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생/ 박기섭
그러니까 그의 생은 모자의 생이었다
세상 모든 풀밭과 돌밭 모자가 이끌었고 세속 곳곳 교차
로와 건널목 모자가 건넜거니, 마침내 모자는 찢어지고 성
긴 모발 사이로 언틀먼틀 드러난 생의 하반,
모자를 태운 재 속에 구름 한 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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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전설/ 박옥위
모자는 나를 사랑하는 설렘이었지요.
젊은 한때 콧대를 세우며 모자를 썼거든요 아무렴요 챙
모자 털모자 밀짚모자 빵모자 사슴모자 여우모자 루돌프의
모자 하양모자 빨강모자. 모자는 전설입니다 시간을 지렛
대에 세워보면 달아나는 백발모자더라구요 은발이라니요
모든 자연은 순종인 것 같아요 아마도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네요. 모든 게 한 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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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쓴 여자/ 염창권
생애의 압착을 견디려는 저 몸짓은
하늘 밑에 가두어 필생으로 간직해 온, 자기 생의 중심
점을 높이려는 태도인데 그 음역 하에서 더 또렷해진 당신
에게,
불운의 시간조차도, 함께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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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밑 잔디/ 이지엽
소나무 밑 잔디가
그냥 자라는 게 아니여
갈퀴로 솔잎을 일일이 긁어내며
김호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이다
솔잎이 떨어져 쌓이면 잔디도 다 죽어불어
참 독한 것이여
봐 아무 것도 읍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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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청탁서/ 공영해
떠나간 말을 찾아 기억의 숲 헤맨다
청탁서를 받아놓고 막막한 나를 본다 숲은 그냥 그대론
데 말도 나도 길을 잃고 바람 없는 숲속에서 쇠매미 이명길
을 콩죽 땀을 흘리면서 바짝바짝 재촉하는 마감날이 지나도
록 붓방아만 찧어대다 탈진하는 나를 본다
아직도 무성한 숲을 어찌하면 벗어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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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 샷/ 박희정
순간이 남겨놓은 샷
비처럼 촉촉하다
꽃 아래 어떤 사람, 사람 곁에 꽃나무 줌인으로 당겨진
짙붉은 삶의 갈피 정면으로 찍다가 돌아서서 찍다가 사선으
로 찍다가 점프 하며 찍다가 이슈가 되어버렸다, 한 컷의 표
정이,
관심을 얻고 싶던 그대도 MZ세대 같은 장소건만 구도를
달리하자 빛나는 명소가 되었다, 줄줄이 댓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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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답서(答書)/ 변현상
텁텁한 막걸리를 시나브로 드시면서
파도치는 생의 먼 길 막무가내 걸으시다 세상을 뜬 아버
지는 마을 교회 목사이신 예덕이 아버지를 무척 미워하셨는
데, 소 꼴 베라 그캤는데 예비당에 갔다는 기 참말로 맞는가
베?, 이 에비가 예수쟁이 따라 댕기지 말라꼬 카더나? 안 카
더나?
머시라! 또 갈끼라꼬? 에라이 이눔 시키!
아부지요! 우리가, 어느 먼먼 전생에서
만나고 헤어졌다꼬, 오시지도 않으시고 이미 댕기 가셨
네요, 어무이는 아부지가 그토록 싫어하시던, 그 얄미운 예
수님을 늘그막에 영접하시고, 날마다 기도하시다, 작년에
천국으로 영영 떠나 가셨는데, 인자 만나 뵙지 못하셔서 우
짜마 좋심미꺼?, 그나저나 저도 인자 예수 믿는 예수쟁이,
됐뿟다 아임미꺼, 인자 저는 죽어도 절때로 안 됨미더, 혹시
라도 그짝에도 예비당 있으시마, 예비당을 나가시소!
제가 요! 기도 올리며 봄소식 전합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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