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난성 모소족 여인. 모소족은 우리에겐 낯선 모계사회를 이루고 산다. |
지대물박(地大物博)이란 말처럼 중국은 크고 넓고 다양한 게 무수히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참 신기한 게 모계사회를 이루고 사는 소수민족입니다. 윈난과 쓰촨 경계에 걸쳐있는 아름다운 로고호(瀘沽湖) 인근에 사는 모소족(摩梭族)이지요.
모소족은 산림이 울창한 지역에서 통나무를 다듬어 목릉방(木楞房)이라고 하는 전통주택을 짓고 삽니다. 이들의 살림집에는 모계사회의 독특한 습속과 특이한 문화가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부계사회에서 살아온 탓에 모계사회의 일상적인 가족관계와 혼인습속이 어떤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들의 살림집을 찾아가 모계사회의 속내를 탐방해보겠습니다.
1980년대에 도로 열려
모소족은 인구가 고작 5만여명에 지나지 않지만 모계사회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중국 고서에 ‘여인국(女人國)’ 같은 호기심 어린 별칭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아주 독특한 자신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지만, 중국의 공식적인 55개 소수민족 명단에는 빠져 있습니다. 모소족이 사는 로고호는 윈난성과 쓰촨성에 걸쳐 있는데 윈난에서는 나시족(納西族)의 한 갈래로 분류돼 있고, 쓰촨에서는 몽골족의 한 갈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나시족, 몽골족과는 다른 모소족임을 수차례 주장한 끝에 신분증에 모소족이란 족칭을 합법적으로 기재할 수 있는 권리는 획득했습니다.
로고호는 수면이 해발 2685m나 되는 고원의 아름다운 호수지만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오지 중 오지입니다. 원시삼림이 빼곡한 고산준령에 있습니다. 로고호에 접근하는 도로가 처음 열린 것이 1982년이라는 사실만 봐도 얼마나 오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윈난의 리장(麗江)에서 버스를 타면 거리는 200㎞ 정도지만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넘어가기 때문에 여덟 시간이나 걸립니다. 그만큼 외부와의 접촉이 없다시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깊은 산중에 사는 만큼 전통적인 살림집은 나무로 만든 집입니다. 원목의 양끝을 다듬은 다음, 가로 세로로 겹겹이 쌓아올려 우물 정(井) 자 형태로 벽체를 만들고, 지붕은 목판으로 덮거나 기와를 올립니다. 이런 집을 목릉방이라고 하는데 대량·천두식 구조와 더불어 중국 목조건축의 대표적 구조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릉방의 3칸짜리 2층 네 동이 ‘ㅁ’자를 이루는 방식을 정간식 합원(井干式 合院)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목조건축의 구조를 귀틀, 방틀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강원도 산간지방이나 울릉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건너편의 정방, 정방 왼쪽의 경방(經房), 오른쪽의 화루(花樓), 대문이 있는 문루까지 네 동이 마당을 둘러싸는 구조입니다. 정방은 주택의 중심인데 할머니의 방과 주방, 식량창고, 그리고 생사간(生死間)이라는 특이한 용도의 방들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정방 전체를 ‘할머니 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방은 아예 그 존재가 없습니다. 이들이 모계사회이기 때문인데, 집안의 가장은 여자입니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의 일은 할머니가 가장으로서 담당합니다.
모계사회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남녀 모두 평생 어머니 집에서 산다는 것이지요. 남자 가족구성원은 할머니의 남자형제거나 아들이거나 손자들입니다. 이들은 여자 가장 밑에서 가정의 일원으로 일을 하고, 나이가 들면 여자 가장을 보좌하게 됩니다. 우리들 관념으로는 쉽게 그 속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방에는 솥을 걸어두는 화당이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손님도 맞고 가정 대소사도 의논하고, 성인식도 치르고, 조상도 모시게 됩니다. 말 그대로 가정의 중심공간입니다. 이 화당 주위의 자리는 누가 앉는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할머니는 안쪽 자리에 앉고 그 맞은편은 할머니의 보좌역인 남자 형제가 앉습니다. 할머니의 바깥쪽은 할머니 다음 대를 잇는 어머니의 자리이고, 그 맞은편은 할머니의 아들이자 어머니의 남자형제가 앉을 수 있습니다.
딸들이 집안 대 이어
재미있는 것은 13세 미만의 아이들이 할머니 방에서 태어나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할머니 방 안쪽 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생사간이라고 하는 방이 하나 있는데,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에는 이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13세가 되면 그해 설날 할머니 방에서 ‘성정례(成丁禮)’라고 하는 성인식을 치르게 되지요.
