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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그 잔상_ 30×30cm, 한지에 흙과 채색, 2013 |
그런데 아이 양육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에게 자신을 더 내려놓으라고, 더 비우라고 계속 요구했다.
“작업과 강의를 병행하면서 아이를 키우느라 전투하듯이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언니, 어린이집, 베이비시터 등 이리저리 아이를 맡기고, 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 후 작업실로 가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또래와 잘 어울리지 않던 아들이 자폐성향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적발달이 빨라 문제가 없다고 여겼는데.”
숲, 80×80cm, 한지에 흙과 채색, 2013 |
양재동에 있던 작업실을 집이 있는 안양으로, 다시 바로 집 앞으로 옮겼지만, 작업에 몰두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작업실로 가는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아이 때문에 작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면 아이가 미워질까봐, 한동안 아예 작업실에 가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하루 종일 아이와 붙어 지냈지요. 함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요. 그전까지는 가족에 대한 애착조차 별로 못 느낄 정도로 온통 나와 내 표현인 그림, 그리고 내 성공만을 보고 살았는데, 그런 저 자신을 깨뜨려나간 시간이었습니다.”
붉은 대지, 80×80cm, 한지에 흙과 채색, 2013 |
‘양육’에 눈을 뜬 그 시절, 그는 집에서 화분을 키우기 시작했다. 봄이면 새파랗게 싹을 틔우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마음이 기울었다. 붓을 잡을 수 없었던 때, 그는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가방을 만들었다. 대학시절부터 워낙 가방을 좋아했는데, 그림을 잡고 있지 못하는 시간에 틈틈이 가방을 만드는 것으로 표현 욕구를 풀어냈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가방이 그의 그림을 닮았다며 좋아했다. 가방을 만들 때는 그림에서는 조심스러웠던 색채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가방은 그의 그림에 영향을 끼쳤다. 다시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서 그는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바느질 자국과 같은 선을 그어 자연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작품들에서도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그의 시간들을, 그 시간들로 인해 성숙해가고 있는 작가의 내면 풍경을 읽을 수 있었다. 빨강·초록·노랑 원색으로 칠한 단순한 형태의 꽃잎과 열매, 나뭇잎들은 생명을 찬미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풍경... 그 잔상〉이란 제목을 붙였다.
“구체적인 풍경이 아니라 제 마음속에 남은 잔상, 풍경들이지요. 지나갈 때 보았던 그 꽃. 만개해서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꽃, 혹은 열매가 머릿속에 각인되었는데, 그걸 그린 것입니다.”
흔들림, 45×75cm, 한지에 흙과 채색, 2013 |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억울하기도 했지만, 쉰이 넘은 지금은 그게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단다. 아이를 키우면서 깨져보았기에 다른 삶을 존중할 수 있게 되었고, 누굴 만나도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은 풀잎, 야생화 하나를 봐도 생명의 숭고함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생명을 품었다 내어놓는 흙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결혼이나 가정이란 게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희생으로 유지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진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을 직접 보면 겹겹이 쌓은 물감 층에서 배어 나오는 깊이, 도자기와 같은 질감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제작 과정은 독특하다. 캔버스를 세 겹의 한지(삼합지)로 싼 후 흙가루(토분)와 어두운 색의 아크릴물감, 접착제인 바인더를 섞어서 밑칠을 한다. 얇게 칠하기를 다섯 번. 다음에는 먹과 분채물감을 번갈아 칠하면서 물감 층을 올린다. 나이프로 선을 긋고, 여러 번 사포질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래에 있는 물감 층이 드러난다. 그 위에 선명한 석채(돌가루)물감으로 형태를 그리기도 한다. 여러 개의 물감 층이 어우러져 한 화면을 구성하는 작품이다. 회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로 분장한 후 무늬를 긁어내는 분청사기 기법과 비슷하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대학원 시절 분청사기 전시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분청사기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한 외국잡지에서는 그의 작품을 공예로 소개하기도 했다.
