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6년 해병 소위로 임관해 해병대 청룡부대에서 통신주임장교 보직을 마치고 99년 전역한 나는 지금 한양대 대학원 전기공학과 전력전자연구실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해 5월, 우리 가족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감기와 빈혈에 시달리던 어머니께서 급성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으신 것이다. 고생 끝에 훌륭하게 우리 삼남매 키워내시고, 이제서야 제2의 인생을 맞이하셨는데 백혈병이라니….
그때부터 시작된 죽음과의 힘겨운 사투. 며칠 휴가를 내 전남대병원을 찾은 나는 병실을 찾던 중 우연히 삭발하신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절대로 울지 않겠다던 다짐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이미 내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어머니는 당신이 벌어 놓으신 돈을 조금이라도 낭비할 수 없다며 치료를 거부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며 가족들은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겨우 어머니를 설득해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가 벗겨지는 항암치료와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 혈액의 각종 수치가 회복되지 않아 엄청난 양의 헌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어머니, 서울로 올라오십시오. 혈소판 헌혈은 제가 다 해결해 놓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올라만 오십시오.” 어머니를 설득해 어렵게 서울치료 결심을 받았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 땅에서 한번에 1~2시간씩 걸리는 혈소판 헌혈자를 구할 수가 없었다.
헌혈을 하려면 술, 담배를 피해야 하고 어떤 약도 먹어서는 안되며 감기에 걸려서도 안되는, 거기다 헌혈이 필요할 때 바로 수혈이 이뤄져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비교적 가까이 있던 예전 근무부대에조차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올라오실 날은 자꾸 다가오는데 철없는 막내가 큰 소리만 친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우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건 곳은 바로 한양대 학군단이었다. e메일을 통해 단장님께 절박한 사연을 보내자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상의해 보자'는 호의적인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을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헌혈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미 졸업한 3명의 후보생과 4학년이 된 13명의 후보생들, 새로 학군단에 들어오자마자 성분헌혈에 지원해준 15명의 3학년 후보생들. 정말 학군단장님을 비롯한 전 간부님들과 헌혈에 적극 동참해주신 많은 후보생들에게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다.
죽음의 병 백혈병. 그러나 개인적인 시간은 물론, 시험기간조차 개의치 않고 헌혈에 흔쾌히 응해준 우리 한양대 학군단의 후배 예비장교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생면부지인 나에게 헌혈증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난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병을 하고 있다.
평생을 소방공무원으로 국가의 안전을 지키셨던 아버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엄마는 내가 책임진다. 너는 네 인생을 준비해라. 또한 고마운 사람을 절대 잊지 말아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한양대 학군단의 `작은 사랑의 실천'은 지금 하루에도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오가면서도 밝게 미소 지으며 살아가시는 내 어머니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학원 생활. 이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최신 학문을 연마하고 졸업한 뒤 국방과학연구소에 지원하여 이 나라 자주국방에 초석이 될 수많은 연구를 멈추지 않을 것임을 이 자리를 빌려 맹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