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사람이 있다. 명품 브랜드에 중독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명품 브랜드의 소비가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믿고 부지런히 일을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명품들을 사들인다. 우리 주변의 많은 이웃들이 그렇듯 그 역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을 살짝 비튼,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정언적 강령의 충실한 실천자이다. 평범한 영국의 한 소시민인 그의 삶은 온통 명품 브랜드들에 둘러싸인 삶, 무절제하고 속물적인 백일몽의 삶이다.
그는 블랙베리의 알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고, 아디다스 Y3 트레이닝복을 입고, 켄우드 주전자에가 물을 끓이고, 보덤 찻주전자에다 끓인 물을 담고, 거기에 야마모토마타 녹차를 넣고, 로버츠 라디오를 켜고, 맥 컴퓨터를 켜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에이이지 오븐을 켜고, 리페르 냉장고를 열고, 퀘이커 오츠로 오트밀 죽을 끓이고, 솔가 비타민을 먹고, 이케아 테이블에 앉아 이케아 접시와 이케아 식기들로 아침을 먹고, 심플 비누로 샤워를 하고, 아베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존 루이스 타월로 젖은 몸을 닦고, 콜게이트 치약과 칫솔로 이를 닦고, 심플의 방취제를 몸에 뿌리고, 캘빈클라인 속옷을 입고, 랄프로렌 양말을 신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헬무트랭 재킷을 입고, 몰스킨 노트를 노스페이스 배낭에 꾸려 넣고, 트렉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신문가판대에서 가디언 신문과 에비앙 생수를 사고, 루이비통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한다.
브랜드 제품의 소비와 우리 삶은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닐 부어맨은 “나는 자아에 대한 긍지를 확인하기 위해 브랜드와의 관계에 길들여졌다.”고 고백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브랜드에 대한 이성을 초월한 충성을 바치며 살아왔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문화는 마음에 일종의 감옥을 만든다. 이렇듯 자본주의의 시장경제 체제는 불가피한 필요가 아니라 잉여의 욕망을 생산함으로써 아니라 우리 몸을 식민화한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은 욕망을 생산하는 소비주의에 포획된 몸이다. 닐 부어맨은 어느날 문득 그 모든 진실들과 마주치는 각성의 순간을 갖는다.
소비의 관습이라는 형식으로 우리 몸에 각인된 갖가지 브랜드들은 우리에게 자아정체성의 근거를 준다. 우리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쓰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일이다. 브랜드 제품의 구매자는 제품의 실질적 효용가치만이 아니라 브랜드 제품이 내재화하고 있는 무형적 가치들, 즉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 의미, 정서를 사들이는 것이다. 브랜드 제품이 시장에서 갖는 차별성과 위상은 곧 그것을 구매한 사람의 취향과 느낌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격을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소비자는 곧 그가 쓰는 브랜드 제품과 동일시되는 현상이다. “나는 한 입 베어먹은 사과이고, 말을 탄 폴로선수이며, 눈 덮인 산이기도 하다. 나는 직장 사람들이 나를 자유분방하고 독창저인 사람으로 여겨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애플 맥을 쓴다.” 한 입 베어먹은 사과, 말을 탄 폴로선수, 눈 덮인 산 등은 유명 브랜드의 제품에 붙어있는 로고들이다. 이 로고가 말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업의 로고를 달고 다니는 그 자리에 옛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제 소유주임을 증명하는 기호나 글자 같은 것을 새기고 살았다. 노예 상인들은 노예의 이마나 가슴팍에 불로 달군 쇠로 낙인을 찍었다.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자랑스럽게 쓰는 브랜드는 그것이 곧 우리의 소유주임을 증명하는 우리 신체에 찍힌 낙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브랜드 제품들의 광고는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욕망과 기호들의 내용을 결정하고, 결국은 우리의 의견과 관습을 지배한다. 광고들은 우리가 특정한 브랜드의 제품을 씀으로써 자아 성취와 성공 그리고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설득한다. 광고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욕망을 조종하며 의견과 관습을 지배함으로써 몸을 포획하고 브랜드의 소비자라는 형식으로 식민화해버린다. 한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을 마치 우리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주입하고 우리 마음을 결정해버린다. 현대인들은 그 누구도 광고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없다. 우리는 “광고라는 거울에 둘러싸인 배우이자 관객”이다. 우리를 둘러싼 광고들은 “이것을 쓰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속삭이며, 실용적 필요와 감성적 욕구를 다 함께 충족시킬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끝없이 유예되고 지연되는 것이다. 광고들의 달콤한 속삭임을 뒤집으면 광고들이 우리 내면에 심어주는 메시지는 “이것을 쓰지 않으면 당신은 불행해질 것이다”라는 암시적 협박이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아주 천천히 우리 자신도 모르게 브랜드 소비자를 넘어서서 브랜드에게 돈과 충성을 바치며 그것을 숭배하는 중독자로 전락한다. “브랜드 메시지는 우리의 강렬한 욕망과 두려움을 조작함으로서 그들의 상품을 구매하게끔 만든다.”