여름, 45×75cm, 한지에 흙과 채색, 2013 |
분청사기 같고, 광목 같기도 한 뿌연 색깔을 내기 위해 갈색에서 노랑·흰색 등 어두운 색부터 밝은 색까지 100번을 번갈아 칠한다고 한다. 얼룩이 진 느낌을 살리기 위해 물감이 마르기 전에 물을 뿌리기도 한다. 친구들은 그걸 보고 “네 그림은 누룽지 같아”라고 한다. 그의 작업 과정은 워낙 복잡해 옆에서 봐도 좀체 파악하기 어렵다. 미대 동기생으로 16년을 함께 산 남편조차 정확히는 모른다고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고집하는 것일까.
“고등학교 때부터 박수근 그림을 좋아했고, 한국적 감성이 뭘까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한국인은 매끈한 것보다는 조금은 거친,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느낌을 내기 위해 흙가루를 섞어 칠하고, 사포질을 하면서 손맛을 살려보려고 했지요. 사포질하는 게 힘들어 기계를 사용해본 적도 있지만, 그런 맛이 나지 않더라고요. 대학원 시절부터 암각화의 원초적인 이미지, 분청사기의 무심하게 그려놓은 것 같은 문양에 이끌렸습니다.”
30×30cm, 한지에 흙과 채색, 2013 |
1992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가진 첫 개인전에서부터 그는 토분과 아크릴물감을 혼합해서 밑칠을 하고, 나이프로 벗겨내고 긁어내는, 지금과 같은 작업을 시작했다. 첫 개인전에 나온 작품들에서 암각화와 고분벽화의 이미지가 많이 보인다면, 1993년 전시에서는 분청사기의 문양이 등장한다. 두 번째 전시부터 그의 작품은 완판이 되어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는 작업만으로도 생활이 해결되는 전업 작가 대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동양화니 서양화니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한지의 섬유질이나 봉숭아물처럼 스며들고 깊이가 있는 동양화 물감 등 동양화 재료를 좋아해요. 그러나 한편 미국 작가 로스코의 색면 추상에 마음 깊이 끌리기도 합니다. 그림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일이라 생각해요. 제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는 용기 있는 편입니다. 그 덕에 산수화나 인물화만 그리게 하던 당시 동양화과 분위기를 박차고 나와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었지요.”
30×30cm, 한지에 흙과 채색, 2013 |
그의 작품은 기본 방향에서는 일관성을 가지되 끊임없이 변모해왔다. 얇게 여러 번 칠하는 요즘 작품에서는 예전 같은 두텁고 거친 질감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는 형상이 점점 더 없어지면서 추상성이 강해질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작업실을 아예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작업과 생활이 긴밀하게 연결되게 하기 위해서다. 밤 10시나 11시쯤 아이와 함께 자고 새벽 3~4시면 일어나 작업을 한다. 가족들이 늦게 일어나는 주말이면 새벽 4시부터 오전 10시까지 6시간이나 작업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 너무 좋다. 작업은 그에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작가여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모두 자신만의 생각, 삶의 방식이 있어요. 그들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로서 나만 특별하다는 의식이 점차 없어졌지요. 다만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가장 나인 것 같고, 좋고, 편안함을 느끼니까, 그게 제가 존재감을 느끼는 방식이니까 작업하는 게 중요하고, 계속 작업을 할 것입니다. 노력하는 데는 자신 있으니까요.”
이기숙 1988년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 1992년 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1992년 관훈미술관, 1998년 공평아트센터, 2005년 노화랑, 2010년 인사아트센터 등 개인전 20여 회와 다수의 단체전, 2인전 참여. 199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우수상, 1994년 동아미술제, 2001년 송은미술대전, 2003년 경기미술상(청년작가상) 수상. 성곡미술관, 안양시청, 아산재단 서울중앙병원, 주 폴란드 대한민국 대사관 등 작품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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