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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2 장
표적이냐 실체냐 (3)
[유다,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 씨, 그 진리를 아들로 가지고 있어야 그 진리가 그들을 살린다. 스데반은 광야 생활을 교회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의 중심은 유다 지파이다(민수기 2장). 유다 지파가 깃발을 들고 있고, 그 깃발을 중심으로 남동서북으로 다른 지파들이 포진하고 거기에 성막이 세워진다. / (그들이) 움직이면 또 유다 지파가 중심이 되어서 그대로 움직인다. 그들이 깃발을 들고 있는데 그 깃발(דגל H1714/ 데겔: 다갈에서 유래)이라는 단어가 표적이다. [유다, 이스라엘]이 이 표가 무엇인지 알면 살고 모르면 죽는다. 그게 이 열두 지파의 대표이다.
유다(יהודה H3063/ 예후다)라는 말은 야다(ידה H3034)에서 유래했고, ‘성전을 펼치다’, ‘성전을 뻗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에서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한다. 그 예수가 성전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 못 하는 성전, 보이는 성전으로 사람들에게 주었더니 사람들이 오해하여 성전에서 제사만 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하는 성전으로 주님이 오셔서 “내가 성전이다.” 하셨다. 그러나 그 말하는 성전은 파괴되어야 할 성전이라고 덧붙이며 세 번째 성전을 세운다고 하셨다.
[음성설교 파일 보충 자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전을 펼쳐내는 역할로 부름 받았다. 그게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민족적 이스라엘’도 어느 시점까지 성전을 펼쳐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런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 내뻗는 역할을 하는 게 유다니까 유다 지파에서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하고, 그래서 그들이 그 깃발, 표적을 갖고 있었고, 나머지 지파가 그 지파를 둘러싸고 거기에 성막이 지어졌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유다 지파에서 나오고, 여러분은 완성된 성전으로 오는 것이다. / ‘내가 [말하는 성전]으로 왔지만 나는 [아직도 율법]이니까 이 성전을 헐어라. 세 번째 것으로 세울게!’ => 말 못 하는 옛 성전과 자기를 연합시킨 것. / 이걸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성령이 너희 안에 오니까 너희들이 성전이다’라고 말했다. -> 이게 완성된 성전이다. ==> 유다라는 과정을 거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들이 되는 게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 메카니즘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다는 하나님의 표, 깃발을 진리로 가지면 살고 못 가지면 죽는다. 가룟 유다가 그 성령, 깃발, 표적, 보증이 오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이 (가룟) 유다는 안 되는 것으로(진리를 갖지 못한 자로) 죽은 것이다. 그게 육적 이스라엘이다. 역사 속에서 (육적) 이스라엘이 쫄딱 망해서 (가룟) 유다 역할을 한 것이다. //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너희가 성령을 품고 있으니 너희가 세 번째 성전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내 안에 그 예수가 있으므로, (파괴되고 새것으로 살아난 그분이 있으므로), 내가 성전이다. / 유다 지파는 반드시 그 깃발을 갖고 그 씨, 살아난 그 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그 표적은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유다는 표, 깃발을 진리로 보면 살고, 표적으로 보면 죽는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예수라는 표적이 나온다. 그 표적을 가진 유다가 예수를 표적으로 보면 죽고, 진리로 깨달으면 영적 이스라엘이 된다. 그 표적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오트(אות H226)라고 한다.
(출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그 피”는 어린양의 피이다. 이스라엘을 살리는 표적, 유다가 가진 표적이 그 피이다. 그 표적을 진리로 가지고 있는 이들이 심판을 모면한다. 그 피는 물, 물은 성령(요일 5장)이다. 그 셋은 하나이다. 결국 이 구절은 “그 피를 진리, 성령으로 갖고 있는 이들은 넘어가고 살려 주겠다”는 약속이다.
