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는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에서 기인하는 만큼, 소설 읽기처럼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이입하는 경험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소설 읽기는 타자의 삶 위에 자신을 얹어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자아를 확장케 합니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가해하고 불완전하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하지요.잘 쓰인 소설들은 모두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며 절대적인 선인이나 절대적인 악인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 정용준(소설 만세, 2022): "나는 소설을 한 사람의 삶에 들어가 그의 마음과 감정을 살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알고 확인하는 것을 넘어 알게 된 것에 책임감을 갖고 그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를 믿고 변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소설은 읽은 자로 하여금 그 사람의 자리에 서게 함. 소설 수업이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고 그 사람의 편에 공감하게 하는 것.
* 소설은 이율배반적인 상황, 원하지 않는 상황에 놓였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를 같이 얘기해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줌. 즉, 소설 수업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임. 자신이 가야하는 방향을 생각해 보게 하는 수업을 지향함.
"내가 어떤 글에서 한 말이지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대체로 옳다고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중략)
나는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예컨대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 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132-133쪽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마음껏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남을 욕하는 일은 쉽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보다 우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우쭐해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잘 쓰인 소설을 읽다보면 아무리 악한 인물이라도 등장인물을 마음껏 욕하기가 쉽지 않아집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내면을 들여다보기 때문이지요.소설을 읽는 시간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혹은 인식하지 않고 있었던 선과 악, 올바름과 잘못됨 사이의 영역을 바라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