이때 남자아이는 할머니 방의 좌측 기둥에 서서, 여자아이는 우측 기둥에 서서 할머니로부터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받습니다. 이 두 기둥은 반드시 한 그루의 나무를 베어 반으로 자른 다음 아래쪽은 여자기둥으로, 위쪽은 남자기둥으로 사용합니다. 남녀가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성인식을 하는 남자아이는 외삼촌이 입던 장삼을 물려받고,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장삼을 물려받을 뿐 아니라 화려한 장식을 합니다. 그리고 왼발로는 돼지고기를, 오른발로는 양식을 넣은 주머니를 밟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잘 먹고 행복하게 살라는 축원의 뜻이랍니다. 생사간은 장례를 치를 때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관념이 투영된 독특한 공간입니다.
할머니의 방을 중심으로 하는 정방은 아이들이 태어나 성장하고 성인이 된 후 저승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상을 모시며 식사를 포함한 일상의 집안 대소사가 모두 치러지는 곳입니다. 모계사회 가족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건축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방의 오른쪽에는 여자들이 기거하는 화루가 있습니다. 화루의 1층은 창고로 사용하고 층계로 올라가는 2층에는 두 칸 내지 네 칸의 방이 있는데, 이를 화방(花房)이라 부릅니다. 성인식을 치른 젊은 여자들이 기거합니다. 특징적인 것은 큼지막한 창문과 화려한 침상입니다. 화방의 창문은 채광과 통풍이라는 통상적 기능 이외에 남자들의 출입구라는 독특한 기능을 합니다.
결혼이 아닌 주혼
‘주혼(走婚)’이라고 하는 모계사회의 독특한 혼인습속은 바로 남자들이 이 화방의 창문을 드나듦으로써 이뤄지게 됩니다. 미성년 여자 아이들이 기거하는 경우에는 촘촘한 창살로 창문을 막아버려 남자들의 출입을 통제합니다. 주혼이란 ‘오고가는 것(走去走來)이 곧 결혼’이라는 말입니다.
모소족에게는 남녀가 여자의 방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성교제는 있어도, 두 남녀가 영속적으로 동거하며 부부가 돼 가정을 이루는 결혼제도는 없습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구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는 여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양육하게 됩니다. 물론 남자도 양육의 의무는 있지만 그것은 생자의 양육이 아니라, 어머니의 집에 살면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누이의 양육에 참여하는 의무가 있는 것뿐입니다.
남녀관계로 인해 상대방 집안의 일원이 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고, 두 집안 또는 두 남녀의 재산이나 경제활동도 전혀 섞이지 않습니다. 남녀가 헤어지는 것도 간단합니다. 남자라면 누군가를 보내 구두로 이별을 통보하거나, 여자에게 직접 오지 않겠다고 말하거나, 그저 오랫동안 여자를 찾아가지 않으면 됩니다. 여자도 남자가 찾아왔을 때 난색을 표하거나 자기 방에 들이지 않거나, 오지 말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사실 혼인이라기보다는 연애라고 하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설명을 들으면 대개의 남자들은 이들의 성관계가 난잡하다든지, 부모자식도 모른다든지, 남자들은 연애만 하고 가정을 부양할 의무가 없으니 마치 ‘남자들의 천국’이라도 되는 듯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랑의 상대를 각자의 의사에 따라 선택할 뿐이지 성생활이 난잡한 것이 아닙니다. 모소족 젊은 남녀가 상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면 대개 이렇습니다.
처음 마주치게 되는 것은 명절과 같은 공동의 연회나 축제 등에서입니다. 여러 청춘남녀가 함께 어울려 노래하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가는 상대가 생기면 둘만의 약속을 합니다. 처음 찾아갈 때에는 보통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깊은 밤에 갑니다. 남자가 여자의 방 밖에서 둘이 약속한 신호를 보내지요. 말고삐에 달린 종을 울린다든지 담뱃대로 창문을 두드린다든지 노래를 한다든지 악기를 연주한다든지, 여러 가지입니다. 이때 여자가 화방의 창문을 열어주면 들어가 밤을 지내지요.
근친혼·외도는 금지
밤을 지낸 남자는 해뜨기 전에 특히 여자의 손윗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창문을 통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렇게 시작됐다 해도 낮에는 남의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가사와 농사일 등에 매진합니다. 남녀관계는 밤이 되면 남자가 여자 집을 찾는 것으로만 성립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계는 며칠, 몇 달, 몇 년, 심지어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남녀가 각각 그들의 교제관계를 공개하기도 합니다. 공개한 다음에는 창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문으로 들어와 여자의 방으로 올라갈 수 있답니다. 이때에는 양쪽 집안에서 서로 예의를 갖춰 선물을 하는 등 대우를 해줍니다.