(출13:15-16) 15 그때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16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 손과 이마에 표를 가진 이가 애굽에서 살아나온다. 그 표가 하나님의 장자의 희생으로 대속 된다는 그 은혜의약속의 표적이다. / 장자의 죽음으로 너희는 산다. -> 죽어야 할 장자가 ‘하나님이 죽인 장자(어린양, 예수)’에 의해 살아난다는 것을 표적으로 갖고 있으라 하신다. ->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유다가 갖고 있던 깃발이다.
[유다,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표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인과 지팡이가 같이 등장한다. 지팡이는 항상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 보증으로 오신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G38751 파라클레토스)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그 표를 갖고 있는 유다는 네 번째 아들이다. / 성경에서 숫자는 항상 의미 가 있다. / 여기서 서수(序數)로 ‘네 번째’는 의미가 없다. 그 당시는 아라비아 숫자도 없었다. / 즉 ‘넷’이라는 아들이다. 그래서 표적이라는 단어가 맨 처음 등장하는 곳이 창세기 1장에 넷이라는 날이다.
(창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하야, חיה H1961, 이루게 하라”)는 눈에 보이는 ‘넷’이라는 것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네 번째 날이다. (레비이, רביעי, H7243, 넷)는 하나님이 성전을 아래의 것으로 보여주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완성되어야 한다. / 그래서 네 번째 날에 ‘광명’(마오르, מָאוֹר)이 나온다. / 마오르(מָאוֹר H3974)는 빛(오르, אוֹר)에 (멤, מ)이 붙어서 어떤 장소나 기구를 뜻한다. 결국 빛이 비취는 (장소 | 어떤 것 ⁃ 기구, 기명)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광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태양, 달, 별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게 아니다. 이것은 창세기 첫째 날의 그 빛이 비취는 어떤 것을 말한다.
창세기 첫째 날은 넷째 날과 짝이다. 당연히 그 빛이 어디서 비취는지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비취는 그 빛에 의해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성취된다. 이것이 ‘넷’이다. (음성설교: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말한 것을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 내 마음에 받아 가지면 그것을 성취, 완성이라 한다. 그걸 ‘넷’이라고 하자) 빛을(אוֹר, 오르) 진리로(מ) 주게 되면 ‘넷’이 성취되는데 그 첫 단어가 오트(אוֹת H226/표적, 징조)이다.
하나님이 하늘의 궁창에 광명을 주신다. 궁창(라키아)은 ‘금을 얇게 펼쳐서 덮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궁창을 완성(된 성전, 하나님나라, 위의 것)과 아래의 것의 가운데에 만들라고 한다. / 바브와우(ו)는 서로 마주 보며 노를 저어 간다는 뜻이 있다. 타베크(가운데)는 완성된 성전(위의 것)과 아래의 것이 서로 마주 보며 노를 저어 만나는 그 지점(교집합)을 뜻한다. 우리에게 아래 것으로 위의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교집합(‘라키아, 궁창’)을 주었는데 그게 바로 율법, 성전, 예수, 성경, 세상 이런 것들이다. / 거기에 라키아를 만들라는 것은 내가 성전을 그런 용도로 너희에게 주고, 거기에 광명(마오르)을 두겠다는 것이다. / 나중에 율법서에 마오르는 성소 안에 등대로 쓰인다. 성소를 비추어서 성전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 성전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면 ‘광명’(마오르)라고 한다. 마오르에 의해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게(징조, 사시, 일자, 연한) 무엇인지 알면 유다라는 넷, 넷이라는 유다가 갖고 있는 그 표가 어떻게 완성되어야 그를 살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 성경에서 광명은 태양, 달 정도를 설명하는 용도로 쓰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담은 성전과 연결시켜서 우리에게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마오르’라고 기록한 것이다.
넷 = ‘레비이, רביעי’ = ‘하나님이 성전을 아래의 것으로 말하기 시작하신다.’ /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말한 것을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 내 마음에 받아 가지면 그것을 성취, 완성이라고 한다. 그걸 ‘넷’이라고 하자. ->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넷으로 완성되어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다.
