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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사찰자료실 스크랩 삼국통일 전에 조성된 남산의 신라 불상은 3기
소윤당 추천 0 조회 16 13.12.21 20: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국통일 전에 조성된 신라불상

 

 

 

경주 남산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100여군데의 불상 중애서 삼국통일 전에 조성된 것은 ‘배리 석조삼존불입상’과 ‘불곡 감실 부처’,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 등 3개 밖에 없다

 

그 외의 신라 불상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인왕동부처와 선도산에 있는 서악동마애삼존불, 단석산 신선사의 미륵불 등이 있을 뿐이며 그외 대부분의 불상은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다.

 

통일 전에 조성된 신라불상들의 면면을 간략히 살펴본다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

 

남산의 장창곡에는 석굴암보다 약 100여년 앞선 시기에 고분을 연상시키는 인조 석굴이 있었는데 지금 이 곳에는 석굴의 흔적을 알리는 돌 몇 개가 남아 있을뿐 석굴은 사라지고 없다. 언제 어떻게 해서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1940년 일제시기에 간행된『경주남산의 불적』에 보면 천정의 개석들은 없지만 벽을 세웠던 석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국랍경주박물관에는 1925년 이 곳 남산의 장창골 한 석실에서 옮겨온 석조미륵삼존불이 있다.

의자에 앉은 본존불과 좌우에 동자로 보이는 작은 보살이 함께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애기보살로도 불리는 작은 동자보살상 2기는 산아래 주변 마을에 살던 소년들이 몰래 산 아래로 옮겼는데 1925년 이를 수습하여 본존불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형상의 본존불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자세가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특이한 자세인데 이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를 의자좌(倚子座)라고 하며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는 유일한 불상이다.

중국의 6∼7세기 불상 중에도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불상이 있는데 대부분 미륵불이기 때문에  이런 중국의 예와 『삼국유사』에 남아있는 기록과 미루어 볼 때 미륵불로 추정을 한다.

 

높이가 1.6m의 본존불은 도톰한 눈두덩이, 작게 조각된 코와 입 등이 어린 아이의 얼굴을 연상케 하며 귀가 어깨에 닿아 있고 하체에 비해 상체가 강조된 모습이다.

두광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리에는 육계가 잘 표현되어 있으나 목부분의 삼도(三道)는 생략되어 있다. 법의는 두 어깨와 몸 전체를 덮은 통견으로 주나라 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일제시 발굴 당시의 삼화령본존불/코의 파손이 없이 말끔하다

 

 발굴 후 방치된 상태의 본존불/코가 파손되어 있다

주변의 큰 돌들은 석굴을 이루었던 석재로 보인다

 

옛 박물관 뜰에 전시되어 있던 삼화령 삼존불과 협시불

 

 

이 미륵불을 발굴할 때 일제가 남긴 사진을 보면 부처의 얼굴이 말끔했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가 지난 뒤의 사진에서는 코가 떨어져 나간 것을 볼 수 있다. 발굴 후 그냥 방치한 탓에 소를 먹이거나 나무를 하러 온 악동들의 장난질에 파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삼화령삼존불의 협시불                                                  인왕동 부처

 

높이가 1m 정도인 협시보살은 4등신의 자그마한 체구에 역시 삼도는 생락되어 있다. 머리에는 3개의 꽃장식이 있는 보관을 썼으며,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어려있다.

 

오른쪽의 협시불은 줄기가 긴 연꽃을 오른손에 쥐고 가슴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오른손 아래 두었다

왼쪽의 협시불은 오른손을 앞으로 굽혀 엄지와 검지로 연줄기를 잡고 왼손은 연꽃을 잡아 어깨 위에까지 올려받치고 있다

 

오른쪽협시불은 무릎 부위의 옷주름이 간결한 U자형이며, 왼쪽협시불의 경우 W자형의 모습으로 조각하여 한껏 변화를 꾀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불상들은 단단한 재질인 화강암을 이용하여 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석불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이 미소의 불상 이름은 황수영박사가『삼국유사』에 기록된 생의사(生義寺)의 돌미륵으로 추정하고, '삼화령 미륵 삼존불'라고 작명하였다

생의사는 경덕왕 때 찬기파랑가와 안민가를 지은 충담(忠談) 스님이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공양했다는  곳이며 생의사가 있던 삼화령은 현재 남간마을의 뒷산이다.

 

 

 

인왕동부처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체높이 112.0㎝의 인왕동부처는  경주시 인왕동에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발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불상은 광배와 대좌, 불상이 하나의 돌에 조성되어 있고, 두광에는 무늬가 없으며 대좌는 옷주름으로 덮히게 표현된 상현좌이다.

민머리에 육계가 큼직하며, 얼굴은 부분적으로 마모되었으나 정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법의는 좁은 어깨를 모두 덮은 양감있는 통견형식으로 통일 전 신라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두 손은 손가락의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위로 올려 두려움을 없에준다는 의미의 시무외인을 하고 있고, 아래로 내린 왼손은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의 손갖춤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표현형식과 고요히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보아 7세기의 신라작품으로 추정한다

 

※ 상현좌(裳懸座) - 결가부좌한 불상의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은 형식을 말한다.

                             주로 삼국시대의 불상에서 나타나는 형식이다

 

※ 남산에는 삼화령으로 지칭되는 곳이 두 곳이다. 위에서 소개한 남장마을 뒷산과  그 곳에서 산등성이

    를  계속 오르다보면 용장사지 가는 길목에 큰 연화대좌가 있고 삼화령의 미륵불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

    안내판이 있다.

