙未樹立。今欲勒銘幽墟。第念。吾父不幸早世。無官位履歷。故備敍兩門世系。以爲子孫永慕之地。不忘追遠之情。請爲文記實而詔後。余居止比隣。朝夕從遊。稔知其賢。不敢以不文辭。謹按。公諱某。字某。順興大姓。世襲貂蟬。金紫相望。遠祖諱孚。高麗時。守太師門下侍中。娶禮賓寺同正禹允成女。生宣授中書省左右司郞中,海東儒學提擧,行僉議中贊文成公珦。從祀文廟。娶東宮侍讀學士金祿延女。生門下贊成事順平君于器。娶校書郞崔沖若女。生進賢館大提學順興君文淑公牧。娶中贊金台鉉女。生藝文館大提學文惠公元崇。娶中贊元善之女。生刑曹典書景質公瑗。娶政丞南暉珠女。生通政海州牧使贈禮曹參議從約。娶蓬原君鄭良生女。生檢校漢城尹璟。以五子登科。贈戶曹參判。卽公之曾祖考也。自文成至參議。皆由科第出身。致位宰相。參判娶開國功臣復興君趙?女。生仁厚。登武科。忠淸道兵馬節度使。贈兵曹判書。公之祖考也。娶進義副尉金義女。生珹。天文習讀。贈議政府左贊成。公之考也。?之父曰平安道兵馬節度使黃石生。以成化丁酉七月二十二日。生公。公性度寬裕。與物無競。平居謹愼自守。不事生?作業。與人交。信而有義。不苟然諾。至於孝友淳篤。撫諸弟。極其恩愛。雖不資學問。而通敏之才。無適不宜。人皆以遠到期之。勸之仕則曰。人之顯晦有時。不可妄求。年近不惑。始以蔭補忠順衛。階承義副尉。忽?疾不起。甲戌二月初二日也。葬于白川郡虎山洞先塋之側乾坐巽向之原。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三世贈官。皆以左相公貴也。配趙氏。亦平壤望族。視公秩。贈貞敬夫人。高麗時。有中樞院副使趙瑩。娶侍中李文幹女。生都僉議司事平壤伯仁規。娶司宰卿趙溫呂女。生宣授懷遠大將軍高麗國副元帥,檢校贊成瑞。娶僉議中贊韓康女。生密直提學千祀。娶興寧君金子昌女。生工部典書文信。娶左諫議大夫金漢龍女。生生員瑨。娶判校李贇女。生工曹佐郞乘。娶都摠制,大提學卞季良女。生僉知中樞院事得仁。登文科。娶領中樞大提學安止女。生文川郡守康門。卽夫人之考也。娶判司宰監事禹元老女。以成化甲午十二月二日。生夫人。及?。擇配歸于公。治內甚嚴。動遵禮法。睦姻?遇隣里。下逮婢使。俱得其歡心。敎子以義方。勸課讀書。夜以繼日。左相公與其兄觀察。克承敎戒。攻苦力學。年踰弱冠。同捷辛巳科。經閤諫署。出入回翔。備極榮養。季子?。年及志學。兩兄訓督甚勤。夫人輒止之曰。爾等同登大科。已致身雲路。心常悚懼。況望三子之俱顯耶。觀察爲養?外。又止之曰。我本固窮。但保家業。不願享專城之奉。以招滿溢之災也。丙申六月十五日。無疾而逝。?葬于議政公之墓。生三男二女。男長瑋。今爲全羅道觀察使。次卽左相公玹。次?。榮川郡守。女長適瑞興府使辛輔商。次適忠義衛李元凱。觀察娶贈昌城君成希雍女。左相娶縣監朴文?女。生三男一女。男曰繼善,光善,宗善。?娶化寧副守女。生一男三女。元凱生一男一女。曾孫男女幾人。噫。公有抱負。不試于世。而卒顯於兩胤。左相公淸忠重厚。位極台鼎。翊輔大平。群生繫望。觀察公文武全才。撫綏南服。公孤之擢。不朝卽夕。安氏累世衣冠之盛。至是大振。公雖不霑一命。而高官大爵之贈。終始榮耀。古有脩德於身而食報于後者。今於公見之矣。銘曰。
?歟安氏。系出順興。趾美聯休。繼繼繩繩。逮公兩世。名位暫虧。珠潛玉?。有蘊不施。篤生賢哲。允也大成。端委廟堂。濟川和羹。推恩追爵。三代有榮。王家植槐。于氏高門。我究其由。種德源源。瞻彼虎山。佳城鬱鬱。旣安且固。永保終吉。
1722년 간행된 권우(權遇, 1363~1419)의『매헌집(梅軒集)』1452년에 탐진안씨 안지(安止)가 쓴「매헌집(梅軒集)의 발문」이 남아있다.
梅軒先生集跋[安止] b_001_106a
余少也游泮水。梅軒先生爲大司成。長於成均。倡鳴道學。施敎不倦。四方尙學之士。聞風而至者日與雲集。時余受易于先生凾丈之下。一日先生論奇偶之數而曉譬之曰。此易知也。人每當飯。先執匙後下筯。匙單而筯雙。此其數也。但人自不察耳。余雖愚昧。竦然聞之。怳如有得。私竊以爲厥工豈知有陰陽之理寓於日用之間先後之中。然旣有天地自然之數。故雖陶冶之賤。亦不得不爲之然也。自是以後。因事知數。觸物觀理者。盖亦不少。服膺勿失。誓終吾身。先生眞吾師也。歲乙丑先生仲子兵曹正郞技來示予以先生之遺藁。乃曰吾先人所爲詩文不爲少矣。而多所亡逸。仲兄右承旨採。只錄若干首。未卒收輯而不幸先逝。此吾平生之痛恨也。自余奉閱以還。吟玩圭復。不忍釋手者有年矣。正郞今守錦山郡。馳書於余曰吾先人之藁。嘗欲刊行而未之果也。今監司成安金相公。先人之門生。亦圖其所以不朽。常加勸勉。而河東鄭相公已爲序。子其跋之。余惟先生長於勳閥。達於儒術。文章道德。與伯氏陽村先生爲甲乙。鳴於一時。其詩若文。如精金美玉。堅正絶雅。淸麗縝密。讀之愈久愈味。非精於學而深於道者。能若是乎。獨恨其所存太少耳。誠宜壽之梓而傳之後也。而况仲子之登第也。余以不才。獲參試席之末。余之於先生之門。緣分亦不淺矣。故不敢以文拙辭。追感昔年開示之恩。仍叙平日歎慕之情。於是乎樂爲之書。
景泰三年(1452)歲在壬申六月旣旬。資憲大夫前藝文館大提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耽津安止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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