징조(오트)는 표적, 이적, 표, 깃발, 증거, 표징의 뜻을 가지고 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전, 세상, 율법, 성경, 예수, 행하신 기적,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전부 표적이다. / 그건 반드시 밝은 빛으로 밝혀지고, 나타내져야 한다.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 자체는 그릇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내용으로 듣고 읽어서 내 마음으로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복음을 쭉 펼쳐서 설명해 주신 다음에 내려가서 그때부터 기적을 행하신다. “내가 앞에 이야기해 주었던 것을 너희가 알아듣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해 줄게”라는 의미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고 죽었던 자를 살려내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아니다. 그렇게 살려 놓아도 또 병들고 죽는다. 이 세상에서 조금 건강하게 산다고 그게 무슨 복이 되는가. 그게 진짜 복이라면 하나님이 하나하나 쫓아다니면서 만지시고 구하실 필요가 있는가. 그 정도는 말로 하시면 된다. 분명한 것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러한 표적을 그냥 표적으로 보고 목적으로 삼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는 곳, 병 고치는 곳을 쫓아다닌다. 한국의 유명한 대형 교회 장로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그것을 묵인하고 있다. 큰 교회의 장로인 데다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라서 아무 말도 못 한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 표적일 뿐이다. / 그것을 통하여 죄의 증상, 사망의 증상 등을 어떻게 우리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지를 배우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표적, 껍데기로 보는 것을 성경은 ‘어두움’이라고 한다.
창세기에서 첫째 날과 넷째 날이 짝,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이 짝,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짝. 이것이 완료되면 일곱이 되고, 그 일곱을 마음으로 가지면 팔(여덟)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덟의 날에 살아나셨다. / 하나님이 첫째 날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환하고 어둡게 나누셨다는 게 아니다.
2절에서 하나님이 먼저 어두움을 설명하고 시작하신다. /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깊음이란 것의 이름을 어두움(흑암)이라고 하자. / [깊음=모인 물=바다, 얌(יָם H3220)] / [하늘, 솨마임(שָׁמַ֫יִם H8064)]=‘거기에 물이 있다,’ / 쉠(שֵׁם)은 명사로 쓰이면 물이지만 형용부사로 쓰이면 ‘거기’라는 뜻을 나타낸다. => 쉠(שֵׁם)=물, 거기 / 상징적이지만 물로써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눈에 보이게 준 것을 ‘바다, 아래의 물’이라고 한다.
(주: ->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물’을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나, 또는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화학기호 ‘H2O’로 표기되는 물(水)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목사의 설명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래 세상의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것(바다, 아래의 물)을 우리가 어두움이라고 하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두움은 나쁜 것인가?
[논제-시작]
(창1:3)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셔서 말씀으로 빛이 창조된 것으로 설명이 된다. 2절에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여 흑암(바다, 아래의 것, 아래 물)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것은 ‘빛’이고, 빛이 있기 전에 어두움(흑암, 천지만물)이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빛이 있기 전에 존재한 [어두움, 흑암, 바다, 아래 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되어 있고 2절로 이어져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설명이 나온다. / 그러면 3절의 “빛이 있으라”는 명령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전 과정에서 흑암이 제일 먼저 지어지고, 그 후속 과정으로 빛이 지어졌다고 보아야 하는가? [논제-끝]
어두움(아래의 것) 없이 위의 물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위의 물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늘 세상의 것들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걸(위의 물을) 우리에게 직접 줄 수가 없고, 바로 이것이 유한적 존재의 절망적 한계이다. /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아래의 물을 주어 위의 물을 설명하려는 것인데, 그래서 눈에 보이는 아래의 것(= 어두움, 흑암 -> 빛이 오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을 어두움이라고 하는데, 이게 나쁜 것인가? / 그것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래의 것으로만 보면 어두움이고, 죄이고, 악이다. 하지만 그 어두움으로(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면 그 즉시 어두움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지고, 여전히 똑같이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빛이다. 그때 그 어두움, 죄, 악 율법이 나와 무관한 것이 되고 그걸 용서라고 한다.