   

 

부처골 감실불상

 

불곡 감실부처의 전경

 

높이 약 2m, 폭 5m의 그리 크지 않은 암석 덩어리에 인위적으로 파낸 작은 석굴이 있고 그 안에 작은 불상이 좌정하고 있다. 석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감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석굴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석굴 중에서 최초의 것이며 이 속에 있는 작은 불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감실 불상이고 또한 최초의 선정인상(禪定印像)이다.

 

7세기 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감실불상은 파낸 석굴에 부처상을 따로 조상하여 안치한 것이 아니고 바위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조상한 후 불상 주변을 높이 한 길, 깊이 세 뼘 가량 파내어 굴의 형태로 조성한 것이다.

 

 

반달모양의 육계 형상

 

 

 

불상의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나 특이하게 반달모양이다

얼굴은 두뺨이 통통하고 눈망울이 커서 어린이 얼굴 같으며 수건을 쓴 듯한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소매 속에 두 손을 넣은 듯하다. 
얼굴만 두드러지고 몸은 평평하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 옷주름은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있다. 옷은 수직으로 흘러내려 사각형 대좌를 덮고 있는데 드리워진 옷자락은  두 겹이다. 하나는 평상에 덮였던 것이고 그 위의 것은 가사자락이다. .

오른쪽 발이 반쯤 밖으로 드러나 있는데 부자연스럽다

 

좌불상의 높이는 1미터 30센티이며 대좌까지 합치면 1미터 50센티이고 무릎폭은 1미터 30센티의 등신불이다. 석굴 입구 높이가 1미터 60센티이니 굴 안에 가득히 앉은 셈이다. 

 

 이 불상의 알굴은 일년 내내 거의 햇및을 받지 못하는데 새해가 시작되는 동지가 되어야 온 얼굴이 햇살을 받아 환하게 웃으신다


 

 

감실의 바깥쪽 바위면에는 코끼리의 형상이 있다. 한번 찾아보는 것도 답사 길에서 또 하나의 재미......

 

 

 

보물 제 63호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慶州 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

 

 

 

 

 

 

배리(拜里) 삼존석불입상은 경주남산에서 삼국시대에 조성된 몇 안 되는 불상 중 하나로,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 불상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존석불입상은 남산 동쪽 계곡의 절터에 파묻혀있던 것을 1923년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발굴되어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중앙의 여래상은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이 전체적으로 풍만하며,

둥근 눈썹과 아래로 뜬 눈, 깊이 파인 보조개 등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잔잔하게 퍼지는 미소가 일품이다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의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약속의 뜻으로 다섯 손가락을 모두 위로 향해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의 뜻으로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바닥을 정면을 향하도록 편 여원인(與願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은 양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린 ‘U’자형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조각하였고 두 발은 가지런하게 대칭으로 조각하였다.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정면에서 보게 되면 얼굴과 어깨부분만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배모양의 광배이다.

 

 

 

 

여래상의 우측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 역시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이중의 연화대 위에 서 있는데  삼존의 불상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아 있다.

목에서 다리까지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의 긴 영락(瓔珞)을 드리웠으며 오른 손으로 그 영락을 감싸 쥐고  경책(徑冊)을 잡은 왼손은 어깨까지 치켜들고 있다.

 

 

 

 

여래상의 좌측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조각수법이 조금 둔탁하지만 몸을 위로 젖힌 우람함으로 우측보살의 여성스러움과 대비되는 남성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오른손은 펴서 가슴에 얹은 설법인을 하고 왼손은 내려서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의 특징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삼화령 미륵삼존불처럼 어린아이의 모습에 웃는 얼굴로 표현되었다라는 점, 신체비율에 있어서 얼굴이 크다는 점, 수인의 모습이나 옷 주름의 조각 등이 비슷하며

삼국시대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호각이 없을 때 본존의 미소.

원래 노출되어 있던 이 삼존불에 보호각을 설치한 이후

본존불은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잃어버렸다

 

1987년 11월 부터 약 3개월 동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삼존불 주변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각과 담장을 설치하였으나 통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아 불상에 이끼류가 생기고 보호각으로 인해 햇볕이 차단되어 그 잔잔했던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담장은 허물었지만 보호각은 아직 그대로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관련자료 :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368>

 

 

이렇게 7세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상들은 풍만하고 네모난 얼굴에 아기 같은 모습, 천진스로운 미소, 신체를 다 가린 두꺼운 옷, 시무외인·여원인의 수인, 4등신대의 비율 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불교 유입 초창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라서 부처의 위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서산마애불과 태안마애불, 김유신장군의 전설이 있는 단석산 신선사의 미륵불, 선도산 아미타삼존불 등이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불상을 보면, 얼굴에서 보여주는 미소가 점점 없어지다가 경주 남산 보리사 불상을 마지막으로 이후 이땅에서 만들어진 불상에서는 전혀 미소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군위 석굴삼존불

 

삼국통일 뒤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경북 군위의 ‘군위 석굴삼존석불’을 보면 아련한 미소를 짓던 삼국시대 불상의 미소는 사라지고 약간은 경직된 모습을 보아고 있다

 

이 후 100여년 동안 불상의 조성기법이 점차 세련되고 양식화되어 그 정점에 조성된 것이 경덕왕(재위 742~765) 때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 본존불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안압지 조성 등 신라불교문화의 최고품들이 모두 8세기인 경덕왕 때 만들어지며 경주 남산의 불상조성도 경덕왕 때부터 본격화된다.

 

이후 신라하대에 속하는 혜공왕때부터 조성되는 불상들에서는 긴장감이 빠지면서 불상의 조성 기법이 조잡해지고 예술성이 떨어지는 하향곡선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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