어머니의 혈연이 닿아 있는 상대는 근친혼의 관계가 되므로 주혼의 대상으로서는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공개된 연인인 경우 소위 외도를 하는 것은 예의를 벗어난 일로 간주되고, 사람들 앞에서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결코 문란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외도라는 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와 같은 법적·도덕적 결속을 전제로 한 동거결혼의 경우처럼 심각한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습니다. 부계사회의 관념에서 보면 여러 여자를 두루 섭렵하려는 남자에게는 모소족의 결혼제도가 참 편리할 것이라 생각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창문을 열어주고 아니고는 전적으로 여자가 주도권을 행사하기 때문이지요.
중국인 일부는 모소족을 향해 아버지도 모른다, 모녀가 한 남자와 교제한다, 부모자식도 없다는 식으로 폄하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편견이지요. 모소족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좋아하는 상대와 교제를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뿐입니다. 오히려 모소족은 남녀가 자유의지에 의해 좋은 감정에 충실할 수 있고, 부계사회의 결혼제도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부작용이 없다며 자신들의 제도를 자랑스러워합니다. 부계사회와는 다를 뿐이지 결코 틀리다고 강변할 것은 아니지요.
아버지는 없다
아이가 출생했을 때에도 우리와 크게 다릅니다.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여자가 키웁니다. 남자는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크게 아는 척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이를 낳을 때에도 남녀관계가 단절되지 않았다면 예물을 가지고 방문할 수 있습니다. 설날과 같은 명절이나 마을의 연회가 공개적으로 열릴 때에는 부자관계를 내색할 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남자는 아이에 대해 일절 권리와 의무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주혼을 ‘남불취, 여불가(男不娶, 女不嫁)’라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가족으로 들이지 않고, 여자는 시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모소족의 말로는 주혼은 ‘써써’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오고간다는 뜻입니다. 교제 중인 여자는 아샤(阿夏)라고 부르고 남자는 아주(阿住)라고 부릅니다.
주혼이 이들의 전통문화이긴 하지만 우리와 같은 동거결혼도 일부 있었습니다. 과거 ‘토사(土司)’라고 하는 토착 권력계층에서는 동거결혼이 있었고, 여자가 없는 가정인 경우 남녀가 합의해서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데릴사위와 유사한 경우입니다. 문화대혁명 때는 일부일처 동거결혼을 강요받기도 했습니다. 또 모소족이 외지인과 결혼하는 경우에는 자연스레 동거결혼을 했지요. 그러나 같은 모소족인 경우에는 지금도 70% 이상이 주혼을 한다고 합니다.
모소족의 목릉방에는 정방과 화루 이외에 경당과 문루가 있습니다. 경당은 라마승이 머물거나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이고, 아울러 집안의 남자들이 기거하는 곳입니다. 대문이 나있는 문루에는 축사를 두기도 하고 2층은 창고로 쓰입니다.
살림집은 건축만으로 보면 특별하지 않아 보이지만 생활이 담기고 세월이 쌓이면서 특유의 문화가 형성되면 그 안에 참 많은 것들이 스며들게 됩니다. 모소족의 집도 마찬가지지요. 방마다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소족을 거론할 때면 항상 로고호라는 호수가 한 묶음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그들이 로고호 인근에 주로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고호가 고원의 명주(明珠)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고원의 명주’ 로고호
로고호는 면적이 여의도의 다섯 배가 넘는데 물이 맑고 투명하여 11m 깊이까지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인근의 구릉지대에 올라서서 보면 호수 속에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푸른 물빛이 너무 아름다워 량해(亮海)라고도 합니다. 50여㎞나 되는 호숫가 도로를 따라 일주를 하면서 모소족 마을을 지날 때마다 그들의 전통적 삶을 음미할 수 있고, 호수 안의 다섯 개 섬과 호수와 잇닿고 있는 세 개의 반도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모소족을 찾아가는 길은 곧 로고호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보통 윈난의 리장 고성에서 출발하는데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산길을 넘어가야 합니다. 가끔은 쿤밍에서 출발하여 토림(土林)을 구경하고, 판즈화시를 거쳐 1박2일 일정으로 로고호에 갈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엔 리장으로 돌아나오기도 합니다.
자신과 다른 것들을 목도하면서 세상이 넓고 크고 다양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여행이라면, 윈난의 로고호를 찾아 모소족의 신비한 토속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윈난은 겨울에 여행하기 좋은 곳인 만큼 이번 겨울 방구석에 잠자고 있는 배낭을 한번 쳐다보는 것은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