닐 부어맨은 어느 날 문득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뒤늦게 깨달은 불편한 진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충격적인 진실은 이것이다. 모든 광고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라’, ‘이렇게 행동하라’, ‘이 물건을 원하라’,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욕망하라’는 시장의 명령을 전달하며, 우리 내면에 소비가 곧 존재라는 강박관념을 심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다. 시장 이데올로기가 유포하는 거짓에 휘말린 사람들은 곧장 소비문화라는 마음 속 감옥에 갇힌다. 우리는 자유와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브랜드 제품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끝없이 일에 파묻혀 살아야 한다. 소비와 일은 우리 삶을 집어삼켜 버린다. 그러나 브랜드 제품들이 우리에게 주겠다는 행복과 자유는 거짓이다. 그런 것이란 애초부터 없다. 단지 “브랜드는 길들여지고 착취당하는 동물의 표식”이다
닐 부어맨은 제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든 소비문화가 어떻게 가치내면화와 부정적 자아정체성 형성을 통해 심리적으로 취약한 제 내면을 점령하고, 강렬한 욕망과 두려움을 조작해서 자기를 소비의 개미지옥 속으로 빠뜨렸가를 알아버린 것이다. 그 앎은 격렬한 분노를 자아낸다. 그는 브랜드 중독자로 만든 자본주의의 모든 체제와 자기 삶을 단절하기로 결심한다. 소비주의에 대한 강력한 항거의 표시로 제가 갖고 있는 유명 브랜드의 제품을 런던의 한 광장에서 불태우고 깨부수는 브랜드 화형식이라는 이벤트를 벌이기로 한다. 닐 부어맨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는 가운데, 승려가 제 몸을 태워 소신공양을 바치듯 브랜드 제품들을 불사른다. 그가 브랜드 화형식에서 태워버린 것은 브랜드 제품만이 아니라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던 제 나약함과 그릇된 강박관념, 그리고 소비주의가 유포하는 거짓 이데올로기들이다.『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라는 책은 브랜드 제품을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매우 선동적이고 도발적인 실험에 대한 보고서이다.
브랜드 제품을 배제하고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원시인으로 살아간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그 삶은 아주 불편한 삶이다. 닐 부어맨은 모든 브랜드 제품들을 공개적으로 불사른 뒤 브랜드가 없는 아주 값싼 제품들을 사 쓰며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가 버린 것은 쇼핑의 쾌감과 명품 소유에서 오는 헛된 만족감이다. 그는 과시적 소비를 위해 쓰던 시간을 회수해서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아다니고, 친구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한다. 브랜드를 맹종하며 소비주의에 깊게 침윤된 그가 브랜드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것은 곧 그 누구도 아닌 제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다. “나는 브랜드 제품 너머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는 열망으로 이 여정을 시작했다. (중략) 나는 아이비엠도 아니고 맥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내 자신일 뿐이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라는 책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덜 쓰고 덜 일하라,는 것, 그리고 소비주의에 굴종하지 말고, 온전한 자기 삶을 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