그 어두움이 담고 있는 내용을 올바로 깨닫고 알면 그것이 빛(오르, אוֹר)이다. 그 빛의 이름을 ‘낮’이라 하셨고, 낮은 날이다. / 욤(יוֹם H3117)은 ‘진리를 주다’라는 뜻이다. 이 아래의 것, 어두움을 하나님의 복으로 알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이 ‘낮’, ‘날’이라고 하신다. / 어두움은 ‘밤’이라고 한다. 라일(ליל H3915/밤)은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자 어두움, 밤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바로 그게 ‘날, 낮’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역사라는 날들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 우리에게 진리를 주기 위해서 흐르고 있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진리를 알면 된다. 그게 날들, 역사의 목적이다.
주님은 율법으로 오셨으므로, 어두움이라는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빛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진리다, 내 안 있는 그 빛이 진리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세상은 그 어두움을 통해서 빛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게 유한자의 한계이다. 그것을 깨달아 알면 낮이다. / 주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모두 어두움이었다(요1장). 아무도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 그를 보지 못했다. 모든 존재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눈이 멀어 어두움을 살고 있었다.
그 표적 안에 담겨 있는 빛을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결국 표적으로 오신 예수가 표적으로 인식된 후에 죽임을 당했다. 주님이 “내가 빛이다. 내가 있는 동안이 낮이다.” 말씀하셨다.
“낮이 12시가 아니냐” 말씀하셨는데 원문은 “내가 있는 그 시간이 12시간이 아니냐”라는 말이다. 그것은 “너희는 내가 있는 이 시간에 열둘이 되어야지, 낮의 사람이 되어야지, 아들이 되어야지” 이런 뜻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곧 나를 못 볼 것이다.”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잠깐 왔다가 사라졌다. 빛은 사라지고 이 세상은 그대로 또 어두움이다. 그때 주님이 “내가 사라지면 이제 심판이 오는데 어떤 자들이 심판을 받는지 아느냐? 그 빛이 너희 안에 없으면 너희는 심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다 어두움이기 때문에 아무도 빛으로 오신 그분을 못 알아봤다. 그래서 그 빛이 너희 안으로 뚫고 들어가 버리겠다고 한다. 그 빛이 없는 자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죽음이다. / 하지만 그 빛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셨다. / 하나님은 그 죽어버린 표적(예수)을 자칼로, 인과 지팡이로, 보증으로, 성령으로 그분의 백성 안으로 뚫고 들어오게 만드신다. 그것이 은혜이고 선물이다. 그 일을 성령이 하신다. 그렇게 표적은 반드시 진리로 완성되어야 한다.
[오르, 빛, אוֹר]으로 시작한 그 빛은 [오트, אוֹת]로 완성되어야 한다. 빛(אוֹר, 오르)은 ‘하나님이 시작하신다’를 뜻하고, 표적(오트, אוֹת)은 ‘하나님이 (그 표적에 내용을 담아서) 완성하신다’를 뜻한다. 표적(징조)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로 주어진 것이 성경, 율법, 성전, 예수, 세상, 인간 이런 것들이다. 표적은 진리로 완성되지 못하면 멸망시키는 양식이 된다. / “그 구유의 아기가 먹인다”는 말은, 구유가 양식이니까, 주님이 “내가 양식으로 왔다. 내가 하늘의 양식이요 하늘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타낸다. / 표적을 진리로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섬김의 대상으로 삼으면 그것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양식이 된다. 다음은 오병이어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다.
(요6:26-27)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 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표적을 ‘호라오’하지 못하고 떡을 먹고 배부르기 만을 위해 주님을 찾아왔다는 말이다. / 나의 육적 가치나 필요를 채워 주는 그런 섬김의 대상은 가짜 하나님이다. / “썩은 양식”은 멸망시키는 양식이라는 뜻이다. 그분이 행하는 기적이나 말, 심지어 그분까지도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게 멸망시키는 양식이다. 그러니 “이제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 너희가 열심히 율법 행하고 제사 지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겠다고 하는 게 멸망시키는 양식이다. 그러니 그런 짓 하지 마!” 말씀하신다. /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 그 양식을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신다. 말씀에 언급된 인(印)은 성령, 보증이다. / 당시에는 그 인치신 자가 예수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역할을 한다.